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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고려실] 고려시대 성리학의 도입

younghwan 2012. 2. 19.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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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원의 간섭기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유물로는 금속활자와 단군신화를 기록한 삼국 유사를 들 수 있고, 고려말 이후 우리나라의 정신 세계를 이끌어 온 성리학 또한 이 시기에 도입되었다. 성리학은 원나라에서 왕을 모시면서 오랜 기간 머물렀던 관료이자 학자인 안향.백이정 등이 관련 서적을 국내에 소개하였고, 충선왕과 함께 원나라에 간 이제현이 중국의 성리학자들과 학문적이 교류를 하면서 많은 학문적인 깊이를 더했다고 한다. 당시 초강대국 원나라를 중심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기때문에 원나라 간섭하의 고려정권이었지만, 큰 영향을 미친 많은 학문적.기술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성리학의 도입
원나라에서 왕(충렬왕.충선왕)을 모셨던 안향.백이정 등의 관료들은 주자성리학 관련 서적들을 가지고 귀국함으로써 성리학을 고려에 본격 소개하였다. 이후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대도로 간 이제현은 충선당이 세운 만권당이라는 서재에서 저명한 원나라 유학자들과 교유하며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 당시 고려 학자들이 성리학의 도입과 연구에 열심이었던 것은, 성리학이 종전의 유학들과 달리 우주와 인간을 아우르는 형이상학적 논리 체계를 가진 새로운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리학을, 지나치게 관념론에 빠진 불교나 미신적 기복 신앙 또는 개인적 양생수련에 치우쳐 있던 도교와 달리, 무신정권에 의해 위축된 유교 정치와 신분 질서를 복원하고, 토지의 불법 소유 문제를 비롯한 각종 사회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 체계로 여겼던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안향의 글과 여러 일들을 기록한 책 (회헌실기), 1909년, 고려후기 학자이자 관료인 안향의 글과 말, 기타 그와 관련된 사실들을 모은 책이다. 안향의 17대 후손이 조선 영조 40면에 처음 간행한 이후 여러 차례 증보.중간되었다.

고려 후기의 학자이자 관료인 안향(1243~1306)의 글과 말, 기타 그와 관련된 여러 사실들을 모은 책이다. 안향의 17대 후손인 안극권이 조선 영조 40년(1764)에 처음 간행한 이후 여러 차례 증보.중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북경 국자감. 원나라 성종 때인 1306년에 창건된. 원.명.청 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동쪽에 배향공간인 대성전이, 서쪽에 강학공간인 벽옹과 이륜당이 있는 동묘서학의 건물배치를 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명나라 때인 1428년에 건립된 건물이라고 한다.

국자감 학생들을 깨우치는 글
저 불교는 부모를 버리고 집을 떠나 인륜을 가벼이 여기고 의리를 벗어나니 곧 오랑캐의 무리와 같다. ... 내 일찍이 중국에서 주자의 글을 보았는데, 성인의 도를 밝히고 불교의 학문을 배척하여 그 공로가 공자와 짝할 만하더라,  - '회헌실기' 유국자제생문. <출처:중앙박물관>


원나라에서 충선왕을 모시던 성리학자 이재현의 초상화(이제현 초상, 복제품), 국보 110호, 1319년, 고려시대 문신인 이제현초상(복제품)으로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원나라 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안향의 초상화와 함께 고려시대 초상화로 남아 있는 2점 중의 하나이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인 이제현의 초상화이다. 33살의 이제현이 충선왕과 함께 중국을 유람하던 1319년에 충선왕이 진감여라는 원나라 화가를 시켜 그린 것이라 한다. 이제현은 귀국할 때 이 그림을 가져오지 못했다가 21년 후에 우연히 그림을 다시 보게 되자 그 감회를 시로 읊었다. 그림에는 이 시가 그림에 대한 원나라 문장가 탕병룡의 찬과 함께 쓰여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그림에는 이제현이 이 그림을 보고 읊은 시와 원나라 문장가 탕병로의 찬이 함께 쓰여 있다.


이제현의 문집(익재집), 순조 14년(1814)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1287~1367)의 문집이다. 그의 서문을 모은 '익재난고'와 문화론을 담은 '역옹패설', 그리고 '습유'로 구성되었다. 고려 때에 간행된 초간본은 전하지 않는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제현이 그렸다는 사냥 그림 (전 이제현 필 수렵도, 복제품), 14세기
이제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그림이다. 맑은 설경과 말 탄 인물의 생동감이 잘 표현되었다. 이 그림이 반드시 이재현의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림에 그의 서명과 함께 '이제현인'이라는 도서가 찍혀 있고 공민왕 무렵 화풍의 요소가 많은 데다 이재현이 원나라에 오래 머물며 중국 화풍의 명작을 모으고 유명 작가들과 널리 접촉하였던 만큼 이재현의 작품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 <출처:중앙박물관>


성리학에 심취했던 최문도의 묘지명(최문도 묘지명), 고려 충정왕 8년(1345), 성리학에 심취했던 원간섭기의 재상 최문도의 묘지명이다. 최문도는 충선왕의 근신인 최성지의 아들로, 원나라에 체류하면서 성리학에 깊이 빠져 들었다고 한다.

