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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259

보은 속리산 법주사 - 쌍사자 석등(국보)

법주사가 보유하고 있는 국보중의 하나로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자 석등입니다. 두마리의 사자가 맞대고 있으면서 화사석을 들고 있는 형태이다. 이 석등의 사자상은 우리나라에 있는 사자상 중에서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한 석상이라도 한다. 법주사 마당 한가운데를 지키고 있는 쌍사자석등 팔상전과 나란히 한 쌍사자석등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특수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긴다. 사..

보은 속리산 법주사 - 석연지石蓮池 (국보)

법주사에 있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국보에 속하는 문화재 입니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라고 하는 다른 절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형태입니다. 출입구인 천왕문 서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연꼿을 띄워 두었다고 하면 극락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라 한다. 국보로 지정된 법주사 석연지 법주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이 석연지(石蓮池)가 보인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물을 담아두며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여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형상들을 만날 수 있다. 연지는 8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보은 속리산 법주사 - 사천왕석등(보물)

법주사 사천왕석등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석등으로 전형적인 석등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라고 한다. 잘 보이지는 않는데 가까이서 보면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법주사 대웅전 앞을 천년 이상 밝혀주던 석등이다. 속리산 법주사 대웅전 앞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석등. 석등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석등이다.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을 올리고 있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아래받침돌은 면마다 안상을 얕게 새기고, 그 윗면은 가운데받침돌을 사이에 두고 윗받침돌과 대칭되게 연꽃을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

보은 속리산 법주사, 마애여래의상(보물)

속리산 법주사 입구 왼쪽편 산아래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의상은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는 유물이다. 바위에 섬세하게 미륵불을 새겨 놓고 있는 것으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마애석불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그 앞에 촛불이 켜져있고 많은 사람이 기도를 드리는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의상. 최근에 새겨진 것처럼 깨끗해 보인다. 앞에는 제단이 있고 촛불이 켜져 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바위. 뭔가 새겨 놓은 것 같기도 한데..... 근처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도 글씨를 새겨 놓고 있다. 법주사는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창건하였고, 그 뒤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가 새롭게 고쳐 지었으며 그 뒤로 진표의 제자들..

[보은 속리산 법주사] 철확鐵鑊, 거대한 밥솥 (보물)

법주사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밭솥이다. 단순한 모양이지만 거대한 크기로 봐서 법주사가 예전부터 얼마나 융성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유명한 개태사의 철확보다 더 큰 것으로 보인다. 법주사 철확. 멀리서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솥입니다. 큰 사발(大鉢)의 형상을 한 법주사 철확은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3㎝의 거대한 크기로, 상부의 외반된 전이 달린 구연부는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벽(器壁)의 두께는 3∼5㎝ 정도이며 무게는 약 20여 톤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주조되지 않아 제조연대·제작자 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용해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

보은 속리산 법주사 - 석조(石槽), 식수를 담아 두던 곳

법주사 석조는 직사각형 형태의 돌로 만든 것으로 나름대로 간결한 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법주사라는 사찰 규모에 걸맞게 다른 사찰에 비해 규모가 크다. 법주사의 3천 승려들의 식수를 담아두던 돌그릇이라 한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아무런 조각을 하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며, 규모는 길이 446㎝, 폭 240㎝로 제법 크다. 통일신라 성덕왕 1년(720)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보은 속리산 법주사 - 당간지주, 철당간

속리산 법주사에도 일반적인 사찰처럼 당간지주가 있고, 비록 복원된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많지 않은 철당간도 남아 있다. 이 당간지주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연상시킨다. 지금은 하나만 있지만 원래는 두개의 쌍을 이루어서 걸개그림 같은 것을 걸어두는 목적이라고 한다. 멀리서 보고 사찰에 거의 도착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법주사 철당간과 당간지주. 사진 두개를 나란히 놓으니 원래 철당간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법주사 경내에는 목탑, 금동미륵대불과 함께 가장 높이 하늘로 솟아 있다. ☞ 당간지주 당간이란 달리 찰(刹) 또는 찰주(刹株)라 불리는데, 일반적으로 절(寺)을 사찰(寺刹)이라 말함은 절에 당간 즉,찰(刹)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 한다. 예전에는 종파를 표시하기 위해 당간 위에 특정한 색깔..

