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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조선의 왕궁

younghwan 2010. 1. 30.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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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지금의 서울은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줄곧 서울을 수도로 하였으며, 한양 도성안에는 북궐인 경복궁, 동궐인 창덕궁, 창경궁, 서궐인 경희궁과 지금은 덕수궁으로 불리는 구한말 역사 현장인 경운궁이 있었다. 그 중 창덕궁을 비롯한 동궐은 태종이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그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으며, 경복궁은 임진왜란때에 불타버린것을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국력을 총 동원하여 복원한 궁굴이다. 서울을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읍이었으며, 임진왜란 등의 전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권위가 높았던 까닭에 일본 교토에 비해서 궁궐의 규모나 수량에 있어서 크다고 할 수 있으며, 중국 북경자금성과 비교해서는 작지만 유교 법도에 따른 동아시아 국가의 궁궐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경복궁 근정전 닫집을 축소한 모형.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어좌(용상.옥좌)와 일월오봉도(일월오악도) 병풍이 있다. 닫집은 고대 이래로 신성의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 설치하는 작은 집이다.

닫집은 본래 존귀하고 신성한 분과 그 형상에 먼지.비바람.태양빛 등이 직접 닿지 않게 하기 위하거나 신성하고 위엄스럽게 보일 목적으로 건물 안에 설치한 작은집이다. 당가.운궁.보개천장이라고도 하였다. 왕궁의 정전, 왕실의 사당, 사찰 법당의 닫집은 더욱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 현재 서울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 등 조선 왕궁의 정전에는 크고 화려한 닫집이 전하고 있다. 이 닫집 모형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의 닫집을 65% 축소한 것이다. 이 닫집 모형에서 보듯 왕궁의 닫집 중앙에는 어좌.용상.옥좌라고 하는 왕이 앉는 의자가 있다. 어좌 아래, 즉 닫집의 기단은 탑 또는 어탑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왕의 어좌 및 왕의 앞은 탑진이라고 불렀다. 닫집의 천장에는 왕을 상징하는 용 두마리를 여의주 구름 문양과 함꼐 그려 놓았다. 어좌의 뒤에 설치된 병풍은 다섯 봉우리의 산과 바다.태양.달 등을 그린 그림으로 이름을 일월오봉도 또는 일월오악도라고 불렀다. 닫집과 어좌 그리고 장식 및 문양과 일월 오봉도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왕.왕권.왕조를 상징한다.<출처:국립중앙박물관>

경복궁 근정전 내부의 닫집 실물 모습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즉위.즉조.등극 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왕은 자신의 아들이나 손자 가운데 다음 왕위에 오를 사람을 미리 정하였는데, 이를 세자.세손이라 불렀다. 왕이 죽으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세자나 세손이 다음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라나 세자.세손이 없을 경우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 또는 대왕대비가 새 왕을 지목하였다. 이때 왕자가 아닌 왕족이 왕이 되면 그 아버니는 대원군이라 하였다. 왕이 죽으면 대비는 왕과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인 국새를 잠시 보관하였다가 새 왕에게 전한다. 왕의 즉위식은 왕궁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을 하는 장소인 정전에서 거행한다. 왕의 즉위식은 왕이 왕과 국가의 상징인 국새를 받고 어좌에 올라 앉는 의식이다. 다만 국새는 전왕의 시신이 안치된 빈전에서 받았다. 왕이 어좌에 앉으면 신하들은 새 왕의 탄생을 축하하며 천세를 외쳤다. 즉위식을 마치면 조선 왕실은 왕이 사망하고 새왕이 즉위한 사실을 이웃 나라에 알렸고, 특히 중국 황제는 전왕의 시호와 함께 새 왕에게 곤룡포 등을 보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동궐도(복제품). 서울의 창덕궁과 창경궁을 실물처럼 정밀하게 그려놓고 있다.

조선왕조의 여러 왕궁 가운데 가장 크고, 으뜸으로 삼은 왕궁은 경복궁이며, 그 별명은 북궐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경복궁 동쪽에 있다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창덕궁은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탄 이후 1867년 복원되기까지 270여 년간 경희궁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왕궁이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그리 이 동궐도는 왕궁의 그림을 담당한 관청인 도화서 전문화가인 화원이 그렸다. 왕궁 주위의 산과언덕은 전통화법으로 그렸으나 건물 표현과 원근 처리에서 일부 서양의 화법도 보인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 왕궁의 모습과 궁중 회화의 높은 품격을 잘 보여 준다. 특히 일제 강점기 이후 훼손된 동궐을 복원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현판에 적힌 고종 임금이 친히 지은 시, 규장각 이문원에서 왕과 신하가 함께지었다고 한다.

