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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고려실] 저무는 고려 왕조

younghwan 2012. 2. 21.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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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공민왕 사후에 극단적인 반동정치가 있었다. 반동세력은 신흥강국인 명을 적대시하고 원을 가까이하는 시대착오적인 정치를 하였으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등을 극복하는데 큰 기여를 한 이성계, 최영 등의 세력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 형국이 되었고, 새로이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은 이들고 힘을 합쳐, 토지제도 개혁 등을 통해 권문세가의 힘을 크게 약화시키고 조선 건국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저무는 왕조
공민왕이 피살되자 극단적인 반동 정치가 펼쳐졌다. 10살의 우왕을 즉위시킨 세력은 신흥강국인 명나라를 적대하고 명나라에 밀려난 북원과 교섭하는 시대착오적 외교를 펴는 한편, 폭력적 토지 겸병을 자행하며 정몽주 등 비판적인 신진들을 유배하는 전횡을 저지렀다. 이러한 가운데 왜구와 홍건적의 토벌로 민중의 여망을 한몸에 받던 이성계와 최영이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고 정국을 장악하였다. 유서깊은 철원 최씨 가문의 최영은 온건 개혁파의 지지를, 한미한 영흥 토호의 아들인 이성계는 불우한 처지의 북방 무인들과 정도전 등 급진개혁파의 지지를 받으며 서로 경쟁하였다. 마침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겠다고 나서자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 정벌이 추진되었다. 정벌에 나선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 이르러 거듭 요동정벌 중단을 건의 했으나 최영과 우왕이 리를 묵살하자 회군하여 이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이성계 일파는 정도전 등 신진 관료들의 주도로 기존의 토지대장을 불사르고 과전법을 통한 대대적인 토지제도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권문세족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민심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남은 것은 민심의 지지를 바탕으로 새 왕조를 여는 일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성계의 왜구 격퇴를 기념한 비문
고려말 신흥 무장 이성계, 뒷날의 조선 태조가 전라도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친 일을 기념하여 조손 선조때 세운 승전비이다. 이성계는 함양으로부터 공격해 오는 왜구들과 격전을 별여 적장을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이 탁본은 일제강점기 때 파괴된 원래의 비를 탁본한 것이다. 현재의 비는 195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태조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잠시 쉬었다는 전주 오목대와 이목대


태조 이성계의 출신지인 함흥에 세워진 함흥본궁 정전을 그린 그림


정도전의 문집(삼봉집), 18~19세기
고려망 급진파 신진 사대의 대표격인 삼봉 정도전의 문집이다. 신진 관료로서 촉망받던 정도전은 이인임 등 친원파 대신들에 반대하다 전라도로 유배되었다. 풀려난 후에는 여러곳을 떠돌다 우왕3년 함흥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 막료가 되었다. 이때의 언변으로 이성계의 측근이 된 정도전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잡은 이후 구세력 제거와 토지제도 개혁을 주도하며 조성왕조 개찰의 명분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출처:중앙박물관>

함흥의 이성계를 찾아갈 때 지은 시, "옛 동주(지금의 철원)을 지나며"
넓은 벌 하늘 낮고 초목은 가을인데
긴 강은 띠처럼 성을 둘러 흐르누나
장군은 이 땅에서 오랭캐를 무찌르고
부절을 갖고 거듭오니 아직도 검은 머리
살피건대, 공민왕 계축년(1373) 봄에 나하추가 침략해 들어오자
우리 태조는 함흥평에서 적을 크게 깨뜨렸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성계를 위해 활약한 조반의 부부 초상화(복제품), 조선후기
고려말 이성계 일파에 힘을 보탠 재상 조반(1341~1400)의 부부 초상화이다. 조반은 위화도 회군 이듬해에 명나라에 가서 이성계 일파가 세운 공양왕의 즉위를 알리고, 그 이듬해에 윤이.이고의 무고 사건에 대해서도 명나라 황제의 의심을 풀어주는 등 이성계의 외교적 입지를 다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그림은 조선 초기의 원본을 후기에 옮겨 그린 것으로 고려말. 조선초 관료의 모습과 부부 초상화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성균관의 중흥에 기여한 이색의 초상화(이색 초상, 복제품), 조선후기
고려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1328~1396)의 초상화이다. 이색은 공민왕의 개혁정책에 따라 성균관을 다시 짓고, 성균관 대사성으로 정몽주.김구용.이승인.박상충 등 쟁쟁한 신진들을 교관으로 근무하게 하는 등 성균관의 성리학풍 진작과 신진사대부의 성장에 크게 이여하였다. 후에 이성계 세력에 협조하기를 거부하여 고초를 겪었다. 문하에 권근과 김종직.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초기의 정치와 학문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경북 영덕 괴시마을 뒷동산에 위치한 목은 이색 선생 생가터.



정몽주 초상(복제품) 고종 17년(1880), 이한철 그림
고려말의 학자이자 충신인 포은 정몽주의 초상화이다. 조선 고종 17년 궁중 화가이던 화원 이한철이 개성 숭양서원에 있던 초상화를 옮겨 그린 것이다. 정몽주는 대학자 이색이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때, 성균관의 중흥과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으며, 이색으로부터 '우리나 이학(성리학)의 시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고 정확하여싸. 또 그는 우왕 때 왜구의 횡포가 극심하자 단속을 요청하는 일본 사행을 충실히 수행하고, 세공 문제로 악화되어 있던 명과의 관계 회복에도 기여하는 등 정치적으로 큰 활약을 하였다. 정도전 등 급진파 신진사대부들과 달리 이성계 일파에 끝내 협조하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음으로써 훗날의 선비들에게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정몽주의 문집(포은집), 조선후기
포은 정몽주의 문집이다. 조선 세종 21년(1439)에 아들 정종성이 처음 펴낸 이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이 전시품은 조선 후기에 간행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경기도 용인에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 묘역


고려 충신 김씨 형제의 글과 행적을 모은 글(쌍절록), 순조 3년(1803)
고려 말의 김제.김주 형제의 글과 행적을 후손인 김양선이 순조 3년에 수집하여 간행한 책이다. 형 김제는 경상도 평해군수로 있을 때 고려가 망하자 집으로 들어가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동생 김주는 성절사로 명에 갔닥 귀국하던 중 압록강에서 고려가 망한 사실을 전해듣고 발길을 돌려 중국에서 여생을 마쳤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주가 부인 유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여인은 두 지아비를 두지 않으니, 내가 강을 건너면 몸 둘 바가 없습니다. 부인께서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양수라 하고, 딸을 낳으면 명덕이라 하세요. 또 조복과 신발을 보내니 다만 이것으로 신표를 삼아 부인께서 세상 떠나신 뒤 이것들을 합장하여 우리 부부의 무덤으로 삼도록 하시고, 강에 이르렀다가 도로 중국을 향해 가는 이 날을 나의 기일로 삼으시고 장례 후에는 지문이나 묘갈은 쓰지 마세요.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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