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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규장각, 역대 국왕의 어필과 한글 자료들

younghwan 2011. 2. 2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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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규장각 설립의 원래 목적은 역대왕들의 글과 글씨를 모아서 보관하고 이를 책자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규장각에서도 조선시대 역대 왕들과 왕실인사 등의 글씨를 소장하고 있는데, 직접 쓴 글씨도 있고, 목판 등으로 간행된 경우도 있다. 현재 규장각에는 선조가 그린 난초그림과 숙종, 영조이 글씨가 전시되어 있는데, 교육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상당한 명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영조의 글씨는 여러 드라마나 초상화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던 불같은 성격을 잘 보여주는 힘있는 글씨체이다.

또한 규장각에서는 한글로 작성된 상당수의 고문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국왕을 비롯한 집권세력의 뜻을 일반백성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초기의 <용비어천가> 같은 문서와 후대 궁궐 여자들을 위해 작성했던 왕실 인사들의 한글 문서들이 있다. 조선후기에는 국왕이 한글로 편지를 쓸 정도로 한글이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는 자료들이다.


선묘어필. 선조가 그린 난초그림이다. 상당히 잘 그려진 그림으로 보인다.

조선의 14대 국왕 선조의 친필과 그림을 모아 편찬한 어필첩, 선조가 중국 문인들의 한시를 쓴 친필과 묵죽도, 묵란도 그림 2점을 모아 1630년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본첩에는 한시와 경구 등 20여 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한시는 대부분이 당시이며, 경구로는 '효제충신정직','개과천선징분질욕' 등이 대자로 쓰여 있다. 대부분의 글씨는 해서로 썼으나 끝에 실린 칠언절구 1수는 초서로 썼다. 대나무와 난초를 그린 그림을 판각한 묵죽도와 묵란도도 실려 있다. <출처:규장각>


숙종대왕어필. 여자를 좋아했던(?) 숙종의 성격을 잘 나타나 있는 것 같다. 매우 단정한 글씨체이다.

숙종이 공주, 왕자, 신하들에게 내린 친필 시문을 음각하여 간행한 어필첩, 19대 국왕인 숙종은 자가 명보, 능호가 명릉으로 시문과 서법에 능하였다. 간행시기는 미상이다. 본첩에는 숙종이 숙명공주, 연잉군, 연령군, 김수항, 남구만, 임창군, 낭원군 등에게 내린 시문이 실려 있다. <출처:규장각>


영조어필.
영조의 초상화에 나타난 그의 얼굴에서 느끼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한 힘있는 글씨체이다. 

영조가 쓴 시구를 1776년 7월에 찍어 이최중에게 하사한 어필첩, 영조는 21대 국왕으로 이름이 금, 자가 광숙, 호가 양성헌이며, 조선의 사회 여러 분야를 중흥시켰다. 앞부분에 정조가 1776년 7월 30일 봉조하 이최중에게 영조의 어필을 하사한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영조의 어필은 4언과 5언의 시구로 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대자의 행서로 쓰여져 있다. 수록한 면은 상서로운 눈이 내려 풍년을 알리니 내년 농사가 잘 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글 가운데 "서설' 두 글자이다. <출처:규장각>


동궁보목, 장헌세자(사도세자)가 8세때 쓴 글씨라고 하는데, 고정관념이 있어서 그런지 웬지 슬퍼보이는 느낌이다. 

정헌세자가 8세 때인 1742년 12월 11일 장악원 첨정 이익준의 아들 갑득에게 써준 글씨를 모아 엮은 필첩. 이익준은 1746년에 이를 첩자로 만들었는데, 표제는 "동궁보묵"이라 되어 있다. 장헌세자는 사도세자라고도 불리는데, 2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62년 뒤주에 갇혀 불행하게 죽었고, 후에 장조로 추존되었다. 본 첩에는 "군신유의 군의신충 군신지분의" 등 13자가 대자의 해서로 쓰여져 있고, 뒤에 이익준의 발문이 실려 있다. <출처:규장각>


사임당필적

신사임당이 초서로 쓴 칠언절구의 당시 6수를 1796년에 윤종의가 목판에 새겨 간행한 필첩, 신사임당은 본관이 평산으로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데, 서화와 시문 등에 능하였다. 신사임당의 필적 6장, 윤종의의 발문 2장이 실려 있다. 대숙륜 2수, 사공서, 유장경, 이백, 황보염의 시가 각각 1수씩 실려 있다. 윤종의는 발문에서 사임당의 필적은 병산최씨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는데, 너무 영락하여 다시 판각한다고 하였다. <출처:규장각>