보은 속리산 법주사 - 희견보살상 (보물), 머리에 향로를 이고 있는 석상

법주사 본당인 대웅전 좌측편에 자리잡고 있는 석상으로 모양이 독특하고 왜 그런 형태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나름대로의 독특한 개성으로 의미를 갖는 것 같다. 향불을 들고 공양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형태의 석상은 없다고 한다. 법주사 희견보살상은 많이 훼손된 것처럼 보이며, 머리에 향로를 들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석상이다. 법주사 희견보살상은 그 유래와 목적을 알수 없는 아주 독특한 석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비슷한 것이 없고 법주사 쌍사자석등과 비슷해서 동일한 작가의 작품을 추정하고 있다. 희견보살상은 지대석 위에 비교적 큰 향로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흔치 않은 조각상이다. 희견보살상으로 불리어 오고 있으나 그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부 대석..

보은 속리산 법주사 - 통일호국 금동미륵대불

법주사를 대표하는 금동미륵대불이다. 학창시절 수학여행때 보았던 거대한 시멘트 불상은 없어지고 지금은 금동미륵대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옛날 추억이 없어져서 아쉬운 면은 있지만 그래도 각고의 노력끝에 더 좋아진 불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래 신라시대부터 금동미륵대불이 있었으나, 구한말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비용을 조달하느라 몰수했기때문에 해방이후 시멘트 불상을 조성했었다고 한다.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이 사찰을 대표하는 상징히라고 할 수 있다. 팔상전과 함께 한 불상 신라 혜공왕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7년간의 노력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해 모셨다. 그때부터 모신 미륵부처님을 조선조 고종9년(1872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축조함에 소요되는 자금마련이라는 구실로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상을..

보은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국보 55호), 거대한 목탑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목탑이다. 중국에는 많이 존재했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불교 문화재였던것도 목탑이었다. 목탑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는 거의 유일한 거대 건축물이었다. 신라를 대표하는 것도 황룡사 목탑이었고, 백제를 대표하는 것도 미륵사 목탑이었다. 사실 석탑은 보조적인 의미가 강했고 당시 대도시를 상징하는 것은 거대한 목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속리산 산속에 법주사에 거대한 목탑이 남아 건축되고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주사 팔상전. 중국 무협소설이나 서유기에 많이 등장하는 목탑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아마 황룡사 목탑은 이보다 훨씬 컸으리라 생각된다. 팔상전 편액 멀리서 본 법주사 팔상전의 웅장한 모습 법주사는 신라..

[예산 덕숭산 수덕사] 법고각, 범종각, 경내 풍경

수덕사는 영주 부석사처럼 산중턱에 축대를 쌓아서 조성한 사찰로서 입구에서 언덕길을 걸어 올라 대웅전까지 갈 수 있다. 그래서 경내에 들어서면 언덕 아래로 멀리 높고 낮은 산들과 들판을 볼 수 있다. 수덕사는 경내입구에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없고 앞이 확 틔여 있는데 부석사 안양루에서 내려보는 풍경과 비슷한 느낌이다. 부석사와는 달리 강당 누각인 황화정루는 축대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수덕사 계단을 올라서서 경내로 들어서면 우측편에 볼 수 있는 법고각. 북과 범종이 같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수덕사는 특이하게 좌측에 범종각, 우측에 법고각이 있다. 수덕사 경내 좌측편에 자리한 범종각 수덕사 경내로 올라서면 멀리 예산 지역의 높고 낮은 산들과 들판이 펼쳐진다. 수덕사 경내를 빛내주는 오래된 고목들

