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반응형

분류 전체보기 4139

[서울역사박물관] 옛문서로 본 조선의 수도 한양

서울은 1394년 조선이 수도로 정한 이래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수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서울은 이름은 한성부로 실제로 그 영은 현재의 종로구와 중구를 포함한 영역보다 좁은 범위로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한양도성과 도성 바깥 일부를 관할하기도 했지만 원칙적으로 도성안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한성부는 정2품인 한성판윤이 최고 책임자 였으며 행정구역으로는 오부와 방, 계.동으로 구성되었으며 인군 10만명 내외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 도성은 태조대에 처음 성곽을 쌓고 종묘와 사직, 궁궐 등을 짓기 시작하여 태종대에 궁궐과 관아, 가로와 시전, 그리고 수많은 주택들이 제각각 자리를 잡아 수도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양도성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쳐면서 도시의 상당부분이 ..

지역박물관 2011.11.27

[이탈리아여행] 리알토다리(Ponte di Rialto),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명장면

리알토다리(Ponte di Rialto)는 베네치아 도심을 가르는 대운하(Grand Canal)을 4개의 큰 다리 중 하나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리알토다리는 1181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처음에는 부교 형태로 세워졌다가 1255년에 나무다리로 바뀌었다. 리알토다리는 대운하 오가는 함선을 비롯한 큰 배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아치형으로 높게 세워졌으며,1310년 함대 퍼레이드 행사을 구경하러 몰려든 인파에 의해 붕괴되었으며, 1524년에도 다시 한번 붕괴되었다고 한다. 대리석으로 만든 현재의 다리는 1551년 유명한 건축가인 Jacopr Sansovino 등이 설계에 참여하여 아케이드를 갖춘 아치형의 다리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리알토다리는 베네치아의 첫번째 다리로 대리석으로 만든 아치형의 다리와 다리위..

이탈리아(Italy) 2011.11.27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문서에 보이는 신라 마을의 모습, 일본 정창원 문서

한반도에서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청동기시대가 아닐까 생각된다. 문헌상으로도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존재했고, 기자나 위만의 존재가 있었고, 중국에서 한반도 연안을 거쳐 일본으로 연결되는 해상무역이 활발히 이루졌기때문 낙랑지역을 비롯하여 창원 다호리, 김해 예안리 유적 등에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기때문에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한자를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한자를 사용한 기록은 고대국가에서 부터 목간이나 토기를 비롯한 생활용품에 새겨진 명문,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기록한 비석의 형태로 많이 남아 있다. 반면에 한나라에서 발명된 종이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한반도에 도입되었으나 종이에 적혀진 문서의 형태로는 남아 있는 유물을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중앙박물관 2011.11.26

강화 굴암돈대, 강화도와 석모도 사이 바다를 지키던 돈대

조선 숙종 5년(1679)에 강화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53돈대 중 강화도와 석모도 사이의 바다를 감시하는 굴암돈대이다. 강화도 양도면 하일리 바닷가 언덕에 위치한 이 돈대는 강화해안방어를 위해 강화도호부에 설치한 진무영 소속의 돈대라고도 하며, 외포리에 있었던 정포보 소속이라고도 한다. 강화도 마니산 서북쪽 해안을 경계하고 있으며, 지금도 이 곳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돈대이다. 굴암돈대 북쪽으로는 가까운 곳에 정포보 소속의 건평돈대가 남쪽으로는 장곶보 소속의 송강돈이 있다. 굴암돈대는 원형으로 석축을 쌓은 형태를 하고 있으며, 잘 다듬은 큰 화강석 석재로 석축을 쌓고 있어서 꽤 견고해 보인다. 이 돈대가 위치한 곳은 바닷쪽으로 돌출해 있는 낮은 언덕에 자리..

강화 고천리 고인돌군, 고려산 중턱에 분포하고 있는 지석묘

고인돌(dolmen)이라고도 부르는 지석묘는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으로 중국 만주의 랴오닝성과 산동반도, 일본 규수지방에서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중국 본토와는 구별되는 지역적 특징을 갖는 유물 중 하나이다. 한반도에는 4면을 판석으로 막고 그 위에 상석을 올린 탁자식고인돌, 지하에 묘실을 파고 상석을 올려놓은 바둑판식이 있다. 탁자식은 주로 북방지역에서 많이 분포하여 북방식, 바둑판식은 남쪽지역에서 많이 분포하여 남방식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화 고천리 고인돌군은 고려산 정상 서쪽 능선 아래 해발 350m 지점에 분포하고 있는 청동기시대 무덤인 지석묘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에는 약 18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강화지역에 남아 있는 다른 고인돌과 바찬가지로 4면을 판..

