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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152

보령 남포읍성, 고려말 왜구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읍성

보령시 남쪽 지역인 남포면 일대에는 조선시대에 남포현이 있어던 지역이다. 금강하구 서해안에서 서울 방향의 육로와 서해안 뱃길이 지나가던 이 고장은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많았던 곳으로 충청수영이 설치된 오천과 보령읍성, 서산의 해미, 홍성의 결성 등과 함께 서해를 통해 침입하던 왜구에 대처하기 위헤 읍성을 쌓았던 고장 중 하나이다. 남포읍성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쌓았던 전형적인 읍성의 모습을 하고 있어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도시화에 소외되었던 까닭에 읍성의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포읍성에는 주로 관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읍성은 둘레 900m 정도로 그리 넓다고는 볼 수 없지만 높이 3.6m의 석축성으로 상당히 견고하게 쌓은 읍성이다. 동.서.남쪽에 성문을 두고 북쪽편에 관아인 ..

보령읍성 성곽과 관아문

충남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는 주포면 소재지이자 조선시대 보령현 관아가 있었던 지역의 행정중심지였다. 현재의 보령시는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개편으로 보령,남포,오천군이 합쳐져서 만들어졌으며, 군청이 대천해수욕장과 대천항에 가까운 대천지역으로 1914년에 이전하면서 행정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잃고 작은 면소재지로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보령현 관아가 있던 자리에 있는 보령읍성 성곽의 일부와 남문 문루인 해산문, 보령향교가 이 곳이 옛 보령현의 중심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옛 보령현 관아가 있던 자리에는 현재 주포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으며, 이 학교 담장과 출입문 역할을 했던 읍성 성곽의 일부와 남문 문루인 해산루가 남아 있다. 보령 읍성은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처음 쌓았던 것으로 보이며, 태종때부터..

보령 충청수영성, 천수만 입구 조선시대 서해안 항로를 통제하던 수영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송리에 있는 작은 포구인 오천항은 조선시대 충청수영이 있었던 곳이다. 충청수영은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한반도와 중국 해안지방에 극심한 피해를 입혔던 왜구를 견제하기 위히 설치한 수영으로 충청병마절제사가 있었던 해미읍성과 함께 서해안을 방어하던 요지였다. 충청수영은 조선초에 설치되어 수영인 폐지된 1896년까지 오랜기간 동안 존속했던 곳으로 조선 세종때의 기록에 의하면 산하에 배속된 군선이 142척에 수군이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수영의 주 임무는 삼남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쌀 등을 운반하는 조선선을 보호하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영역은 금강하구에서 경기만 일대까지라고 한다. 충청수영성은 오천항을 둘러싸고 있는 언덕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제천 청풍 망월산성, 남한강을 지키던 신라의 산성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의 옛 청풍도호부 관아가 있던 마을 뒷편에 위치한 망월산 정상부를 둘러싼 망월산성이다. 청풍은 남한강 중류의 충주와 단양 사이에 있는 고을로 남한강 수운과 죽령길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중요한 지역으로 종3품관인 부사가 수령으로 있던 큰 고을이다. 남한강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옛부터 경북지역에서 죽령을 넘어 서울로 여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잠시 쉬어가던 고장이다. 망월산성은 망월산 정상부에 작은 규모로 석축을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여주 파사산성, 충주 장미산성, 단양 적성산성과 온달산성과 함께 삼국시대에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신라와 고구려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시기에 처음 세워진 산성으로 보인다. 원래 쌓았던 산성의 석축은 없어지고 지금은 옛모습을 추정하여..

홍성 홍주 아문, 홍주목관아 출입문

충남 홍성군 군청소재지가 자리잡고 있는 옛 홍주성내의 관아건물 중 동헌인 안회당과 함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축물로 관아 출입문인 홍주아문을 들 수 있다. 이 문은 구한말인 1870년에 세워진 건물로서 시대적으로는 문화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서양함선의 출몰과 프랑스인에 의한 남연군묘 도굴 등 외세의 침입에 많았던 시기에 새로이 정비한 관아와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홍주아문은 구한말에 세워진 것이라 그런지 다른 지역 관아 아문과는 달리 문루를 두지 않고, 삼문의 형식 또한 취하지 않고 있다. 앞면 5칸의 개방된 형태의 출입문을 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아문의 형태이다. 아마도 관아 전체가 성곽으로 둘러쌓여 있었기때문에 방어의 의미가 없어 보이..

