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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박물관 373

[경기도박물관] 고구려, 신라.통일신라시대 경기도 지역 유물

경기도는 한성백제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래로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한성백제를 공격하고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는 등 그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기 시작했고, 장수왕이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백제를 몰아내고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된다. 경기도의 고구려 유적은 주로 한강과 임진강을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에 구축한 주요 군사시설들로 서울의 아차산성, 연천 임진강변의 호로고루 등이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한강유역에서 고구려 유물들이 아차산성을 중심으로 여러곳에서 출토되고 있지만 실제 유물들은 발굴을 주관한 서울대박물관이나 한국 박물관을 대표하는 중앙박물관에 대부분 전시되어 있고 경기도 박물관에는 일부만이 전시되어 있다. 신라는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래로 통일신라시대까지 이 지..

지역박물관 2012.01.07

[경기도박물관] 한성백제 시기의 유물

경기도 지역은 한강, 임진강을 비롯하고 크고 작은 강과 하천이 발달해 있고 넓은 농토와 서해안 갯벌 등 자연적 조건이 사람이 거주하기에 양호하여 구석기시대 이래로 사람이 거주해 왔으며, 신석기시대를 거치면서 정착농경생할에 따라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에는 삼한 중 마한 54개국이 자리잡았으며, 고구려에서 남하한 한성백제가 이 지역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이런 배경으로 경기도에는 많은 한성백제기의 유적들이 남아 있으며 주로 한성백제의 수도 위례성, 파주와 연천의 임진강 유역, 중국.일본과 무역활동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고양 멱절산과 화성 당황성 부근에 한성백제의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다. 경기도 박물관에서는 한성백제 유물로 육계토성이 있었던 파주 주월..

지역박물관 2012.01.06

[경기도박물관] 청동기시대 유물, 연천 삼거리유적 출토

경기도는 한강과 임진강, 서해안 갯벌을 중심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경기도의 선사유적지로는 연천 전곡리, 파주 장산리, 용인 평창리, 파주 주월리, 연천 삼거리 등 많은 유적지들이 발굴되고 있다. 청동기시대는 간석기와 민무늬토기 등을 사용한 시기로 본격적으로 정착농경이 시작되고 인구가 늘어나며 크고 작은 마을들이 생겨난 시기이다. 주거 유적과 함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는 이 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을 들 수 있으며, 경기도내에는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 지석묘를 비롯하여 상당히 많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한반도를 대표하는 청동기시대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고인돌 외에도 경기도에는 연천 삼거리, 여주 흔암리, 안성 마정리, 평택 소사동 등에서..

지역박물관 2012.01.05

[경기도박물관] 구석기, 신석기시대 유물

경기도는 한강과 임진강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와 서해안 갯벌이 있어 인류가 거주하기에 좋은 환경으로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지석묘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구석기 연구에 획기전인 발견이 되었던 연천 전곡리 유적지, 암사동 선사유적지 등 많은 선사시대 유적지가 남아 있다. 경기도 일대의 선사유적지들 중 구석기 유적지로는 연천 전곡리, 파주 가월리, 연천 강내리, 용인 평창리 등이 있으며 대표적인 유물로는 구석기시대 연구에 획기적인 발견이 되었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를 비롯한 주먹도끼, 자리개, 몸돌, 찍개 등 다양한 유물들이 집터에서 발견되고 있다. 토기를 제작하고 농경생활이 시작되기 시작한 신석기시대 유적는 큰강인 한강유역의 암사동과 여주 흔암리, 임진강 유역의 파주 주월리와 연천 삼거리, 경기 남부 지역..

지역박물관 2012.01.03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가구와 생활 용품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가구와 생활용품들이다. 박물관에 전시하는 유물로서는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없는 것들로 단순히 당시 사람들이 사용했던 가구들이나 생활용 등을 통해서 당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는데 의의가 있는 것 같다. 가구로는 조선시대 양반 남자들의 생활공간이었던 사랑방에 비치되었던 책상이나 문방구, 식탁이라고 할 수 있는 소반, 백자나 분청사기, 유기 등으로 만들어졌던 그릇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골동품이나 유물로서 큰 가치가 있는 것들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생활용품으로 전국의 고택 등을 방문하게 되면 전시되어 있는 옛 생활용품과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사랑방 가구, 사랑방은 남자 주인이 늘 거처하는 ..

