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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산행, 제2봉 중청봉과 중청대피소 (산장)

외설악 입구인 신흥사에서 아침에 출발해서 꼬박 한나절이 걸려서 해가 질 무렵인 저녁 6시경에 해발 1,708m 주봉인 대청봉과 중청봉 사이에 위치한 중청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청봉 정상 다음날 아침에 오르기로 하고 중청대피소에서 여장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설악산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중청대피소 부근은 설악산은 변화무쌍한 날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곳이었다. 잠시 날이 밝았다 싶으면, 구름이 몰려와서 한치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다시 금새 구름이 걷히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중청대피소는 설악산 대청봉을 찾는 사람들이 꼭 찾게되는 가장 잘 알려진 대피소로 가을 행락철에는 등산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다고 하는데 여름이 끝난 9월초 초가을이라서 그런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피소 앞..

한국의 풍경 2010.09.25

의정부 수락산 입구 서계 박세당 사랑채, 조선후기 대표적인 중농주의 실학자

의정부 수락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중농주의 실학자인 서계 박세당 선생의 고택이다. 원래는 안채, 안사랑, 바깥사랑, 행랑채를 갖춘 양반가의 대 저택이었으나 한국전쟁때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 사랑채만이 남아 있다. 원래 저택의 규모가 상당히 컸었던지 지금도 여러동이 건물에서 후손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건물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2칸으로 조선후기에 유행했던 누마루가 사랑채에 붙어 있다. 사랑채의 방향은 서향으로 뒷쪽으로는 수락산을 등지고 있으며, 앞으로는 도봉산 봉우리들이 보이는 경치가 상당히 수려하고, 수락산 계곡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박세당 선생은 관직을 그만둔 뒤 이 곳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농사에 관련된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 ..

고택_정원 2010.09.25

의정부 노강서원, 노량진에서 수락산으로 옮겨온 서울에서 가까운 서원

서울에서 의정부로 들어가는 초입에 위치한 노강서원이다. 수락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한 노강서원은 숙종때 문신 박태보를 기리는 서원으로 원래 서울 노량진에 있었다가, 한국전쟁시 불타버린것을 지금의 자리에 복원한 것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은 서원으로 숙종때 국가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이다. 박태보는 숙종때 인현왕후의 폐위에 반대하다 귀향가서 돌아오는 길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곳 수락산 자락 의정부 장암동은 그의 아버지 박세당이 지은 고택이 아직 남아 있는 등 그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노강서원 입구는 수락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곳으로 등산객이 많이 찾는 등산로 입구에 있어서 그런지 계곡에 있는 많은 식당들로 인해서 산만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서원 건물은..

아산 공세곶고지, 공덕비만 남아 있는 조선시대 충청지역 조운 중심지

아산 공세리성당은 조선시대 충청지역 조운의 중심지였던 공세곶 창고를 개조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아산시 인주면에 자리한 공세곶은 지금은 평야지대에 있는 작은 언덕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해안가에 돌출된 지형이 곶이었던 곳으로 주변지역이 간척되어 농지로 변했기때문에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공세곶에는 충청지역에서 세금으로 걷어들인 곡식을 모아두었다가 배를 이용한 수운으로 서울로 운반하던 기관인 공진창이 있던 곳으로 세금을 운송하는 조운뿐만 아니라 물자가 서울로 이동하는 중요 교통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금강의 강경포구, 영산강의 영산포구 등 당시 해운의 중심지가 되었던 많은 포구처럼 이 곳 공세곶도 지금은 한적한 시골소읍처럼 보이지만 이곳에 창고가 운영되던 시절에는 조운을 담당하던 해운판관을 비롯..

조선 관아 2010.09.24

아산 공세리성당, 공세곶 언덕에 세워진 아름다운 성당

공세리성당은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언덕에 위치한 성당이다. 아산 공세리는 평택과 아산을 연결한 아산만방조제의 아산쪽 연결지점으로 지금은 평지에 솟은 작은 동산처럼 보이지만, 조선시대 세금을 걷어들이는 바닷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공세곶고가 있었던 장소로 공세리성당이 있는 곳이 바다로 튀어나온 곶이었던 곳이다. 공세리 성당에는 본당을 비롯하여 사제당.피정의 집 등의 건물이 있는데, 그 중 1897년에 지어진 사제관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본당도 192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붉은 벽돌로 지은 고딕양식의 건물로 초기에 지어진 성당건물인 명동성당, 약현동성당, 원효로성당 등과 설계와 공법에 있어서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지금은 아산만의 한적한 시골마을 성당이지만, 당시에 이 곳에 큰 규모의 성당을 ..