조선 관아 2011.02.04

충남 홍성 홍주성, 구한말에 증축한 조선시대 읍성

충남 홍성의 군청소재지에 위치하고 있는 홍주성은 구한말인 고종때 홍주목사 한응필이 크게 보수한 읍성으로 조선이 쌓은 마지막 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곳 홍주성 성곽은 최초의 축성연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구한말 일본에 대항한 큰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의 전투결과 및 일본인들로 인해 많은 훼손이 있기는 했지만 성곽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홍주성은 둘레 1,772m에 달하는 읍성으로 원래는 사대문을 두고 있었으나 지금은 동문인 조양문만이 남아 있다. 성내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관아건물이 35동이나 있었으나, 홍주아문과 동헌인 안회당 정도만 남아 있다. 구한말에 증축한 홍주성은 조선시대 축성기술이 동원된 마지막 성곽으로 성곽을 쌓은 규모로 보았을 때 상당히 정성을 들여서 쌓았던 것으로..

홍성 조양문, 홍주성의 동문

홍주성은 조선시대 홍주목 관아가 있던 읍성으로 지방 읍성 중에는 규모가 제법 크고, 잘 보존되어 있는 읍성 중의 하나이다. 홍주성 내에는 홍주목 관아와 주요 행정시설들이 있었는데, 정3품이 목사가 다스리던 고을로 관아의 규모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홍주성에는 남쪽과 서쪽의 성벽, 동헌, 아문과 동문인 조양문이 남아 있다. 홍주성은 구한말 고종때 대대적인 수리를 한 성곽으로 역사적으로 보면 가장 최근에 축성한 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홍주성에는 동문인 조양문, 서문인 경의문, 북문인 망화문으로 3곳에 문루를 세웠었는데 지금은 도심 한가운데에 조양문만이 남아 있다. 조양문은 구한말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일으킨 의병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로 상당부분 파괴되어 있던 것을 1975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홍주성의..

남원성, 정유재란때 왜군과 큰 전투가 있었던 읍성 (사적298호)

정유재란 당시 남원전투는 당시 왜군이 전북 남원성을 공격해 조.명 연합군과 전투를 벌린 것으로 각지의 의병들과 군민들이 합세해 벌린 큰 전투였으며, 결국 왜군에 패해 모두 살했당했으며, 그당시 살해당한 관민 일만명의 무덤이 남원에 있는 만인의총이다. 당시 왜군은 칠전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격파하고 육군도 구례를 함락시키고 남원성으로 총진격하였으며 왜군의 수가 오만이 넘었다고 한다. 당시 남원성은 경상도에서 호남지역을 거쳐서 서울로 북상할 수 있는 길목에 해당되기 때문에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 3,000명이 파견되었고 각지제서 관군들과 의병들이 모여서 일만이 넘는 민.관이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5만이 넘는 왜군의 주력부대와의 싸움에서 작은 읍성으로는 지키기 어려웠기때문에 남원성에 있었던..

[서울 성곽] 홍지문, 오간수문, 탕춘대성

홍지문은 서울 성곽 북서쪽 출입문인 창의문을 지나서, 북한산에서 흘러내리는 홍제천 계곡에 있는 성문이다. 조선중기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시 반란군이 반정을 모의한 세검정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반군이 경복궁으로 들어온 길에 있는 성문이다. 이 지역은 서울 성곽과 북한산성 사이에 있는 사각지대를 방어하기 위해 조선 숙종때 쌓은 북한산성과 인왕산 성곽을 연결해주는 탕춘대성의 출입문이다. 홍지문은 숙종때 쌓은 성문과 홍제천을 막아 놓고 있는 오간수문이 연결되어 있으며, 홍지문이 있는 길만 평지이고 성문 좌.우로는 능선을 따라서 성벽이 쌓아 놓고 있다. 현재의 성문과 오간수문은 일제강점기에 홍수로 떠 내려간 것을 1977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서울 세검정 상명대학앞 홍제천가에 세워진 홍지문. 1921..

서울 북한산성, 북한산을 둘러싸고 있는 성

북한산성에는 지금은 고양시쪽 입구에만 일부 주민이 거주하고 있고, 남쪽의 대남문은 아주 높은 지대에 성문이 있다. 북한산성 성벽을 따라서 서울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으며, 삼국시대 한강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유용했으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군사적으로는 별로 유용성을 보여주지 못한것 같아 보인다. ☞ 북한산성 주요 유적지 1. 대남문, 청수동 암문, 문수봉, 2. 성벽을 따라 걷는 대성문, 대동문 3. 북한산 계곡에 자리잡은 중성문, 4. 진흥왕순수비가 있었던 비봉 북한산성의 남문인 대남문입니다. 문수봉 아래 구기동으로 가는 고갯길을 막고 있습니다. 멀리 비봉 근처에서 바라본 대남문 북한산 동쪽의 대동문 주위 북한산성의 정문격인 대서문의 취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계곡 한가운데 세운 중성문 북한산성이란 이름은 삼국..