지역박물관 2011.11.30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사람 일생을 보여주는 유물

조선시대 서울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왕도다운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서울사람들의 의식주 생활은 다른 지역에 살았던 사람보다 고급스러웠다. 그들의 생활은 대도시답게 다채롭고 번잡하였으며, 지방과는 다른 품격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 서울사람의 일생을 보여주는 생활과 관련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풍속화의 일종인 평생도이다. 평생도는 주로 잔치 등에서 사용했던 병풍에 그려졌던 그림으로 당시 사람들의 소방을 그려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로 과거에 급제에 관직에 진출하여, 다양환 관직을 거치는 삶을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전시된 유물들은 그리 다양편은 아니다. 평생도. 사람의 일생 중에서 주요 장면..

지역박물관 2011.11.29

[서울역사박물관] 옛문서로 본 조선의 수도 한양

서울은 1394년 조선이 수도로 정한 이래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수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서울은 이름은 한성부로 실제로 그 영은 현재의 종로구와 중구를 포함한 영역보다 좁은 범위로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한양도성과 도성 바깥 일부를 관할하기도 했지만 원칙적으로 도성안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한성부는 정2품인 한성판윤이 최고 책임자 였으며 행정구역으로는 오부와 방, 계.동으로 구성되었으며 인군 10만명 내외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 도성은 태조대에 처음 성곽을 쌓고 종묘와 사직, 궁궐 등을 짓기 시작하여 태종대에 궁궐과 관아, 가로와 시전, 그리고 수많은 주택들이 제각각 자리를 잡아 수도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양도성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쳐면서 도시의 상당부분이 ..

지역박물관 2011.11.27

[경주박물관 미술관] 황룡사지 출토 기와와 전

황룡사는 신라 칠처가람의 하나로 규모나 위상에 있어서 신라 최고의 사찰이었다. 황룡사는 진흥황 14년(553)에 월성 동쪽 지금의 구황동에 짓기 시작하여 17년만에 완성한 사찰이다. 현재 남아 있는 절터의 면적은 약 2만5ㅍ천여평에 달하며, 절터에는 당시 건물이 들어섰던 초석이나 불상이 있었던 석불대좌 등이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사찰의 가람배치는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일열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황룡사에는 신라 삼보 중 장륙존상과 경주의 랜드마크가 되었던 구층목탑이 있었고, 화가 솔거가 그린 금당벽화도 있었다. 또한 원효대사가 이 곳 황룡사 강당에서 강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 진흥왕때 처음 세워진 황룡사는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고려 고종 23년(129..

지역박물관 2011.11.08

[경주박물관 미술관] 황룡사 구층목탑 사리갖춤과 지진구

경주 황룡사는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으뜸가는 사찰로 진흥왕때 짓기 시작하여 선덕여왕 때 완성되었다. 황룡사에는 신라의 삼대 보물 중 두가지인 금당에 안치된 금동장륙존상과 구층목탑이 있었다고 한다. 황룡사구층목탑은 선덕여왕 때인 645년에 승려 자장의 권유로 세운 높이 80여m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로 몽고의 침입으로 1238년에 불타버리기까지 약 600여년의 세월 동안 경주 도심에 우뚝서 있으며 경주의 랜드마크가 되었던 웅장한 구조물이었다. 탑(Pagoda)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쌓은 구조물로 스투파라고도 한다. 탑은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서 유래했으며, 인도나 서역에서는 반구를 뒤집어 놓은 형태가 일반적이었으나, 중국을 거치면서 목조건축물 형식으로 바뀌었고 이후 중국에서는 벽돌로..

지역박물관 2011.11.07

[경주박물관 미술관] 신라의 금석문, 석경과 이차돈 순교비

삼국시대에는 진흥왕순수비, 남산신성비 등 국가정책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글자를 새겨 놓은 비석을 많이 활용하였는데, 이는 경주를 비롯한 특징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라의 영역에서 고루 분포되고 있어 비석이 통치의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비석에서는 당시의 관직, 인물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 사회 체제가 안정됨에 따라 국가 통치를 위한 비석의 필요성은 많이 줄어든 것으로 보이며, 이때부터는 왕이나 특정 인물의 업적을 찬양하는 목적으로 세운 비석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며, 비석의 이런 특징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부처의 사리를 모신 석탑의 건립은 점차 줄어드는 경..

