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반응형

궁궐_종묘 144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보물 385호), 품계석이 세워져 있는 정전 앞 마당

창경궁은 조선3대 국왕인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머물렀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궁궐로 상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태종 이후 조선왕조에서는 상왕이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국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했던 대비들이 존재했다. 이런 까닭에 창경궁은 주로 왕실의 어른인 대비를 위한 공간의 성격이 강한 궁궐로 실제로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처음 지은 궁궐이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실제로 많이 사용하지 않다가, 임진왜란때 경복궁과 함께 불타버린 후 창덕궁과 함께 중건되어 주로 사용되었으며, 동궐로 불리었다. 창경궁 일원은 대비를 비롯하여 왕실에 딸린 후궁, 어린왕자나 공주 등이 살았던 주거공간으로 조선후기 후..

궁궐_종묘 2012.09.10

[창경궁] 홍화문(보물384호)과 외조(外朝)의 외행각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은 다른 궁궐 정문과는 달리 동쪽을 하고 있는 출입문이다. 보물 384호로 지정된 홍화문은 성종 15(1484)에 처음 지어졌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으로 광해군 8년(1616)에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일제가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면서 정문으로도 사용했던 건물로 여러 차례 수리를 하고 단청을 입혔기때문에 옛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17세기초 목조건축 양식이 잘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다. 궁궐 정문으로서는 작은 규모라 할 수 있는 3문의 형식을 하고 있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조선시대에는 양쪽에 한쌍의 십자각을 두었다고 한다. 위층은 마루를 깔고 나무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고 한다. 홍화문 바깥쪽에..

궁궐_종묘 2012.09.08

[경희궁] 영조의 어진을 모신 태령전과 서암

조선시대 서궐이라 불리웠던 경희궁은 정전.동궁 등 1,500여칸에 이르는 큰 궁궐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되었고,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가 세워졌었다. 태령전은 경희궁에 있던 많은 전각들 중 하나로 국왕의 집무장소였던 편전이 자정전 서쪽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던 건물이다. 원래는 특별한 용도가 없었던 건물인데 영조대에 영조자신의 어진을 모시는 건물로 사용하면서 태령전이라 불렀다. 이 건물 또한 일제강점기에 없어졌던 것인데, 경희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대표적으로 복원되었다고 할 수 있다. 태령전 뒷편에는 서암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원래 이름은 왕암이라고 하며, 이곳에 왕기가 서렸다고 하여, 광해군이 서궐을 창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경희궁이 있던 이곳은 임진왜란 이후 정원군의 사..

궁궐_종묘 2012.08.19

[경희궁] 편전인 자정전(資政殿)

경희궁 정전인 숭정전 뒷편에 자리잡고 있는 편전인 자정전이다. 편전은 국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던 등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경희궁은 국왕이 많이 머물렀던 궁궐이 아니었기때문에 편전이기는 하지만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는 빈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가 임시로 보관되기도 하였다. 자정전은 편전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크지 않은 규모의 건물로 행각으로 둘러져 있다. 우물마루가 깔려 있는 경복궁 편전인 사정전과는 달리 정전처럼 내부 바닥에 전돌이 깔려 있고, 건물을 크게 꾸며 놓고 있지는 않다. 광해군대에 처음 지어진 이 건물은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경희궁 편전인 자정전을 들어가는 출입문인 자정문. 규모가 크지는 않고 소박해 보인..

궁궐_종묘 2012.08.17

[경희궁] 정전인 숭정전과 조정

경희궁은 원래 있었던 수많은 전각 중에서 정전영역에 해당되는 숭전전과 편전에 해당되는 자정전만이 현재 복원되어 있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광해군 때 건립된 건물로 원래의 건물 일제의 의해 개조되어 동국대에서 법당 건물로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고증을 통해 복원한 건물이라고 한다. 조선후기에 정전으로서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하였다. 지금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많지 않지만 역사적으로 국왕 즉위식이 있었고 궁궐로 사용되었던 곳이라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서궐이라고 불렸던 경희궁은 조선시대 5대궁궐 중 하나로 임진왜란 직후인 광해군 때 창건되어 조선후기 동안 국왕이 거처하던 궁궐로서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원래의 경희궁은 정전인 숭전전을 ..