열성어필, 1725년

조선시대 역대 국왕들의 친필을 모아 목판으로 간행한 필첩. 172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태조, 문종, 세조, 성종, 인종, 명종, 선조, 원종,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등 13왕의 친필이 수록되어 있다.
전시면은 태조의 어필로서, 태조가 1401년에 쓴 허여문기이다. 태조가 김해 관기 출신의 첩 칠점선에게서 난 딸 며치를 위해 집터를 구입하여 가옥을 지어 주도록 명한 내용으로, 지어줄 집의 구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문서 끝에 태조의 수결이 있다. 국왕이 지은 문서이지만 이두식 표현이 많이 등장하며 글의 형식도 일반 민간문서의 체제를 따르고 있다. 원문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보물 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규장각>

규장각 소장 서예자료
규장각에는 역대 국왕의 어필과 명필로 알려진 문인들의 필첩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은 중국과 조선의 문인들이 지은 시문을 옮겨 쓴 것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자신이 지은 시문을 직접 쓴 경우도 적지 않게 실려 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도 실려 있어 선인들의 도타운 정을 짐작하게도 한다. 그리고 필첩은 유묵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고, 목판 등으로 간행된 경우도 있다. 특히 친필 글씨는 유일본을 그 가치가 매우 큰데 그들의 묵향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다. 또한 오래 보존하고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간행한 목판본 글씨도 선인들의 필체를 직접 접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규장각에 소장된 필첩 중에서 역대 국왕의 글씨로는 선조, 효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등의 것이 남아 있다. 그리고 왕세자나 왕비 등 왕실 관련 인물이 쓴 필적도 남아 있다. 사도세자가 8세때에 쓴 글씨, 인목왕후와 순원왕후가 쓴 한글 편지와 시문, 흥선대원군이 쓴 편지와 일기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위의 필적들은 국왕과 왕비 등이 직접 쓴 것으로 그들의 필적과 정신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역대 명필들의 필첩으로 사육신, 김인후, 한호, 신사임당, 윤순, 이광사, 신위, 이영익 등의 것이 주목된다. 이들은 우리나라 서예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들로 이들의 필적을 통하여 우리나라 서예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다. 특히 신위의 필첩에는 시와 함꼐 매화 난초 그림이 실려 있어 옛 문인의 아취를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출처:규장각>


인목왕후 필적

인목왕후의 필적을 모아 엮은 필첩. 인목왕후는 김제남의 딸로 선조의 계비가 되어 1602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본 첩에는 1603년에 쓴 한글 편지, 당나라 왕발의 <등왕각서> 일부, 육조 도잠의 <사시>, 저자 미상의 칠언율시 등 4편의 시문이 실려 있다. 한글편지는 1603년 11월19일에 쓴 병문안 편지이다. <출처:규장각>


익종간첩.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그의 누이에게 쓴 편지이다. 누이를 위해서 한시를 일일이 한글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의 누이에 대한 정을 느낄 수 있다. 효명세자는 그의 아버지인 순조를 위해 창덕궁 후원에 사대부 가옥형태의 건물인
연경당을 짓고, 연경당 앞의 소박한 공부방인 의두합에서 사색을 즐기던 다정다감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가 누이인 명온공주 등에게 보낸 시문과 이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19세기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2첩으로 구성되어 있다. <직금도>는 누이에게 보이기 위하여 그림으로 된 시를 한글로 적어 보낸 것이다. 이밖에 누이가 익종에게 보낸 편지와 시, 이에 대한 익종의 답과 시를 나중에 비낀 것이 있다. 누이에게 보낸 편지와 한시는 한글로만 되어 있어서 여성의 전형적인 문자 생활을 잘 보여준다. 누이에게 한시를 보내면서 한글과 음과 뜻을 풀이한 것도 있다. <출처:규장각>

규장각 소장 한글자료
규장각에 소장된 고문헌 중 상당수는 한글로 작성되어 있다. 세종이 한글, 즉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글자 그대로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중요한 정치적 사건에 대한 통치자의 뜻을 만백성에게 알리고자 하는 의도로 한그로 번역된 책이 편찬되었다. <용비어천가>나 <윤음언해>와 같이 왕조의 정통성이나 국왕의 말씀을 담은 책이 한글로 제작된 것이 이러한 목적에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글은 한문을 교육하기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한문이나 한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한글번역본이 필요했다. 이와 함께 학습이 용이한 한글은 창제 초기부터 여성의 문자생활을 위한 용도가 중요하였다. 이러한 관례로 인해 조선초기부터 여성의 교화를 위해 한글로 번역한 서적이 편찬되었으며 소해왕후의 <내훈>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한글이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된 후에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글로 된 문학작품이 널리 읽혔고, 조선후기에는 여성을 주된 독자로 한 한글소설이 유행하였다. 19세기 후반 갑오개혁으로 한글은 국문으로 불리며 국가의 공식적 문자로 승인되었고, 국가에서는 한글을 본격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교재를 발행하였다. <출처:규장각>


용비어천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용비어천가. 이 책자는 후대인 17세기 새로 만들어 태백산 사고에 보관하던 것이라고 한다.

