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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2797

옛제일은행본점 사옥, 일제강점기에 지어졌지만, 새건물처럼 보이는 건물

일제강점기에 서민금융을 목표로 했던 조선저축은행으로 한때는 우리나라에 수신규모가 가장 큰(?) 은행이었으며, 1997년 IMF금융위기로 외국계 자본으로 넘어가 버린 옛 제일은행 본점건물이다. 한국 최초로 철골.철근 건물로 지어졌으며, 맞은편에 위치한 르네상스 양식의 한국은행본점과 대비되는 전형적인 네오-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비록 수리가 되어왔겠지만 옆에 있는신세계백화점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이 아닌 최근에 지어진 건물처럼 보이는 건물이다. 옛제일은행 본점 건물은 신세계백화점과 나란히 있으며, 백화점 건물로 오해받기 쉬운 건물이다. 지상 5층 건물로 외벽을 국내산 화강석으로 마감했으며 웅장하면서도 단정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믿기지 않는 건물이다. 건물 정문. 최..

한국은행본관 (화폐금융박물관),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건물

남대문시장 신세계백화점 맞은편에 있는 서울에서 많지 않은 유럽풍으로 생긴 한국은행 본관이다. 1910년대에 지어진 건물로 일제가 지금은 헐어버린 총독부 건물과 함께 심혈을 기울여 지은 건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 건물로 외벽에는 화강석을 다듬어 붙였고, 지붕에는 철골조의 동판을 씌웠다. 이 건물은 좌우 대칭을 이루는 H자형 평면으로 만들어졌다. 양쪽 모서리에는 원형의 돔을 얹어 르네상스식 외관을 보여준다. 비슷한 형태의 총독부 건물, 그리고 서울 시청과 함께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해방후 한국은행 본관으로 계속 사용되어 왔으며, 지금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고층 건물이 많은 서울이지만, 오랜 기간동안 서울을 대표하는 건축물로서 맞은편 신세계 백화점과 함께 도심의 상징..

보은 속리산 법주사 - 쌍사자 석등(국보)

법주사가 보유하고 있는 국보중의 하나로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자 석등입니다. 두마리의 사자가 맞대고 있으면서 화사석을 들고 있는 형태이다. 이 석등의 사자상은 우리나라에 있는 사자상 중에서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한 석상이라도 한다. 법주사 마당 한가운데를 지키고 있는 쌍사자석등 팔상전과 나란히 한 쌍사자석등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특수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긴다. 사..

보은 속리산 법주사, 마애여래의상(보물)

속리산 법주사 입구 왼쪽편 산아래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의상은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는 유물이다. 바위에 섬세하게 미륵불을 새겨 놓고 있는 것으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마애석불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그 앞에 촛불이 켜져있고 많은 사람이 기도를 드리는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의상. 최근에 새겨진 것처럼 깨끗해 보인다. 앞에는 제단이 있고 촛불이 켜져 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바위. 뭔가 새겨 놓은 것 같기도 한데..... 근처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도 글씨를 새겨 놓고 있다. 법주사는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창건하였고, 그 뒤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가 새롭게 고쳐 지었으며 그 뒤로 진표의 제자들..

[보은 속리산 법주사] 철확鐵鑊, 거대한 밥솥 (보물)

법주사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밭솥이다. 단순한 모양이지만 거대한 크기로 봐서 법주사가 예전부터 얼마나 융성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유명한 개태사의 철확보다 더 큰 것으로 보인다. 법주사 철확. 멀리서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솥입니다. 큰 사발(大鉢)의 형상을 한 법주사 철확은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3㎝의 거대한 크기로, 상부의 외반된 전이 달린 구연부는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벽(器壁)의 두께는 3∼5㎝ 정도이며 무게는 약 20여 톤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주조되지 않아 제조연대·제작자 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용해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