궁궐_종묘 2012.08.10

[경희궁(慶熙宮)] 흥화문(興化門)과 금천교

흥화문은 조선의 궁궐 중 가장 많은 수난을 받았던 경희궁의 정문이다. 경희궁은 일제에 의해 헐려서 없어지고 서울고등학교 교사로 사용되다 최근에 복원된 궁궐이다. 정문인 흥화문은 일제에 의해 이토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한떄는 신라호텔이 있는 장충동으로 옮겨져서 호텔정문으로 사용되다 경희궁이 복원됨에 따라 현재의 장소에 옮겨졌다고 한다. 경희궁 앞으로는 서울 역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고 광화문과는 아주 가까운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은 창덕궁을 비롯한 기존 궁궐의 정문이 2층 문루 형태로 되어 있는데 반해서 단층으로 지어졌다. 규모는 앞면 5칸에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광해군이 경덕궁을 세울때 공사중지를 주장하는 신하들을 설득하기 위해..

궁궐_종묘 2012.07.30

[덕수궁] 정관헌, 최초의 궁궐안 서양식 건물

덕수궁 함녕전 뒤뜰 후미진 곳에 자리한 정관헌은 궁궐안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라고 한다. 이 정관헌의 위치는 성공회 건물 바로 옆에 있으며 영국 대사관 등 서양 국가의 대사관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작은 건물이다. 궁궐속에 자리한 하나의 작고 아담한 카페를 연상시키는 장소로 고종이 휴식을 취하며 차를 마시던 곳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러시아인이 설계한 건물로 동.서.남 삼면이 뚫려 있는 형태로 내부에는 높고 굵은 돌기둥을 사용하고 있다. 난간은 서양식 철제양식이지만 문양은 소나무, 사슴, 박쥐 등 우리나라 전통문양을 사용하고 있다. 구한말 건축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러시아 건축풍이 남아 있는 건물로 특히 베란다의 차양은 강릉 선교장에서 볼 수 있는 러시아인이 지어준 차양과 비슷한 분위기를 주고..

궁궐_종묘 2012.05.08

[덕수궁] 함녕전과 덕홍전, 고종이 마지막으로 거처하던 곳

함녕전과 덕홍전은 고종황제가 마지막으로 거처하고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중 함녕전은 궁궐 전각 중에서는 국왕의 침전으로 사용했던 건물로 경복궁이 왕비의 영역인 내전을 별도로 두고 있는데 비해서 왕비의 침실을 같이 두고 있어 내전을 겸하고 있던 건물이다. 이는 덕수궁이 대한제국의 궁궐로 정해진 후 증축하는 과정에서 지어졌는데 당시는 중전인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로 내전이 급하게 필요하지 않았기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신에 덕홍전 오른쪽편에 명성황후의 빈전인 '경호전'이 있었으며, 그 자리에 고종이 손님을 접견하기 위한 건물로 덕홍전을 지었다. 덕홍전은 궁궐건물 중 제일 마지막인 1911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하며, 고종이 손님을 접견하기 위한 공간으로 지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덕홍전은 국왕 침전과 비슷한 역..

궁궐_종묘 2012.05.03

[덕수궁] 석조전, 구한말에 세워진 서양식 궁전 건축물

덕수궁 석조전은 예전의 경북궁 정문에 자리잡고 있던 중앙청 건물, 그리고 남대문 시장 부근의 한국 은행 건물과 함께 20세기초 서양식 건물을 본떠서 만든 대표적인 건물이다. 그 크기는 실제 유럽이나 미국 등의 유명 건물에 비해서는 왜소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주었던 서양식 건물이기는 하다. 그래서 그 후 덕수궁 석조전을 본 떠서 많은 건물들이 우리나라 만들어졌던 것 같다. 그리고 또한 많은 사진에 등장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던 건물이 덕수궁 석조전이다. 덕수궁 석조전은 고종이 업무를 보기 위한 편전과 침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9년에 건립된 서양식 건축물로 궁궐 전각 중 하나이다. 전체적으로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넓은 베란다를 두고 있고, 전면에는 19세기에 ..