서울 북한산성, 북한산을 둘러싸고 있는 성

북한산성에는 지금은 고양시쪽 입구에만 일부 주민이 거주하고 있고, 남쪽의 대남문은 아주 높은 지대에 성문이 있다. 북한산성 성벽을 따라서 서울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으며, 삼국시대 한강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유용했으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군사적으로는 별로 유용성을 보여주지 못한것 같아 보인다. ☞ 북한산성 주요 유적지 1. 대남문, 청수동 암문, 문수봉, 2. 성벽을 따라 걷는 대성문, 대동문 3. 북한산 계곡에 자리잡은 중성문, 4. 진흥왕순수비가 있었던 비봉 북한산성의 남문인 대남문입니다. 문수봉 아래 구기동으로 가는 고갯길을 막고 있습니다. 멀리 비봉 근처에서 바라본 대남문 북한산 동쪽의 대동문 주위 북한산성의 정문격인 대서문의 취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계곡 한가운데 세운 중성문 북한산성이란 이름은 삼국..

구한말 풍운아 김옥균 선생 유허

옛 아산현 소재지였던 영인면소재지에는 아산향교, 아산현 동헌 아문이었던 여민루가 옛 관가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 곳에는 특이하게도 구한말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풍운아였던 김옥균 선생의 묘소가 마을 뒷동산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일본 동경의 청산외인무덤에 있었던 그의 무덤을 1914년 아산군수였던 그의 양자 김영진이 이곳으로 옮겨와 부인 유씨와 합장하였다 한다. 김옥균 선생의 무덤은 아산만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동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본과 협력하여 개화운동을 했던 까닭에 일제강점기에 그의 양자가 이 곳 아산군수를 지낸 이 곳에 그의 묘소가 있을 수 던 같다. 김옥균 선생은 1894년에 천진에서 수구파 자객에게 암살당한 후 능지처참을 당했다가 갑오경장 이후에 복권되었다고 한다. 그의 사상과 실천방법이..

[오산 독산성] 세마대지, 권율장군이 흰쌀로 말을 씻어 왜군을 물리친 전설이 있는 산성

오산 독산성은 수원, 기흥, 동탄의 넓은 평야지대를 내려보고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산성이다. 북쪽으로 수원 광교산까지는 산이 거의 없는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어, 독산성에 올라서면 상당히 넓은 지역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이 곳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거점이지만, 산성내에 물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고, 그래서 임진왜란때 권율장군의 세마대 전설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독산성은 남한산성 등과 더불어 수도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산성으로 그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독산성은 산정사 부근에 성벽을 쌓은 퇴메식 산성으로 산성의 규모는 크다고 볼 수 없다. 현재 성벽을 쌓은 규모로 보면 남한강변을 지키는 적성산성이나, 온달산성과 비슷한 규모로 보이며..

보은 삼년산성(三年山城), 삼년에 걸쳐 쌓았다는 삼국시대 신라의 성

보은 읍내에 자리잡고 있는 삼년산성은 우리나라에 몇개 남지 않은 신라시대 산성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납작한 돌을 층층히 쌓아 거대한 산성을 쌓았다. 보기에도 매우 튼튼해 보이는 이 성은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할 때 교두보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조그만 돌로써 쌓은 형태로 보아서는 고구려 산성이 형식과 비슷해 보이지만 이를 개량해서 매우 튼튼하게 쌓았다. 삼년산성의 성벽입니다. 일반적인 우리나라의 성벽과는 달리 조그만 돌로써 매우 촘촘하게 쌓았습니다.성문은 남아 있지 않고 출입구만 있습니다. 성벽의 두께가 매우 두꺼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년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성이라서 삼국이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매우 중요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튼튼하게 성벽을 쌓았습니다. 반면 고려시대 이후에는 전..

단양 적성산성, 남한강변 죽령길을 지키는 신라의 산성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 있는 비석 중 하나인 단양 신라적성비가 있는 적성산성이다. 조령과 더불어 영남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중요한 통로 중의 하나인 죽령을 지키는 산성으로 남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성재산에 자리잡고 있다. 이 적성산성은 남한강 북쪽에서 쳐들어 오는 적을 제압하는 목적으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에게 유용했던 산성으로 보인다. 대부분 성벽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라 하며, 성을 쌓은 방법과 형태를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 비슷한 신라계 산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단양 적성산성 정상 부근. 이 성벽위에 서면 발아래로 남한강이 흘러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적성산성에서 내려다 본 남한강 단양 적성산성 성벽위에는 흙이 깔려있지 않다. 단양 적성산성 내부 성벽적성산성 성문. 남한강 방향으로 성문이 있..

