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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186

태안 경이정, 태안을 지나가던 중국사신이 잠시 쉬어가던 관아 정자

태안군 태안읍 사무소가 있는 동문리 일대는 조선시대 태안군(현) 관아가 있던 지역으로 관아건물로는 동헌과 관아에서 운영하던 누정인 경이정, 중등교육기관인 태안향교가 남아 있고, 객사를 비롯한 건물들이 있던 터에는 초등학교와 읍사무소가 들어서 있다. 조선시대 바다와 조운을 담당한 연안항로를 지키는 수군으로 남.서해안에는 주로 수영과 그보다 낮은 조직인 방어사가 설치되었는데 태안에는 그 중 수군 방어사가 설치되었다. 방어사는 무관으로 고을 수령을 겸하면서 주변지역 수군조직을 관장하는 직위로 종2품에 해당하는 고관이었다고 한다. 태안읍사무소 앞 큰 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정자인 경이정은 원래 중국사신들이 안흥항을 통해 조선을 방문하면서 태안을 지나갈 때 휴식을 취하던 장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명나라..

조선 관아 2013.03.28

태안 목애당, 옛 태안군 관아 동헌

충남 서해안 끝자락 태안반도에 위치한 태안군은 조선시대 태안군이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서산과 접한 동쪽을 제외하고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으로는 서해 먼바다와 직접 맞닫아 있고, 남쪽으로는 천수만, 북쪽으로는 가로림만이 있다. 태안은 서해안에 위치하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서 갯벌은 적은 편이며 모래사장과 송림이 발달되어 있어 크고 작은 포구와 해수욕장들이 있다. 삼국시대 태안은 백제가 중국 남.북조와 교류하는 중요한 창구였으며, 불교를 비롯한 중국문물이 전래되는 중요한 접점으로 태안마애석불, 서산마애석불, 보원사절터 등에서 당시 교류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태안이라는 지명은 고려 충렬왕때부터였으며 조선시대에는 태안군이 설치되었다. 태안은 관할지역이 넓지 않기때문에 태안군수는 지방관의 역..

조선 관아 2013.03.28

서산 관아문, 옛 서산군 관아 아문과 노거수

서산은 충남 서해안의 진산이라 할 수 있는 가야산 서쪽편에서 태안반도 사이에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한 고장으로 동쪽으로 당진.예산, 남쪽으로 홍성, 서쪽으로 태안군에 접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산시에는 충청병영이 있었던 해미현과 서령군이 있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백제가 서쪽끝 태안반도 끝 항구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던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삼남지방에서 세금으로 걷어들은 물자를 운반하던 조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고장이다. 남쪽의 천수만, 북쪽의 아산만을 통해 바다와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때문에 고려말, 조선초 왜구의 위협을 많이 받았던 곳이며, 병자호란 이전까지 서해안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 해미읍성에는 충청병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서산시청을 비롯한 서산시 주요 관..

조선 관아 2013.03.26

서산객사,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는 관아 건물

서산군 관아를 구성하던 건물 중 가장 중요한 건물인 객사 건물이다. 원래 서산시청 내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구한말 근대 초등교육기관을 세울때 대부분은 기존에 손님이 묵는 숙소로 이용했던 객사건물과 객사터가 초등학교로 변신하는 경우가 많고 동헌건물은 읍사무소 등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서산군의 경우는 객사건물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읍사무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서산객사는 앞면 8칸의 '-'자형으로 생긴 큰 건물이다. 보통 객사건물은 '궐패를 모신 가운데 건물을 중심으로 양쪽에 익랑형식으로 약간 지붕이 낮은 숙소건물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건물은 전체가 하나의 건물처럼 보이며, 내부 구성은 다른 객사들과 동일하다. 건물이 지어진 형태로 볼 때 구한말에 크게 ..

