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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박물관 373

[경주박물관 국은기념실] 청동기시대의 석기, 돌을 갈아서 만든 생활도구

경주 박물관 고고관에는 경북대 의과대 교수를 지내면서 경북지역 문화재를 발굴조사에 많은 공을 기울였으며 경주박물관에 666점의 문화재를 기증한 국은 이양선박사 기증 유물을 전시한 기념관을 두고 있다. 기증문화재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들이 있다. 기증 유물 가운데 '말타무사모양 토기'는 국보로, '죽동리출토유물'과 '옻칠발걸이'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기중 유물가운데 석기로 분류된 것은 신석기시대 이전의 유물은 아니고 주로 청동기시대에 사용했던 돌로 만든 도구들이다. 마제석검이라고 부르는 청동기시대 많이 사용된 검에서 부터 화살촉.창.도끼,반달돌칼 등 동시대에 경북지역에서 사용되었던 다양한 형태의 석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석기 인류는 구석기시대부터 돌로 간단한 도구를 만들어 ..

지역박물관 2011.10.20

[경주박물관 고고관] 도장무늬토기, 뼈항아리

4~6세기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엇갈린 구멍을 뚫은 굽다리그릇을 비롯하여 많은 토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들 토기들은 회전판을 이용하여 빚은 뒤 밀폐된 가마에서 구워 이전의 토기보다 얇으면서도 단단하며 전문공장에서 대량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6~7세기가 들어서면서 무덤에 껴묻거리로 묻었던 토기가 많지 않거나 발굴된것이 많지 않아서 실제로 남아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7세기 이후에 신라의 토기는 표면을 화려한 무늬로 장식하게 되는 이를 무늬가 새긴 도장으로 무늬를 찍었다고 하여 인화문토기라고 부른다. 이 시대의 토기는 일상생활에 사용했던 토기들도 많고, 무덤의 껴묻거리라기 보다는 불교식 장례풍습인 화장이 성행함에 따라 뼈가루를 담았던 뼈항아리들이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어며 그 중 가장 발달한 형..

지역박물관 2011.10.20

[경주박물관 고고관] 문자의 사용, 서역과의 교류

신라에 한자가 언제 전해졌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마립간시기인 4~5세기대에 고구려와의 교류를 통해 한자 사용이 확산되어진 것으로 보이며 많은 유물들이 동시대에 조성된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글자가 적힌 청동그릇들이 출토되어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진흥왕대 이후에는 진흥왕순수비를 비롯하여 각종 비석에서 당시 사람들의 문자 생활을 엿 볼 수 있다. 문자를 사용하다 문자는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고 전달합니다. 사회와 문화의 발전에 문자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신라인은 한자로 기록하였는데, 언제 한자가 전해졌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 4~6세기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한자가 쓰여진 부장품들이 발견되고 있어, 한자를 활발히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세기가 되면 포항 냉수리비나 진흥왕순수비, 남산신..

지역박물관 2011.10.17

[경주박물관 고고관] 신라의 토용과 십이지신상

신라의 유물은 삼국시대 내물마립간대부터 시작한 황금문화시기에 조성된 경주도심 대릉원 일대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후 불교를 받아들이고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는 사찰건립 등에 많은 자원을 쏟아부었기때문에 이전 시대에 비해서 무덤에 껴묻거리로 묻은 유물은 많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무덤에서 껴묻거리로 출토된 유물 중 대표적인 것 사람이나 동물을 본떠서 만든 토용과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역할을 기대했던 십이지신상일 것이다. 토용에서는 당사 사람들이 입었던 의복이나 복식 등을 알 수 있으며, 함께 출토되고 있는 수레 등 생활용품에서 당시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다. 특히, 경주 용강동에서 출토된 여인상과 문인상은 통일신라 복식에 대해서 알려주는 대표적인..

지역박물관 2011.10.16

[경주박물관 고고관] 4~6세기 신라토기, 독무덤, 수레모양토기

신라토기는 4세기 후반에 다리에 엇갈린 구멍을 뚫은 굽다리토기가 출현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게되는데 회전하는 물레를 사용하여 형태를 빚은 뒤 1,000도 이상의 고온으로 밀폐된 가마에서 구워서 얇고 단단한 그릇을 만들게 된다. 신라토기는 그릇 종류로 큰 항아리, 굽다리접시, 잔, 그릇받침 등 다양한 종류가 출토되고 있으며 가야 토기에 비해서 직선적인 것이 특징이다. 4~6세기에는 경주 월성 북서쪽으로 많은 왕이나 귀족층 등의 무덤들이 많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들 고분에선 금관을 비롯한 금속세공품과 더불어 상당히 많은 양의 토기들이 같이 출토되고 있다. 그 중 황남대총에는 4천여점의 토기들이 껴묻거리로 묻혀 있었다. 고분에 묻힌 토기들은 다량의 껴묻거리를 만들기 위해 대량생산한 것으로 보이며, 실제 사용하..

