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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화려한 불교미술에 비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그 표현 방식의 섬세함이나 예술적 완성도에서는 크게 뒤떨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민간의 생동감 넘치는 투박하고 거대한 석불들과 철불상들이 전국 곳곳에 많이 만들어졌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완성도가 높았던 석탑의 제작은 크게 줄어들고, 고승의 사리를 모시는 사리탑이 전국적으로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다른 경향으로는 원나라 침입이후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경천사지석탑 등과 라마풍의 불상들도 제작되기도 했다. 조선시대는 유교국가로 불교 미술은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고려시대를 답습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1. 고려시대 불상

 고려시대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비해서 불상의 세부 표현 기법이나 기술의 크게 떨어져서 지금의 기준을 봐서 크게 인상적인 불상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였다. 반면에 민간의 바램을 표현하든 듯한 은진미륵이나 파주 용미리 석불 등과 같은 거대하고 토속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미륵 석불이 많이 만들어졌다. 또한 몽골의 침입이후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라마교풍의 불상이나 도교의 영향이 들어가 있는 경천사지 석탑같은 불교 미술작품을 남겨 놓고 있다.

고려시대 불상은 신체의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묘사 등 기술적인 면에서는 통일신라 불상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불교신앙이 전국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각 지방마다 특색있는 불상을 만들었다. 고려 전기에는 통일신라 불상의 전통을 이어 동이나 철로된 항마지촉 불상과 비로자나불상을 주로 만들었다. 이와 함꼐 키가 10미터를 넘는 거대한 석불도 많이 만들었다. 고려 후기에는 고려전기보다 세련되고 온화한 모습의 불상이 유행하였다. 또한 중국 원나라 라마 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은 이국적인 불상도 함께 만들어서 일시나마 유행하였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금동관음보살 좌상(14세기). 라마교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불상으로 인도에서 만들어진 황동불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준다.

갸름한 얼굴에 화려한 장식으로 뒤덮힌 신체 등에서 라마 불상 양식의 영향이 엿보인다. 가부좌한 자세에서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오른팔을 자연스럽게 올려놓은 뒤 왼손으로 바닥을 짚는 윤왕좌의 앉음새를 취하고 있다. 윤왕좌는 원래 인도 신화에
서는 이상적인 제왕인 전륜성왕이 취하는 자세이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관음보살, 고려 14세기
보관에 화불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보살상임에도 아미타불의 손갖춤을 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아미타불상의 협시인 관음보살상 역시 아미타불이 맺는 구품인을 맺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관음보살
부처의 자비심을 상징하는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준말로, 관자재보살이라고도 한다. 관음신앙의 기본 경전인 <법화경>에 의하면, '관세음'이란 중생의 고통 소리를 듣고 구원한다는 뜻이다. 이름에 걸맞게 관음보살은 세상 모든 중생의 바람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관음보살상을 만들었다. 초기에는 보관에 화불이 있고 정병을 든 전형적인 모습을 띤다. 통일신라 중엽에는 밀교의 영향을 받은 십일변관음상도 조성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석굴암에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중국 원나라 라마 불상 양식의 영향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관음보살상이 제작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아미타삼존불


금동 대세지보살 입상 (14세기). 웅장한 면은 있으나 세부적이 묘사에서 통일신라시대 불상에 비해서 제작수법이 많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아미타불


관음보살


금동불좌상 (고려, 14세기)
 

금동보살 입상(고려, 14세기). 신체의 비례와 세부적인 묘사가 떨어지는 편이다.


금동불감(14세기)

불감은 작은 불당으로 집에서 예불을 드리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문 안쪽에는 문을 지키는 인왕을 조각하였고, 원래 안쪽에 작은 불상을 모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벽면에는 구룡인을 맺은 아미타불, 보살, 나한 등을 새겼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2. 조선시대 불상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국가적으로 지원을 받지 못했고,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친 개혁정책으로 사찰들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토지와 노비들을 많이 잃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전국적으로 많은 사찰들이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여 폐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당시에는 사찰운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들었기 때문에 큰 불사를 일으키기 힘들었던 것 같다. 다만, 조선 명종때 문정왕후가 불교를 크게 중흥시키고, 그 인력들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승병으로 큰 활약을 보였기 때문에 조선후기에는 전국적으로 큰 불사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주로 대웅전같은 불전 건축 위주로 했기때문에 인상적인 불상을 제작하지는 못했던 것 같고, 개인적으로 시주해서 만든 작은 불상들만 조금씩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기때문에, 고려시대와 같이 국가주도의 불교 문화는 융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1천년 넘게 우리 민족의 생활 깊숙이 파고든 역사를 바탕으로 그 전통을 면면이 이어왔다. 조선 초기에는 태조나 세조와 같은 군왕을 비롯한 왕실의 후원아래 수준 높은 불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승병들이 큰 활약을 함에 따라, 전란 이후에는 전쟁에서 훼손된 많은 절과 불상을 새로 짓고 만들었다. 지방에 있던 승려 장인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이 시기 불상은 대부분 조선 초기에 비해 형태가 단순하고 세부묘사가 적은 소박한 모습을 띤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지장보살(15세기,보물1327호). 조선시대부터 민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지장보살상이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도 전국적으로 사찰에는 죽은이의 명복을 비는 목적으로 지장전(명부전)이 많이 세워지고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박도 있는 중생을 위하여 영원히 부처가 되지 않는 보살이다. 다른 보살상과는 달리 민머리의 스님모습이거나 머리데 두건을 쓴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좌 밑에 정덕10년3월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종 10년(1515년)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장보살상과 같이 머리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은 고려말부터 조선전기에 걸쳐서 많이 만들어졌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은제도금불좌상과 은제도금 관음보살 좌상


수종사 오층석탑에서 나온 불상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에 있는 수종사는 세조에 의해 크게 중창된 절이다. 이 곳에 있는 오층석탑을 1957년에 해체했는데, 여기서 수많은 금동불이 발견되었다. 오층석탑 1층 탑신에서 발견된 금동 불감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반가사유상, 두건을 쓴 지장보살로 구성된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발원문에 의하면, 이 삼존불은 성종의 후궁인 명빈김씨가 1459년에서 1493년 사이에 발원해 만든 것이다. 이 밖에도 이 탑에서는 인조 6년 정의대왕대비(인목대비)가 발원한 불.보살상23구가 발견되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금동 삼세불 좌상, 14~15세기
심세불은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로 이루어진 삼존상을 말한다. 보통은 과거불인 연등불, 현재불인 석가모니불, 미래불인 미륵불로 구성되는데 이 불상과 같이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불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위.아래 연꽃이 서로 붙어 있는 대좌와 머리 중앙에 뽀족하게 솟아 오른 계주에서 고려말에 유행했던 라마 불상 양식의 영향이 느껴진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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