단양 적성산성, 남한강변 죽령길을 지키는 신라의 산성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 있는 비석 중 하나인 단양 신라적성비가 있는 적성산성이다. 조령과 더불어 영남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중요한 통로 중의 하나인 죽령을 지키는 산성으로 남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성재산에 자리잡고 있다. 이 적성산성은 남한강 북쪽에서 쳐들어 오는 적을 제압하는 목적으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에게 유용했던 산성으로 보인다. 대부분 성벽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라 하며, 성을 쌓은 방법과 형태를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 비슷한 신라계 산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단양 적성산성 정상 부근. 이 성벽위에 서면 발아래로 남한강이 흘러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적성산성에서 내려다 본 남한강 단양 적성산성 성벽위에는 흙이 깔려있지 않다. 단양 적성산성 내부 성벽적성산성 성문. 남한강 방향으로 성문이 있..

여주 파사산성, 신라 파사왕이 쌓은 남한강변을 지키는 산성

우리나라 역사에서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교통로 중의 하나였던 남한강 수운을 지키는 여러 산성중에서 하나인 여주 파사산성이다. 이 성은 삼국시대 신라 파사왕때 쌓은 산성으로 당시 고구려와의 투쟁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산성이다. 그 후로도 한강 수운을 지키기 위해서 이 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강에 있는 많은 나루터중에 하나인 이포나루를 지키는 이 성은 조선시대 수도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성들 중의 하나였지만, 이 곳 주민들은 이 성을 쌓고 유지하는 데 비협조적인 것으로 여러 기록들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이 산성의 형세를 보면 북쪽은 산악지대이고 남쪽은 여주와 이천의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 파사산성을 쌓은 파사왕의 의도에서 알 수 있듯이 북쪽으로부터의 침입을 막고자 하..

서울 아차산성, 백제 수도 위례성이 내려다 보이는 산성

서울의 동쪽 경계인 지금의 워커힐 호텔이 있는 뒷산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이다.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한눈에 내려볼 수 있는 아차산에 쌓은 산성이다. 백제가 수도 위례성을 방어하기 위해 처음 쌓았으며, 이때는 토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구려가 아차산성을 점령하고 이 일대에 군사시설인 보루를 건설함으로써 백제 위례성에서 물러나 공주지역으로 수도를 옮길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성곽은 중간크기 돌을 촘촘하게 쌓고 있는데, 고구려 산성축조법의 영향을 받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쌓은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아차산성에서 백제 개로왕이 전사하였다고 하며,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이후 고구려의 온달장군 또한 이곳에서 전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아차산성에서 거의 유일하게 산성임을 눈으로..

단양 온달산성, 온달장군 전사한 장소라는 전설이 남아있는 곳

온달산성은 단양에서 남한강을 따라서 상류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소백산자락 아래 남한강변 성산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이다. 삼국시대에서 신라 전성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고구려와 신라 간에 힘겨루기가 치열하게 있었던 장소로 고구려 온달장군이 전사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산성의 이름은 온달산성으로 고구려 산성으로 여겨지는 곳이지만, 산성이 위치한 장소가 북쪽으로부터의 적을 제압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아서 신라의 산성으로 여겨진다. 성을 쌓은 방법을 보면 작은 돌로서 촘촘하게 쌓은 것이 아차산성 등 고구려 산성과 비슷하기도 하며, 신라가 쌓은 보은 삼년산성과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고구려, 신라 간에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을 것 같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곳 온달산성에 올라가면 남한강..

연천 당포성, 임진강 나루를 지키는 고구려성

연천 당포성은 연천과 파주 사이를 가르면서 흐르는 임진강변에 있는 고구려 성 중의 하나이다. 4~5세기 무렵 고구려가 남하함에 따라 백제와의 전선이 형성되었으며, 그후 신라 진흥왕이 한강을 장악하면서 자연스럽게 신라와의 국경선이 되었던 지역이다. 임진강을 따라서 북단에는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 고구려의 요새들이 발굴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백제의 육계토성, 오두산성, 신라의 칠중성 등이 자리잡고 있다. 수백년동안 고구려와 백제 또는 신라와의 접전이 일어났던 국경지대 역할을 했으며, 지금도 남북의 휴전선이 이 임진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당포성을 보면 산성축조에 있어서 고구려인의 뛰어난 점을 느낄 수 있는데, 고구려 산성을 보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소수의 인원으로 방어할 수 있는 산..