궁궐_종묘 2012.04.29

[덕수궁] 편전인 즉조당과 준명당, 석어당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 뒷편에는 편전에 해당하는 석어당, 즉조당과 준명당이 자리잡고 있다. 덕수궁이 구한말 국왕이 거처하는 정식 궁전으로 바뀌면서 많은 건물들이 새로 지어졌지만, 이 곳에 있는 석어당과 즉조당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처했던 전각들을 보존한 곳이다.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오른 곳이고, 석어당은 선조가 거처하다 승하한 유서깊은 건물이다. 덕수궁은 경복궁과는 달리 정전을 둘러싸고 있었던 행각이 남아 있지 않고, 즉조당 옆으로 서양식 건물이 석조전이 세워졌기때문에 다른 궁궐과는 달리 개방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편전 건물 중 석어당은 현존하는 유일의 목조 2층집으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소박한 살림집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건물로 임진왜란 당시 임시로 궁궐로 사용했던 건물 중 대부분은 1..

궁궐_종묘 2012.04.23

[덕수궁] 중화전(中和殿,보물819호), 구한말에 세워진 덕수궁의 정전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으로 이 곳에는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의 개인저택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가 서울로 돌아온 후 임시로 거처했던 곳으로 행궁이었던 것을 광해군때 그 규모를 확장하여 경운궁이라 하였다. 실제로 덕수궁은 구한말까지는 그 규모가 크지 않은 별궁으로 유지되어왔으나, 1897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이 곳 경운궁으로 거쳐를 옮기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정식궁궐로 바뀌었다. 덕수궁 중화전은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조례, 외국 사신 접견 등 주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는 곳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궁궐의 정전으로 1902년에 완공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06년에 중건한 건물이다. 처음 중화전을 세웠을 때는 경복궁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2층 건물이었..

궁궐_종묘 2012.04.17

[덕수궁] 중화문(中和門), 중화전(中和殿) 앞 내조(內朝)와 품계석

중화전은 구한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지위에 오르면서 그에 걸맞는 궁궐건물로 세운 덕수궁의 정전이다. 1902년에 중화전을 처음 세울때는 중층의 웅장한 건물이었으나 화재로 불타버린 후 1906년에 중건한 것이다. 구한말 조선의 경제력을 보여주듯이 다른 궁궐의 건물에 비해서 웅장한 멋이 덜하다는 느낌을 준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정전은 국가적인 큰 행사를 치르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는 고대 로마의 바실리카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덕수궁은 현재 행각이 일부만 남아 있어서 개방된 공간형태를 하고 있다. 중화전의 출입문은 중화문으로 단층에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으며 정문인 대한문에서 직각으로 꺾여서 들어간다. 중화문을 들어서면 바닥에 박석이 깔여 있고 품계석과 삼도가 설치된 조선시대..

궁궐_종묘 2012.04.06

[덕수궁] 대한문(大漢門)과 금천교, 덕수궁 들어가는 길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과 궁궐 앞을 흐르는 작은 하천인 금천을 건너는 돌다리인 금천교이다. 덕수궁 대한문은 시청앞 광장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어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문으로 많은 사람들은 단지 저 곳에 덕수궁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지나가는 일상과 너무 가까운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덕수궁은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과는 원래 왕족의 사저였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 궁궐로 개조했던 별궁으로 규모가 작은편이다. 실제로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에 이곳에 거처하면서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대부분읜 건물들은 구한말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지은 건축물이다. 덕수궁의 원래 정문은 정전인 중화전 정면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1904년 화재로 중화전 등을 재건할 때 환구단을 중심으로 현 시청광장 주변이 도심의 중심지로 바뀌면서..