원 간섭기의 재상 최문도의 묘지명이다. 최문도는 충선왕의 근신인 최성지의 아들로, 원나라에 체류하면서 성리학에 깊이 빠져 들었다. 묘지명에 따르면 그는 주돈이, 이정, 주희의 책을 읽느라 밤이 늦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으며 부모가 돌아가시자 3년상을 치르고 가묘를 세워 돌아간 분을 살아 계실 때처럼 잘 섬겼다고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삼국과 통일신라에 대한 기록들에서 빠진 부분을 모은 책인 삼국유사이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 인쇄된 책이다.

삼국과 통일신라에 대한 기록들에서 빠진 부분을 모은 책(삼국유사), 1904년 신연활자본
고려 후기의 선승 일연(1206~1289)이 충렬왕 7년(1281) 무렵에 엮은 책으로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 등 기존의 문헌들이 기록하지 못한 일들을 널리 모아 정리하였다. '제왕운기'와 함께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의 출발점으로 설정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 고대 문화의 많은 부분을 밝히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삼국유사' 중에서
고조선<왕검조선>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 아사달<경에는 무엽산이라고도 하고 백악이라고도 했는데, 백주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지금의백악궁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으나, 요임금과 같은 시대였다." 또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제석을 이른 것이다>의 서자 환웅이 늘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아버지가 자식의 뜻을 알고 세상을 내려다보니, 삼위태백이 가히 세상을 널리 이롭게(홍익인간) 할 만하므로,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서 내려 보내어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시곳을 신시라고 부르니 이 분을 환웅천황이라고 한다."라 하였다.
- 삼국유사, 기이 - <출처:중앙박물관>

금속활자 인쇄
'직지'로 널리 알려진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직지'는 그것이 1377년에 청주의 흥덕사라는 사찰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임을 책의 말미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직지'보다 훨씬 앞선, 무신정권의 강화도 천도(고종 19,1232) 이전 시기부터 이미 개발.사용되고 있었다. 이는 금속활자본을 번각 인쇄한 목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라는 책의 기록을 통해 증명된다. 아울러 '동국이상국집'에는 강화도 천도 시절에 무신정권이 '상정예문'이란 책을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배포한 사실도 전한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시대 실물 금속활자. 개성지역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고려시대 실물 금속활자이다. 고려 금속활자의 실물은 이것 외에도 개성에서 발굴된 것이 북한에 소장되고 있다고 한다.

'직지'가 알려지기까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은 19세기 말 ~ 20세기 초에 주한 프랑스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콜랭 드 플랑시가 수집하였다. 1900년에 파리 세계만국박람회에 전시되고 1902년에 프랑스의 학자 모리스 쿠랑이 '한국서지'의 제4책 부록에 수록하기도 하였지만 '직지'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1911년 플랑시의 물품 경매 때에 골동품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직지'는 일제강점기인 1931년 '조선활자인쇄자료전관목록'에도 소개되었으나 여전히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베베르의 유언에 따라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서고에 묻혀 있던 '직지'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72년의 일이다. 이 도서관 특별보조원으로 일하던 서지연구자 박병선이 그해 이 도서관에서 개최된 '세계도서의 해' 전시회에서 '직지'를 고려의 금속활자본으로 소개한 것이다. 이후 학자들의 공동 연구가 이어지면서 '직지'는 명실상부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될 수 있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우리라나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인 직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있는 것을 복제한 것이다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품, 직지(복제품), 고려 우왕 3년(1377)
고려 말의 선승 백운화상 정한(1299~1374)이 공민왕 21년(1372)에 역대 여러 부처와 고승의 설법, 문답, 편지, 시문 등에서 선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만 뽑아 엮은 책이다. 우왕 3년(1377)에 청주목 흥덕사에서 비구니 묘덕의 시주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 이 책은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로서,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원래 상하 두 책이었으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하권 한 책뿐으로 진본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록 활자의 주조와 판짜기 기법 등에서 서툰 점이 적지 않지만, 원나라의 지배로 관청 주도의 금속활자 인쇄가 점차 마비되어 가던 시기에 지방 사찰이 직접 활자를 주조하여 책을 찍어냄으로써 금속활자 인쇄의 맥을 이어 주었음을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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