예산 수덕사 칠층석탑, 삼층석탑

수덕사는 백제시대부터 내려오는 고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최고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인 대웅전을 제외하고는 인상적인 유물이 많지는 않다. 아마도 옛날에는 수덕사가 산중에 자리잡고 있어 비중이 크지 않아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남아 있는 석탑은 크기나 예술적인 면에서 뛰어나다고는 말하기는 힘든 면이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수덕사 칠층석탑. 원래는 수덕사 대웅전 앞 경내에 있었는데 지금은 금강문 위쪽 언덕으로 옮겨져 있다. 탑신만 있고 기단석은 없다. 기단이 없는 석탑이라서 영 불안해 보인다. 수덕사 대웅전 앞에 자리잡고 있는 삼층 석탑, 고색 창연한 대웅전 건물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칠층석탑과 삼층석탑이 있던 자리에는 최근에 만든 석탑이 놓여 있다.

안동 봉정사 삼층석탑

봉정사 극락전 앞 마당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만 삼층석탑이다. 석탑의 각부분에서 섬세하거나 화려한 점이 없고 웅장한 석탑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 평범한 석탑으로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에 비해서 기술이 많이 퇴보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고려시대부터는 불교신앙의 중심이 탑에서 불전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봉정사 극락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2층의 기단, 3층의 탑신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그 규모나 기단과 탑신에 새겨진 조각상 등이 수준이 상당히 떨어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봉정사 삼층석탑의 기단석. 장식이 없고 당시에 형식적으로 대량 생산된 듯한 느낌을 주는 석탑이다. 봉정사 삼층석탑의 탑신. 몸돌과 지붕돌에서 섬세..

안동 천등산 봉정사 - 범종각, 당간지주, 석조불상, 삼성각

안동 봉정사에는 국보로 지정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대웅전, 고금당, 화엄강당 등 보물급 이상의 목조건축물을 보유하고 있지만, 석탑을 비롯한 석재문화재는 많지 않은 편으로 불전 중심의 사찰이라 할 수 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앞 마당 입구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는 봉정사 범종각. 범종은 문화재로 분류된 오래된 범종은 아니고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봉정사 대웅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아주 낡은 당간지주 봉정사 극락전과 대웅전 사이에 위치한 석조불상.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기도를 올린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뒷편에 자리한 삼성각.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아주 작은 건물로 극락전, 화엄강당, 고금당과 일관된 건축형태를 보이고 있다.

[부안 능가산 내소사] 고려동종(高麗銅鐘) 삼층석탑(三層石塔)

부안의 내소사는 전북의 주변에 속하는 변산반도에 자리한 사찰이기 때문에 문화재는 대형사찰에 비해서 많지는 않은 편이다. 그 중에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급에 속하는 고려시대 동종이 이 곳 내소사에 있다. 종의 크기는 크지 않고 원래 다른 사찰에 있던 것을 조선후기에 옮겼다고 한다. 내소사의 대웅전 앞 마당에는 크지 않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3층석탑이 있는데 예술적인 면에서나 역사적 면에서나 가치는 높지 않은 아주 평이한 3층석탑이다. 내소사에 있는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 동종. 동종의 크기는 별로 크지 않으나, 역사적인 가치가 있고 용머리를 한 종의 고리가 예술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어 보인다. 가까이서 찍은 고려동종의 사진. 크지는 작지만 오랜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위쪽 고리부분을 화려하게 장식해..

대원각사비, 원각사지 내력을 적은 비석

종로 탑골공원에 있던 사찰인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대원각사비이다. 조선 성종때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거북모양으로 만든 귀부 위에 대리석으로 비석을 세워 놓았는데, 용이 비석을 휘감고 있는 중국풍의 비석이다. 당시 국가 주도로 만든 비각이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탑비보다는 만든 수법이 떨어지고 약간 성의가 없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원각사지10층석탑과 함께 이 곳의 원각사 옛터였음을 알려주는 대원각사비. 머릿돌을 따로 두지 않고 몸돌과 머릿돌이 하나로 되어 있다. 대원각사비 거북받침돌. 조각수법이 고려시대 탑비들에 비해서 많이 떨어진다. 전체적으로 화려하거나 생동감을 많이 주지는 못하고 있다. 비석의 몸돌과 머리돌이 하나로 이루어져 있고, 두마리의 용이 비석을 감싸는 모양이다. 비문은 당대의 명신들인..

