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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_향교_사당 156

평택향교, 조선시대 공립교육기관

평택시 팽성읍은 옛 평택현 청사가 있던 곳으로 현재 평택시에서 남쪽편 안성천이 아산만과 만나는 넓은 곡창지대의 중심지였고, 아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주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팽성읍에는 지금 옛 평택현의 흔적으로 객사와 향교가 남아 있고, 다른 관청건물들은 대부분 없어졌는데 아마도 팽성읍사무소에 관청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택향교는 이 지역의 공립교육기관으로 평택현이 큰 고을이 아니었기때문에 향교의 규모또한 크지 않은 편이다. 이 향교는 전학후묘의 건물배치를 하고 있으며, 앞쪽에 강당인 대성전과 기숙사인 동.서재가 있고, 뒤쪽에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대성전이 자리잡고 있다. 향교입구임을 알려주는 홍살문. 보통 홍살문 옆에 하마비가 있다. 향교와 관련된 공덕비. 향교 정문인 외삼문..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 선생 위패를 모신 사당

영주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고려시대 유학자 안향 선생을 주향으로 안축, 안보, 주세붕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향교와는 달리 학문적 업적이 뛰어난 분의 위패를 모시고 그 학문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 서원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소수서원에서 제사 기능을 담당하는 영역의 핵심 건물이 이 곳 문성공묘이다. 보통 서원은 전묘후학 또는 전학후묘의 건물 배치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이 곳 소수서원은 최초의 서원이라서 그런지 사당이 서쪽편에 있고, 강학공간이 동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특이한 건물 배치를 하고 있다. 소수서원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문성공묘. 정면3칸, 측면3칸으로 맞매지붕을 하고 있다. 문성공묘 내부는 개방되어 있..

[안동 병산서원] 입교당立敎堂, 서원의 중심영역 강당

병산서원 기능의 중심이 되는 영역으로 유생들이 공부하는 장소인 강당은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로 입교당立敎堂이라 불린다. 병산서원에서 가장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곳 입교당 마루는 정면의 누각인 만대루, 낙동강, 병산이 한데 어우러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건물 자체는 크거나 웅장하지는 않지만, 자연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담한 규모이다. 입교당 건물 양쪽에는 온돌방이 있고 가운데에는 넓고 시원한 마루가 있다. 병산서원 출입문인 복례문과 누각인 만대루를 지나면 정면 5칸으로 이루어진 서원의 중심 영역인 강당을 볼 수 있다. 양쪽 2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3칸은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유생들의 기숙사가 있는 마당..

[파주 자운서원] 문성사, 율곡 이이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자운서원 문성사는 율곡 이이선생과 제자들인 김장생 선생, 박세채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어진 것을 60년대에 중건한 것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많이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사당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전학휴묘의 공간배치에 따라서 자운서원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일반적인 서원이나 향교의 경우 대정전이나 사당들의 출입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곳 자운서원의 문성사는 아산 현충사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 누구나 참배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율곡 선생이 영정이 같이 모셔져 있다. 자운서원 배향공간 건물인 율곡 이이 선생의 영정이 모셔진 문성사 내부. 선생의 영정으로 보면 얼굴이 호남형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는데, 인기가 좋았을..

[파주 자운서원] 묘정비, 서원의 역사를 적어 놓은 비석

파주 자원서원 배향공간인 문성사 출입문인 외삼문 왼쪽편에 있는 묘정비이다. 자운서원은 효종때 자운이라른 편액이 내려졌고, 그때 묘정비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 당대 유학자인 송시열이 지었다고 전해지며, 글씨는 예서체로 김수증이 썼다고 전해지면 보기에도 글씨를 깨끗하게 잘 썼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자운서원 묘정비. 받침돌과 비몸,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각을 별도로 두고 있지는 않다. 비몸에는 자운서원 역사를 적은 글이 적혀 있으며, 예서체로 썼는데 글씨가 또박또박하게 잘 썼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연꽃무늬와 구름으로 장식한 받침돌 자운서원 배향공간인 문성사 내삼문에 왼쪽에 서 있는 자운서원묘정비 자운서원의 역사를 적은 비이다. 자운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

[파주 자운서원] 강학공간인 강인당

파주 자운서원은 조선중기 유학자 이이 선생을 모신 서운 중의 하나로 어머니인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선생의 가족묘 부근에 세워진 서원이다. 나지막한 언덕에 세워진 서원으로 자운서원은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수도인 한양과 가까이 있었던 까닭에 서원의 규모도 크지 않고, 경관이 수려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지 않은 까닭에 누각을 비롯하여 정원을 꾸며놓지도 않고 있다. 자운서원 건물은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없어졌고, 건물도 한국동란때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최근에 고증에 따라서 복원된 것이라 한다. 자운서원의 강학공간은 강당인 강인당과 마당 좌.우에 배치된 유생들의 기숙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물의 크기도 크지 않은 편이다. 자운서원 강학공간 중심건물인 강인당. 유생들의..

