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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고려실] 개혁군주 공민왕

younghwan 2012. 2. 20.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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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말 공민왕은 대표적인 개혁 군주로 원나라가 쇠퇴해자 친원파를 숙청하는 한편 영흥 일대를 회복하는 등 반원 정책을 추진하고 여러 제도적인 면을 개혁하였다. 물론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고려는 멸망하게 되었지만, 그의 정신은 후대 사람들이 높이 사서, 그의 신당이 조선 종묘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조선의 건국이 후손이 없었던 공민왕을 승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원나라 노국공주와의 깊은 부부애로 인해서 그 초상화는 노국공주와 함께 그려져 있다. 또한 공민왕의 지원을 받은 목은 이색을 중심으로 한 성균관 학자들의 성리학에 대한 연구는 후에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개혁군주 공민왕
원나라가 정치 불안 등으로 쇠퇴해 가자 고려 공민왕은 몽골식 복장과 머리모양을 폐지하고 친원파를 숙청하는 한편, 원나라에 빼앗긴 영흥 일대를 되찾는 등 일련의 반원 정책을 추진하였다. 홍건적의 침입과 내부 반란을 잘 넘긴 공민왕은 무명의 승려 신돈을 파격적으로 등용하였다. 이는 권문세가 등의 저항을 정면으로 돌파하면서 원간섭기 내내 문제가 되었던 불법적인 토지.노비 소유를 과감히 개혁하기 위한 조치였다. 공민왕의 개혁은 교육과 과거 분야에서도 추진되었다. 대학자 이색을 중심으로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중흥하고, 과거제도를 성리학을 중심으로 개혁한 것이 그것이다. 훗날 이성계와 손잡고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은 바로 이러한 개혁의 흐름속에서 조금씩 성장하였다. 재위 말기에 공민왕은 요동의 동녕부를 공격하는 등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권문세족 등의 반발 속에 신돈이 실각하고 공민왕 자신도 피살당하면서, 왕실이 주도한 개혁 정치는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출처:중앙박물관>


공민왕이 쓴 안동 영호루 현판 글씨의 탁본(안동 영호루 현판 탁본)
안동 영호루 현판 글씨를 탁본하여 첩으로 만든 것이다. 이 글씨는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 갔던 공민왕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출처:중앙박물관>


탁본첩


안동 도심 낙동강변에 세워진 영호루


공민왕 부부의 초상화(복제품),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원나라 출신 왕비 노국대장공주(?~1365) 부부의 초상화이다. 무신도의 색채가 짙은 이 그림은 누가 언제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림에서 공민왕은 복두를 쓰고 둥근 것에 소매가 넓은 단령포 차림이다. 노국대장공주는 화려한 관과 웅장한 소매 폭, 길게 늘어뜨린 치마 등에서 왕비의 위엄이 느껴진다. <출처:중앙박물관>


공민왕이 그렸다는 사냥그림(전 공민왕 필 천산대렵도,복제품), 14세기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작품으로, 천산에서 수렵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곤륜산의 북쪽 자락인 음산에서의 사냥모습을 표현하였다는 뜻에서 음산대렵도라고도 한다. 원래의 그림이 세 개로 분리된 것 둥 하나로서, 낡고 훼손되어 상세한 필법을 알기는 어렵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울 종묘의 공민왕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 부부의 초상화와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하는 대렵도풍의 준마도가 있다.


종묘 입구의 공민왕 신당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의 무덤 이름이 새겨진 청자대접, 공민왕 14년(1366) 공민왕 23(1374)
"정릉"이라 새겨진 청자 넝쿨무늬 대접이다. "정릉"은 개성에 있는 노국대장공주의 능호(무덤이름)이다. 따라서 이 대접은 애초 무덤에 부장하기 위해 제작한 것 중 하나이거나, 공민왕의 능행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출처:중앙박물관>


친원파의 숙청을 원나라에 납득시킨 염세신의 초상화(복제품), 보물 1097호, 고려후기
문신이자 공민왕의 장인인 염제신의 초상화이다. 염제신은 공민왕의 친원파 숙청을 원나라에 납득시켰고, 공민왕 19년에는 오로산성 공격에 성공하는 등 공을 세웠다. 이에 공민왕은 그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 하사하고 그 딸을 비로 들였는데, 이 그림이 그때 하사한 초상화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림의 품격 등으로 보아 공민왕의 작품일 가능성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성균관의 중흥에 기여한 이색의 초상화(이색 초상, 복제품), 조선후기
고려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1328~1396)의 초상화이다. 이색은 공민왕의 개혁정책에 따라 성균관을 다시 짓고, 성균관 대사성으로 정몽주.김구용.이승인.박상충 등 쟁쟁한 신진들을 교관으로 근무하게 하는 등 성균관의 성리학풍 진작과 신진사대부의 성장에 크게 이여하였다. 후에 이성계 세력에 협조하기를 거부하여 고초를 겪었다. 문하에 권근과 김종직.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초기의 정치와 학문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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