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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태인 고현동 향약

younghwan 2010. 2. 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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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방 사회에 유교를 토착시켜려 시행한 향약 가운데서 그 내용이 양적,질적으로 가장 충실하다고 여겨지는  전라북도 태인의 고현동 향약이다. 마을에 최치원 선생을 모신 서원인 무성서원이 있고, 아마도 이 서원을 중심으로 향약이 제대로 유지되어 왔다고 보여진다. 특히 가사문학 '상춘곡'으로 유명한 정극인 선생이 초기에 이 곳 향약을 주도한 까닭에 그 내력이 깊어져서 제대로 향약이 잘 시행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형태의 향약 관련 문서들과 제도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

정극인이 지은 태인 향약에 관한 시, 불우헌집은 조선 성종때 학자 정극인의 문집이다.

정극인의 글과 행적 등을 한 데 엮은 책이다. 정극인이 처음으로 만든 고현동 향약에 관한 시인 '태인향약계축', 향음주례 서문인 '둥중향음주서', 태인 고현동에서 지은 한글 가사 '상춘곡' 등이 실려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고을에서 술을 마시는 예법을 담은 그림, 향음주례지도

향음주례의 절차와 방법을 요약한 그림이다. 향음주례는 마을의 질서를 세우려는 목적에서 유생들이 어른을 모시고 예법에 따라 술을 마시며 모임을 갖은 의식이다. 정극인이 고현동에서 처음 향음주례를 행하며 썼던 글이 후대에 향약 책에 반복하여 실린 것은, 고현동 향약이 다른 지역에 비해 향음 주례를 강조한 향약이라는 것을 뜻한다.<출처:국립중앙박물관>

성종6년 정극인은 고현동 양반 간의 화목과 질서 유지를 위해 향약과 향음주례(고을에서 어른을 모시고 술을 마시는 예법>를 시행하였다. 이 때 그는 동회 활동을 규정하는 규약과 동원의 명단을 만들고 동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정극인은 학당을 세워 마을 자제들을 교육하는 등 마을의 풍속을 바꾸어 유교적인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런 노력을 중종 5년 같은 마을의 송세림 등이 계승하였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고현동 향약의 약조와 구성원의 명단을 담은 책, 동안(보물)

현재 남아 있는 고현동 향약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이다. 향약 구성원 명단인 좌목, 정극인과 송세림이 쓴 향응주례에 관한 서문과 발문이 실려 있다. 이 두 글은 이후 고현동 향약문서에 대부분 실려 있다. 이는 고현동 향약을 세우고 정착시킨 정극인과 송세림의 향약 정신을 계승발전 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고현동 향약의 약조와 그 구성원의 명단을 담은 책, 고현동약좌목(보물), 이책에는 향약 참여자의 명단인 좌목, 정극인.송세림의 서문과 발문이 실려있으며, 20여개의 향약 규약이 적혀 있다. 이 규약에 의하면, 양반이 아닌 중서층이 향약에 들어가기 시작하고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태인선비들이 송정에서 계를 만든 것을 기념한 그림

송정수계지도는 '고현동 성황산 송정에서 계모임을 하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그림에는 술상 주위로 둘러 앉아 있는 계 모임의 주인공인 10명의 선비들, 술독.술상 등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 당나귀와 마부 등이 소나무 아래에 나오고 있다. 그리고 냇가 동쪽에는 이 모임을 찾아오는 듯한 선비 일행이 보인다. 그림의 아래 부분은 선비를 상징하는 대나무와 매화 사이로 계모임을 하였던 사람의 명단을 적었다. 참석자는 호, 이름, 자, 본관 순서로 적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17세기 초까지 향약은 양반만 참여하는 모임의 성격이 강하였다. 특히 김대립, 김응빈 등 고현동의 유력한 양반들이 향약 모임을 주도하였다. 17세기 중반 이후, 양반뿐 아니라 서얼까지 향약의 구성원으로 참여 하였다. 구성원 간의 혼례.장례를 서로 돕고, 일반 백성들도 향약의 제재를 받게 되었다. 이 시기의 향약은 양반만의 참여하는 모임의 성격을 넘어 참여하는 범위가 넓어졌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고현동의 약조와 그 구성원의 명단을 담은 책. 동계좌목(보물)

이 책에는 숙종때 다시 만들어진 '동안', '고현 동계 좌목'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고현동계좌목'에는 양반으로 구성된 상계와 일반 백성으로 구성된 하계의 명단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시기부터 일반 백성들이 향약에 참여하고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고현동 향약 구성원의 명부, 고현동향약안(보물)

