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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 공산성은 백제의 두번째 수도로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한 후 부여로 다시 옮길때까지 64년 동안 그 역할을 했던 곳이다. 금강변  남쪽의 약 110m 정도의 구릉에 석축과 토축으로 쌓은 천혜의 요새와 같은 성이다. 북쪽으로는 한강이 막혀있고, 동.서.남쪽으로는 높지 않은 구릉이 둘러싸고 있는 곳이다. 백제의 성곽은 주로 흙을 다져서 쌓은 토축성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이 곳 공산성은 조선시대에 다시 석축성으로 고쳐 쌓은 까닭에 사비성이나 몽촌토성 등 백제 성곽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의 공산성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산성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으로 생각된다. 공산성 중심인 금강변에는 지금은 민가도 없고, 아무도 살지 않는 곳으로 약간 삭막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이 곳은 금강나루와 다리가 있던 곳으로 호남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제일 중요한 육로로 지금의 1번국도와 호남고속도로, 호남선이 이곳을 지나간다고 보면 생각하면 그 중요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옛날부터 공주는 정3품의 목사가 관장하던 고을로, 주변 넓은 지역을 관장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통행하는 금강나루를 관리하는데도 그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1개국가의 수도로 쓰기에는 공산성의 규모가 너무 작고, 주변에 평야지대가  넓지 않아서 백제는 다시 부여로 수도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1. 공산성 금서루, 정문 역할을 하는 서쪽편 성문



공산성 서쪽 출입문인 금서루는 오래전에 공산성 안에 도로를 만들면서 없으졌으나, 최근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공주에 있는 금강을 건너는 다리 중 가장 오래된 금강교 바로 옆에 있어 공산성 정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금도 공산성 내부로 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자동차 출입문이 있다.


공산성 서문격인 금서루 주위의 성벽

2. 공산루 주변 성벽, 금강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곳


공산성에서도 서쪽 금강변 구릉위에 위치하고 있는 공산루는 기록에는 없는 누각으로 봐서 최근에 금강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서 만든 누각으로 보인다. 지금은 공산성에 수풀이 우거져서, 산성 방위를 지휘하는 공산성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쌍수정이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여 마치 금강변 구릉에 위치한 공산루가 그 역할을 하는 것 처름 보인다. 공산성 서쪽편 석축은 원래 백제시대에 쌓은 흙으로 쌓은 토축 외부에 돌을 쌓아서 축조했다고 한다. 공산루에 올라서면 금강과 북쪽편이 훤히 보이는데 벌판은 그리 넓어 보이지는 않아서 수도로서 기능을 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3. 공산성 북문인 공북루와 금강나루, 옛다리의 흔적


공주 공산성 북문인 공북루는 지금은 아무도 드나드는 사람들이 없는 외진 곳처럼 보이지만, 고대 이래로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공주에 금강철교(금강교)가 가설되기 전까지는 호남지역에서 서울로 통하는 거의 유일한 내륙교통의 거점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출입문이다. 공북루를 나서면 금강을 건너는 나루가 있었고, 후대에는 각종 다리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금강을 건너면 걸어서 천안 차령산맥의 관문인 차령을 넘어서 서울로 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공주 공산성은 동.서로 흐르는 금강 수운과 호남지역에서 연결된 남.북 내륙 교통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으며, 그 관문이 공산성 북문인 공북루였다.



조선시대 수도 한양과 호남지역을 오가던 사람들이 지나던 공산성 공북루.


공북루 바깥쪽 금강변에는 옛날 금강나루터와 다리를 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4. 금강변 우물인 연지와 만하루


공주 공산성 정문격인 북문 공북루를 지나서 성벽을 따라서 동쪽으로 가면 금강과 연결되어 있는 또 다른 누각인 만하루를 볼 수 있다. 만하루는 사람이 왕래하는 성문은 아니고, 금강 경치를 감상하고, 금강과 바로 연결되기때문에 군사적 방어 목적으로 누각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만하루 바로 안쪽으로는 공산성에서 필요한 식수를 확보할 목적으로 만든 우물인 연지가 있고, 그 뒷편으로는 작은 사찰인 영은사가 자리잡고 있다. 이 곳 주변은 원래부터 사람이 많이 왕래하던 곳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공산성 남문인 진남루와 주위의 성벽


공산산 남문과 누각인 진남루는 공산성 성문 중에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던 성문으로 보이며, 70년대 해체 복원했다고 한다.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돌로 쌓은 석성으로 바꾸면서 만든 성문으로 공주 구시가지와 통하는 길이 이 진남루와 연결되어 있다. 공산성과 진남루가 통하는 길이 경사가 있는 산길이었고, 서문인 금서루가 금강변을 중심으로 교통의 중심지와 가까웠던 까닭에 도로가 서문방향으로 개설되어서 이 곳 진남루 주변은 보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남루는 공산성의 중심인 쌍수루와 백제 왕궁터와 가깝고 공주 구도심과도 가까웠던 까닭에 조선시대에는 진남문을 통해서 출입하던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6. '이괄의 난' 이야기가 남아 있는 쌍수정과 백제왕궁터 


공주 공산성을 이루고 있는 구릉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쌍수정이다. 이 곳 쌍수정은 지금은 나무가 많아서 주위가 잘 보이지는 않지만, 주위를 훤하게 내려다 볼 수 있다. '이괄의 난'의 난을 피해서 인조가 6일동안 근심하면서 이 곳 쌍수정에서 반란 진압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에 있던 나무에 정삼품의 벼슬을 내리고 쌍수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쌍수정 아래 약간 넓은 공간에는 백제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을 당시의 건물터로 보이는 유적과 우물이 발굴되었으며, 아마도 초기에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공산성 쌍수정 주변에는 백제왕궁터를 비롯한 많은 유적지들이 있다.



사적 제12호. 둘레 2,200m. 웅진성(熊津城)·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했다. 금강에 접한 표고 110m의 구릉 위에 석축과 토축으로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형(包谷型) 산성이다. 475년 백제 문주왕이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여 538년(성왕 16) 사비(泗沘:지금의 부여)로 옮길 때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축성시기는 국력이 안정된 동성왕 때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시대에 축조된 이래 여러 차례의 개축을 거쳐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성의 구조는 석축 약 1,810m, 토축 약 390m이다. 석축산성은 안팎으로 돌을 쌓는 협축방식(夾築方式)을 이용했으며, 내탁외축(內托外築)을 한 부분도 있다. 상단의 너비는 약 70cm 정도이고, 안쪽에는 백회를 발라서 성벽의 석재가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토축산성은 돌을 혼합하여 쌓았는데 대개 높이 1m, 바닥너비 8.5m, 윗면너비 3m 정도이다. 성내에는 깊이 2m 정도의 호(壕)가 형성되어 있다. 서쪽 성벽은 토축된 위에 돌을 쌓아 축조했다. 성에는 진남루(鎭南樓:南門)·공북루(拱北樓:北門)와 암문(暗門)·치성(雉城)·고대(高臺)·장대(將臺)·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이 있으며, 동문과 서문의 터가 남아 있다. 성내에는 영은사(靈隱寺)·광복루(光復樓)·쌍수정(雙樹亭)·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쌍수산정주필사적비(雙樹山亭駐驆事蹟碑)와 주초석·창고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고, 만하루지(挽河樓址)·임류각지(臨流閣址)·장대지 등이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동쪽과 서쪽에는 보조산성이 있어 공산성을 보호하고 있다. 공산성은 백제멸망 뒤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던 곳이며,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했던 일화도 있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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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 공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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