여주 파사산성, 신라 파사왕이 쌓은 남한강변을 지키는 산성

우리나라 역사에서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교통로 중의 하나였던 남한강 수운을 지키는 여러 산성중에서 하나인 여주 파사산성이다. 이 성은 삼국시대 신라 파사왕때 쌓은 산성으로 당시 고구려와의 투쟁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산성이다. 그 후로도 한강 수운을 지키기 위해서 이 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강에 있는 많은 나루터중에 하나인 이포나루를 지키는 이 성은 조선시대 수도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성들 중의 하나였지만, 이 곳 주민들은 이 성을 쌓고 유지하는 데 비협조적인 것으로 여러 기록들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이 산성의 형세를 보면 북쪽은 산악지대이고 남쪽은 여주와 이천의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 파사산성을 쌓은 파사왕의 의도에서 알 수 있듯이 북쪽으로부터의 침입을 막고자 하..

파주 중성산 칠중성(七重城), 나.당 전쟁과 한국전쟁 격전의 현장

파주 임진강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칠중성(七重城)입니다. 워낙 격전이 많았던 곳이고, 특히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던 파주 감악산 인근에서 가장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던 곳이어 과거의 성벽과 시설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한국전쟁의 연장선으로 많은 참호들과 군사시설이 있는 곳입니다. 칠중성이 있는 이 곳은 남북한 세력이 부딪히는 임진강 중류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의 투쟁, 고구려와 신라의 투쟁, 나.당 전쟁과 최근의 한국전쟁의 격전장입니다. 그래서 부근에 고구려성과 백제토성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칠중성이 있는 중성산 정상에 올라서면 북쪽 임진강 방향을 막힌 산이 없어서 조그만 움직임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전략적 중요성을 한눈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서울 아차산성, 백제 수도 위례성이 내려다 보이는 산성

서울의 동쪽 경계인 지금의 워커힐 호텔이 있는 뒷산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이다.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한눈에 내려볼 수 있는 아차산에 쌓은 산성이다. 백제가 수도 위례성을 방어하기 위해 처음 쌓았으며, 이때는 토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구려가 아차산성을 점령하고 이 일대에 군사시설인 보루를 건설함으로써 백제 위례성에서 물러나 공주지역으로 수도를 옮길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성곽은 중간크기 돌을 촘촘하게 쌓고 있는데, 고구려 산성축조법의 영향을 받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쌓은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아차산성에서 백제 개로왕이 전사하였다고 하며,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이후 고구려의 온달장군 또한 이곳에서 전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아차산성에서 거의 유일하게 산성임을 눈으로..

단양 온달산성, 온달장군 전사한 장소라는 전설이 남아있는 곳

온달산성은 단양에서 남한강을 따라서 상류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소백산자락 아래 남한강변 성산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이다. 삼국시대에서 신라 전성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고구려와 신라 간에 힘겨루기가 치열하게 있었던 장소로 고구려 온달장군이 전사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산성의 이름은 온달산성으로 고구려 산성으로 여겨지는 곳이지만, 산성이 위치한 장소가 북쪽으로부터의 적을 제압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아서 신라의 산성으로 여겨진다. 성을 쌓은 방법을 보면 작은 돌로서 촘촘하게 쌓은 것이 아차산성 등 고구려 산성과 비슷하기도 하며, 신라가 쌓은 보은 삼년산성과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고구려, 신라 간에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을 것 같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곳 온달산성에 올라가면 남한강..

충주 장미산성(忠州薔薇山城), 남한강이 굽어보이는 삼국시대 고구려 산성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간 분쟁이 많았던 지역인 충주 인근 남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장미산성입니다. 고구려와 신라가 세력권의 표시로 만들어 놓은 중원고구려비와 중앙탑이 있는 곳에서 자동차로 남한강변을 따라서 하류로 10여분 내려오면 있는 남한강 서쪽편 장미산에 장미산성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장미산성 중앙인 장미산 정상에 올라서면 남한강 상류쪽 충주 일대가 한눈에 들어와서 이 장미산성이 당시 국방상의 중요한 요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장미산성 성벽의 일부는 온전하게 남아있고 많은 부분은 허물어져 있지만 산성 자체는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충주 남한강변 중원고구려비와 중앙탑이 있는 지역에서 남한강 하류쪽로 도로를 따라서 자동차로 10여분 내려오면 남한강 서쪽편에 있는 나지막한 장미산이 있는 삼국시대 산..