지역박물관 2011.11.06

[경주박물관 미술관] 신라의 금석문, 글자가 새겨진 비석, 임신서기석(보물 1411호)

기원전 57년경에 건국된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세력을 장악하여 백제, 고구려와 함께 삼국시대를 이루는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신라는 내물왕 때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왜(倭)를 격퇴하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지증앙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제도가 더욱 정비되면서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호칭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이후 법흥왕대에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통치질서를 확립하면서 중앙집권체제을 완비하고, 김해지역 금관가야을 정복하여 한반도 동남부지역에서 그 세력을 확고히 하였다. 신라에서 문자를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는 크게 알려진 것은 없지만, 삼한시대 출토 유물에서 한자를 사용한 흔적이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한자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

지역박물관 2011.11.05

[경주박물관 미술관] 신라의 불교조각, 금동불상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28호)

불상은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좁게는 여래상, 넓게는 보살상과 신장상까지를 포함한다. 불상은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또는 마투라지방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불교의 전파경로에 따라 서역과 중국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전해졌다. 불상은 석재를 조각한 석조불상, 금속에 황금빛 도금을 한 금동불상, 철로 만든 철불상, 나무로 만든 목조불상 등이 있다.금동불은 동과 주석,납 등의 합금에 금도금을 입힌 불상으로 동의 제련, 합금, 주물, 도금 등 고도의 숙련된 주조기술과 고가의 재료인 동과 밀납을 필요로 한다. 금동불은 상당한 비용과 기술을 필요로 하지만, 정교한 조각이 가능하고 내구성이 뛰어났기때문에 많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금동불상은 그 용도에 따라서 수cm 작은 금동불..

지역박물관 2011.11.01

[경주박물관 미술관] 신라의 불교조각, 석조불상

불상이라 함은 부처의 형상을 회화.조각 등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조각상을 말한다. 불상에서 말하는 부처라 함은 여래의 상을 의미하는데 그 범위를 넓혀서 보살상, 신장상 등도 불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상은 불교가 탄생한 이래 수백년 동안 신앙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원래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Pagoda)이나 보리수,금강보좌 등이 불교신앙의 대상이었으나 불교가 서역을 통해서 동아시아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그리스나 이집트 등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지역과 인도의 마투라라는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하여 전파되었다고 한다. 동아시아에서 보여지는 부처의 형상인 불상에서는 사실적인 면이 강조되지 않아서 그리스나 헬레니즘문화권의 조각상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불상이 처음 생..

지역박물관 2011.11.01

[경주박물관 미술관] 사리갖춤, 황룡사 목탑 찰주본기와 감은사 사리갖춤(보물 366호)

사리(舍利)는 부처나 성자의 유골을 의미하며, 사리를 숭배하는 신앙은 불교가 처음 생긴 이래로 성행했다. 석가모니가의 사리를 8등분하여 인도 각지에 탑을 세운 것이 불탑의 시초이며, 아소카왕이 이를 세분하여 84,000개의 탑을 인도 각지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래되면서 불상이 신앙의 중심이 되기 이전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이 사찰의 중심이 되었으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까지는 탑을 중심으로 사찰의 가람을 배치하였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Pagoda)은 인도나 서역에서는 반구를 엎어 놓은 모양이었으나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전각의 형태를 취하게 되면서 목탑의 형태를 하게 되었다. 목탑은 중국, 한국, 일본에서 비슷한 형태로 많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 중국에는 벽돌로 쌓은..

지역박물관 2011.10.31

[경주박물관 미술관] 신라의 절터 출토 기와, '신라의 미소'라 불리는 얼굴무늬 수막새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으며, 그 중 불국사는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은 법흥왕때인 527년으로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우면서 국가적인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삼국시대 경주에는 7처가람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기던 숲이 있던 곳에 큰 사찰들이 들어서게 된다. 경주 동쪽편의 분황사와 황룡, 남쪽편 낭산 끝자락에 세워진 사천왕사, 서쪽편 오릉 주변의 영흥사, 영묘사, 담엄사, 흥륜사가 있다. 특히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능이 있는 오릉 주변에 많았다는 것은 불교 공인을 반대한 세력을 박씨들이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원래 경주의 중심이 오릉 주변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칠처가람에서 ..

