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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한산성] 대동문에서 대성문까지

북한산성 중에서 성벽이 능선을 따라 가장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는 구간입니다. 정릉, 수유리 등 서울의 동쪽에서 북한산을 등반하게 되면 통과하게 되는 성문들입니다.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산성의 성벽을 느낄 수 있고 서울의 동쪽 부분의 경치를 멀리까지 감상할 수 있는 곳입니다. 북한산성 안쪽에서 본 대동문입니다. 북한산성 바깥쪽에서 본 대동문입니다. 대동문 바깥 쪽에서 본 성벽 북한산성 성벽 대동문 현판과 문루. 북한산성 성곽길. 이런 형태로 능선을 따라서 성벽이 있다. 이 성곽은 워낙 높은 능선에 있어서 쌓느라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군데군데 위치한 치. 가파른 언덕길. 능선을 따라서 이어진 북한산성 성벽, 문수봉까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성벽위서 내려다본 서울시가지 멀리 남산타워가 보인다. 대동문..

[서울 북한산성] 대남문, 청수동 암문

북한산성은 서울의 북쪽에 자리한 북한산을 둘러싸고 있는 성이다. 그래서 북한산성의 성벽들은 대부분 해발 500m이상의 능선을 따라서 쌓았고 그 중 구기동을 통해서 올라가면 문수봉 옆 고개길에 있는 대남문을 만날 수 있다. 북한산성 성문중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대남문입니다. 문수봉 바로 아래에 있는 고개에 있습니다. 성문을 통해 등산객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대남문 성문 대남문 문루와 현판 문수봉 방향으로 성벽이 계속 연결되어 있습니다. 대동문에서 대남문으로 연결된 성벽, 이 쪽 성벽이 제일 완벽하게 북한산성 성벽을 체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북한산성 성벽 대남문 성벽 위의 풍경입니다.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북한산을 감상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먼곳에서 바라본 대남문입니다 문수봉과 비봉 사..

[서울 성곽] 남산타워 오르는 길

조선시대 한양 도성을 이루는 성벽 중에서 남쪽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산 능선을 따라서 쌓은 성벽이다. 남대문에서 남산타워 오르는 길 입구까지의 도성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남산을 오르는 계단 옆으로 성벽이 남아 있다. 수도를 방어하는 중요한 성벽이지만, 남쪽 방향으로는 적의 침입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성벽이 높지고 견고하지도 않은 편이다. 아마도 도성의 상징적인 의미를 강조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산을 오르는 산책길 자체가 원래 성벽을 왕래하던 통로를 확장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남산을 오르는 산책길 입구. 길을 쌓은 축대의 모양새로 보아 원래 한양도성의 성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직터널 부근에서 끊어진 한양 도성 성벽이 다시 시작되는 지점. 남산 중턱쯤에서 남산을 오르는 계단길과 ..

[서울성곽] 남산 동쪽 장충동 일원

한양도성을 이루고 있는 성곽중 남동쪽 소문에 해당되는 광희문을 지나서 남산으로 연결된 성곽이다. 광희문에서 다시 시작된 성곽은 옥수동 방향 도로가 있는 부근에서 끊어 졌다가 장충체육관 뒷편에서 시작되어서 남산 동쪽 능선으로 연결되고 있다. 한양도성의 동쪽에 자리잡은 낙산 능선에 남아 있는 성곽과 함께 도심에서는 성곽이 꽤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성곽 안쪽에는 일반인들이 거주하는 주택이나 마을은 거의 없고 장충체육관, 신라호텔, 자유센터, 국립극장, 동국대학교 등 관변단체나 시설 등에 그 기원이 있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성곽 바깥쪽에는 일반 서민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전형적인 서울 성곽주변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 중 그 상태가 양호하게 남아 있는 장충동 일대의 서..

[서울 성곽] 이간수문과 주위 성벽 흔적, 동대문운동장에 묻혀 있던 조선시대 수문

최근에 철거된 동대문운동장은 일제가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의 성곽을 허물어서 만든 운동장으로 최근에 철거가 완료되었다. 철거과정에서 남산과 장충동에서 흘러내린 물을 성 밖으로 빼내기 위해 만든 조선시대 수문이 이간수문이 발굴되었고, 주위 서울 성곽의 성벽도 조금씩 복원해 놓고 있다. 이 곳은 조선시대 병영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의 용산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성밖 청계천으로 빼내는 조선시대 수문이 이간수문. 오랜 세월 동대문 운동장 아래 묻혀 있었던 까닭에 원형이 거대로 남아 있다. 아치형으로 만든 거대한 수문. 우리나라 석조구조물 중에서는 상당히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수문 안쪽에서 본 모습. 거대한 돌이 돌출되어 있다. 서울 성곽에서 유일한 ..