보은 속리산 법주사 - 석조(石槽), 식수를 담아 두던 곳

법주사 석조는 직사각형 형태의 돌로 만든 것으로 나름대로 간결한 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법주사라는 사찰 규모에 걸맞게 다른 사찰에 비해 규모가 크다. 법주사의 3천 승려들의 식수를 담아두던 돌그릇이라 한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아무런 조각을 하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며, 규모는 길이 446㎝, 폭 240㎝로 제법 크다. 통일신라 성덕왕 1년(720)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보은 속리산 법주사 - 당간지주, 철당간

속리산 법주사에도 일반적인 사찰처럼 당간지주가 있고, 비록 복원된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많지 않은 철당간도 남아 있다. 이 당간지주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연상시킨다. 지금은 하나만 있지만 원래는 두개의 쌍을 이루어서 걸개그림 같은 것을 걸어두는 목적이라고 한다. 멀리서 보고 사찰에 거의 도착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법주사 철당간과 당간지주. 사진 두개를 나란히 놓으니 원래 철당간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법주사 경내에는 목탑, 금동미륵대불과 함께 가장 높이 하늘로 솟아 있다. ☞ 당간지주 당간이란 달리 찰(刹) 또는 찰주(刹株)라 불리는데, 일반적으로 절(寺)을 사찰(寺刹)이라 말함은 절에 당간 즉,찰(刹)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 한다. 예전에는 종파를 표시하기 위해 당간 위에 특정한 색깔..

보은 속리산 법주사 - 사천왕문, 금강문

속리산 법주사의 정문인 사천왕문. 팔상전, 대웅전과 일직선상으로 균형있게 자리잡고 있다. 인조때 벽암대사가 법주사를 크게 중건할때 세운 사천왕문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 사찰에 있는 사천왕문중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보통 사찰의 경우 언덕을 올라가면서 그 입구에 사천왕문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 곳 법주사는 경주나 부여 시내에 지었던 평지 사찰의 특성도 같이 가지고 있으면서, 조선시대 사찰 가람의 특성도 같이 가지고 있다. 속리산 법주사 사천왕문. 문앞에 두개의 전나무(?)가 우뚝 서있는 것이 특색있어 보인다. 사천왕문, 팔상전, 대웅전이 나란히 균형있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현재의 출입구인 금강문.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세워진 법주사의 정문이다. 그 후 몇 차례 다..

보은 속리산 법주사 - 희견보살상 (보물), 머리에 향로를 이고 있는 석상

법주사 본당인 대웅전 좌측편에 자리잡고 있는 석상으로 모양이 독특하고 왜 그런 형태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나름대로의 독특한 개성으로 의미를 갖는 것 같다. 향불을 들고 공양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형태의 석상은 없다고 한다. 법주사 희견보살상은 많이 훼손된 것처럼 보이며, 머리에 향로를 들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석상이다. 법주사 희견보살상은 그 유래와 목적을 알수 없는 아주 독특한 석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비슷한 것이 없고 법주사 쌍사자석등과 비슷해서 동일한 작가의 작품을 추정하고 있다. 희견보살상은 지대석 위에 비교적 큰 향로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흔치 않은 조각상이다. 희견보살상으로 불리어 오고 있으나 그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부 대석..

속리산 법주사, 원통보전 (보물)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보물급 문화재로 관음보상을 모신 원통보전이다. 보통은 관음전이라고 많이 부른다. 정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법당으로 본당 앞 마당의 우측편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의 가람배치와는 잘 맞지 않는 모습으로 조선중기 인조때 벽암대사가 법주사를 크게 중건할 때 세웠다고 한다. 아마도 속리산 산중에 있기때문에 이곳에 기도를 드리러 오는 할머니들을 위해서 세웠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법주사 원통보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사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주심포 양식의 기둥으로 만들엇다. 속리산 기슭에 있는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지었고,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탄 것을 인조 2년(1624)에 벽암이 다시 지었으며..