연천 당포성, 임진강 나루를 지키는 고구려성

연천 당포성은 연천과 파주 사이를 가르면서 흐르는 임진강변에 있는 고구려 성 중의 하나이다. 4~5세기 무렵 고구려가 남하함에 따라 백제와의 전선이 형성되었으며, 그후 신라 진흥왕이 한강을 장악하면서 자연스럽게 신라와의 국경선이 되었던 지역이다. 임진강을 따라서 북단에는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 고구려의 요새들이 발굴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백제의 육계토성, 오두산성, 신라의 칠중성 등이 자리잡고 있다. 수백년동안 고구려와 백제 또는 신라와의 접전이 일어났던 국경지대 역할을 했으며, 지금도 남북의 휴전선이 이 임진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당포성을 보면 산성축조에 있어서 고구려인의 뛰어난 점을 느낄 수 있는데, 고구려 산성을 보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소수의 인원으로 방어할 수 있는 산..

부여 성흥산성 (가림성,사적4호), 백제수도 사비성을 지키던 주요 산성

부여 성흥산성은 해와 달이 뜨는 풍경이 아름다운 아름다운 장소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이 곳 성흥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부여)과 웅진(공주)을 지키는 군사전략상 아주 중요한 곳으로 부여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부여 수도인 사비성을 가로 지르는 백마강(금강) 하류쪽과 주변 논산지역의 넓은 평야를 굽어보고 있어 수도를 방어하는데 요충지이다. 성흥산성이 있는 임천면은 조선시대에는 임천군으로 현재 부여군에 속해 있던 부여현, 흥산현, 석성현보다 높은 지위의 군현으로 아마도 금강 수운을 관리하는 업무의 중요성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부여 성흥산성은 산정상을 돌과 흙으로 성벽을 빙둘러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산성의 규모는 아주 큰 편은 아니지만 적정한 수..

용인 처인성, 몽고침입때 명장 김윤후가 몽골 장군 살리타이를 사살, 몽고 침입을 물리친 곳

용인시와 남쪽 안성시, 평택시와 경계가 되는 지점에 위치한 남사저수지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처인성입니다. 전체 둘레 425m의 작은 평지성으로 성벽은 토성으로 쌓았으면 별로 높지도 않고 견고해 보이지도 않은 성입니다. 이 곳이 몽골의 고려 침입시 가장 유명한 전투인 처인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고려시대 명장 김윤후가 몽골 자군 살리타이를 사살함으로써 당시 세계 최고의 군대인 몽골 기마대를 물리친 곳입니다. 처인성의 전략적 위치는 용인 이남에서 서울방향과 연결해 주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중요해 보이기는 하지만 성벽의 규모로 보아 큰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만 역사적으로 고려가 몽골군을 격퇴한 장소로서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처인성은 용인 남사에서 서울 방향으로 들어오는 길목의 교통 ..

나주 자미산성, 고대국가 마한의 중심

나주 영산강 남쪽에서 영암 월출산까지의 넓은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 지역은 고대국가 마한의 중심지이고, 그 중심에 해발 100m도 되지 않는 낮은 야산에 자리잡고 있는 자미산성이 있다. 이 자미산성은 백제 테뫼식 산성으로 백제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산성의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자미산성은 영산강 이남 하류지역을 관장하는 곳으로 마한시대부터 후백제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과의 투쟁, 삼별초 항쟁 등 다양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이 주변 지역은 반남 박씨의 본향이기도 하다. 물론 자미산성은 지금 이름만 산성이고, 성벽이나, 성문지 같은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상태로 산성이었다는 의미만 간직하고 있다. 자미산성 입구 자미산성 오르는 길. 자미산성은 해발 100m가 되지 않는 낮은 ..

부여 부소산성

부소산성은 부여의 금강산변 낮은 야산인 부소산성에 쌓은 성을 말한다. 부소산성은 백제의 산성 형식을 보여주며 자연적인 능선을 쌓아서 산성의 형태를 만든 것으로 돌을 쌓은 흔적을 찾기는 약간 힘들다. 그렇지만 산성이 백마강을 끼고 요새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공략하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 부소산성 내 유물/유적: 1. 계백, 성충, 홍수 3명의 충신을 모신 사당: 삼충사 2. 3천궁녀가 떨어진 낙화암, 백마강 그리고 고란사 부소산 정상부근의 반월루 입니다. 부여시내와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입니다. 부소산성내에 있는 누각인 영일루 입니다. 부소산성내에 있는 숙영지인 군창지입니다. 부소산성의 성벽이었던 것 같은데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경주의 반월성이나 행주산성도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백제성인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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