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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중국사신이 한국을 방문할 때 의주를 거쳐서 오랜 여행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고양 벽제관에서 잠시 머물면서 의복을 단정히 하고, 한양의 서북쪽 경계였던 무악재를 넘으며, 첫번째로 보이는 출입문이라 할 수 있는 영은문을 지나서 숙소인 모화관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구한말 자주독립의지를 표명하기 위해서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고 하며 주춧돌만 남아 있다. 구한말이라 영은문을 찍은 사진은 여러장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 모습을 보면 한국식과 중국식을 혼합한 듯한 형태를 하고 있다.


독립문 앞에 있는 영은문 주초, 독립문과 영은문이 있던 원래 자리는 도심쪽인 영천시장 부근이라 하며, 도로공사로 인해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옛날 영은문 사진을 보면 영은문은 중국 패루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지붕은 한국식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보통 중국 패루의 경우 3칸으로 하는 경우도 있고, 한칸으로 하는 경우도 있는데 영은문은 1칸짜리 출입문이다. 현재의 기둥 굵기를 보면 상당이 웅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은문 주초 아랫부분에 문양을 장식해 놓았는데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이 많이 낡았다는 느낌을 준다.


지금은 영은문 주초와 독립문이 나란히 서 있다.


여러 방향에서 본 영은문 주초


영은문을 오기 전 중국사신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역관인 고양 벽제관 옛터


중국 북경 후퉁 국자감 거리 입구에 있는 성현가 입구에 있는 문. 영은문이 이런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모화관 앞에 세웠던 주춧돌이다. 개화기에 우리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다짐하는 의미로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면서 그 기둥을 받치던 밑돌인 주초만 남게 되었다. 모화관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처음 세우고 모화루라 하였는데, 그 뒤 세종 12년(1430)에 모화관이라 이름을 바꾸고 그 앞에 상징적인 의미의 홍살문을 세웠다. 중종 32년(1537)에 홍살문보다 격식을 갖춘 형식의 문을 만들고 ‘영조문’이라 하였다가, 중종 34년(1539)에는 중국 사신의 건의로 영은문이라 이름을 고쳤으며, 연주문·연은문이라고도 하였다. 중종 때 만들어진 문은 1칸 규모이며 두 개의 긴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우진각지붕을 얹었는데, 지붕은 청기와로 덮고 각종 동물 모양을 조각한 잡상을 배치하였다. 남아 있는 2개의 주초는 2단의 사각형 받침돌 위에 기둥처럼 길게 세워져 있다. 위에 놓인 받침돌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1896년 독립문이 세워지면서 주초만 그 앞에 세워두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독립문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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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 | 영은문 주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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