보은 속리산 법주사 - 통일호국 금동미륵대불

법주사를 대표하는 금동미륵대불이다. 학창시절 수학여행때 보았던 거대한 시멘트 불상은 없어지고 지금은 금동미륵대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옛날 추억이 없어져서 아쉬운 면은 있지만 그래도 각고의 노력끝에 더 좋아진 불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래 신라시대부터 금동미륵대불이 있었으나, 구한말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비용을 조달하느라 몰수했기때문에 해방이후 시멘트 불상을 조성했었다고 한다.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이 사찰을 대표하는 상징히라고 할 수 있다. 팔상전과 함께 한 불상 신라 혜공왕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7년간의 노력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해 모셨다. 그때부터 모신 미륵부처님을 조선조 고종9년(1872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축조함에 소요되는 자금마련이라는 구실로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상을..

보은 속리사 법주사 - 풍경들

본당인 대웅보전 앞에 자리잡고 있는 보리수 나무들이다.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수행을 했다는 장면이 떠오르게 하는 법당앞의 울창한 보리수가 좋아 보인다. 마당 한가운데 팔상전 옆에 있는 보리수 나무입니다. 팔상전 옆에 있는 석등입니다. 쌍사자 석등, 사천왕석등, 대웅전과 잘 어울린다. 법주사 앞을 흐르는 계곡물

전국 사찰 2010.03.24

보은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국보 55호), 거대한 목탑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목탑이다. 중국에는 많이 존재했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불교 문화재였던것도 목탑이었다. 목탑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는 거의 유일한 거대 건축물이었다. 신라를 대표하는 것도 황룡사 목탑이었고, 백제를 대표하는 것도 미륵사 목탑이었다. 사실 석탑은 보조적인 의미가 강했고 당시 대도시를 상징하는 것은 거대한 목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속리산 산속에 법주사에 거대한 목탑이 남아 건축되고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주사 팔상전. 중국 무협소설이나 서유기에 많이 등장하는 목탑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아마 황룡사 목탑은 이보다 훨씬 컸으리라 생각된다. 팔상전 편액 멀리서 본 법주사 팔상전의 웅장한 모습 법주사는 신라..

속리산 법주사 대웅전(보물), 통일신라 금당의 모습이 남아 있는 불전

속리산 법주사 중심불전인 대웅전은 우리나라 사찰 본당전 손꼽을 정도로 큰 건물이다. 경주의 대형 사찰이었던 황룡사의 가람배치와 형태가 법주사에는 남아 있다. 이층 건물처럼 보이는 대형사찰은 황룡사를 비롯한 초기 불기의 금당인 장륙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고, 그 앞에는 신앙의 중심이었던 목탑인 팔상전이 자리잡고 있다. 아마도 속리산의 지리적 특징이 세속과 아주 격리된 것과 관련이 있느 것으로 보인다. 중심불전인 대웅전과 사천왕석등 ,쌍사자석등, 팔상전,사천왕문이 일렬로 서 있다. 법주사 본당 앞 마당은 다른 사찰에 비해 꽤 넓어 보입니다. 법주사 대웅전. 앞에는 보리수 나무와 사천왕석등이 있다. 현재 법주사 대웅전은 팔작지붕에 다포계 공포를 하고 있어 원래 금당인 장륙적은 우진각지붕에 치미가 있는 형태..

예산 수덕사 대웅전(국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수덕사 대웅전은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고려시대에 만든 건축물을 아직도 쓰고 있기 때문에 낡은 모습이지만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수덕사는 충청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백제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축물이라고 한다.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여러 방향에서 본 수덕사 대웅전 대웅전 편액과 정면의 서까래를 포함한 구조형태 옆과 뒤에서 본 수덕사 대웅전. 대웅전 좌측으로는 관음전이 있고, 우측으로는 명부전이 있다. 맞배지붕에 주심포양식을 하고 있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잘 모여 주고 있다. 대웅전에서 내려다 본 경내 모습 수덕사는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 절..

