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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사찰

합천 가야산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있는 법보사찰

younghwan 2010. 9. 12.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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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 가야산 해인사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팔말대장경판을 비롯하여 많은 불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송광사, 통도사와 더불어 법보사찰로 3대 사찰 중의 하나로 불리는 사찰이다. 해인사는 의상대사가 세운 화엄10찰 중의 하나로 통일신라시대부터 전국의 유명한 사찰 중의 하나로 불리었다. 화엄사는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할 때 큰 공을 세워 화엄사상을 크게 떨쳤다고 한다.  당시에 죽은 승려와 주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세운 길상탑이 해인사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조선초 강화 선원사에 있던 고려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겨오면서 법보사찰로서 그 이름이 크게 아려지게 되었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을 중심으로 사찰이 유지되었던 까닭에 불전이나 석탑처럼 가시적인 건축물이 많이 전해 내려오지는 않는다.
 
 해인사에는 수차례에 걸친 화재로 인해 오래된 불전이 없지만, 하늘이 도와서 인지는 몰라도 한국전쟁의 폭격 위험에서 살아 남는 등 장경판전은 많은 위험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해인사가 가야산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 까닭에 통일신라시대의 문인 최치원을 비롯하여 대각국사 의천, 사명대사, 최근의 성철스님까지 유명한 고승이나 문인들이 이 곳에 머무르면서 수도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 해인사의 풍경은 최근에 너무 많은 전각들을 새로이 신축한 까닭에 봉정사나 부석사같은 고풍스러운 멋은 많이 떨어지지만, 팔만대장경의 존재만으로도 그 가치가 넘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위대한 기록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모셔진 해인사 장경판전. 소박하면서도 단아하게 지어진 건물에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1. 일주문, 들어가는 길


해인사는 다른 사찰에 비해서 입구에서 많이 떨어져 있고, 들어가는 길은 수목이 우거진 숲길로 산사라는 의미가 깊게 다가오는 사찰이기도 하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에는 산길도 있고 맑은 계곡물도 흐르는 자연이 살아 숨쉬는 길로 숲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2. 비석거리, 부도전, 원경왕사비


해인사 입구에는 해인사의 내력을 말해주 듯 많은 공덕비들이 있고, 그 뒷편으로는 성철스님을 비롯한 많은 고승들의 부도들이 모여 있는 부도전이 있다. 그 중 가장 크고 내력이 있어 보이는 탑비로는 고려시대 국사를 지낸 고승 원경왕사를 기리는 원경왕사비가 있다.

3. 해인사 길상탑


해인사 입구에 있는 크지 않은 3층석탑으로 길상탑이라 한다. 이 길상탑은 통일신라후기, 치열했던 왕위쟁탈전 속에 장보고가 죽었던 그 시기에 해인사를 지키기 위해 죽은 승려와 주민들을 위해서 세운 석탑이라하며 일반적인 석탑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는 석탑이다.

4. 봉황문, 해탈문


가야산 해인사는 우리나라 3대사찰답게 2단계의 출입문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출입문을 지키는 의미로 천왕문격인 봉황문을 지나문 국사단을 지어놓고 있다. 해인사 첫번째 출입문은 봉황문으로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는 천왕문격이며, 그 안에는 조각으로 만든 사천왕상이 아닌 탱화로 사천왕상을 그려놓고 있다. 봉황문을 지나면 계단을 올라 두번재 출입문이 해탈문을 지나서 첫번째 경내 마당에 들어서게 된다.

5. 누각강당인 구광루와 보경당


구광루는 가야산 해인사 경내에서 강당 역할을 하는 누각을 근래들어서 아주 크게 지은 건물로 현 해인사 중수 결과 중 보경당과 함께 혹평을 많이 받는 부분이다. 누각은 사찰을 찾는 사람들이 설법을 듣거나 잠시 앉아서 쉬는 곳으로 누각에서 사찰의 풍경을 조용히 차분히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의 해인사 구광루는 전혀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보물을 보관하는 보관장으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건물의 규모도 사찰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서 너무 크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충남 예산 수덕사의 황화정루와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는 건물이다.

6.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비롯하여 많은 불경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사찰로 대장경과 장경판전을 제외하고는 문화재는 많지 않은 편으로 각 불전이나 요사채들의 내력또한 깊지 않은 편이다. 해인사에는 원래 이 불경들을 지키기 위해 많은 스님들이 기거했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해인사가 깊은 산중에 있었던 까닭에 이 곳을 방문하는 신도들 또한 이 곳에서 묵고 가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해인사에는 많은 요사채들이 있으며, 대부분 건물 규모도 크고, 건물을 지은지 오래되 보이지는 않았다.

7. 중심불전인 대적광전


법보사찰인 가야산 해인사 중심불전인 대적광전이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이 중심불전인 일반 사찰과는 달리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고 있기 때문에 대적광전이라 부른다. 건물은 수차례의 화재로 인한 소실과 중수를 거듭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구한말 순조때 새로 지은은 것을 1971년대 대폭 수리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을 토대로 과거 건물을 모습을 추론해 보면 구례 화엄사 각황전과 비슷한 통일 신라시대 금당의 모습을 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 규모 또한 후대의 대웅전 건물에 비해 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의 건물도 그 크기가 상당히 큰 편이고, 조선시대 이후 우리나라 건물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치미를 사용하고 있다.