지역박물관 2011.10.30

[경주박물관 미술관] 신라의 불교 미술

신라에 불교가 받아들여진 것은 고구려를 통해서 눌지왕때인 5세기 중엽이었으나 실제로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은 법흥왕 때인 527년 이차돈의 순교에 의해서이다. 이전까지 신라인들은 고분에 껴묻거리와 경주 낭산으로 비롯하여 지배계층이 신성시 여겼던 숲 등을 통해서 고유의 신앙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에서 불교는 왕실과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호국불교의 성격을 갖고 있다. 내물마립간 이후 찬란하게 꽃피웠던 황금문화는 불교가 국가적인 종교로 자리를 굳히면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마립간시기에 대릉원 일대 고분을 조성하는데 쏟았던 노력과 열정을 경주 각처에 사찰을 건립하는 데 쏟음으로써 화려한 불교 유물들을 오늘날까지 남겨 놓고 있다. 당시 신라..

지역박물관 2011.10.29

[경주박물관 국은기념실] 통일신라 기와, 불교공예품

삼국시대 신라를 대표하는 유물들은 마립간시기 고분에서 껴묻거리로 출토되는 금관을 비롯한 다양한 금속장신기와 토기들일것이다. 이런 껴묻거리를 무덤에 묻는 문화는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서 많이 약해진 것으로 보이며, 불교국가로 변신하기 시작한 법흥왕대 이후에는 이전에 고분을 조성할 때 쏟았던 노력과 관심이 사찰을 건립하고 유지하는 것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람들은 황룡사, 불국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찰들을 세웠으며, 그 중 일부가 석탑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문화재로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신라의 문화재 가운데 그 비중이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당시 절터나 건물터에서 발견되고 있는 기와들에서 당시 사람들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발견할 수 있으며, '신라의 미소'라고도 일컫어지는 영묘사 절터에서 발견된 ..

지역박물관 2011.10.27

[경주박물관 국은기념실] 삼국시대 장신구

신라 내물왕에서 지증왕 이전까지는 왕의 호칭이 마립간이었으며, 이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왕을 부를때 사용하는 '칸'이라는 호칭과 비슷한 유래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 월성 북쪽 대릉원 일원에 있는 신라의 고분들은 대체로 마립간시기에 조성된 것들로 황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비롯하여 많은 껴묻거리들을 무덤에 함께 묻었다. 금관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여러 고분들에서 금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화려했던 당시 신라의 모습을 오늘날까지 남겨 놓고 있다. 국은 기념실에서는 공식적인 발굴.조사작업을 통해 출토된 유물 이외에 개인적으로 수집했던 것으로 보이는 삼국시대 장신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실에 전시된 신라의 장신구들도 그 종류가 다양한 편이며, 당시 신라인..

지역박물관 2011.10.25

[경주박물관 국은기념실] 토기, 기마인물형토기 (국보275호)

국은기념실에 전시된 유물 중 가장 잘 알려진 유물인 국보 275호로 지정된 기마인물형토기를 비롯한 토기들이다. 기마인물형토기는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가야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기마인물형토기는 나팔모양의 받침 위에 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말을 탄 무사의 형상을 올려놓고 있는데 그 표현방법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당시 가야무사의 모습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무사는 머리에 투구를 쓰고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뒤쪽에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각배가 있다. 기마인물형 토기와 함께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에서 삼국시대의 그릇받참까지 다양한 양식의 토기류들도 같이 전시되고 있는데 그 중 경주 교동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오리모양토기는 경주지..

지역박물관 2011.10.24

[경주박물관 국은기념실] 초기철기시대 청동기 유물, 경주 죽동리 출토유물 (보물 1152호)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중국 요하지역을 중심으로 한 동북지역과 한반도를 주무대로 하여 기원전 15세기 무렵에 시작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은 당시 지배층의 무덤인 고인돌과 요령식동검이라고도 하는 비파형 동검의 분포지역과 비슷하며 유사한 문화권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들은 한.중.일 해상무역로를 따라서 고조선을 비롯하여 한반도 남부의 삼한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에는 비파형 동검, 한국형 동검, 청동투겁창 등 무기류와 청동방울 등 의기류, 생산도구, 수레부속구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에는 실제로 칸돌칼이나 벼농사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돌을 갈아서 만든 도구들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이들 청동기들은 실제로는 의례용이나 신분을 상징하는 목적으로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지역박물관 201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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