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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사찰

고성 금강산 건봉사, 조선시대 전국 4대 사찰

younghwan 2011. 5. 27.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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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 건봉사는 휴전선 부근 금강산 자락에 위치한 사찰로 조선시대에는 전국 4대 사찰의 하나로 세자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원찰로 지정한 사찰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때 아도화상이 처음 창건했다고 하며,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실제로는 고려말과 조선초에 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끼친 무학대사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나옹선사가 크게 중수하면서 건봉사라고 개명하면서 전국적인 규모의 사찰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시대 선비들이나 지도층 인사들 사이에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금강산 유람길에 위치하고 있고, 왕실에서 후원을 받던 양주 회암사와 연관이 되고 있어서 왕실 인사들이 많이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세조는 이 곳을 친히 방문하여 왕실관 관련된 원찰로 삼고 전답 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이 곳 건봉사에서 승병을 일으키고 많은 공을 세워서 조선후기에 그 규모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건봉사는 한때 건물의 규모가 3,183칸에 이르는 등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던 사찰이었으며, 간성군 관아에서 건봉사에 이르는 길에 육송정 홍교를 놓는 등 그 위상이 상당히 높았던 사찰이다. 일제강점기까지 금강산, 설악산 일대를 관장하던 전국 31본산의 하나였지만, 한국 전쟁으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고, 휴전선 부근에 위치했던 까닭에 폐사지처럼 되었다가 최근에 대웅전 영역을 중심으로 복원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 전쟁전 건봉사는 총642칸과 보리암등 124칸의 부속암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건봉사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은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적멸보궁을 두고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금강산 건봉사 대웅전 영역. 원래의 건봉사 건물 전체를 복원하지는 못하고 대웅전이 있던 영역의 건물들만 복원되었다. 복원된 대웅전 입구의 강당은 앞면 7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로 옛 건봉사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국에 있는 웬만한 사찰에서는 이렇게 큰 규모의 강당을 볼 수 없다.


옛 건봉사 전각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인 불이문1920년에 건립된 것으로  일반적인 불이문이나 천왕문과는 달리 일주문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돌기둥에 사찰을 수호하는 의미로 금강저가 음각되어 있어서 사천왕이나 금강역사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홍예가 아름다운 건봉사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가는 다리인 보물 1336호인 능파교이다. 금강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을 건너는 다리로 아치의 규모가 상당히 크고 안정감있게 만들어진 아름다운 다리이다. 다리의 중앙에 잘 다듬은 석재로 아치를 만들고 그 좌우에 장대석을 축조하여 다리를 만들고 있다.


건봉다 대웅전 영역 입구에 있는 강당이다. 앞면 7칸, 옆면 2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강당이다. 비록 복원된 건물이지만 옛 건봉사의 규모를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지금은 판문으로 닫혀 있지만, 문이 열면 시원한 계곡바람이 들어오는 좋은 휴식공간이다.


'금강산건봉사'라 적혀 있는 현판


강당 2 층는 건봉사를 찾은 신도들이 잠시 앉아서 쉬는 공간이다.


건봉사 대웅전이 있는 경내. 최근에 복원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건봉사 대웅전. 앞면 3칸에 웅장한 팔작지붕을 올려 놓은 불전이다.


대웅전 동쪽편에 있는 명부전.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앞면 3칸규모의 불전이다.


대웅전 서쪽편에는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불전건물을 볼 수 있다. 현판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경내 동쪽편에 있는 요사채


경내 서쪽편 요사채


대웅전 아래쪽에 있는 요사채로 보이는 건물




건봉사는 대웅전 영역만 제대로 복원되어 있고, 옛 극락전 영역은 아직 복원되지 않고 있다. 옛 극락전 영역 입구에 복원되어 있는 범종각. 일반적인 사찰의 범종각에 비해서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봉사 뒷편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는 적멸보궁으로 올라가늘 길.


일반적인 사찰에서는 민간신앙과 관련된 불전으로 삼성각을 두거나, 산중 사찰인 경우는 산신각만 두는 경우가 많은데 건봉사는 전국 4대 사찰의 하나일 정도로 큰 규모의 사찰이었기 때문에 독성각, 산신각, 칠성각을 별도로 두고 있다.


1칸짜리로 아담하게 지은 산신각.


산신각에서 내려다 보이는 대웅전 영역


건봉사 뒷쪽편에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되돌려 받은 통도사에 있었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


건봉사 적멸보궁


적멸보궁 내부에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사리탑과 등동탑비가 있다.


적멸보궁 올라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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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건봉사
건봉사는 전국 4대사찰의 하나로 만해 한용운 선생의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지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아도화상이 원각사를 창건하였고, 그 후 도선국사가 중수한 뒤 서봉사라 하였으며, 고려 말엽 나옹화상이 중수하고 건봉사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라 경덕왕 17년(578) 발징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 등과 염물만일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염불만일회의 효기가 되었으며, 현존하는 "등동탑비"는 서기 782년 염불만일회에 참가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 하였다고 전하고 그 부도를 모신것이다. 서기 1456년 세조임금이 건봉사를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고, 전답과 친필 동참문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서기 1878년 4월 3일 큰 불로 인해 3,183칸이 전소되었으나, 여러차례 복원작업을 통하여 서기 1911년에 9개 말사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었다.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에 사명대사가 의승병을 기병한 호국도량이었으며, 당시 통도사에 있던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왜병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사명대사가 사행하였다가 다시 찾아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또한 구한말인 서기 1906년 "봉명학원"을 설립하여 개화사상과 신문화를 받아들인 관동지방 교육의 도장이 되었으나, 그후 일제에 의해 강제폐교 되었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 중 휴전 직전까지 2년여에 걸쳐 아군 5,8,9사단 및 미군 제10군단과 공산군 5개 사단이 16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건봉산 전투 전적지이며, 이때 건봉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나, 서기 1994년부터 대웅전, 팔상전, 염불만일원, 종각, 사지 등이 각각 복원 되었고, 지금도 사찰복원이 계속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전쟁 전 건봉사는 총 642칸과 보리암 등 124칸의 18개 부속암이 있었다. <출처:건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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