[예산 덕숭산 수덕사] 강당인 황하정루, 경내로 오르는 길

수덕사 황하정루는 대웅전을 오르는 계단 앞에 있는 강당인 누각이다. 수덕사가 경사진 지형에 석축을 쌓아 만든 사찰인 까닭에 대웅전 앞 경내 입구에 위치하는 보통의 사찰 누각과는 달리 언덕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에 새로 수리해서 만들었기 때문 오래된 건물로 보이지는 않는 건물이다. 수덕사 경내 입구의 누각인 황하정루입니다. 다른 사찰과는 달리 언덕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 앞 경내 마당에서 내려다본 황하정루 황하정루에서 계단을 걸어올라 석축으로 쌓아 만든 수덕사 대웅전 앞 경내에 들어설 수 있다. 석축을 상당히 높게 쌓아서 대웅전 경내에 올라서서 보는 경치가 휼륭하다.

[예산 덕숭산 수덕사] 사찰 출입문인 금강문과 사천왕문

수덕사는 충남 서해안 지역의 대표 사찰답게 입구는 금강문과 사천왕문, 두개의 문이 있다. 보통 사찰에는 금강문 또는 천왕문만 있거나 안양루 같은 누각이 출입문의 대신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덕사에는 두개의 출입문이 있다. 이는 대형 사찰에서도 흔치 않은 모습이다. 물론 건물 자체로는 오래된 건물은 아니지만 오르는 언덕길 중간에 배치되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수덕사의 실질적인 첫번째 문인 금강문. 아담하고 주위 배경과 잘 어울린다. 금강문에서 내려다 본 수덕사 일주문에서 금강문을 오르는 길. 주위의 나무들이 가을 분위기를 내고 있다. 사천왕문으로 오르는 길에서 내려다 본 금강문. 자동차들이 아름다운 사찰의 풍경과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수덕사 사천왕문. 사천왕문 내부에 있는 사천왕상. 위쪽에..

[예산 덕숭산 수덕사] 일주문, 들어가는 길

수덕사는 백제시대부터 내려온 고찰로서 충청 서해안 지역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사찰이다. 덕숭산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어 언덕길을 따라서 올라보면 앞이 탁트인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이라서 그런지 주차장에서 수덕사 입구까지는 별로 아름다운 광경은 볼 수 없지만 수덕사 입구부터는 깨끗하고 조용한 사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수덕사 편액. 출입문 자체는 문화재적인 의미를 찾을 수는 없고 단순히 수덕사 입구라는 느낌만 준다. 수덕사 입구를 유명하게 해주는 이응로 화백이 머물고 많은 유명인사들이 다녀갔다는 수덕여관. 지금은 복원된 건물이 있지만 예전에는 오래되고 낡은 수덕여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낡아지면 제대로 된 수덕여관의 모습을 보..

안동 봉정사 삼층석탑

봉정사 극락전 앞 마당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만 삼층석탑이다. 석탑의 각부분에서 섬세하거나 화려한 점이 없고 웅장한 석탑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 평범한 석탑으로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에 비해서 기술이 많이 퇴보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고려시대부터는 불교신앙의 중심이 탑에서 불전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봉정사 극락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2층의 기단, 3층의 탑신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그 규모나 기단과 탑신에 새겨진 조각상 등이 수준이 상당히 떨어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봉정사 삼층석탑의 기단석. 장식이 없고 당시에 형식적으로 대량 생산된 듯한 느낌을 주는 석탑이다. 봉정사 삼층석탑의 탑신. 몸돌과 지붕돌에서 섬세..

안동 천등산 봉정사 - 범종각, 당간지주, 석조불상, 삼성각

안동 봉정사에는 국보로 지정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대웅전, 고금당, 화엄강당 등 보물급 이상의 목조건축물을 보유하고 있지만, 석탑을 비롯한 석재문화재는 많지 않은 편으로 불전 중심의 사찰이라 할 수 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앞 마당 입구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는 봉정사 범종각. 범종은 문화재로 분류된 오래된 범종은 아니고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봉정사 대웅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아주 낡은 당간지주 봉정사 극락전과 대웅전 사이에 위치한 석조불상.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기도를 올린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뒷편에 자리한 삼성각.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아주 작은 건물로 극락전, 화엄강당, 고금당과 일관된 건축형태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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