지역박물관 2011.10.11

[경주박물관 고고관] 신라의 무기, 판금갑옷과 말갖춤

신라는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장수왕에 해당되는 마립간(내물~지증왕)시기에 고구려와 교류를 하고, 광개토왕의 도움을 받아서 왜(倭)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게 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군사력을 비롯하여 문화.기술 등 모든 면에서 고구려가 신라를 앞섰던 것으로 신라가 고구려와 협력하던 이 시기에 신라는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며, 이 시기의 화려한 황금문화가 천마총, 황남대총 등 당시 고분의 발굴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 고분들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장신구와 함께 고분 주인이 사용했거나, 사용할 무기류나 말갖춤 등을 껴묻거리로 함께 묻어두어서 당시 사람들이 사용했던 무기의 형태나 수준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신라는 마립간시기에 동북아시아에서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고구려의 철기병 체제를 받아들인 것으로 ..

지역박물관 2011.10.10

[경주박물관 고고관] 금관총 출토 유물, 금관총 발굴 90주년 기념 특별전

경주 도심 노서동에 위치한 노서동 고분군은 월성 북쪽이 넓은 평야에 자리잡고 있는 마립간시기에 김씨 귀족층의 무덤으로 보이는 대릉원 주변 고분들 중에서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고분이다. 이 지역 고분들은 돌무지덧널무덤이라는 신라 특유의 무덤양식으로 하고 있는에 나무로 넓은 고간을 만들어 그 안에 주검과 껴묻거리를 넣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오린뒤 흙을 덮은 구조로 도굴이 상대적으로 어려워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가장 큰 무덤은 높이가 22m로 봉분의 규모가 이전이나 이후의 고분에 비해서 상당히 큰 편이다. 노서동과 노동동은 도심과 가까이 있었기때문에 이른 시기에 개발이 이루어졌으며, 대표적으로 금관총과 서봉총 등이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되어 있다. 그 중 금관총은 지금으로 부터 90년전인 1921년에 ..

지역박물관 2011.10.08

[경주박물관 고고관] 신라의 금.은 그릇, 유리잔, 청동자루솥

신라의 고분에서는 많은 껴묻거리들이 출토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금관총과 서봉총에서도 많은 유물이 출토되기는 했지만, 70년대에 시범적으로 발굴한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는 상당히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는 당시 신라인들이 사용했던 것들을 금.은으로 만들어서 무덤의 껴묻거리로 묻은 화려한 금.은 그릇들과 서역에서 수입했을 것으로 보이는 유리잔, 제사의식에 사용하는 청동제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이들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 중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주로 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으며, 천마총을 비롯한 여러 고분들에서 출토된 것들은 경주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현재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은 그 중 동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유물 중 금..

지역박물관 2011.10.06

[경주박물관 고고관] 신라의 화려한 장신구

신라는 마립간시기인 내물왕대에서 지증왕때까지 중앙아시아 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려한 황금문화를 남겨놓고 있다. 천마총, 황남대총, 금관총, 서봉총으로 대표되는 금관과 금제관식을 비롯하여 수많은 귀금속 장신구들을 무덤에 껴묻거리로 묻어두고 있다. 이 시기의 고분들은 신라 도심부의 대릉원을 중심으로 넓게 펴져 있는데, 특히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으로 만들어진 이들 고분들은 봉분 조성양식의 특성으로 인해 도굴이 상당히 어려웠기때문에 오늘날 많은 유물들을 우리에게 남겨 놓고 있다. 신라의 왕과 귀족들은 화려하게 반짝이는 금과 은으로 만든 목걸이, 귀걸이, 팔찌, 반지를 하고 살았다고 하며, 얇은 금판으로 만든 달개를 달아 움직일 때마다 흔들려 더욱 빛났을 것으로 보인다. 마립간 시기의 신라는 금을 비..

지역박물관 2011.10.05

[경주박물관 고고관] 마립간의 등장, 금관을 비롯한 왕의 관식

신라에서 임금을 뜻하는 말은 시조인 박혁거세때는 거서간, 2대 남해왕때에는 차차웅, 3대 유리왕에서 김씨가 왕위를 세습한 내물왕 이전까지는 '임금'이라는 단어의 어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사금이라고 불렀다. 내물왕때부터는 마립간이라 불렀는데 으뜸이라는 뜻의 '마립'과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왕을 부를때 사용하는 '칸'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내물왕때 시작된 마립간이라는 칭호는 22대 지증왕 이전까지 사용하는데 이 마립간 시기에 신라는 화려한 황금문화를 남겨 놓고 있다. 경주 도심 역사지구의 대릉원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는 수많은 고분들에서 오늘날 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데 1921년 처음 발견된 금관총 금관을 비롯하여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교동 등지에서 6개의 금관이 발견되었는데 이른..