이 책에는 당시 태인 현감이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정조의 뜻에 따라 향약을 진흥시키려 하였다. 이 향약은 수령의 서명과 관인이 찍혀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의 향약과 성격이 다소 다르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18세기 초 향약에는 양반과 일반 백성들이 상.하게의 형태로 함께 명단에 기록되기도 하였다. 또 향약을 통해 마련된 동의 공동 재산을 가난하거나 병든사람에게 경제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런 성격의 향약은 18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향약은 규약이 간소화되거난 생략되는 등 다소 위축되었다. 그래서 19세기의 향약은 고현동 내 학당 또는 동각을 유지.운영하려는 성격이 강하였고, 향약 구성원의 일상생활을 규제하기보다 동각의 교육기능이 중시되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향약은 착한 것을 권장하고 악한 것을 경계하며 어렵고 구차한 때에 서로 돕고 구하기를 목적으로 하여 마련된 향촌의 자치규약이다. 이 문헌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선조년간에 시작하여 1977년 최근에 이르기까지 약 400여년 동안 전라도 태인현 고현동에서 결성하고, 시행한 향약에 관한 자료이다. 원본을 보고 옮겨쓴 것으로 총 29책인데, 명칭은 다소 다르기는 하나 내용이 향약자료로 분류되는 문헌이 24책이며, 나머지 5책은 향약 관련자료들이다. 책의 형태와 체제는 각각 약간씩 다른데 머리말과 맺음말 그리고 좌목(座目:자리의 차례를 적은 목록)과 규약 등이 갖추어진 책도 있고, 단순히 좌목만 있는 책도 있다. 이 향약은 정극인(1401∼1481)의 『향음서』를 기준으로 하며, 성종 6년(1475)이 그 시행시초가 된다. 이 향약안들은 그 중간중간 빠진 본들이 많으며, 또한 구한말 이후의 것도 6책이나 포함되어 있다. 현재 이 문헌은 영광 정씨, 여산 송씨, 경주 정씨, 청도 김씨, 도강 김씨 등 최초 회원 오대문중의 자손들이 돌아가며 총무격인 유사를 뽑아 보존· 관리하고 있다. 현존하는 향약 문헌으로 양적으로나, 내용면에 있어 가장 많고 충실하며 향약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

고현동 향약 문서의 보존을 위해 방충제로 쓴 담뱃잎.

시대를 걱정하며 미친 척한 고현동의 일곱사람을 그린 그림

광해군 대 국왕의 정치가 부당하다고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거짓으로 미친척하며 고현동 내 송정에서 시문과 자연을 벗 삼아 살았던 7명의 서비, '7광七狂'을 기리고자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을 통해 조선시대 고현동의 실제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고현동은 시산과 성황산 등의 산으로 둘러 싸여져 있고, 그 가운데 마을과 농지가 펼쳐져 있어 경치가 아담하면서 아름답다. 마을은 무성서원과 그 주변 건물을 포함하고 있는 원촌마을, 향약을 실시하고 문서를 보관한 장소인 동각이 소재하고 있는 남전 마을, 그리고 시산 밑의 송산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이곳에 동각.무성서원 등 여러 역사문화유산이 있고, 성황산 중턱 송정 부근에는 7명의 선비가 그려져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대동여지도'내 태인현 일대

김정호가 목판으로 제작한 조선의 전국지도이다. 이 지도에서 보듯 전라도 태인현은 전라도 감영이 있던 전주부를 비롯하여 임실현, 순창군,정읍현,고부군,금구현과 경계를 맞대고 있으며, 전주.김제.부안.정읍.순창.임실과 직통하는 9개의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김정호가 쓴 우리나라의 지리지.

김정호가 전국 각 고을의 정보를 수집하여 만든 지리지이다. 이책에는 각 고을의 역사 및 지리정보를 담고 있는데, 조선후기 면의 발달이 반영되이 있다. 태인현에서도 현내면과 고현내면 등 16개면이 발달하였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태인의 역사.지리지. 태인지역의 서원.정자.누각 등 역사문화유산과 인물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전라도 태인현 고현동
조선시대 전라도 태인현은 오늘날 전라북도 정읍시의 일부인 칠보면, 태인면, 산외면, 북면 등을 아루르는 지역이다. 이 현은 전라도 감영이 있는 전주부 등 6개 군현과 인접하고 있으며, 이들 군현과 연결되는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고현동은 '옛날 군현의 치소가 있었던 마을이란 뜻이다. 태인현 고현동에는 백제시대 대시산군과 통일신라 시대 이후 태산군의 치소가 있었다. 조선 태종 9년에 이웃한 인의현과 합쳐 태인현이 만들어졌다. 이 때 치소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고현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현동은 지금의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무성리 일대이다. 이 곳은 시산과 성황산 사이에 있어 경치가 좋고 벼농사에 유리했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태인현의 대표적익인 양반 가문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또한 500여년간 실시한 향약을 비롯하여 유학-문학.의병 정신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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