[영주 소수서원]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齎), 상위 단계 유생이 공부하던 곳

영주 소수서원 강학공간의 중심인 강학당 뒷편에 자리잡고 있는 안동지역 유지들의 저택 사랑채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건물인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齎)이다. 2개의 건물이 붙어있어 하나의 건물로 보인다. 원래 하나의 건물을 둘로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학문의 단계에 따라 일신재와 직방재로 나누고 있다. 동쪽 구석에 위치한 지라재와 학구재에 비해서 축대도 높고, 건물 자체도 격식있게 꾸면 놓고 있다. 소수서원 건물배치는 하학상달(下學上達), 즉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뜻하며,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 그리고 깨어 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 이 직방재에 이르면 학물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이라 불리는 강학당에 들어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고 한다. 일신재, 직방재는 정면 ..

[영주 소수서원] 지락재(至樂齋)와 학구재(學求齎), 하위 단계 유생이 공부하던 곳

영주 소수서원 강학영역은 지락재(至樂齋), 학구재(學求齎), 일신재(日新齋), 직방재(直方齎), 강학당의 5단계로 구분된다. 그 중 지락재(至樂齋)와 학구재(學求齎)는 1,2번째 단계 유생이 공부하던 곳으로 서원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건물들이다. 소수서원은 규모가 상당히 크고 많은 유생들이 공부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젊은 유생들이 이 곳에 머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수서원 마당 동쪽편 구석에 지락재와 학구재가 위치하고 있다. 학문의 단계에 따라서 건물의 크기와 축대의 높이를 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곳에서 숙식하기는 힘들고 마루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토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 정면3칸의 작은 건물로 1칸의 방과 2칸의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축대..

[영주 소수서원] 장서각, 정료대와 관세대 등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와 직방재 사이에는 서원이 소장했던 책과 목판을 보관했던 장서각이 있고, 그 앞에는 야간에 불을 밝히던 정류대와 사당 참배시 손을 씻는 대야을 올리는 관세대가 있다. 소수서원 장서각은 전면2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많은 책들을 보관했던 것 같다. 문성공묘 동쪽편에 위치한 장서각. 제사를 준비하던 전사청, 영정을 보관하던 영정각과 하나의 건물군을 이루고 있다. 소수서원 장서각은 전면2칸이지만, 당시 장서각 건물 중에선 큰 편에 속하는 것 같다. 장서각 출입문 장서각 뒷편. 장서각 앞에는 횃불을 밝히던 정류대와 손을 씻을 대야를 올려 놓던 관세대가 있다. 해시계를 올려 놓던 일영대

[영주 소수서원] 제사를 준비하던 전사청과 영정각

서원의 제례영역의 중심인 문성공묘 제사를 준비하던 전사청과 안양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이다. 전사청은 전면3칸의 작은 건물로 특색없이 소박한 건물이고, 영정각은 원래 소수서원에 없던 건물로 1975년에 안양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서 별도로 세운 건물이다. 물론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소수서원 문성공묘 제사를 위한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준비하던 전사청 건물 소수서원 영정각은 안향 선생의 영정을 모시는 건물로 7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소수서윈 뒷편에 있는 영정각과 전사청 건물 고려 중기 문신인 회헌 안향(1243∼1306) 선생의 초상화로 가로 29㎝, 세로 37㎝의 반신상이다. 안향은 고려 원종 1년(1260)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원..

