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한강유역에서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밀려서 도읍을 웅진으로 옮긴 시기는 약 70년(475~538) 정도이며, 송산리 고분군에서 무령왕릉이 1971년 송산리고분군에서 발굴되기 이전까지는 공산성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유물이 없었다. 송산리고분군 중 하나인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고분 중에서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진 왕릉으로 관꾸미개를 비롯하여 약 4,600여점에 이르는 많은 유물이 이 왕릉 한곳에서 출토되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왕릉 중 보기 드물게 벽돌로 쌓아서 만든 무덤으로 중국 남조와의 문화적 교류를 잘 보여주는 무덤이다. 비슷한 형태의 무덤이 중국 남조의 귀족층 무덤으로 여러 곳이 발굴되고 있다고 한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대부분은 현재 공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유물 중 금제관꾸미개(왕비)와 금목걸이는 특별히 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석수, 왕과 왕비의 매지권, 환두대도, 금제관장식과 귀걸이 등 수많은 장신구들이 있으며,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제품, 자기류 등 당시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다양한 부장품들이 있다. 무령왕릉 출토 금제관꾸미개는 90년대 능산리사지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되기 전까지는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이었다.
백제문화의 중흥, 웅진기
웅진기는 문주왕이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에서 성왕이 사비로 도읍한 538년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 웅진으로의 천도는 고구려의 침략에 의한 것이었으나 빠른 시일에 왕도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부터 다져진 정치적 기반 때문이다. 도성은 금강과 맞닿아 있는 공산성을 중심으로 배치하여 방어성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하였다. 국가를 재건하고 고구려의 남진에 대처하기 위하여 노력한 백제는 신라와 혼인을 통해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 왕조 및 왜와의 관계도 확고히 하였다. 왕권과 귀족의 세력균형을 이루어 안정을 되찾은 무령왕대에는 중국 남조의 양에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강화하였다. 웅진기는 한성기의 문화를 계승하면서 중국의 문물을 수용하여 이를 다시 신라와 가야 그리고 왜에 전하였으며, 백제가 다시 국력을 회복하고 중흥의 초석을 다진 시기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웅진기를 대표하는 25대왕 무령왕(재위501~523년)의 무덤으로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위치한다. 이 무덤은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진 것이다. 무덤은 벽돌로 쌓아 만든 벽돌무덤으로 내부에서는 묘지석을 비롯하여 4,600여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중국 남조와 관련된 것이나 신라.왜와의 교류관계도 살펴 볼 수 있는 유물도 있어 백제문화의 개방성과 국제성을 잘 보여준다. 관 꾸미개나 귀걸이 등은 백제 고유의 특징을 지닌 것으로 백제 문화의 독창성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금제 관꾸미개(왕비), 국보 155호, 6세기. 왕비의 관꾸미개는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를 맞새김 하였는데, 대칭형의 구도로 되어 있으며 날개는 달려 있지 않다. 문헌 기록이나 출토 위치 등으로 미루어 검은 비단으로 만든 관모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파악되고 있다. 원본이 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금제 관꾸미개(왕), 복제, 국보 154호, 6세기. 원본은 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금 귀걸이(복제품)
꽃모양 금 꾸미개
금박구슬 금.유리
금목걸이 국보 158호, 목걸이
팔찌
꽃모양꾸미개
공주 공산성 서쪽편 송산에 위치한 웅진기 백제의 왕릉인 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 입구
무령왕릉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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