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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원주 강원감영지(사적439호), 강원 관찰사가 근무했던 감영 옛터

younghwan 2011. 6. 1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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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청이다. 조선왕조는 1395년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여 강원도라 하고 강원도의 수부를 원주로 정하여 강원감영을 설치하였다. 조선초에 세웠던 강원 감영의 건물들은 임진왜란때 대부분 소실되었고, 1634년 원주목사가 재건하기 시작한 후 여러 건물들이 계속 중축대기 시작하여, 강원 감영이 없어진 1895년에는 55동에 이르는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감영에 설치된 건물 중에서는 궐패를 모신 객사가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고, 관찰사가 근무하던 선화당, 숙소인 내아를 중심으로 감영에 소속된 인사들이 근무하는 비장청 등과 호적 등 서류를 보관하던 호적고를 비롯한 창고를이 감영내에 설치되었다. 조선전기까지는 관찰사는 관할지역내를 돌아다니면서 근무하는 순력이 중심이어서 감영 건물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조선후기에는 지방을 통치하는 상설기관의 성격을 갖게 됨에 따라 많은 건물들이 필요하였다.

 조선시대 전국 팔도에 설치된 감영들은 오늘날 대부분 대도시를 이루고 있기때문에 그 흔적을 찾아 보기는 힘들고 대부분은 도심 상가지역이나 관공서 지역으로 바뀌었다. 현재 전국적으로 남아 있는 감영 건물을 살펴보면 공주.대구.원주에 관찰사가 근무하던 선화당과 출입문인 포정루가 남아 있고, 전주에는 객사 건물이 남아 있다. 내아는 원주감영에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또한 원래의 모습을 찾아 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원주시 일산동 도심에 복원되어 있는 강원감영지는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되어 있는 지역으로 선화당, 포정루, 내아 건물이 남아 있으며 사적 4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작은 도성 감영
강원감영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포정루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먼저 감영 외곽에 세워져 있는 4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방위에 따라 동.서.남.북에 세워져 있는 4대문은 각각 수명문(동문), 취적문(서문), 진남문(남문), 공북문(북문)이라 했는데, 이 4대문의 경계가 곧 강원감영에 들어서는 첫번째 관문이 되고, 여기를 지나 관찰사가 일하는 감영의 정문인 포정루에 도착하게 됩니다. '포정'이란 원래 중국 명나라에서 각 지방을 통치하는 기구였던 포정사에서 연유한 말이지만 여기에 깃들어 있는 의미는 관찰사가 강원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좋은 일을 하고, 또 한 해의 농사가 어려워지면 도와주는 등 뭇 사람들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포정루 건립과 함께 17세기 후반부터 강원감영에는 선화당과 관풍각, 감사를 보좌하는 사람들의 집무실, 창고들이 설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감영의 규모는 점차 늘어나 1750년엔 31동 509칸, 1870년에는 33동 454칸, 1875년에는 43동 459칸, 1891년에는 55동 670칸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감영 내에 지어진 많은 건물은 당.사.각.누.청.방.문.창.고 등의 명칭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왕을 상징하는 전궐패를 모시고, 손님이 묵었던 객사, 관찰사의 주거공간으로 사용되었던 내아, 후원에 있던 봉래각과 부평각, 관풍각, 환선정, 군사시설인 중영, 화약고, 군기고, 군향고 등과 죄인을 매질하거나 잡아오던 나장이 일하는 군뇌방, 곡식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근무하던 사창이 있었습니다. <출처:원주시청>




강원감영 사료관에 전시되어 있는 강원 감영의 옛모습이다. 총 56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면, 동쪽편에는 객사 건물이 있고, 서쪽편에 관찰사가 근무하던 선화당이 있다. 감영에는 4대문이 있었고, 관찰사가 근무하던 선화당 입구에는 별도의 출입문인 포정루가 자리잡고 있다.