원각사지 십층석탑 (국보 2호), 유리벽에 갇힌 탑골공원 석탑

서울의 중심으로 조선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이래 오랜 기간 역사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던 탑골공원이 원래는 사찰이었음을 말해주는 국보 2호로 지정된 원각사지십층석탑이다. 경천사지석탑과 더불어 고려말, 조선초를 대표하는 대리석으로 만든 석탑으로 도교사상이 들어가 있는 많은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원나라의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석탑으로 또다른 북방민족이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수도 북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조각상들이다. 이 곳에 원각사라는 절을 세운 사람은 단종을 폐위시키고 무력으로 왕좌에 오른 수양대군, 즉 세조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많은 살생을 하고, 살아가는 가운데 피를 많이 본 민족인 토번족인 티벳인, 몽골인이 세운 원나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라마교를 많이 숭상하고 이런류의 조각상을 많이..

[가야산 해인사] 당간지주, 석등

해인사 대적광전 앞에서는 절터나 오래된 사찰에서 석탑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남아서 절터였음을 알려주는 문화재인 당간지주가 철당간과 함께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최근에 만든 당간지주와 당간을 볼 수 있다. 1쌍의 당간지주와 붉은 칠을 한 당간이 대적광전 앞 경내 마당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마도 행사에 필요한 걸개그림을 걸어두는 용도란 것은 알았지만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처음 보았다. 해인사 대적광전 아래에 위치한 당간지주와 당간. 웬만한 사찰을 찾아가면 볼 수 있었던 중심불전 앞 당간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당간지주는 보통 사찰입구와 중심불전 앞에 위치하고 있는데, 해인사 일주문 옆에도 오래된 당간지주가 있다. 사찰을 찾는 사람에게 행사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목적인 것으..

합천 해인사 삼층석탑 (비로탑,정중탑)

해인사 경내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삼층석탑이다. 정중탑 또는 비로탑으로도 불리는 석탑으로 원래는 2층기단에 3층탑신을 하고 있었지만, 1926년에 기단을 한층 더 올렸다고 한다. 해인사의 사찰 규모나 오랜 내력에 비해서 석탑의 크기나 예술적 미, 내력 또한 많이 떨어지는 석탑이다. 중심불전인 대적광전 아래 마당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해인사 삼층석탑. 2층의 기단부 아래에 1층의 기단을 조성해 올려놓고 있는 석탑으로 웅장해 보이기는 하지만, 통일신라 이래의 삼층석탑의 비례가 변형되어 균형미가 떨어져 보인다. 석탑 기단부. 가운데 있는 부분이 세로 추가된 기단으로 보인다. 삼층으로 된 탑신은 원형이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 석탑 앞 연화무늬가 있는 제단(?) 경내 한가운데에 석탑, 석등이 있고 좌.우에는..

합천 해인사 길상탑 (보물 1242호), 오대산사탑지

보물 1242호로 지정된 해인사 입구에 있는 크지 않은 3층석탑으로 길상탑이라 한다. 이 길상탑은 통일신라후기, 치열했던 왕위쟁탈전 속에 장보고가 죽었던 그 시기에 해인사를 지키기 위해 죽은 승려와 주민들을 위해서 세운 석탑이라하며 일반적인 석탑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는 석탑이다. 길상탑을 1960년대에 해체했을때 탑에 대한 기록을 새겨 놓은 최치원이 쓴 탑지를 비롯하여 오대산사탑지, 백성산사탑지가 함께 출토되었다고 한다. 해인사 일주문 아래에 있는 길상탑. 정식 명칭은 '해인사묘길상사탑'이라 한다. 이 탑에서 출토된 '오대산사탑지'. 이 탑지는 인근에 있는 오대산사탑지만 이 길상탑에서 함께 출토되었다고 한다. 해인사 절 입구의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지점에 서 있는 탑으로,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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