서울 동숭동 낙산공원, 한양도성의 동쪽 성벽

낙산 공원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에 있는 공원으로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에 위치해 있다.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사직터널에서 부터 인왕산 능선을 한번 타고 내려온 후에 자하문을 지나서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 능선을 타고 올라 갔다온 후 혜화동을 지나서 낙산 능선을 따라 성벽이 있다. 낙산은 한양을 구성하고 있난 4대 산 (남산,인왕산,북악산,낙산) 중에서 가장 낮은 산으로 봉우리가 형성되어 있지는 않고 평평한 능선이 이어져 있다. 정상 바로 아래까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어 산처럼 생각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학로가 있는 혜화동에서 낙산 능선을 따라서 연결된 한양도성 성벽 낙산 정상에서 성밖으로 나가는 작은 암문이 있다. 이 암문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낙산 성벽 밖에서 본 한..

한국의 풍경 2010.09.22

[서울 성곽] 혜화문, 한양도성 동소문에 해당하는 성문

사직터널에서 산능선을 따라서 인왕산을 거쳐 북악산을 지나 창덕궁과 성균관대학 뒤쪽 능선을 지나서 의정부 방향 도로와 만나는 곳에 있는 혜화문이다.한양도성의 동소문에 해당하는 성문으로 의정부, 양주를 거쳐 함경도 방향으로 연결된 도로들이 한양도성으로 들어오는 혜화동 고갯길에 있던 성문으로 지금은 원래의 위치에서 동쪽편 언던에 위치하고 있다. 다른 성문과는 달리 원래부터 있던 성문이 아니라 90년대에 복원한 성문이다. 혜화문 안쪽으로는 혜화동 대학로가 있으면, 성곽은 다시 낙산 능선을 따라서 계속 이어진다. 한양도성의 동소문은 원래 의정부방향 도로 중앙에 있었는데, 도로 확장 등으로 현재의 위치인 동쪽편 언덕에 복원해 놓고 있다. 복원된 혜화문. 아치형 성문과 성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래 있었는 성루가 1..

[서울 성곽] 성북동 경계가 되는 창덕궁 뒷편 와룡공원 성벽

한양 도성을 이루고 있는 서울의 성곽 중에서 북악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벽이 사람들이 사는 공간과 만나기 시작하는 지점인 와룡공원 부근의 성벽이다. 오랜 기간 동안 국왕이 거처했던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녹지공간과 북한산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이 곳 성벽을 넘으면 성북동이 시작된다. 성의 북쪽이라는 성북동은 이 성벽너머의 마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성벽 바로 아래에는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에서 묘사한 성북동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는 달동네라고 불리는 동네가 있고, 그 너머로 요즈음의 부의 상징이라는 성북동 고급 주택가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궁궐이 지키던 성벽답게 거의 전역에 걸쳐서 아주 크고 튼튼한 돌을 쌓은 성벽이 있으며, 성벽위에는 또한 아주 튼튼한 흉벽이 있..

[서울 성곽] 창의문(자하문), 한양도성 북소문에 해당하는 성문

창의문은 자하문이라고도 불리는 한양 도성의 서북쪽 방향에 위치한 성문이다. 세검정에서 청와대와 경복궁 방향으로 난 고갯길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후기 인조반정때 반란군들이 세검정에서 출발하여 이 곳 창의문을 통해서 지나갔다고 하며, 60년대 북한에서 침투한 김신조 일당도 이 곳을 지나서 청와대를 기습할려했던 곳이다. 창의문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성문 중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에 속하며, 원래 이 길은 조선시대에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한때 풍수상 좋지 않다고 하여 폐쇄되기도 한 성문이다. 창의문 아래에는 1.21 청와대 습격 당신 순직한 경찰들의 동상이 서 있고, 그 아래로는 이 곳의 청계천 발원지임을 말해주는 표지석이 있다. 인왕산길에서 북악산길로 가는 도로에서 보이는 창의문. 현재 창..

[서울 성곽] 서대문에서 인왕산 아래 (사직동 부근)

서울의 성곽은 인왕산, 북악산, 남산, 낙산 등 서울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적인 장애물에 오랜 기간 동안 성곽을 쌓아 형성되어 있고 4대문과 4소문을 두고 있습니다. 서울의 서쪽 방면을 막고 있는 성곽은 서대문을 중심으로 인왕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는데 숭례문과 서대문 사이의 성벽은 도심으로 변해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서대문에서 시작해서 능선을 따라 쌓은 성벽은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서울 성곽 여행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는 사직단 근처 사직터널위 능선에 설치된 성벽을 올라가는 길입니다. 이 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인왕산 능선을 따라서 쌓은 서울 성곽을 탐사할 수 있습니다. 사직단과 독립문이 있는 무악재 사이의 능선을 따라 형성된 성벽 주위 마을 주민을 위한 도로에 잘려나간 성벽입니다. 독립..