지역박물관 2011.10.04

[경주박물관 고고관] 무늬토기와 토우, 토우장식장경호(국보 195호)와 서수형토기 (보물 636호)

토우(흙인형)란 보통 흙으로 만든 인물상인데, 넓은 의미로 동물이나 생활용구.집 등을 본떠서 흙으로 빚어 만든 것을 일컫기도 한다. 토우는 주로 고대국가에서 조성한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주술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 많으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무덤의 껴묻거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토우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이집트,메소포니마아,에게해 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중국 앙소문화, 일본 조몬시대에도 토우가 출토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신라와 가야에서 토우가 주로 출토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토우는 신라 토우를 일컫는 경향이 있다. 토우에는 간략하게 표현된 인물상, 동물상,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말을 탄 무사, 집모양 토기, 짚신모양토기, 등잔모양 토기 등 형태와 양식에..

지역박물관 2011.10.03

[경주박물관 고고관] 신라의 성립, 무덤의 변천과 껴묻거리용 와질토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삼국시대 이전의 유물들은 대부분 지배층의 무덤인 고분 발굴을 통해서 출토된 것들이다. 고조선에서 시작해서 삼한, 가야, 삼국의 고분들은 그 형태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어 보이며 가야를 제외하고는 초기에는 대부분 평지에 무덤을 조성하고 있으며, 후대에 들어서는 대부분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 낮은 구릉에 무덤을 조성하고 있다. 무덤은 초기에는 현재와 비슷한 나무로 된 널무덤이 주를 이루었으며 후대에 들어서면서 돌무지 덧널무덤,굴방을 만드는 석실분으로 변했으면 특이한 형태로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독무덤의 형태를 한 곳도 있다. 후대에 화장이 성행하면서 뼈항아리를 묻는 형태도 나타나고 있다. 유물들은 대부분 무덤의 껴묻거리 형태로 매장되었는데 묻힌자들이 권위와 지위를 말해 주고 있다. 금관을 ..

지역박물관 2011.10.01

[경주박물관 고고관] 신라의 성립, 철을 바탕을 성장하다.

고조선 이후 삼한시대 진한의 중심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철을 생산하고 제련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신라 영역에서는 울산 달천 광산에서 철을 생산하여 경주 황성동 공방에서 이를 제련하고 가공하였다고 하며, 일본과 중국으로 수출도 했다고 한다. 당시 철은 고령지역을 중심으로 변한에서 많은 철을 생산하고 수출하면서 부를 축적했는데, 신라는 이들 지역을 위협하기도 하면서, 상호 거래를 통해 경제적 기반을 갖추어 가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박물관에서는 신라초기 철기 제작과 관련된 유적지로서 불국사 부근의 구정동 고분군과 경주 남산 동남쪽에 위치한 조양동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류들과 초기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주 대릉원 동쪽편 고분과 주택들이 섞여 있는 쪽샘지구에 위..

지역박물관 2011.09.30

[경주박물관 고고관] 신라의 성립, 고조선의 유민을 흡수하다. (영천 어은동, 경주 사라리 출토 유물)

기원전 57년에 건국된 신라는 처음 나라를 세울때는 사로국이었다. 진한은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형성한 삼한 중 경상도 지역에 형성되었으며 경주 사로국을 비로하여 12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들 소국은 그 규모가 작아서 큰 곳이 4~5천호, 작은 것은 6~7백호 정도라고 한다. 이 지역의 소국들은 주변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 중 고조선 유민들과 함께 고조선 문화를 받아들였다. 경주 인근에서 발견되는 고조선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유적지로 영천 어은동 유적, 영천 용전리 널무덤, 경주 사라리 유적 등을 들 수 있다. 경주박물관에서는 그 중 영천 어은동 유적과 경주사라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고조선의 영향을 받은 청동기와 철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출토유물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 같..

지역박물관 2011.09.29

[경주박물관 고고관] 청동기시대의 경주, 청동제 무기와 토기

한반도에서의 청동기시대는 요동지역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대국가 고조선이 있었다. 청동기시대는 고조선이라는 고대국가가 있기는 했지만, 현대적인 의미로 전국을 통치하는 국가는 아니고 특정지역만을 세력권으로 두면서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형태로 보인다. 청동기시대 한반도에는 고조선 이외에도 중요 교통로 및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크고 작은 형태의 소규모 국가가 건설되었는데, 이들 유적은 주로 평야지대와 강이 발달했으면서 한.중.일 해상무역로와 가까왔던 한반도 서남부 지역으로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예산 동서리 유적 등에서 다양한 형태의 청동기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경주가 위치한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서는 울산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에서 알 수 있듯이 울산지역과 고령 알터마을을 비롯..