조선 관아 2013.03.23

서산 외동헌, 옛 서산군수가 근무하던 관아 건물

서산시는 충남 서해안 태안반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고장으로 동쪽으로 예산,당진,홍성과 접하고 있다. 북쪽의 아산만, 남쪽의 천수만 사이에 비교적 고도가 낮은 구릉지와 넓은 평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이 지역은 태안의 크고 작은 항구로 통하여 내륙지방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국시대 백제와 중국간의 교류가 많았던 지역으로 서산마애석불, 보원사지 등 유적지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해미현과 서산군이 있었다. 서산시청이 있는 서산읍은 조선시대 서산군 관아가 있는 곳으로 지금도 서산시청 주변에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인 외동헌, 객사, 아문이 남아 있다. 서산군 고을 수령이 근무하던 건물인 외동헌은 지방관아 건물로는 큰 편으로 앞면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단청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구한말인..

조선 관아 2013.03.22

서울 용양봉저정, 정조가 한강을 건넌후 잠시 쉬었던 노량진나루터 정자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는 인도교로서 첫번째로 건설된 한강대교는 한강 이남의 노량진과 강북의 용산을 연결해 주는 다리로 1917년에 준공되었으며, 1980년대까지는 제1한강교라고 불리웠다. 노량진에서 용산까진 강폭이 좁고 가운데 노들섬이 있어서 한강을 건너기에 가장 용이하였던 지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시흥.수원을 거쳐서 충청도.전라도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노량진 나루터는 경강의 4대도선장 중 하나로 교통량이 많았다고 한다. 한강대교 남단 입구 언덕에는 용양봉저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한강을 내려보고 있다. 이 정자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 참배길에 한강을 건넌 후 잠시 휴식하던 곳이다. 앞면 6칸의 마루와 온돌방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숙식을 하던 행궁이라기 보다는 정조가 화성행차를 ..

조선 관아 2013.02.17

청주동헌, 조선시대 청주목사가 근무했던 관아 건물

청주목은 삼국시대 서원경이 설치되었던 청주지역에 설치된 지방행정기구로 고려가 국가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기 시작한 광종대에 전국에 12개 목(牧) 중 갑오개혁으로 전국의 행정체제가 개편되기까지 유지되어 왔다. 청주에는 병자호란 이후 해미읍에 있던 충청병영이 옮겨와 상당산성을 중심으로 내륙의 군사적 거점이 되어왔다. 청주 구도심으로 대부분의 행정기관이 모여있는 상당구 남문로에는 객사가 있었던 중앙공원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관아 건물들 중 일부가 남아 있다. 중앙공원 뒷편에는 원래 충주목 관아 동헌이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은 청원군청이 소재하고 있고, 그 사이에는 KT지사가 들어서 있는데, 대체로 충주목과 충청병영에 속했던 많은 관아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원군청 본관 뒷편에 남아 있는 청주동..

조선 관아 2012.12.02

청주 망선루, 청주목 관아에 있던 공식 행사를 위해 세운 누각

충청북도 도청소재지가 있는 청주시는 삼국시대에 상당현과 서원소경이 설치되었으며, 가야가 멸망한 이후 김유신 장군으로 대표되는 가야후손들이 세력을 잡았던 곳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서원경이 설치되었고, 고려시대 이후로는 지방관제 중에서는 높은 직급이라고 할 수 있는 정3품 목사가 수령인 청주목이 설치되었다. 청주는 동쪽으로는 상당산으로 비롯하고 크고 작은 산들이 있고, 서쪽과 남북쪽으로는 금강 지류인 무심천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청주 구도심으로 상업의 중심지인 상당구 남문로 일대에는 조선시대 읍성 안 관아가 있던 지역으로 조선후기에 충청병영이 청주로 옮겨오면서 청주목 관아와 충청병영 관아가 모여있던 지역이다. 그 중 관아의 중심건물인 객사가 있었던 장소인 중앙공원에는 관아 건물 중 충청병영 ..