[영주 소수서원] 충효교육관, 사료관

소수서원 뒷편에는 70년대에 지어진 건물로 소수서원 사료관과 충효교육관이 자리잡고 있어, 이 곳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소수서원 역사와 유학에 대해서 교육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충효교육관은 소수서원 뒷편의 선비마을과 연계하여 교육을 제공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 곳을 지나면 뒷문을 통해 영주 선비마을과 연결되어 있다. 소수서원 사료관 소수서원 충효교육관 소수서원 관리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보이면, 관람객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소수서원 뒷문 소수서원 충효교육관과 사료관을 출입하는 문 소수서원 출입문. 영주 선비마을과 연결되어 있다.

[영주 소수서원] 들어가는 소나무숲 길

소수서원을 특징짓는 풍경은 입구에서 서원까지의 울창한 송림과 송림으로 뒤덮힌 나지막한 둔덕인 영귀봉일 것이다. 소나무 숲속길을 한적하게 걸어가다 보면, 이 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주는 숙수사지 당간지주가 있고, 그 너머를 죽계별곡의 무대인 죽계천과 작은 정자인 취한대가 보인다. 매표소에서 1분 남짓 걸어가는 동안에 소수서원의 이미지가 그려지는 곳이다. 소수서원 정문 앞에는 작은 잔디 제단이 있고, 서원 정문을 들어서면 이 곳이 소수서원임을 알려주는 강학당의 '백운동'이라는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소수서원 매표소.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매표소에서 소수서원으로 들어오는 길. 양쪽으로 수백년된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소나무숲이 있는 작은 둔덕인 영귀봉 소수서원 들어가는 길의 소나무 숲 소나무숲 너..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 아름다운 낙동강 풍경이 보이는 누각

전 문화재청장인 유흥준씨가 적극 추천한 병산서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동강 풍경을 볼 수 있는 누각인 만대루이다. 자연지형을 이용해서 만든 고풍스러운 누각이다. 병산서원 강당 마루에서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만대루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더운 여름날 이곳 만대루에서 낙동강 풍경을 보노라면 신선이 된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아마도 이 곳 유지들이 만대루에 모여서 풍류를 즐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드는 곳이기도 하다. 병산서원 출입문이 복례문을 들어서면 이층누각인 만대루의 기둥이 눈앞에 보이고, 주위에는 작은 정원을 조성해 놓고 있다. 병산서원 누각인 만대루의 현판 병산서원 만대루의 굵은 기둥은 자연스럽고 고풍스런 분위기를 주고 있다. 병산서원 만대루의 넓은 마루. 이 곳은 보기만 해도 쉬원..

[안동 병산서원] 서애 유성룡을 모신 사당인 존덕사

병산서원의 제향공간인 존덕사와 전사청이다.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 선생의 풍악 서당에 선생을 기리는 존덕사를 세움으로서 서원으로 기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존덕사에는 서애 유성룡 선생을 주향으로 하고 후손인 그의 아들 유진 선생을 배향으로 하고 있다. 병산서원의 특징 중의 하나로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이 존덕사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제사의 편의성과 건물의 조화를 고려한 실용주의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듯 하다. 병산서원에서 뒷편에 자리잡고 있는 서애 유성룡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존덕사. 정면 3칸으로 규모가 웅장하거나 화려하게 지어 지지는 않았고 소박하고 검소한 유교정신을 잘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병산서원 존덕사 앞 마당에 있는 팔각 기둥 모양의 노주석. 야간 조명을 위해 불을 밝히는 역할..

[안동 병산서원] 유생들이 머물던 동.서재와 목판을 보관하던 정판각

전형적인 우리나라 서원의 건물 배치를 보여주는 병산서원 강당 좌우에 위치한 동재와 서재, 그리고 서원 강당 뒷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목판을 보관하던 정판각이다. 동재와 서재의 건물 규모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많은 유생들이 머물런 곳이 아닌 것 같다. 전형적인 전학휴묘의 건물 배치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강학 공간인 강당과 동.서재에서는 아름다운 낙동강과 병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누각 뒷편으로 언제나 보인다. 병산서원 유생들 중 상급생들이 머물렀던 동재. 작은 독방에는 학생회장격인 유사(有司)가 머무는 방이라고 한다. 병산서원 서재. 동재, 서재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하고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두 건물은 똑같이 크고 작은2개의 방과 가운데 1칸 마루로 구성되..

