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을 대표하는 인물인 서애 류성룡 종가인 충효당에는 영모각이라는 별도의 전시관을 두고서 국보 132호로 지정된 <징비록>을 비롯하여, 보물 160호로 지정된 <류성룡 종가 문적>과 보물 460호로 지정된 <류성룡 종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김성일과 동문수학을 했으며, 선조대에 중앙의 여러 요직을 거칠 정도로 학식도 높았지만, 관리로서 업무능력도 뛰어났던 인물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에는 영의정으로서 선조의 피난길을 수행하였고, 외교적 성과로 명나라 원병을 끌여 들일 수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하여 임진왜란 중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동안 일어난 일들을 세세하게 기록하였는데, 이는 국보 132호 지정된 <징비록>을 비롯하여, 보물 160호로 지정된 <류성룡 종가 문적>에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공식 기록들이 전란으로 많이 남아 있지 않는 까닭에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더불어 국왕을 모시고 임진왜란에 대처했던 중앙부처의 입장에서 본 당시 상황을 기록한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류성룡의 성장과정
류성룡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류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류성룡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날 때 이무기 하나가 용이되어 성천하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류성룡은 어릴때부터 책을 가까이 하여 4세에 이미 글읽기를 시작하였고, 21세 때인 1562년(명종17)에는 형 류운룡과 함께 당시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성리학은 물로 천문, 지리, 군사, 의학 등 모든 분야를 통달하였다. 퇴계 선생은 류성룡을 가리켜 "이사람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라고 하여 장차 대성할 인물임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출처: 영모각>
영모록 초본, 류성룡은 풍산 류씨의 계보를 모아 기록하고 또한 선친의 연보와 저술, 제문, 만장 등을 모아 편집하고 발문을 붙여 조상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표하였다. <출처: 영모각>
벼슬길에 올라,
퇴계 이황 선생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던 류성룡은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상경 후 곧바로 관직을 받았고 승문원,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직책을 두루 거쳤다. 특히, 1570년(선조3)에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어 사가독서의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직전에는 좌의정에 올랐으며, 난중이었던 1592년(선조25)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그는 순탄하고도 빠른 승진을 하였고, 대부분 중앙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이같은 사실은 그가 관인으로서 얼마나 뛰어난 역량과 학덕을 가졌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출처: 영모각>
구주대통력, 보물 160호, 서애 선생은 항상 이 대통력을 휴대하고 그날그날의 중요한 사건이나 날씨 등을 기록하였다. 대통력은 당시 명나라의 역서를 우리나라 계절에 맞게 재편한 것이다. <출처: 영모각>
영의정 임명교지, 보물160호, 1592년 피난길에 있던 선조가 개성에서 선생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는데 그 때의 사령장이다.
도제찰사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임금은 군의 작전을 정돈.통제하여 왜적을 물리치라는 특별 교서를 도제찰사인 선생에게 내린 것이다. <출처: 영모각>
임진왜란에서의 활약
류성룡의 능력은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란 앞에서 더욱 빛나게 되었다. 그는 허술한 군사제도의 정비를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주장하였고, 왜란이 발발하자 병조판서와 좌의정을 겸임하고 모든 군무에 대한 총책임을 맡았다. 그는 다시 도체찰사라는 직책을 맡아서 왜군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특히 피난길에 임금을 모시면서 "임금께서 한 발자국이라도 조선 땅에서 떠나신다면 조선은 곧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의주에 머물러 후일을 도모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출처: 영모각>
