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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_향교_사당 156

안동 도산서원, 퇴계 이황선생을 모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원

낙동강변 안동 도산면 토계리에 자리잡고 있는 도산서원은 선조 7년에 건립된 퇴계 이황 선생을 위패를 모시고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선조8년(1575)에 명필 한석봉이 쓴 편액을 국왕이 하사하였으며, 광해군 7년(1615)에 월천 조목 선생을 종향하였다. 퇴계 이황 선생 제자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이 있으며 이들 또한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문신이다. 처음에는 이 두분도 도산서원에 배향되기로 하였으나, 두분의 서열을 정함에 있어서 지역에서 상당히 논란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서애 류성룡은 하회마을 인근의 병산 서원에, 학봉 김성일은 임하댐 부근의 호계서원에 모셔져 있다. 도산서원은 선현을 모시고 후진을 양성하는 영남 유림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월철폐령에..

광명 충현서원지, 오리 이원익 선생을 모셨던 서원이 있었던 자리

광기도 광명시 소하리에 있는 오리 이원익선생 종택이 있는 곳은 선생의 후손들이 살아왔던 종갓집이기도 하지만, 종택 뒷편에는 선생을 모신 충현서원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옛 건물터와 복원되 정자 등이 남아 있는 이 곳은 원래 고려 강감찬 장군 등을 모신 사당인 삼현사가 있었다고하며, 숙종때 이원익을 모시면서 충현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옛 서원건물터를 살펴보면 건물은 그리 크거나 많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교육 기관의 성격을 갖고 있는 건물이 강당이나 동.서재가 크게 있었던 같지는 않고 사당 위주로 서원이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서원의 성격이 교육기관에서 배향공간으로 기능의 변모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교육기관이나 여론형성의 기능이 약했던 경기지역 서원의 특징을 ..

보령 화암서원, 토정비결 저자 이지함 선생을 모신 서원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 자리잡고 있는 토정 이지함 선생을 모신 화암서원이다. 화암서원이 위치한 곳은 보령시 동쪽 높은 산에서 발원하여 서해안으로 흘러드는 하천을 막은 청천저수지 안쪽편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서원은 1610년에 이지함의 문인 구계우가 주도하여 건립하였고, 숙종때 화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고 한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철된 것을 일제강점기에 복원되었다.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을 청천저수지를 만들면서 1959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토정 이지함(1517~1578년)은 주선 중기의 유학자로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인 서경덕 선행 문하에서 수양했으며, 포천현감.아산현감 등의 관직을 지냈면서 걸인.노약자.기민 등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유학..

보령향교, 조선시대 보령현 공립교육기관

충남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 소재한 공립교육기관인 보령향교이다. 보령현은 조선시대까지 현 보령시의 행정중심지역이었으며, 그 흔적으로 보령읍성 성곽과 보령향교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 보령현과 충청수영이 있었던 오천군, 남쪽의 남포군이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합쳐져서 현재의 보령시를 이루고 있다. 장항선 철로의 개통과 대천해수욕장의 명성으로 현재는 행정중심지가 대천으로 옮겨져 있다. 보령향교는 강당인 명륜당,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 유생들의 숙소인 동.서재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 향교이다. 대천해수욕장을 비롯하여 이 고장의 해안은 백사장이 발달해 있으며, 경치가 뛰어나서 그런지 조선시대에도 서해안 관광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 곳 보령향교도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서 그런지 고을 규모에 비..

고성 간성향교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교동에 위치하고 있는 간성향교이다. 간성읍은 조선시대 종3품인 군수가 고을 수령으로 있었으며, 동해안의 여러 고을 중에서는 강릉과 삼척을 제외하고는 고을 규모가 큰 편이라 할 수 있다. 간성군은 대관령 등과 함께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진부령 입구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금강산과 관동팔경 유람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간성군내에는 조선시대 4대 사찰의 하나로 왕실과 관련되어 있었던 건봉사가 있다. 옛 간성군 관아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설명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간성읍사무소와 간성초등학교가 자리에 관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간성향교는 간성읍에서 약간 떨어져 건봉사와 진부령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자리잡고 있다. 이 향교는 조선 세종때 처음 세워졌다고 ..