[안동 병산서원] 출입문인 복례문과 연못인 광영지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서원으로 유성룡 선생의 후손들이 사는 마을인 안동 하회마을에서 강을 따라서 동쪽편으로 가면 볼 수 있는 서원이다. 물론 하회마을을 통해서는 이 곳 병산서원에 들어갈 수 없고, 하회ㅡ나마을 입구에서 산을 돌아서 반대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병산서원의 출입문은 '복례문'이고 불리우며, 솟을대문으로 된 대문으로 삼문처럼 만들었으나 실제 출입문은 하나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출입문의 '복례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는 오래된 누각인 '만대루'가 있고, 그 서쪽편에는 작은 연못인 '광영지'가 있다. 안동 병산서원의 정문인 '복례문復禮門'. 솟을대문므로 형태는 삼문이지만 가운데에만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있고, 양쪽으로는 벽으로 되어 있다. '복례復禮'..

안동 의성김씨종택 (보물) 영정실, 경묘각

안동 의성김씨종택은 종손의 저택답게 조상을 모시는 사당과 관련된 건물이 경묘각, 영정실, 이름을 적어놓지 않은 작은 건물을 포함하여 3동의 건물이 있어서 웬만한 서원 못지 않은 규모라 할 수 있다. 이 3동의 건물은 손님이 드나드는 사랑채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고 있다. 보통 유명한 사람의 고택인 경우에도 작은 규모의 사당 건물 1동만 있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안동 의성김씨종택에는 3동의 건물이 조상을 모시는 기능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안동 의성김씨종택 사랑채 바로 위쪽으로는 사당 기능을 하고 있는 영정실, 경묘각 2동의 건물이 있고, 아래쪽에는 기념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다. 전체적으로 건물의 숫자도 많고 다른 고택의 사당에 비해 건물의 크기도 상당히 크다. 안동 의성김씨종택에서..

강진 다산초당, 정약용 선생 유배생활기간 실학을 완성한 곳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은 강진만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만덕산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초당이다. 지금의 건물은 50년대 다산유적보존회에서 기와집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하며, 앞으로 원래의 모습인 초당으로 복원될 예정이라 한다. 이 곳 강진의 다산초당은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가장 오랜기간 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다산의 외가에서 마련해 준 거처라 한다. 다산은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종가집인 녹우당이 있는 해남이 이 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에서 다산의 실학사상을 정리하고 많은 책을 집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곳 다산초당에서 내려다 보는 강진만으로 풍경은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다산 생가가 있는 양수리 부근 한강의 풍경과 조금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다산이 고향과 비슷한 곳에..

해남 고산유적지 추원당, 해남땅에 처음 터를 잡은 어초은 선생 제사를 위한 제각(재실)

고산 윤선도 선생 고택을 옆으로 돌아서 숲속길을 조금 걸어들어가면 오래된 것 같은 고택을 볼 수 있는데, 해남땅에 처음 터를 잡은 고산선생의 고조부인 어초은 윤효정의 제각으로 실제로는 1935년에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제사를 지내는 곳은 하니고 제사준비를 하기 위한 사람들이 숙식을 하거나 문중회의를 하는 곳을 재실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해남윤씨가 이 일대에서 부를 이룬 집안으로서 규모가 상당히 큰 재실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로 정문은 솟을대문을 하고 있으며, 상당히 웅장하게 지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축대 위에 추원당 건물이 있다. 일반 주택이 아니라 재실 목적으로 지었기때문에 건물 규모는 큰 편이다. 추원당 현판과 계단 제사난 문중회의 같은 행사시 많은 사람..

강릉 오죽헌, 문성사와 어제각

강릉오죽헌은 조선중기 최치운이 창건한 이래 아들과 사위 등에게 물려주면서 오랜 기간동안 이 지역에서 명맥을 이어오던 것을 1970년대 오주헌 정화사업에 따라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그 모습이 오천원권 지폐에 담겨짐에 따라서 안동의 도산서원과 함께 실생활에서 그림으로 가장 많이 접해왔던 유적지이다. 율곡 선생과 신사임당이 태어난 오죽헌을 중심으로 고택,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 과 벼루를 보관하는 어제각, 기념관이 하나가 되어 강릉과 영동지역을 대표하는 역사유적지라 할 수 있다. 경포호수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곳 오죽헌은 현재도 성역화되어 있는 곳이지만 정조가 명을 내려서 어제각을 세운것을 보면 조선시대에도 이 곳 영동지역을 찾는 많은 선비,묵객들이 이 곳을 찾았던 것으로 보이며, 율곡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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