징비록, 국보132호, 징비록은 서애 류성룡 선생이 영의정에서 물러난 후에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저술한 책으로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쟁의 상황 등을 기록한 친필 회고록이다. 징비란 뜻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시경>의 <소비>에서 따온 것이다. <출처: 영모각>
근폭집, 보물 160호, 근폭집은 서애 류성룡 선생이 임진왜란 중 군무와 정사에 대하여 국왕에게 올린 여러 글들을 모아서 만든 책이다. '근폭'이란 뜻은 '옛날 송나라에 농부가 늘 삼베옷을 입고 겨울을 지내다 봄이 와서 따뜻한 햇볕을 쬐자 마음이 기뻐 임금님께 이 따스함을 드리고 싶다 했고, 맛있는 미나리의 맛을 보고는 우리 임금님께 드려야 겠다"라고 한데서 따온 것이다. <출처: 영모각>
선조친필밀부유서, 선조임근이 1598년 12월에 영의정이며 도제찰사인 선생에게 전략상의 기밀을 임금 자신과 선생 두사람만 알고 처결하자는 뜻을 친필로 쓰고 어보를 찍어 보낸 음서이다. <출처: 영모각>
전영군편성도, 보물 160호, 서애 선생은 군제를 개혁하고 각 영군을 재편성하였는데 1영은 5사, 1사는 5초, 1초는 5기, 1기는 3대, 1대은 화병을 협력하도록 하였다. <출처: 영모각>
당장제시선, 보물160호, 임진년 12월,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안주에서 서애 선생과 평양 탈환을 협의한 후 그가 가졌던 부채에 시를 써서 서애 선생에게 선물한 것이다. <출처: 영모각>
광국공신교서, 보물160호, 1590년(선조23) 종제번부의 공을 높이 치하하기 위하여 서애 선생에게 내린 광국공신 3등 풍원부원군의 상훈교서인데 명필 한석봉의 글씨이다. <출처: 영모각>
이순신과 권율
류성룡의 임진왜란에 대한 공적 중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의 등용이다. 그는 임란이 발생하기 전에 이순신을 정읍 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권율을 형조정랑에서 의주목사로 천거하여 왜적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렇듯 앞을 내다보는 선생의 안목이 없었다면 우리는 임진왜란 떄의 위대한 두 영웅을 만날수 없을지도 모른다. <출처: 영모각>
이통제사애사, 선생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전몰한 후 지방민들이 민충사를 세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충무공의 순국을 애도하며 이 시를 지었는데, 구주대통력 뒷면에 기록하였다. <출처: 영모각>
당장서첩,서애 류성룡 선생은 정치가로서의 면모 뿐만 아니라 이순신 장군에게 군사전술에 대하여 적어 보낼 만큼 군사전략가로서의 면모 또한 뛰어났다. <당장서첩>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30여명이 서애 류성룡 선생에게 보낸 서한 43통을 수록한 것으로 긴요한 정치적 안건이나 작전, 군수사항 등에 관한 논의가 글 속에 보인다. <출처: 영모각>
말년의 생활,
서애 류성룡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다시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옥연정사 등에서 못다한 학문정진에 힘을 쏟았다.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그는 <징비록>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또한 검소한 생활을 하여 먹을것리조차 넉넉하지 못하였으며, 아들들에게 나누어줄 집도 없을 정도로 청빈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선생은 결국 1607년(선조40)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나라의 모든 백성이 슬퍼하였다고 한다. 1614년 병산서원에 위패가 모셔지고, 1627년(인조5) 2월에 '문충'이란 시호를 받았다. <출처: 영모각>
운암잡록. 류성룡 선생은 서애라는 호 이외에 운암이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다. 류성룡 선생은 1958년 영의정에서 물러난 후 다사다난했던 생애를 돌아보며 이를 수필 형식으로 기록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운암잡록>이다. 주로 동서로 나뉜 붕당에 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붕당간의 갈등이 커지는 것은 말세에 일어나는 일이라 하며,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걱정한 그의 우국충정을 엿볼 수 있다. <출처: 영모각>
선조제문, 보물 160호, 서애 선생의 부음을 받은 선조임금은 승지 이유흥을보내어 조의를 표하고 예조좌랑 구혜에게 명하여 치제하게 하였는데 그때의 제문이다. <출처: 영모각>
서애집, 서애 류성룡 선생의 저술 중 많은 부분은 임진왜란 중에 잃고, 문집과 <징비록> 등 중요한 몇몇 책들만 전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서애집은 본집 20권 10책, 별집 4권 2책, 그리고 연보 3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633년(인조11) 당시 합천군수로 있던 셋째 아들 수암 류진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다. <징비록>은 1647년(인조25)경에 류성룡의 외손 경상감사 조수익에 의해 경상감영에서 간행되었다. <출처: 영모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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