조선 관아 2012.11.29

청주 충청병마절도사 영문, 조선후기에 세워진 병영 출입문

충청북도 도청소재지인 청주시는 삼국통일에 큰 기여를 한 김유신 장군의 출신지역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5소경 중 하나인 서원경이 설치된 곳이다. 고려초에는 호족세력이 강했던 지역 중 하나로 청주목이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조선후기에는 충청도 내륙지역의 국방상 중요성이 강조되어 서산 해미에 있던 충청병영이 이곳으로 옮겨졌다. 충북도청과 청원군청이 있는 청주 구도심 중앙공원은 조선시대 청주목 관아 객사가 있던 곳으로 객사건물은 남아 있지않고, 객사 누각 건물인 망선루, 충청병영 출입문을 비롯하여 척화비 등이 남아 있으며, 뒷편 청원군청내에는 동헌 건물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병영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종2품 무관인 병마절도사가 머무르는 곳으로 충청도, 경상좌.우도, 전라..

조선 관아 2012.11.27

여수 진남관(국보 304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조건축물 중 하나인 전라좌수영 객사

국보 304호로 지정된 여수 진남관은 현존하는 가장 큰 목조건축물 중의 하나로 여수에 있었던 전라좌수영 객사 건물이다. 객사는 관아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중앙 정청 내부에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전패)을 모신 함을 두고 고을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날 또는 국가적인 큰 일이 있을 때 국왕을 향해 절을 올리는 '향월 망배'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이지만, 실제로는 지방관아를 방문한 중앙 또는 지방의 관리들이 공적인 업무를 여행을 할 때 머무는 장소이다. 객사는 거의 모든 관아에서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건물이 여수 좌수영 객사인 진남관과 통영 통제영 객사인 세병관이다. 이는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남해안이 왜구의 침입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기때문에 강한 수군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때문에 수영과 남해안의 주요 포..

조선 관아 2012.10.29

인천 화도진 관아, 구한말 한미수교통상조약이 체결된 역사적 장소

인천시 동구 화수동에 있던 화도진은 구한말 병인양요를 거치고, 일본과의 조약으로 제물포가 개항된 이후 인천을 통해 드나드는 선박을 감시하고 해안방어를 위해 설치한 포대들을 관리하기 위한 관청이다. 진(鎭)은 주로 해안이나 내륙수운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조직으로 진영(鎭營)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화도진은 인천항과 주변 연안항로를 운행하는 선박을 감시하고, 외국 군함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세운 군사조직으로 기존에 있던 진(鎭)과는 달리 규모가 큰 편이다. 이 곳에서는 1882년 고종의 전권대사였던 신헌과 미국의 전권대사 슈벨트 제독 사이에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화도진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제가 개편될 때 폐지되었다. 화도진 공원의 관아 건물은 기존 자료를 바탕으로 1988..

조선 관아 2012.10.22

순천 낙안읍성 옥사(감옥)와 연못

순천 낙안읍성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관청이 있던 지방고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남부 해안가지역이기 때문에 평지에 읍성을 쌓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는데, 동.서을 가르는 도로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관청 건물들이 있고 남쪽에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객사를 제외한 읍성내 관청 건물들은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관청의 배치나 구성요소들을 잘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낙안읍성의 옥사는 고을내의 죄수들을 수용하였던 건물로 다른 읍성과 다른 점은 관아와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읍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남문을 들어서면 가운데 큰 길은 관아로 연결되며 동쪽편에는 비상시 읍성내 식수와 생활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조성한 연못들이 있고, 연못안쪽에 옥사터가 있었다. 옛 옥사..