원주 김두한 가옥, 조상묘를 관리하기 위한 재실

원주시 문막읍 건등리에 위치한 '김두한 가옥' 이라고 이름 붙여진 한옥 건물이다. 이 가옥은 260여년전 원주 목사를 지낸 김탄행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재실건물이라고 한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중앙에 넓지 않은 마당을 두고 있다. 'ㄱ'자형으로 된 안채는 넓은 부엌과 대청마루, 3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깥쪽에는 대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사랑채를 두고 오른쪽에는 문간채를 두고 있다. 마당 안쪽에는 방이 2개있는 앞면 3칸짜리의 작은 부속채를 두고 있다. 이 가옥은 제사를 비롯하여 집안 행사를 위해서 만든 건물로 주택과는 달리 형식적인 내용은 배제하고, 행사때 일을 보는 사람들의 동선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제사를 준비하는 넓은 부엌이 건물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

포천 화산서원, 백사 이항복을 모신 서원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 나즈막한 화봉산 아래에 위치한 화산서원이다. 이 서원은 조선중기의 명신 백사 이항복의 기리기 위해서 건립한 서원으로 숙종때 국왕으로부터 편액을 받은 사액서원이다. 서원 인근에 이항복 선생의 묘가 있으며, 서울출신인 백사 이항복의 집안에서 아마도 가산면 일대에 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사 이항복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많은 정승들을 배출한 집안으로 유명하며 이시영, 이회영 등 많은 인물들이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많은 기여를 했었다. 현재의 화산서원은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17년 지방유림들이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뒷쪽에 사당이 있고 앞쪽에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가 있으며, 강당은 두고 있지 않다. 화산서원이 있는 포천시 기산면은 조선시대 금강산 유람..

포천 용연서원, 한음 이덕형을 모신 서원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 자리잡고 있는 용연서원은 '오성과 한음' 이야기로 유명한 조선중기 문신 한음 이덕형을 모신 사원이다. 이 서원은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중요 서원 중의 하나이다. 현재의 서원건물은 강당과 사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서원이다. 원래는 동재.서재를 비롯하여 여러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국전쟁때 소실되어 사당만 남아 있던 것을 1986년도에 강당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오성과 한음' 이야기를 전해줄려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포천시에는 용연서원과 화산서원이 있으며, 포천시 가산면에 위치한 화산서원은 오성이라고도 불렸던 백사 이항복을 모신 서원으로 용연서원에서 남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조선시대 금강산으로 가는..

포천향교, 옛 포천현 관아 공립교육기관

경기도 북부지역에 위치한 포천시는 조선시대 포천현과 영평군이 합쳐서 이루어진 지역이다. 현 포천시의 북쪽은 영평군, 남쪽은 포천현이었다고 한다. 양주와 가평 사이의 넓은 평지에 위치한 포천현은 조선시대 금강산과 관동팔경 유람을 떠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런지 유명인사들이 많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며, 지금도 포천에는 2곳의 서원이 남아 있다. 포천향교가 위치한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는 고구려가 쌓은 산성인 반월산성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 포천현 관아가 소재하고 있었던 지역이다. 포천현 관아 건물은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포천향교만이 이 지역에 관아소재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포천향교는 고려초에 세워진 향교로 설립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현재의 건물은 한국전쟁 이후에 중건한 것..

용인 충현서원, 한국민속촌에 세워진 서원

용인 민속촌에 위치한 충현서원이다. 이 서원에는 용인지역에 묘가 있는 포은 정몽주, 병자호란때 삼학사 중 한명인 오달제, 구한말 순국한 민영환과 김석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원이다. 이 서원은 관광단지인 한국 민속촌을 건설하면서, 한국을 소개하는 측면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서원이다. 민속촌 중앙을 흐르는 개천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곳에 위치한 충현서원은 제향기능만이 남아 있었던 경기도지역의 서원과는 달리 명산이나 경치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공부와 휴식이 강조되던 지방 서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민속촌에 소재한 충현서원은 이 곳을 찾는 많은 이에게 서원의 기능과 특징을 잘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한쪽편 구석에 위치하고 있어서 서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서원과 유학에 ..