조선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지은 악장이다. 1447년에 처음 간행된 원간본의 후쇄본과 1612년에 다시 인쇄하여 사고에 내린 중간본 등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 있고 주석은 한문으로만 되어 있다. 한글 창제 초기의 일반적이 표기방식이다. 전시된 책은 1612년에 증간하여 태백산 사고에 내사한 것이다. <출처:규장각>


내훈.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엮은 여성들을 위한 지침서이다.

성종의 어머니로 흔히 인수대비라 불리는 소혜왕후 한씨가 중국 역대의 교화서에서 부녀자의 훈육에 필요한 부분을 뽑아 언해한 책이다. 1475년 간행한 것을 1611년 훈련도감자로 3건 3책으로 증간하였다. 한글로 토를 달아 원문을 제시하고 이어 언해문을 실었다. 이후 여성을 위한 책은 모두 순한글로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출처:규장각>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 경. 한글 보급에 많은 공헌을 한 세조가 간행한 한글이 들어간 불경이다.

인도의 승려 불타다라가 693년 백마사에서 간행했다고 알려졌으나 7세기말에 중국에서 만든 위경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석존과 문수보살 등 12보살 사이의 문답을 통해 대원각의 신묘한 이치와 그 관행을 설명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각경>이라 줄여 불린다.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목판본 <원각경>언해본과 달리 본문의 언해가 없고 한글 구결만 수록되어 있다. 1465년에 원각사를 준공한 후 이책을 간행하기 위해 주조한 을유자로 찍었으며 구결을 위한 한글한자도 함께 만들었다. 한 면에 한문 대.중.소자, 한글 중.소자 등 다섯 종류의 활자가 사용되었다.


불성대보부모은중경. 정조의 명으로 화산
용주사에서 발간한 불경으로 부모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당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인사들이 이 불경을 보고 들으면서 상당히 긴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부모 은혜에 대한 소중함과 보답의 도리를 담은 불전인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을 언해한 책이다. 유교사회인 조선시대에 효를 강조하는 시대상과 맞물려 왕실은 물론 사찰과 민간에 의해 간행.유포되었고 시기, 지역별로 언해본으로 많이 간행되 당시 언어생활에 대한 이해에도 도움이 된다. 각 장에 도판이 있고 아래 좌우에 한문과 언해가 나란히 실려 있다. 전시된 책은 1796년에 수원 화산의 용주사에서 간행된 것이다.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 곁에 능사로서 용주사를 창건하였는데, 이 책의 간행도 정조의 부친에 대한 효심의 발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규장각>


선원계보기략

조선 왕실의 족보의 하나로서 여러 국왕의 이름과 계보, 비빈의 책봉, 왕세자.왕세손의 탄생을 주로 기록한 책이다. 1681년에 처음으로 <선원계보기략>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여 일정한 체제를 유지한 채로 새 국왕이 즉위하거나 존호를 받는 등의 사유가 있을 때마다 증보.개간했는데, 1900년에 이르기까지 220년간 총 104회에 걸쳐 간행되었다.전시된 책은 1783년에 보간된 판본으로 <정조어제서>와 <범례>, <선원선계>, <열성계서지도>, <선원세계>, <열성팔고조도>와 역대 국왕의 자손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규장각>


안동권씨 성화보(복제). 정조사후 권문세가들에 의한 세도정치 기간동안 권문세가들이 자신들의 족보를 규장각에 보관하게 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족보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인 안동권씨족보이다. 규장각에는 여러 권문세가들의 족보를 보관하고 있는데, 당시 그들의 욕심과 자만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1476년에 간행된 안동권씨의 족보이다. 우찬성 권제가 만든 가첩을 그 아들 권람과 생질 서거정 등이 증보하여 완성한 것을 경상감사 윤호가 안동부에서 간행하였다. 현존하는 최초의 간행본 족보이며 전시된 책은 1476년 당시의 판각본이다. 이 족보는 약 9,000명이 실려 있는데 안동권씨의 부계 자손 뿐 아니라 딸을 통해 이어지는 여러 성씨의 외손까지도 무제한 수록하고 있고, 간행당시까지 조선왕조가 배출한 문과급제자의 절반 이상을 수록하고 있어서, 조선전기 양반층의 족보 형태와 혈연 관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규장각>

규장각 소장 족보자료
어제와 어필을 주로 보관하는 왕실도서관에서 유래한 규장각은 <선원록>,<선원계보기략>,<선원속보> 등 4,400여 책에 달하는 왕실 족보도 소장하고 있다. 왕실족보는 국왕의 친인척에 관한 계보와 인적사항을 조사.기록한 것으로서 종부시라는 관청에서 편찬하였고, 국가의 족보로 인식되어 사고에 보관하여 소중하게 관리하였다. 규장각에는 100여종의 사대부 족보도 소장되어 있는데, 조선후기 경화사족을 배출한 명문 성관이 중앙정계를 장악해 가던 18~19세기 당대에 편찬한 판본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간행본 족보인 <안동권씨 성화보>의 초간 당시 판본도 소장되어 있는데, 외손을 제한 없이 수록하는 조선전기 족보의 편집 방식과 혈연 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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