아산 온양군 동헌

온양온천으로 유명한 아산 온양 시가지에서 동남쪽 산너머에 있는 옛 온양군 동헌이다. 이 곳이 온양지역 행정의 중심지였으나, 장항선 철도부설로 인해 그 기능을 온양온천 부근 지역으로 넘겨주고 한적한 시골마을 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는 곳에 있다. 대부분의 조선시대 관아건물들처럼 온양군 동헌과 그 출입문인 온주아문 바로 앞에는 온양초등학교가 있다. 20세기초 전국에 초등학교가 세워지고, 근대적인 행정기관이 들어서면서 전국 대부분 관아의 동헌과 내아 등 은 시청,읍사무소,면사무소 등로 변했고, 객사는 초등학교 교사로 바뀌었는데 이 곳 또한 비슷한 경로를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아와 작청같은 건물들은 없어지 동헌건물만 변형되어 주재소,파출소,동사무소 등으로 사용하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온주아문을 들어서..

조선 관아 2010.09.21

아산 여민루, 아산현 동헌 출입문

아산시 영인면 소재지에 위치한 옛 아산현 동헌 출입문인 여민루이다.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옛 동헌 아문인 여민루는 영인초등학교 정문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의 관아 건물인 객사, 동헌, 내아 등은 모두 초등학교 건물로 변한 듯하다. 이 곳 아산현에도 옛 고을의 흔적은 아산향교와 관아 아문인 여민루만이 남아 있다. 여민루는 앞면3칸, 옆면2칸의 문루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조선 태종대 처음 문루를 지었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고종때 크게 수리한 것이라고 한다. 근처에 구한말 개화운동에 앞장선 풍운아 김옥군의 묘소가 있다. 날렵합 팔작지붕을 한 이층문루인 여민루. 초등학교 출립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교문은 여민루 뒷쪽편에 있다. 이민루 이층 문루와 현판 여민루 출입문 초등학교 안쪽에서 본 여민루..

조선 관아 2010.09.21

온주아문, 온양군 동헌 출입문

온양군은 옛날 온양역을 중심으로 아산시 동남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온양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현재는 아산시와 통합되었지만 예전에는 온용이 있는 시가지에 온양시 중심부가 있었다. 원래 온양군의 중심지역은 현재 온양시가지 남쪽편 고개너머였는데 지금은 그 흔적으로 당시 관청건물인 온주아문과 동헌, 그리고 부근의 온양향교가 남아 있다. 지금의 온주아문이 있는 곳 주변에는 주민도 그리 많이 살지 않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처럼 보이지만, 옛날 기준으로는 홍성에서 천안으로 연결된 길과 공주에서 아산을 거쳐 서울 방향으로 가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방면에 넓은 벌판이 있는 지역이다. 온주아문은 옛 온양군사가 근무하던 동헌의 출입문으로 1871년에 고쳐 지어진 건물이다. 정면3칸, 측면2칸의 누각 건물로 아문의 ..

조선 관아 2010.09.21

조선 수군의 기상이 돋보이는 통영 세병관

통영 세병관 선조때 통제사 이경준이 통제영을 통영으로 옮긴 후 완공한 건물로 여수 진남관, 경복궁 경회루와 더불어 가장 큰 목조건축물이다. 임진왜란 이후 통제사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고, 상주하는 인원과 방문하는인사가 많았서 그런지 객사의 규모가 아주 크다. 세병관을 들어설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엄청나게 크게 쓴 '세병관(洗兵館)'이라고 적혀있는 현판으로 건물의 규모와 현판에서 조선 수군의 웅장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역사성과 예술성이 높이 평가되어 국보로 지정된 건축물이다.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 중에 하나인 통영 세병관. 건물의 크기와 기둥의 두께, 현판의 글씨가 웅장한 조선 수군의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통영 세병관은 수군통제영 많은 건물 중에서 중심이..

조선 관아 2010.09.21

전주 구도심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전주객사(全州客舍)

전주의 구도심 중앙에는 조선시대부터 이곳이 전주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전주객사가 자리잡고 있다. 보통의 다른 유적지와는 달리 도심 중앙에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이 전주의 전통을 알려주고 있다. 이 전주객사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아마도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지방관청 건물로는 가장 큰 건물이다. 객사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사신이 묵는 숙소로 지방의 거점도시에 마련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전주객사는 건물의 규모는 웬만한 서울의 궁궐보다도 규모가 큰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전주객사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는데 이것은 전주객사를 일컫는 말로서,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풍패는 한고조 유방의 고향으로 한고조 유방이 중국뿐만 아니로 우리나라에서 많이 사랑을..

