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농업국가로서 인구의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농업 생산은 국가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국왕이 직접 관장했던 부분이 많았다, 사직단의 제사를 비롯하여 측우기, 천문관측 등도 모두 농업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때에 작성한 '농사직설'을 비롯하여 가장 유명한 '농가월령가'까지 국왕을 비롯하여 많은 지식인들이 농업을 위한 서적을 편찬, 보급할려고 애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효종대에 신속이라는 사람이 만든 농서인 '농가집성'
17세기 활동한 관리 신속이란 인물이 편찬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농업서적이다. 세종대에 정초 등이 왕명을 받을어 편찬한 '농사직설', 세조 때 강희맹이 지은 '금양잡록', 작자미상의 '사시찬요처' 등 3종의 농서와 부록으로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대책을 적은 '구황활요'를 덧붙여 한데 엮었다. 그러나 4종의 책을 그대로 합쳐서 엮은 것이 아니라 수정.보완하였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농촌생활을 경영해가는 지혜를 적은 책으로 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의 증보판이 유중림이 지은 '증보 산림경제'
조선 영조 때 사람 유중림이 앞서 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를 보충하여 엮은 책이다. '산림경제'의 16항목이 이 책에서는 23항목으로 늘어났고 각 항목에서도 내용이 첨가되었다. 산림에 묻혀 살며서 지켜야 할 생활 규범과 농촌 생활의 지혤를 적은 이 책은 농사짓는 법 이외에 나무심기, 가축기르기, 건광관리와 질병 예방법 등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농촌의 추수기록인 '추수기'
조선후기 어느 지역의 벼농사 추수상황을 기록한 문서이다. 문서의 형식은 경작자의 이름, 토지명적, 소출량 순으로 되어 있다. 경작자는 대부분 노비들이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농민의 한 해 생활은 농사일을 중심을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명절이나 생일, 제삿날 등은 모두 음력을 썼지만, 한 해 농사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정한 24절기에 맞추었다. 17세기 초반 고상안이란 인물은 매달 두 차례씩 오는 절기마다 해야 할 농사일을 적은 농가 월령이라는 농서를 만들었는데, 24절기는 파종, 제초, 이앙 등의 농사일마다 해야 할 시기를 알려 주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아동 구호 대책을 적은 서적인 '자휼전칙'
흉년에 걸식하는 어린이와 버려진 아기에 대한 구호 대책을 적은 책이다. 1783년에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 반포되었다. 국왕 정조의 윤음과 구호 방법을 규정한 사목으로 되어 있고, 뒷 부분에 한글 본이 붙어 있다. 걸식 어린이와 버려진 아이에 대한 음식 지급 규정, 임시 거처 운영 방안 등 구체적인 구휼책이 실려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큰 도둑, 작은 도둑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세금으로 전세.군포.환곡이 있었는데, 이를 삼정이라고 하였다. 전세는 농민들이 농사짓는 땅에서 생산한 수확물의 일부를 나라에 바치는 세금이다. 그리고 군대에 나가는 대신 베나 돈을 갖다 바치는 것을 군포라고 하였다. 환곡은 원래 굶주리는 농민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제도였다. 그런데 불공평한 세금 부과와 지방관의 가렴주구로 삼정은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 때로 관리들은 세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의 친족이나 이웃에게 세금을 물리고, 어린아이와 죽은 사람 몫의 군포를 받아가기도 하였다. 조선의 대표적 사상가 다산 정약용은 세금 때문에 도탄에 빠진 농민들의 어려움을 직접 보고, 도적질을 일삼는 지방 수령은 '작은 도적', 이들과 짜고 이들을 용서해 주는 관찰사는 '큰 도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의 담뱃대. 담뱃대의 길이는 신분과 비례한다.
담배는 17세기 전반 조선 광해군 때 들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담배는 순식간에 조선 사람의 기호 식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에는 담배 예절이 생겨나기 전이라 어린아이도 침을 뱉으며 담뱃대를 빨아 댔고, 다홍치마 입은 규방 부인도 낭군 앞에서 유유자적 담배를 피웠다. 양반 중에는 술이나 밥은 끊어도 담배는 못 끊겠다고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담뱃대를 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만큼 담배가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었다는 증거이다. 당시에 사람들은 담뱃대의 길이가 길수록 신분과 권위가 높은 사람으로 여겼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담배 쌈지, 담뱃대걸이, 부시와 부시통
백자로 만든 재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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