용인 심곡서원, 정암 조광조 선생을 모신 대표적인 서원

정암 조광조는 14세때 성리학자 김굉필 문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며, 과거에 급제한 이후 호조,예조,공조의 좌랑, 홍문관 승지, 부제학 등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유학자 정치를 구현하려는 중종의 신임을 받아서 다양한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이후 조광조의 개혁에 반감을 가진 중종반정 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의 역공을 받은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했다. 정암 조광조는 조선전기와 후기를 구분짓는 역사적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후대에 조선사회를 주도했던 사림세력을 추앙을 받았다. 정암 조광조를 모신 서원은 용인 심곡서원, 서울 도봉서원 등 전국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용인 수지신도시에 위치한 심곡서원은 그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의 묘소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역사적인 중요성으로 인해서 구한말 흥선대원군..

공주향교, 충청감영에서 운영하던 향교

옛 충청감영과 공주목이 있었던 공주의 공식 교유기관인 공주향교이다. 옛 감영이 있던 공주사대부고에서 금강방면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주택가 위치하고 있다. 금강 중류에 위치한 백제의 옛 수도인 공주는 조선시대 충청도의 중심지이자 금강 수운, 호남지역과 서울간의 교통로에 위치한 아주 큰 고을이자, 충청도 관찰사사 근무하던 충청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하지만 공주라는 큰 고을에 위치한 공주향교는 생각보다 규모가 상당히 작았다. 나주향교나 전주향교는 그 규모에 있어서 한양의 성균관에 비길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데, 이 곳 공주향교는 웬만한 군현에 소재한 향교와 비슷한 규모로 보인다. 공주향교는 앞쪽에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뒷쪽에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동.서무가 있다. 유생들이 ..

남산골한옥마을,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안채

이 집은 제기동에 있던 순종의 장인이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그의 딸이 1906년 동궁 계비로 책봉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갈때 즈음에 지은 재실이라고 한다. 이 재실을 주로 순종이 제사지낼때 사용했던 재실이라고 하는데, 국왕이 윤택영의 집에 제사를 지내러 올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근처에 있었든 명성황후의 능이었던 홍릉에 들릴때 사용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00년대 초에 지어진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등지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으며 건물 뒷편에 사당이 있다. 구한말 채무왕으로 악명높았던 윤택영이 동궁 계비 간택을 위한 로비 목적으로 이 건물을 지은 것으로 보이며, 돈을 물쓰듯이 썼던 윤택영이 상당히 크고 화려하게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형이 첩을 위해서 지었던 옥인동 윤씨가옥과 나란히 한옥마을을 지..

홍성 홍주향교

홍성군은 충남 서해안에 위치한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충청 서해안지역에서 가장 큰 고을인 홍주목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중 정3품의 높은 관직인 목사가 다스리던 고을인 목(牧)은 지방행정단위 중에서는 가장 큰 곳에 속하며 대부분 이름끝에 주(州)를 달고 있다. 아마도 충남서해안 지역 대부분의 고을이 직속은 아니지만 관할지역과 비슷한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홍성군은 옛 홍주목과 결성현이 합쳐진 것이라고 하면,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인근의 공주와 일본어 발음이 비슷하다고 해서 이름이 홍성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홍주향교는 홍주목 관아가 있었던 읍성인 홍주성에서 북쪽편에 위치한 구릉에 위치하고 있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서 목사가 근무하던 동헌과는 많이 떨어져 있다. 홍주..

홍성 결성향교

결성현은 충남 홍성군 광천읍과 결성.서부.구항.은하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이다. 결성현 읍치는 현재 결성읍성이 있었던 자리인 결성면 소재지에 위치하고 있다. 결성현은 천수만에서 홍성군과 예산군을 포함하는 내포평야를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초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을 때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던 고을이다. 결성현에서 관장하던 교육기관이었던 결성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존재해왔었던 지방교육기관으로 현재의 위치로는 조선초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결성읍성을 현재의 결성면 소재지에 세우게 되면서 이전하였다고 한다. 향교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결성면 소재지에서 북쪽편으로 약간 떨어진 구릉지에 세워진 이 향교는 공자와 성현들을..