[이탈리아여행] 베네치아 산마르코대성당(Basilica San Marco), 도시의 수호성인 산마르코를 안치한 성당.

산마르코대성당(Basilica Cattedrale Patriarcale di San Marco)은 물의 도시 베네치아 중심에 위치한 대성당을 이 도시의 수호성인인 산마르코의 유골을 봉안하고 있는 성당이다. 산마르코(San Marco)은 신약 마가복음의 저자로 초대 알렉산드라대주교로 영어로는 Mark라고 쓴다. 로마카콜릭과 동방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공증인.안경사.유리제작자.동물사육자.번역가.베네치아의 수호성인으로 사자를 옆에 두고 복음서를 저술하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진다고 한다. 산마르코는 베드로의 통역으로 일하면서 예수의 언행과 행적을 기록했다고 하며 58~62년에 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순교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의 시신이 9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한 성당에서 발견되..

이탈리아(Italy) 2011.11.24

강화 망양돈대, 외포리선착장 뒷편에 위치한 돈대

조선 숙종 5년(1679)에 강화 지역 해안선 방어를 위하여 쌓은 53돈대 중 강화도와 석모도 사이의 좁은 수로를 지키는 망양돈대이다. 망양돈대는 강화도와 석모도를 연결해 주는 카페리호 선착장이 있는 외포리선착장 뒷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망양돈대가 지키는 수로는 강화도와 석모도 사이의 마다 중 그 폭이 가장 좁고 썰물시에도 갯벌이 잘 드러나지 않는 협곡과 비슷한 지형으로 강화해안에서는 선박이 정박하기 좋은 곳이다. 망양돈대는 석각돈, 삼암돈, 건평돈과 함께 내가면 외포리 '성안'이라고 불리는 곳에 있었던 정포보 관할의 돈대이다. 외포리 선착장 서쪽편 언덕에 위치한 이 돈대는 높이 3m, 폭 25m, 둘레 120m 정도의 정방형돈대로 바다 방향으로 4문의 포를 장착할 수 있는 포좌와 성벽위에 여장을 두..

[서울성곽(한양도성)], 북악산 성곽길 걷기

서울 성곽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도성으로 태조가 조선을 개국한 이래로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북쪽의 북악산(백악산), 동쪽 낙산, 남쪽 남산(목멱산), 서쪽 인왕산을 연결한 총 길이 18.2km의 성곽이다. 처음에는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쌓았던 것을 세종 27년에 석축성으로 보수하였으며, 병자호란 이후 숙종대에 대대적은 보수작업을 통해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서울성곽은 조선이 개국한 이래로 끊임없이 보수작업이 이루어졌기때문에 시대에 따른 성곽 축성방법을 볼 수 있다. 서울 성곽 중 북쪽편 성곽에 해당하는 북악산은 조선이 한양을 도읍을 정할때 주산을 해발 342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산세는 험한편이라 할 수 있다. 북악산 성곽은 1960년대 무장공비 침입이후 전면적으로 통제되었다가 20..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이두와 향찰의 발명,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우리나라에 한자가 수용된 이후 우리말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두, 향가, 향찰, 속자, 구결 등 다양한 형태로 방법들이 만들어졌는데, 보통 이를 통털어서 이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두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서 우리말을 적던 표기법으로 삼국시대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고려때에는 이서라는 형태로 하급관리들이 공문서나 관용문에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보통 이두는 넓은 의미로 한자를 차용해서 음을 표기한 것을 통칭하며, 현재의 일본어 또한 이두와 비슷한 개념의 문자라 할 수 있다. 이두는 신라초기부터 사용되어 진 것으로 보이며 서동요, 제망매가 등 다양한 문학작품이 이두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 신문왕때 설총이 기존의 이두사용법을 정리하여 크게 발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두의 사용은 삼국유..

중앙박물관 2011.11.22

강화 홍릉(사적 224호), 무인정권기 대몽항전을 이끈 고려 23대 고종의 능

강화도의 주산인 고려산 남동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 23대 고종의 능인 사적 224호로 지정된 강화 홍릉이다. 고려 고종은 최충헌 집권기에 왕위에 올라 대몽항전을 거치면서 몽고에 항복하기까지 약 46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고종은 최충헌 일가가 집권하던 시기였기때문에 실권없었던 최씨정권을 몰아내고 몽고와 강화를 했던 그해에 죽어서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강화에 묻혀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종의 재위기에는 무신정권기란 어려움도 있었지만 몽골이 동아시아는 물론 중동과 서구까지 그 영향을 미쳤던 세계사적으로도 격변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고려도 거란.몽골 등의 침입을 받아 전국토가 초토화되고 인명과 문화유산의 손실도 상당히 컸던 시기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국내외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팔만대..