<정선총쇄록>의 강원감영
<정선총쇄록>은 오횡묵이 1887년 3월부터 1888년 8월까지 강원도 정선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쓴 일기입니다. 오횡묵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성규이며 호는 채원입니다. 19세기 말 정선군수.자인현감.함안군수.고성부사.지도군수.여수군수 등 각 지방을 다스리는 수령을 두루 거쳤는데, 그는 재직할 당시 중한 일과 여행을 다니면서 보고 들은 일들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오횡묵은 1887년 윤4월 15일 이틀간 원주의 강원감영을 방문했는데 당시 강원감영의 규모와 여러 거물들에 대한 감상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오횡묵은 윤4월 15일 원주의 안창을 거쳐 만종에 이르렀고, 북문을 통해 감영에 들어와서 첫 인상을 한편의 의 시로 남겼습니다. 오횡묵은 감영의 거처에 짐을 풀어놓은 뒤 먼저 객사에 들러 보고 절차를 밟았고, 포정문을 지나 선화당에서 관찰사를 만납니다. 이후 안내자를 따라 징청문으로 나와 관풍각을 지나게 됩니다. 그는 감영의 후원 공간을 거닐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시를 지었고, 중영의 담당자와 인사한 다음 감영에 소속된 여러 건물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윤4월16일 오전 그는 정선을 떠나기 전 관찰사에게 하직 인사를 한 뒤, 정오경 감영의 동문을 나와 봉천을 건너 원주를 떠나게 됩니다. <출처:원주시청>



관찰사가 근무하던 건물인 강원감영 선화당은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앞면 7칸, 옆면 4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건물은 화강석으로 다듬은 기단위에 건물을 올려놓고 있는데, 사방에 툇마루를 두지 않은 단순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 양쪽과 뒷면에는 툇간을 두고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 2칸은 관찰사가 개인적인 집무를 보던 칸막이가 있는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선화당과 후원
선화당은 관찰사가 일하던 곳으로 강원감영의 중심건물입니다. 관찰사는 이곳에서 강원도 각 지역에서 올라온 행정과 농사, 세금을 거두거나 재판을 하는 등에 대한 첩보를 상세하게 읽어보았고, 문제가 되는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선화당 뒤편 후원에는 관찰사가 휴식을 하거나 사람들과 중요한 회의를 할 때, 손님을 맞이하여 음악을 듣거나 춤을 감상하는 연회를 열었던 관풍각과 환선정, 봉래각이라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옛 선비들이 남긴 시에는 연못에 떠 있는 누각과 정자를 오가는 조각배 두척이 연못을 가로지른 다리 밑에 매여 있었는데, 감영의 아름다운 후원 풍경과 노를 저으며 아담한 누각과 정자를 드나드는 사람들 모습이 마치 신선이 사는 것처럼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수백년 전에 있었던 많은 건물들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무너지기도, 다시 세워지기도 하였고,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건물의 위치가 옮겨지기도 했습니다. 현재 강원 감영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옛 건물은 바로 포정루와 선화당입니다. <출처:원주시청>
 

강원 감영 건물 중 남아 있는 건물의 하나인 관아 출입문인 포정루이다. 조선시대 관아건물은 지역별로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관찰사가 근무하던 감영은 같은 이름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원 감영 포정루는 감영을 출입하는 첫번째 문으로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는 2층문루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감영출입문이지만 규모를 크게 하고 있지는 않다.


포정루를 들어서면 현재는 선화당과 내아, 그리고 넓은 마당이 보이는데 실제로는 담이 있었더 내삼문을 통과해야만 선화당 마당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강원감영의 출입문으로는 2번째로 중삼문.


마지막 출입문으로 징청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내삼문. 포정루는 원래부터 있던 건물을 보수한 것인데 반해서 중삼문과 내삼문은 복원한 건물로 맞배지붕를 한 3칸짜리 출입문으로 서울 사직단 정문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관찰사의 숙소인 강원감영 내아. 감영내아는 일반적인 관아 내아와는 달리 부엌이 없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사랑채도 없다는 점이다. 내아 건물 대부분은 중요 물품이라 서류 등을 보관하던 창고 건물이며, 관찰사가 머무는 공간은 작은 툇마루를 두고 있는 방이 2개뿐인 3칸짜리 건물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감영 내아 건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조선시대 관찰사가 머물던 감영 내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다.


강원감영 사료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행각. 행각은 궁궐의 중심건물인 정당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보조 건물을 말한다. 강원감영도에는 선화당 왼편으로 세 채의 건물이 확인되는데 북쪽으로부터 차례로 행각, 보선고, 공고가 자리해 있다.