조선 관아 2012.10.21

순천 낙안읍성 관아 아문인 낙민루와 임경업장군 선정비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워진 많은 읍성들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낙안읍성은 원래 세종대에 흙으로 쌓은 토축성을 개축하여 석축성으로 쌓은 것이다. 현재의 성벽은 조선 인조대에 낙안군수를 지낸 임경업장군이 크게 보강한 것으로 지금도 읍성내 관아 객사 입구에 그의 선정을 기리는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낙안읍성내에는 아직도 100여명 이상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초가집들이 있고 읍성 북쪽편에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들이 있다. 낙안읍성 관아건물로는 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되었던 객사, 최근에 복원된 동헌과 내아, 문루인 낙민루가 있다. 읍성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큰길가에 위치하고 있는 관아 출입문인 낙민루는 다른 지방 관아 문루가 동헌 입구에 있는 것과는 달리 고을 수령의 숙소인 내아 출입문..

조선 관아 2012.10.19

순천 낙안읍성 내아, 고을 수령이 머물던 살림집

낙안읍성은 전남 순천시 낙안벌판 북쪽 끝자락에 자리잡고 옛읍성이다. 읍성에는 100여 가구의 주민들이 지금도 살고 있는 초가마을이 있고, 옛 낙안군 관아 건물인 낙악객사, 동헌, 내아, 문루 등이 남아 있다. 현재의 기준으로 지금 남아 있는 읍성내 마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아 보이지만, 조선시대 이곳은 종4품 군수가 고을 수령이었던 약간 큰 규모의 고을이자, 이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읍성 관아 건물 중 객사는 초등학교 건물로 사용하다가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동헌과 내아는 옛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한 건물이다. 그 중 내아 건물은 마당이 넓고, 본채 외에는 부속건물을 두지 않는 구조이다. 본채는 'ㄱ'자형 구조를 하고 있으며, 'ㅁ'자형으로 이루어진 다른 지방 관아의 내아와는 달리 개방된..

조선 관아 2012.10.18

순천 낙안읍성 동헌, 낙안군수가 근무하던 읍성내 동헌 건물

낙안읍성은 옛 낙안군 관아가 있던 읍성으로 낙안군은 전남 순천시 낙안면.외서면과 보성군 벌교읍 일대를 관할하던 옛 고을의 이름이다. 조성시대 지방행정 단위 중에서는 중간 정도 규모로 종4품 군수가 고을 수령으로 있던 곳이다. 관아가 있던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지방 행정의 중심지로 관아를 비롯하여 성벽과 내부의 마을의 모습도 원형에 가깝도록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 관아가 있던 지역 중심지에서 살던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낙안은 서남쪽을 제외하고는 산으로 둘러싸은 넓은 분지가 평야를 이루는 곳으로 관아가 있는 낙안읍성는 평야의 북쪽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낙안읍성은 동문에서 서문으로 연결되는 큰 길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아전들을 비롯하여 관아와 관련된 사람들이 거주했던 민가와 상점들있고,..

조선 관아 2012.10.16

순천 낙안객사, 낙안읍성에 남아 있는 고을을 방문하는 중앙관리들을 위한 숙소

조선시대 낙안군 관아가 있었던 낙안읍성은 조계산 남쪽자락에서 남해안 순천만까지 이어지는 낙안벌판의 북쪽끝에 자리잡고 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 왜구의 침입이 극심할 때 처음 토성을 쌓았던 것으로 인조대 낙안군수를 역임한 임경업 장군이 현재의 모습처럼 석축성으로 중수하였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읍성 중 그 원형에 가장 가깝게 남아 있게, 실제 주민들도 당시의 초가주택에서 그대로 살고 있는 등 조선시대 지방 관아를 중심으로 읍성의 모습을 실제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마을이다. 낙안읍성에는 조선시대 관아를 이루고 있던 객사, 동헌, 내아가 원래의 모습대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객사는 외국 사신이나 왕명으로 지방을 방문하는 중앙의 관리들이나 귀빈들을 위한 숙소로 지어진 건물이다. 본래의 기능은 객사 중앙 대청마..