도봉산 도봉서원과 각석군,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서원

서울 도봉산 등산로 입구 계곡에 위치한 도봉서원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서원 중 서울에 소재한 유일한 서원이다. 도봉산 기암괴석과 계곡의 맑은물, 큰 바위 등은 예로부터 명승지로 유명했다고 하며, 중종때 사림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정암 조광조 선생이 이 곳을 자주 들렀다고 하며, 1573년 선조때 조광조 선생을 모시기 위한 서원으로 창건된 사액서원이라고 한다. 서울출신인 백사 이항복 등 저명한 유학자들이 시문을 남긴 유서깊은 서원이다. 도봉서원은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헐린 것을 복원한 것이라 한다. 현재의 서원은 뒷편에 있던 사당만이 남아 있고, 앞쪽에 있던 강당과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는 복원되지 않았다. 도봉서원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건물외 도봉산 계곡의 바위에 여러 문인들이 각석으로 글..

인천 원인재, 인천이씨 중시조 이허겸의 묘 앞에 세운 재실

인천 남쪽 송도신도시로 향하는 대로변에 잇는 웅장한 저택처럼 보이는 한옥 건물이 있어 찾아 보았다. 이 곳은 인천이씨의 중시조인 이허겸을 묘를 지키는 재실로 원인재를 비롯하여, 돈인재, 승휴당, 명인사, 율수실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원인재가 재실 건물이었던 것 같고 나머지은 세운지 그리 오래 되어 보이지 않는다.그리고 조선시대에 재실에 큰 건물들이 여러동 있는 경우도 많지 않은 것으로 봐서 최근에 만든 건물로 여겨진다. 인천이씨는 김해허씨에서 갈라져 나간 성씨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시대 이래로 인천지역 토호로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고려시대에 외척으로써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대표적인 역신인 이자겸 또한 인천이씨라고 한다. 원래부터 있었던 건물로 추정되는 원인재는 앞면 4칸 규모의 전형적인..

남원향교, 남원도호부 관할의 큰 향교

남원향교는 조선 태종때 처음 창건된 남원지방의 향교로 처음에는 남원성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잦은 홍수로 인해서 세종 때 현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남원성 동북쪽 약간 언덕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 향교는 향교의 학규를 비롯하여 유생들들 내무생활규범 등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어 조선시대 지방사회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남원향교는 향교 중에서 면적은 넓지 않지만, 건물로는 공자와 제자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동무.서무, 강당인 명륜당,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 사마재와 전사청, 그리고 웅장한 문루를 두고 있는 규모가 큰 향교이다. 남원향교는 대성전이 임진왜란때 불타버린 것을 재건한 것으로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고종때 중건한 명륜당이 약간 내력이 있는 건물로 보인다. 나머지 ..

남원 창주서원, 조선중기 문신 노진 선생을 모신 서원

남원 창주서원 조선중기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옥계 노진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조선시대에 서원은 주로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잡고, 향교는 관청이 있는 행정중심지에 있는 것이 보통이나 이 서원은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옥계 노진선생은 경남 함양출신으로 오랜 관직생활을 하면서 처가가 있는 남원으로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노진선생을 모신 서원으로 고향인 함양에도 당주서원이 있었으나, 두개의 서원이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원래 창주서원은 남원시 금지면에 섬진강을 바라보고 있는 지역에 있었던 것 같은데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50년대에 현위치에 새로이 지어졌다고 한다. 서원의 건물은 사당인 명덕사와 강당, 고직사 등의 건물이 있으며,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서..

정읍 태인향교, 조선시대 고현동 향약으로 유명한 태인현의 중등교육기관

전북 정읍시 태인면은 주변의 신태인읍.웅동면.산외면.감곡면.칠보면.산내면을 포함하고 있던 조선시대 태인현의 소재지였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호남선 철도가 신태인지역을 지나감에 따라서 행정과 교통의 중심으로서 그 기능을 잃고, 지금은 시골의 작은 면소재지가 되어 있는 곳이다. 태인면은 김제평야를 비롯한 전북지역의 넓은 벌판과 동쪽의 산악지대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주나 정읍과 비슷한 지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고을이다. 태인면 소재지에는 보물로 지정된 정자인 피향정과 태인동헌, 태인향교가 이 곳이 태인현 관아가 있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 중 태인향교는 태인현감이 관리하던 조선시대 공립 중등교육기관으로서 근처의 무성서원과 함께 이지역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던 곳이다. 태인향교는 작은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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