경복궁 태원전 현판

이 현판은 조선 고종임금 때 왕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복원된 경복궁의 건물 가운데 하나인 태원전의 현판이다. 고종임금 때 태원전은 처음에슨 왕실의 진전으로 사용하였다. 조선 고종 32년 을미사변 때 왕후가 일본에 의하여 비참하게 시해되었다. 명성황후의 장례는 이후 2년간 이루어졌다. 1897년 4월 거행되는데 이 때 태원전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모시는, 즉 빈전으로 사용하였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경연학사지서

경연이란 왕과 신하가 한 자리에 앉아 경전과 역사를 강의하고 토론하는 자리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경연은 대개 왕에 대한 교육을 가리킨다. 경연청은 경연 및 그와 관련된 사무를 맡은 관청이며 왕궁 안에 있었다. 이 현판에 새겨진 '경연학사지서'란 경연청에 근무한 학사들의 사무실이라 여겨진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제일의 법궁 경복궁의 법전인 근정전.

동궐인 창덕궁 법전인 인정전

조선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 수창궁에서 1392년 이성계가 세운 나라이다. 조선은 태조 4년 10월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한양에 있었던 조선의 대표적인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이다. 이 가운데 경복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지은 정궁인데,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빈 터로 전하다가 고종때인 1867년 복원하였다. 태종이 건립한 창덕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궐로 불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희궁과 함께 조선 왕실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경희궁은 본래 정원군의 사저였는데, 왕기가 있다하여 광해군이 빼앗아 궁으로 증축하고 이후 서궐이라고 불렀다. 창경궁은 처음 이름이 수강궁이었다. 1481년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르자 생존한 아버지이자 상왕인 태종을 편안히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지었다. 그후 성종이 어머니 인수대비를 포함한 3명의 대비를 편안히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지었다. 그 후 성종이 어머니 인수대비를 포함한 3명의 대비를 모시고자 증축하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함께 동궐로 불리게 되었다. 경운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옛집이었는데, 임진왜란 후에 선조가 행궁으로 이용하여 궁이 되었고, 광해군 때부터 경운궁이라 불렀다.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주무대였으나 고종황제가 일본에 으하여 강제로 퇴위당한 후 거주하면서 명칭을 덕수궁이라 고쳐 불렀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의 수도와 왕궁
고려는 송악의 호족 왕건이 신라 경명왕2년 태봉의 수도인 철원에서 왕 궁에를 내몰고 세운 나라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919년 조상 대대로 지지 기반이 있는 송악으로 수도를 옮기고, 이름을 개경이라 하였다. 고려는 국가의 방비와 역사적 위상을 감안하여 지금의 평양에 서경, 경주에 동경, 서울에 남경이라는 작은 수도를 설치하였다. 이 가운데 서경은 고려가 고구려을 계승한 나라이며 북방을 개척하는 전진 기지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개경에는 고려의 정궁인 본궐과 본궐을 보조하는 궁들이 다수 있었다. 본궐을 보조하는 궁을 이궁이나 별궁이라 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수창궁, 대명궁, 연경궁 등을 들 수 있다. 고려는 세계 대제국인 몽골, 즉 원나라에 대항하려고 고종 20년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강도라 불렀다. 이후 원나라에 굴복하여 개경으로 돌아온 고려는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 본궐은 의례의 장소로만 사용하고 수령궁과 연경궁을 정궁 대신 사용하였다. 1359년에 있었던 홍건적의 침략으로 본궐과 연경궁이 불타자 공민왕은 임시로 지은 궁궐에서 거처하다가 살해되었으며, 우왕은 몽골의 침략으로 불탔던 수창궁을 복원하여 정궁으로 삼었다. 이 수창궁에서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1392년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나라를 넘겨주었다. 고려는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수도 개경의 지덕을 살리고 국운을 상승시킬 3곳의 소, 즉 삼소를 길지로 정하기 하였다. 삼소는 시대와 해석에 따라 위치를 달리하였는데, 종종 궁궐을 건립할 후보지나 천도의 목적지가 되곤 하였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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