조선 관아 2012.10.15

[창덕궁] 궐내각사 내의원, 국왕의 건강을 보살피던 궁궐내 의료기관

조선후기 국왕이 거처하는 정궁으로 사용되었던 동궐 창덕궁 궐내각사에는 학문을 관장하는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 등과 함께 국왕의 건강을 관리하던 내의원이 있다. '약방'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행각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정부에서 요직이라고 할 수 있는 홍문관 등과는 달리 궁궐내 병원으로 작은 건물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물을 짓는데 있어서 격식을 차리지 않고 좁은 공간을 활용해서 많은 방들이 들어설 수 있도록 작은 행각들이 오밀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국왕의 말과 글을 대필하던 예문관과 함께 국왕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모실 수 있도록 공간 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내의원은 왕의 약을 조제하는 일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전의원.혜민서와 함께 삼의원..

조선 관아 2012.09.28

[창덕궁] 궐내각사 예문관, 국왕의 말과 글을 대필하는 국왕 보좌기관

궐내각사는 규장각을 홍문관, 예문관, 내의원 등 국왕을 직접 보좌하는 관청들인 모여있는 곳으로 창덕궁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서 볼 수 있는 건물들이다. 경복궁에서도 경회루 앞의 수정전을 중심으로 같은 기능을 하는 관청들인 모여 있었다고 한다. 이들 건물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철거되고 없어졌던 것을 2005년 창덕궁 궐내각사가 먼저 복원되었다. 궐내각사는 정전인 인정전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왕과 가장 가까운 곳에 예문관과 내의원이 위치하고 있고, 그 앞쪽에 국정을 자문하는 홍문관이 자리잡고 있다. 예문관, 내의원 등은 정전 옆 작은 출입문을 통해 정전으로 출입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문관은 국왕의 말이나 글을 대필하는 기관으로 세조대에 집현전이 혁파되면서 도서출판의 기능은 홍문관으로..

조선 관아 2012.09.27

[창덕궁] 궐내각사 옥당, 조선시대 국왕 자문을 담당하던 홍문관 건물

창덕궁 궐내각사는 크게 금천을 기준으로 동쪽편에는 홍문관, 예문관, 내의원 등이 있으며, 서쪽편에는 규장각이 자리잡고 있다. 규장각이 숙종대에 지어진 국왕의 어제와 어필 등을 보관하던 건물에서 출발하여 정조대에 그 기능이 크게 확장되어 국내외 도서의 수집, 왕실 도서의 출판 등 학문의 중추지관으로 변모하였다면, 홍문관은 원래 왕실을 서적을 관리하고 국왕을 자문을 대비하는 기관으로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한 이래로 학문을 관장하는 기능을 해 왔던 기관이다. 홍문관은 국왕의 건강을 살피는 내의원, 왕의 말과 글을 대신 짓는 예문관과 함께 정전인 창덕궁 인정전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어, 국왕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기관이다. 경복궁에서 집현전이 근정전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국왕을 보좌하던 것과 같은..

조선 관아 2012.09.27

[창덕궁] 궐내각사 규장각, 조선 왕실의 도서관이자 학술연구기관

창덕궁 궐내각사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조선 왕실의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규장각이다. 조선초기 세종이 창설했던 학술 연구기관인 집현전의 예를 본받아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창설된 기관이다. 창덕궁 외조 출입문 앞을 흐르는 금천을 기준으로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규장각은 책을 보관하던 주 건물인 규장각을 비롯하여 검서관들이 근무했던 검서청, 역대왕들의 글과 그림을 봉안하던 봉모당, 입구의 행각, 뒷편의 책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장각은 원래 숙종대에 왕이 지은 글인 어제와 왕의 글씨인 어필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작은 건물이었으나, 정조대에 규장각을 확장하여 창덕궁 후원에 2층건물을 짓고 1층에 규장각 현판을 걸고 정식 정부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정조는 규장각에 기존의 어재.어필..

조선 관아 201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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