강화 계룡돈대, 강화도 서북쪽 제방 남쪽끝 작은 섬에 세워진 돈대

조선 숙종 5년(1679)에 강화 지역 해안선 방어를 위하여 쌓은 53돈대 중 강화도 서북쪽 해안에 쌓은 제방 남쪽 작은 언덕위에 세워진 계룡돈대이다. 계룡돈대가 위치한 곳에 원래 갯벌위에 있던 작은 섬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북쪽 무태돈대가 있는 창후리선착장까지 길게 쌓은 해안 제방이 시작되는 지점을 북쪽편으로는 별립산, 봉천사, 고려산까지 이어지는 넓은 평야가 펼쳐지는 곳으로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고인돌이 주로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다. 남쪽편으로는 국수산과 황청리, 외포리 선착장이 있고, 석모도의 넓은 간척평야와 마주하고 있다. 갯벌위에 있었던 작은 섬에 쌓은 계롱돈대는 길이 30m, 너비 20m, 석축높이 3~5m로 작은 규모의 돈대이다. 북쪽편으로는 망양돈대가 있고 남쪽편으로는 지금은 남아 ..

[이탈리아여행] 베네치아 산마르코 대성당의 4마리 청동 말조각상(La quadriga)과 모자이크 벽화

베네치아의 수호성인 산마르코의 유골을 모신 산마르코 대성당은 2명의 상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에서 훔쳐온 산마르코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 829~832년에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 이 대성당 처음 세워진 것과 같는 과정으로 이 대성당에는 동방 비잔틴 제국이나 그리스, 이집트 등지에 수많은 유물들이 약탈하거나 훔치는 과정 등을 통해서 이 대성당을 장식하고 있다. 이런 유물들을 대표하는 것이 대성당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시대에 만들어진 4마리의 말청동조각상(La quadriga)일 것이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청동으로 만든 4마리의 말 청동조각상은 1254년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 것들은 한때 트라야누스 개선문(Arc of Trajan)을 장식했었다고하며 오랜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플의 히포드럼에 전시되었다..

이탈리아(Italy) 2011.11.21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삼국시대 사상,종교와 문자

고대국가에서 국가나 집단간의 교역을 위한 경제적인 동기와 지배계층의 권위를 나타내거나 통치를 위해서 문자의 사용이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자의 기원 또한 길흉화복을 점치는 행위에서 그 내용을 기록하는 갑골문자 등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종교적인 행위가 당시에는 지배계층의 통치를 위한 정치적인 활동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대국가에서 통일신라까지 시기의 문자 기록 중 상당수는 종교적인 행위와 관련이 있는 것이 많다. 대표적으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은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며, 가장 오래된 문서 또한 붓으로 쓴 사경이다. 삼국시대에는 종교적인 내용이 담긴 목간이 많이 출토되고 있으며, 중국의 능묘제도가 받아들여진 이후에는 개인의 업적을 칭송한 묘지비..

중앙박물관 2011.11.20

강화 망월돈대, 바다를 막은 제방에 쌓은 돈대

조선 숙종 5년(1679)에 강화 지역 해안선 방어를 위하여 쌓은 53돈대 중 강화 서북쪽 해안에 쌓은 제방에 위치한 망월돈대이다. 이 돈대가 위치한 강화군 하점면 망월리 일대는 남쪽편 외포리 부근 국수산와 북쪽편 별립산 주변을 긴 제방으로 연결하여 간척한 곳으로 넓은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 간척지는 조선후기 강화도 국방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 자체적인 식량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토목공사였다고 한다. 망월돈대는 강화도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고려저수지에서 흘러내려오는 내가천 수로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보통 돈대는 해안가 높은 언덕에서 사방을 감시하기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반면에 이 곳 망월돈대는 해안가 평지에 약간의 둔덕을 만들어 그 ..

강화 무태돈대, 교동도 입구 바다를 감시하던 돈대

강화도 해안에 구축한 53돈대 중 교동도와 강화 본섬 사이의 해로를 지키던 무태돈대이다. 돈대는 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방어할 목적으로 접경지역이나 해안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 방어시설로 총포와 화포가 전쟁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병자호란 이후에 나타난 방어시설로 강화도의 돈대는 숙종때 강화유수 윤이제가 승군 등을 동원하여 40여일만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무태돈대는 인화돈 등과 더불어 인화보 소속으로 삼도수군통어영이 있었던 교동도 남산포의 경기수영 외곽수비를 담당하는 기능도 함께 가지고 있던 돈대이다. 석축으로 쌓은 직사각형의 돈대로 길이가 44m 정도이다. 돈대에는 바다방향으로 포좌4문과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무태돈대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교동도와 강화본섬을 오가는 카페리호가 정박하는 창후리 선착장 북..