용인 처인성, 몽고침입때 명장 김윤후가 몽골 장군 살리타이를 사살, 몽고 침입을 물리친 곳

용인시와 남쪽 안성시, 평택시와 경계가 되는 지점에 위치한 남사저수지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처인성입니다. 전체 둘레 425m의 작은 평지성으로 성벽은 토성으로 쌓았으면 별로 높지도 않고 견고해 보이지도 않은 성입니다. 이 곳이 몽골의 고려 침입시 가장 유명한 전투인 처인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고려시대 명장 김윤후가 몽골 자군 살리타이를 사살함으로써 당시 세계 최고의 군대인 몽골 기마대를 물리친 곳입니다. 처인성의 전략적 위치는 용인 이남에서 서울방향과 연결해 주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중요해 보이기는 하지만 성벽의 규모로 보아 큰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만 역사적으로 고려가 몽골군을 격퇴한 장소로서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처인성은 용인 남사에서 서울 방향으로 들어오는 길목의 교통 ..

나주 자미산성, 고대국가 마한의 중심

나주 영산강 남쪽에서 영암 월출산까지의 넓은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 지역은 고대국가 마한의 중심지이고, 그 중심에 해발 100m도 되지 않는 낮은 야산에 자리잡고 있는 자미산성이 있다. 이 자미산성은 백제 테뫼식 산성으로 백제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산성의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자미산성은 영산강 이남 하류지역을 관장하는 곳으로 마한시대부터 후백제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과의 투쟁, 삼별초 항쟁 등 다양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이 주변 지역은 반남 박씨의 본향이기도 하다. 물론 자미산성은 지금 이름만 산성이고, 성벽이나, 성문지 같은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상태로 산성이었다는 의미만 간직하고 있다. 자미산성 입구 자미산성 오르는 길. 자미산성은 해발 100m가 되지 않는 낮은 ..

부여 부소산성

부소산성은 부여의 금강산변 낮은 야산인 부소산성에 쌓은 성을 말한다. 부소산성은 백제의 산성 형식을 보여주며 자연적인 능선을 쌓아서 산성의 형태를 만든 것으로 돌을 쌓은 흔적을 찾기는 약간 힘들다. 그렇지만 산성이 백마강을 끼고 요새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공략하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 부소산성 내 유물/유적: 1. 계백, 성충, 홍수 3명의 충신을 모신 사당: 삼충사 2. 3천궁녀가 떨어진 낙화암, 백마강 그리고 고란사 부소산 정상부근의 반월루 입니다. 부여시내와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입니다. 부소산성내에 있는 누각인 영일루 입니다. 부소산성내에 있는 숙영지인 군창지입니다. 부소산성의 성벽이었던 것 같은데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경주의 반월성이나 행주산성도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백제성인 토..

[서울 북한산성] 대남문, 청수동 암문

북한산성은 서울의 북쪽에 자리한 북한산을 둘러싸고 있는 성이다. 그래서 북한산성의 성벽들은 대부분 해발 500m이상의 능선을 따라서 쌓았고 그 중 구기동을 통해서 올라가면 문수봉 옆 고개길에 있는 대남문을 만날 수 있다. 북한산성 성문중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대남문입니다. 문수봉 바로 아래에 있는 고개에 있습니다. 성문을 통해 등산객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대남문 성문 대남문 문루와 현판 문수봉 방향으로 성벽이 계속 연결되어 있습니다. 대동문에서 대남문으로 연결된 성벽, 이 쪽 성벽이 제일 완벽하게 북한산성 성벽을 체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북한산성 성벽 대남문 성벽 위의 풍경입니다.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북한산을 감상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먼곳에서 바라본 대남문입니다 문수봉과 비봉 사..

[서울성곽] 남산 동쪽 장충동 일원

한양도성을 이루고 있는 성곽중 남동쪽 소문에 해당되는 광희문을 지나서 남산으로 연결된 성곽이다. 광희문에서 다시 시작된 성곽은 옥수동 방향 도로가 있는 부근에서 끊어 졌다가 장충체육관 뒷편에서 시작되어서 남산 동쪽 능선으로 연결되고 있다. 한양도성의 동쪽에 자리잡은 낙산 능선에 남아 있는 성곽과 함께 도심에서는 성곽이 꽤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성곽 안쪽에는 일반인들이 거주하는 주택이나 마을은 거의 없고 장충체육관, 신라호텔, 자유센터, 국립극장, 동국대학교 등 관변단체나 시설 등에 그 기원이 있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성곽 바깥쪽에는 일반 서민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전형적인 서울 성곽주변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 중 그 상태가 양호하게 남아 있는 장충동 일대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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