행각 건물 옆쪽에 있는 공방고지

조선시대 강원감영에는 행정업무를 수행하던 이방.호방.예방.공방 및 사법기관의 역할을 하던 형방, 그리고 군사업무를 관장했던 병방의 6방이 있었다. 공방은 공장과 건축물을 신설하거나 영선의 업무 및 공용지를 운영하는 역할을 했다. 강원감영터를 발굴할 당시 확인된 공방고지는 공방에서 필요한 도구를 마들어 보관했던 창고로 추정되는데, 당시 감영은 원주목과 같은 관아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 창고는 원주목과 함께 사용했던 공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출처:원주시청>


관찰사와 목사 선정비

감영의 중삼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총 14기의 비석이 놓여 있다. 이 비석들은 과거 조선시대 강원감영과 원주목 관아에서 관찰사와 목사로 재직하였던 관인들이 재임 당시 강원도와 원주지역을 훌륭하게 잘 다스렸던 흔적을 생생하게 남기고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다. 한편 이 선정비는 후임자로 온 관찰사와 목사에게 하나의 모범 사례가 되기도 하였고, 그런 측면에서 선정비는 올바르게 백성을 다스리고 어루만졌던 지방관을 기리는 의미와 함께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나 목사를 경계하는 의미도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출처:원주시청>


선화당 뒷편으로는 원래 연회를 열었던 큰 누각과 연못, 정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당시에 있었던 오래된 고목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원감영 전경.

강원감영
강원감영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지방관청입니다.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서울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여덟 개의 도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8도 아래에는 더욱 작은 지역으로 오늘의 '시'나 '군'과 같은 '목'과 '군', '현'이라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각 도의 관찰사는 왕을 대신하여 자신이 담당한 지역을 책임지고 다스렸습니다.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이 곳 강원도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등과 함께 전국 팔도의 한 행정구역이며, 강원감영은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 전체를 다스렸던 관찰사가 머물던 곳입니다. 강원감영은 1665년(현종 6) 선화당이 세워지면서 많은 관리들이 일하는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하였고, 1895년 당시에는 총 57개의 건축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감영에는 관찰사가 일했던 선화당, 감영의 정문인 포정루,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 거쳐가야 했던 중삼문과 내삼문, 관찰사의 일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던 행각과 내아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출처:원주시청>


감영내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감영 남쪽으로 외각지역에 있는 원주향교. 강원감영에서 관리하던 향교이다.


행각의 형태로 만들어 놓고 있는 강원감영지 출입문.

강원도의 중심도시 원주
원주에 강원도 전체를 다스리는 강원감영이 설치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었일까요? 그 첫째로 원주는 중앙에 있는 왕의 명령이 가장 신속하게 전달되고 또 그 명령을 강원도에 속해 있는 다른 각 지방으로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기때문입니다. 둘째는 원주지역이 강원도에서 인구와 토지면적이 가장 풍부한 지역으로 도시의 규모가 그만큼 컸기 때문에 강원도 곳곳에서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기 편리한 동시에 사람과 물자가 다른 지역으로 전달되기도 편했습니다. 일례로 육로와 함께 남한강 물길이 서울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강원도 각 지방에서 거두는 대부분으 세금을 이곳 원주에서 모아 서울로 옮겼습니다. 이곳 원주에 강원감영이 자리잡은 이유는 바로 서울과 강원도를 연결하는 통로가 있었고, 또한 강원도 내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오는 물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으며, 강원도 전체를 책임진 강원감영이라는 국가기관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주지방은 강원도 행정의 중심으로 기능한 동시에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이전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습니다. 삼국시대는 물론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방행정 권역과 군사 배치 권역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원주는 고구려 때에 신라와의 대치관계속에서 국원성을 지키는 주요한 중심지역으로 평원군이라 불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5소경의 하나인 북원경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5도양계의 지방제도에서 양광도에 속하는 영군 중 하나로 수령이 파견된 원주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래전부터 국가의 지방통치제도가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도 원주가 변함없는 행정적.군사적 요지로 주목받아왔던 사실을 보여줍니다. <출처:원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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