[맛집] 강화 더리미집, 장어구이로 유명한 더리미마을에서 제일 오래된 집

강화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인삼, 순무, 병어회, 꽃게, 장어구이 등이 있는데 그 중 강화도와 육지 사이를 흐르는 염하에 자리잡고 있는 더리미마을은 장어구이집이 모여 있는 마을이다. 초지진에서 시작하여 문수산성 아래 연미정까지 이어진 염하에서 거의 유일하게 어선 정박하는 작은 포구가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염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장어를 잡았던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는 곳이다. 더리미마을에는 장어구이를 하는 식당이 여러곳 있는데 그 중 제일 오래되었다는 더리미장어구이를 찾아가 보았다. 더리미마을에서는 파는 장어구이는 일반적인 양식장어와 갯벌에 양식한 장어가 있는데, 갯벌에서 키운 것이 약간 비싸다. 장어는 초벌구이를 한 것을 숯불에 구워먹는데 보통 장어구이와 큰 차이는 없어보이지만 괜이 맛있다는 느낌을 준다...

맛집 2011.11.18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삼국시대 글자가 새겨진 토기와 기와

삼국시대 사람들이 문자를 사용했던 흔적들은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돌에 글을 새긴 비석일 것이다. 비석에서는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후대에 만들어진 역사서 등을 통해서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반면에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한 문자는 화물이나 물건의 꼬리표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던 목간이나 그릇, 건축에 사용한 벽돌이나 기와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기와나 토기는 전국적으로 많이 발견되는편인데, 주로 제작연도나 제작자, 제작경위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이런 유물들 중 지명이나 마을이름 등이 적혀 있는 것에서 당시 이런 물건들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집..

중앙박물관 2011.11.18

강화 교동도 화개산 봉수대와 정상에서 내려다 본 풍경

강화도 서북쪽 한강이 서해바다와 만나는 곳에 위치한 교동도의 주산이라고 할 수 있는 화개산은 해발 269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주위에 높은 산이 없어서 북한의 연백평야를 비롯하여 서해안의 크고 작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아주 좋은 산이다. 화개산은 한강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특징때문에 삼국시대 이래로 국방상 중요한 요지였으며, 광개토대왕이 한성 백제를 제압하기 위해 산성을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고려시대에 쌓은 화개산성의 석축들이 일부 남아 있다. 화개산 정상 동쪽편에 있는 연봉 정상에는 조선시대 비상통신수단이었던 봉수대 석단이 남아 있다. 이 봉수대에 올라서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강화 본섬의 덕산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동쪽편 하점면에 있는 봉천산 봉수로 응한다고 되..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삼국시대 목간과 글자가 새겨진 생활용품

목간은 글을 적은 나뭇조각으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문서라고도 할 수 있으며 책(冊)이라는 한자의 어원이 된다. 대개 나무를 폭 1cm, 길이 20~30cm, 두께 3mm 정도로 끈으로 묶어서 사용했는데, 지금의 책과 비슷한 크기라고 할 수 있다.논어를 비롯한 춘추전국시대의 다양한 저서들이 적혀 있는 목간들이 중국에서도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목재가 잘 부패하지 않는 사막이나, 뻘에 묻혀 있던 상태로 많이 발견된다. 목간은 우리나라에서 여러지역에서 발견되는데 특히, 경주 안압지를 비롯하여 삼국시대에 적혀진 목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목간은 고조선때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한.중.일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지역에서는 교역을 위한 경제적인 목적으로 한자..

중앙박물관 2011.11.17

강화 교동도 대룡시장, 70년대 시골장터의 모습이 남아 있는 곳

교동도는 강화도 북서쪽의 한강 하구에 자리잡고 있는 섬으로 북녘땅인 연백평야와 마주하고 있는 큰 섬이다. 주산인 해발 260m의 화개산을 중심으로 주변의 크고 작은 섬들을 제방으로 연결하여 간척한 농지가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교동도를 들어가는 길은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선착장에서 교동도 월선포를 연결해주는 카페리호가 유일한 교통수단이며, 지금은 강화 인화리와 교동들을 연결해 주는 연육교가 한창 공사중이다. 교동도는 조선시대에는 강화도와는 별개로 교동부라는 독립된 고을이 있었다. 그래서 원래 관아와 경기수영이 있었던 남산포와 읍내리가 이 섬의 중심지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넓은 간척지 평야와 가까운 화개산 서쪽편 대룡리에 면사무소와 학교, 시장 등이 들어서면서 섬의 중심지가 옮겨졌다. 교동도는 북녘땅인..

한국의 풍경 2011.11.17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