조선 관아 2010.09.21

[나주목 관아] 나주객사 금성관

나주목의 규모를 잘 보여주는 건물인 나주 객사인 금성관 건물이다.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로 통제영 객사인 통영 세병관이나, 여수 진남관보다는 작지만, 전주 객사와 비슷한 규모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관청건물로 개조되어 사용하다가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서쪽 날개 건물은 원래부터 있던 건물로 보이며, 동쪽 날개 건물은 최근에 복원된 것으로 보인다. 전국의 비슷한 건물들을 보면 동쪽 날개 건물이 많이 훼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주 객사인 금성관. 중앙에 위패를 모시는 건물이 있고, 양쪽 날개에 손님이 묵는 방이 있다. 나주 객사인 금성관. 금성관 편액 금성관 내부. 넓은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금성 서쪽 날개 건물. 앞면 5칸의 건물로 2칸은 방, 3칸은 마루로 사용되고 있다. 나주 객..

조선 관아 2010.09.21

강릉 임영관지 객사, 고려 공민왕이 쓴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

강릉 임영관지는 고려시대부터 강릉지역 관아가 있었던 건물터로 기록에 의하면 고려태조 19년인 936년에 강릉을 동원경이라 칭하고 임영관을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강릉은 조선초에는 대도호부였다가 국방상 큰 위험이 없었던 까닭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그 이후 강릉부로 구한말까지 이어져 왔다고 한다. 태백산맥 동쪽 동해안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가 있는 곳으로 삼국시대 이래로 이 지역의 중심이 되었던 도시이다. 현지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강릉은 지금도 크게 변한 것은 없지만, 옛날부터 피서를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고관, 선비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을 접대하느라 아주 바빴던 곳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지역의 객사에서는 객사를 사용할 수 있는 직위를 설명하지 않고 있는데 이 곳에서는 그 직위를 설명해..

조선 관아 2010.09.21

[서산 해미읍성] 호서좌영 객사

서산 해미읍성은 충남 서해안 지역의 왜구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새운 읍성으로, 조선 전기까지는 충청병마도절제사가 머무르던 곳이며 왜구의 침입이 없어진 조선 후기에는 해미현 관아가 옮겨왔다고 한다. 해미읍성 관아 건물로는 객사, 동헌, 내아를 볼 수 있는데 원래부터 있었던 건물은 아니고, 건물터에 현재의 건물을 복원했다고 한다. 읍성내에 있는 작은 동산 아래에 관아 건물들이 모여 있다. 해미읍성 북쪽편 동산 아래에 객사를 비롯한 관아 건물들이 모여있다. 해미읍성 객사. 복원된 건물로 문화재적인 가치는 없으나, 옛날 관청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해미읍성 객사는 앞면이 5칸이나 되는 건물로, 도절제사가 머물렀던 관청 건물답게 다른 지역의 객사보다 크다. 객사 양쪽 날개부분에는..

조선 관아 2010.09.21

인천도호부 청사 객사, 임금의 궐패를 모시던 지방관청의 중심

인천 월드컵경기장인 문학경기장 맞은편에는 옛 인천지역을 관할하던 인천도호부청사가 남아 있다. 최근에 정비가 완료되어서 예전의 건물의 그대로 남아있는지, 아니면 대대적으로 보수.복원을 했는지 구분하기가 좀 힘들정도로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 지방수령이 관장하던 교육의 중심인 인천향교와 객사, 동헌이 나란히 있으며, 지방수령의 숙소인 내아는 남아있지 않다. 도호부는 고려시대부터 설치된 관청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하거나 변방의 점령지 등에 설치한 군사적 성격이 강한 지방관청이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일반관청과 비슷하게 변화하였다. 도호부 수령인 부사는 종3품으로 정3품인 목사보다 한단계 낮은 단계이다. 그래서 목이 설치된 전주나 나주의 객사에 비해서 그 크기가 작지만, 현단위 고을의 객사보다는 크게 지었다. 인천도호..

조선 관아 2010.09.21

고양 벽제관지, 옛터만 남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마지막으로 머물던 역관

조선시대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마지막으로 예를 갖추면서 숙박을 하던 고양군청 역관 겸 객사인 벽제관 옛터이다. 지금은 벽제갈비로 유명한 이 곳은 일산을 포함한 대도시로 변모한 고양시의 행정중심지였던 곳이다. 지금은 일산과 원당에 밀려서 고양시에서 가장 한적하고 시골같은 장소로 바뀌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의주로 통하는 대로변이었으며, 근처의 양주와도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옛터만 남은 벽제관지를 보면, 중국 사신이 머물던 곳이라 건물이 상당히 크고 많았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실제 건물터를 보면 별로 큰 건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 법도에 맞추어 군수가 다스리던 지역의 객사 규모에 맞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객사 건물인 전주객사나 나주 금성관 등에 비해서 건물규모는 상당..

조선 관아 201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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