지역박물관 2011.09.28

[경주박물관 고고관] 석기시대의 경주, 빗살무늬토기와 도구

경주는 신라의 수도로 신라가 건국된 기원전 57년부터 고려에 멸망된 935년까지 약 천년의 세월을 이어온 도시로 대릉원을 비롯한 고분, 불국사를 비롯한 많은 절터들이 남아 있는 문화재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경주는 한반도 동남부에서 동해로 흘러드는 큰 강인 형산강과 태화강을 기반으로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던 국가이다. 이 지역의 역사는 기원전 수세기에 시작된 청동기시대부터 형산강 유역에 토착세력이 정주하기는 했지만, 그 이전 선사시대에는 이 지역에 주민이 정착해서 살았던 흔적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형산강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서 정착해서 살기에는 그리 적합한 땅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농경생활이 정착된 청동기시대부터는 형산상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지역에 정착하면서 일정..

지역박물관 2011.09.27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신분을 뛰어넘고자 했던 중인들, 웃대에서 청계천으로

조선시대 중인은 경국대전에 정확하게 그 신분에 대해서 명시한 바가 없으며, '경국대전'에 정의된 '한품사용조'라는 규정에 의하여 그 적용범위가 기술직을 비롯한 하급관리에 관례적으로 적용되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한품사용자'란 2품이상을 지낸 자의 서얼들을 기술직이나 하급직으로 진출하게 해주는 제도로 과거진출에 제한이 있었던 당시 고위직의 서얼들에게 특혜를 주는 조항이었으나, 조선중기 인조대에 의관이 세습직으로 변하면서 관례적으로 계층화되면서 일반 기술직에도 일괄적으로 이 조항이 적용되면서 이들은 관직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홍문관 등 삼사관직에 오를 수 없도록 왜곡하여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영.정조대 이후에 이들은 다양한 형태의 청원 등을 통해 신분을 한계를 뛰어 넘고자 했다. 이들은 구한..

지역박물관 2011.09.25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조선시대의 중인, 음양관과 도화서 화원 그리고 관청 서리

조선시대 중인계층 중 외교문서작성과 통역을 맡았던 사역원 하급관리인 역관과 더불어 이들 중인계층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직종은 관상감에 소속되었던 음양관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천문을 관측하고 일식과 월식의 예보, 역서의 간행을 맡았던 상당한 수준의 과학적 지식을 가진 계층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남긴 많은 천문도와 실록에 나타난 천체현상에 대한 기록 등으로 보아서 상당한 수준의 천문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경아전에 속했던 하급관리로 서리라고 불리던 사람들은 양반들이 가지기 힘들었던 행정업무 능력으로 관아를 끌어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 관아서리들이 이런 역량을 바탕으로 많은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까닭에 오늘날 중인계층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못한 편이며 이런 인식이 오늘날 ..

지역박물관 2011.09.23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조선시대 중인계층, 전의감 의관과 사역원 역관

조선시대 중인은 양반 사재부와 일반 평민인 양인의 중간 신분에 속하는 계급층이나 실제로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시대 법전 등에는 중인신분에 대한 특별한 규정이 없으며, 조선의 법제도에 따르면 양인이면 누구나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기때문에 법률적으로 속박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서을출신은 관직진출 등에서 제한이 있었기때문에 이들을 일반 양인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중인이라는 관습적인 명칭이 생긴것으로 보이며, 서울 인왕산 자락 웃대에 살던 관아의 서리, 역관, 의관, 음양관, 화원 등 기술직에 종사했던 하급관리들과 지방의 향리.아전 등 중간계층을 통칭해서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사회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장자상속에 따른 토지겸병에 따른 계급의 고착화에 따라서 이들 중간계층..

지역박물관 2011.09.20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웃대의 시사, 중인들의 시모임

조선후기 중인들이 모여살았던 웃대라 불렸던 인왕산 자락 아래 마을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한시를 향유하는 모임인 시사를 들 수 있다. 이들 시모임은 17세중반 삼청동 일대 의관,역관 등이 중심이 된 6인의 시모임에서 시작되어 관청 서리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중인이지만 통역을 하던 역관이나 의관, 중앙부처의 서리들로 오늘날의 견해로 볼 때도 의사,중앙부처 공무원, 외교관 등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지식을 요하는 전문직에 속하는 직업군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경제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이며, 시사 이외에도 이들의 계모임이 상당히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인들의 시모임은 18세기 옥계시사를 통해 절정을 맞았는데 이들은 공..

지역박물관 2011.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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