8.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



해인사 장경판전은 사찰경내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전각으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해인사를 살펴보면 중심불전을 제외하고는 별로 내세울만한 전각이나 석탑 등의 문화재는 별로 없는 편이고, 요사채와 부속암자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 해인사를 법보사찰이라 불리며 우리나라 3대 사찰에 포함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이 팔만대장경을 비롯하여 많은 불경판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경판전은 해인사에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경내 많은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곳 장경판전은 오늘날까지 전란이나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고 팔만대장경을 지켜왔다. 이 장경판전은 15칸 건물 두동을 나란히 배치하고 있는데, 장식이나 모양새 등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대장경을 온전히 보전하고자하는 기능적인 면만 강조되고 있다.

9. 대비로전, 명부전, 웅진전, 국사전, 독성각, 학사대 전나무


해인사는 신라시대부터 존재해 온 아주 오래된 사찰이지만,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 판전을 제외하고는 유서깊은 사찰전각이 별로 없는 편이다. 현재 중심불전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대비로전, 웅진전, 명부전이 있다. 토속신앙과 관련된 전각으로 사찰입구에 국사단이 있는데 이는 보통 사찰의 산신각에 해당하는 전각이고 뒷쪽에는 또다른 민간신앙의 대상인 독성각이 있다. 대부분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 불전이다.

해인사 뒷편에 있는 학사대 전나무.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선생이 꽂은 지팡이가 자랐다는 전설이 있다.

10. 삼층석탑


해인사 경내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삼층석탑이다. 정중탑 또는 비로탑으로도 불리는 석탑으로 원래는 2층기단에 3층탑신을 하고 있었지만, 1926년에 기단을 한층 더 올렸다고 한다.


삼층석탑 앞 석등

11. 당간지주, 석등


해인사 대적광전 앞에서는 절터나 오래된 사찰에서 석탑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남아서 절터였음을 알려주는 문화재인 당간지주가 철당간과 함께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최근에 만든 당간지주와 당간을 볼 수 있다. 1쌍의 당간지주와 붉은 칠을 한 당간이 대적광전 앞 경내 마당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마도 행사에 필요한 걸개그림을 걸어두는 용도란 것은 알았지만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처음 보았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서남쪽 기슭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의 본사로 75개의 말사와 14개의 부속암자를 관리하고 있다. 통도사·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삼보(三寶 : 佛寶·法寶·僧寶) 사찰 중 하나이며 고려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어 법보사찰이라고도 한다.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 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가야산해인사고적〉에 의하면, 신림(神林)의 제자인 순응(順應)이 766년(혜공왕 2) 중국에 건너가서 법을 전수받고 귀국한 뒤 802년(애장왕 3) 가야산에 해인사를 창건하다가 갑자기 죽자 이정(利貞)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이 부석사를 창건하고 곧 해인사·화엄사·범어사 등 화엄10찰(華嚴十刹)을 세웠다고 되어있어 창건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절의 이름은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되었고, 그 개조(開祖)였던 순응 역시 의상의 손제자였다는 사실 등에서 화엄사상(華嚴思想)을 근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운 희랑(希郞) 법사가 태조가 헌납한 전지 500결을 가지고 절을 중건하고, 이곳에서 화엄사상을 크게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1398년(태조 7) 강화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겨옴으로써 호국사찰의 중심지가 되었다.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憙王后)가 해인사를 중건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488년 덕종의 비인 인수왕비와 예종의 계비인 인혜왕비가 학조(學祖)에게 명해 대장경판전(大藏經板殿)을 중건했으며 또 3년간에 걸쳐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법당·요사 등 160여 칸을 새로 건립했다. 1695년(숙종 21) 화재로 만월당(滿月堂)·원음루(圓音樓) 등 여러 요사채가 소실되었고, 그 이듬해 다시 불이 나서 무설전(無說殿) 등 나머지 요사채가 불타버리자 뇌음(雷音)이 중건했다. 그뒤에도 끊임없는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되는 과정을 겪었지만, 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만은 피해를 입지 않고 오랫동안 보존되어왔다. 이밖에도 대각국사 의천, 사명대사 등과 같은 고승이나 최치원·이거인(李居仁)·김정희·정인홍(鄭仁弘) 등 역대 명인들이 한때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적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을 비롯하여 명부전·응진전·삼성각·조사전·퇴설당(堆雪堂)·음향각·관음전·궁현당(窮玄堂)·구광루(九光樓)·경학원(經學院) 등이 있으나 대부분 근래에 세워진 것이다. 중요문화재로는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264호)·원당암다층석탑(보물 제518호)·고려각판(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반야사원경왕사비(보물 제128호) 등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해인사동종을 비롯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수많은 유물들이 해인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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