궁궐_종묘 2012.03.29

흥선대원군 사저 운현궁, 내부에 전시된 당시 생활상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거처했던 운현궁은 이름은 궁궐이지만, 당시의 세도가의 주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인 노안당에는 흥선대원군과 그를 위해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 그리고 대원군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으며, 안채로 사용되었던 노락당에는 명성황후가 왕비수업을 받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운현궁 사랑채인 노안당에 흥선대원군이 거처하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노안당 대청마루에는 흥선대원군이 난을 그리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난을 그리고 있는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친척인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배웠고, 묵란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추사는 그의 묵란을 가리켜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궁궐_종묘 2011.12.06

흥선대원군 사저 운현궁, 여인들의 공간인 안채 이로당(二老堂)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곳으로 현재의 건물들은 고종이 즉위한 이후에 새로이 지은 건물이다. 운현궁은 사랑채인 노안당, 명성왕후가 왕비수업을 받았던 노락당, 안채인 이로당, 별당인 아재당, 정자인 영화루, 은신군.남연군의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언덕에 있던 별당.사당.정자 등은 일제가 허물고 양관이라는 현대식 건물을 지었다. 이로당(二老堂)은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거처했던 운현궁에서 제일 안쪽에 위치한 건물로 운현궁에서 안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원래는 노락당이 안채였으나 그 곳에서 고종의 가례의식을 치러 안채로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새로 신축한 건물이라고 한다.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7칸으로 남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중정이 있는 'ㅁ'자형 건물배치..

궁궐_종묘 2011.12.05

흥선대원군의 사저 운현궁, 명성황후가 왕비수업을 받던 노락당(老樂堂)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전에 살았던 곳으로 구한말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즉위 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사랑채인 노안당, 원래 안채였다가 명성왕후가 신부수업을 받은 이후 비워두었던 노락당, 안채인 이로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뒷편 언덕 후원에는 별채와 사당이 있었다고 하나, 일제가 이를 허물고 양관이라는 현대식 건물을 지어놓고 있다.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인 노락당(老樂堂)이다. 정면 10칸이나되는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로 구한말에 지어진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노락당은 원래 운현궁의 안채였으나,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왕비수업을 받았던 까닭에 안채는 노락당 뒷편에 이로당을 신축해서 옮겨지고 이곳 노락당은 회갑연 등 흥선대원군 일가의 가..

궁궐_종묘 2011.12.04

흥선대원군 사저 운현궁 노안당(老安堂), 구한말 정치의 중심 사랑방

운현궁 사랑채인 노안당으로 대원군이 직접 이름을 짓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현판을 달고 있는 건물이다. 이 곳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일상에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노안당'이란 현판은 '노자를 안지'하며 에서 딴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된 덕택으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 되어 스스로 흡족하다는 뜻으로 흥선대원군이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다. 노안당 건물은 구한말 당시에 유행했던 사랑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흥선대원군이 기거했던 건물임에도 일반 한옥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으며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우리나라 한식 기와집으로 처마끝에 각목..

궁궐_종묘 2011.11.29

흥선대원군 사저 운현궁, 솟을대문과 수직사

구한말 역사와 정치의 중심지였던 흥선대원군의 거처였던 운현궁이다. 이름은 운현궁이지만 궁궐 건물은 아니고 민간인들이 사는 사가(私家)에 이름만 궁(宮)이라고 붙혔다. 구한말 고종이 등극하기 전에는 이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아마도 계속 확장 한 것으로 보인다. 운현궁 출입문인 솟을대문을 통해서 들어서면, 정면에 대원군이 거처했던 사랑채인 노안당을 들어가는 출입문이 보이고 오른쪽편에 운현궁에 소속돤 관리들이 거처했던 수직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수직사는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 궁에서 파견된 경관들과 관리하는 인원이 많았다고 한다. 솟을대문 북쪽으로는 물품을..

궁궐_종묘 2011.11.27

강화 용흥궁,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전 거처했던 잠저(潛邸)

강화읍 역사유적지구라고 할 수 있는 고려궁지, 강화유수부 동헌, 강화성당, 강화성공회성당 등이 모여 있는 관청리에 소재한 조선 25대 철종이 강화도 유배시절에 살았던 잠저인 강화 용흥궁이다. 철종은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로 그의 형 회평군의 옥사로 가족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살다가 헌종 사후 덕완군으로 책봉되었다가 1849년에 왕위에 즉위했다. 철종의 재위시기는 구한말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했으며, 청나라의 몰락 등 동아시아 정세 또한 극히 나빴던 시기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잠저는 인조, 철종, 고종처럼 정상적으로 왕세자를 거쳐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국왕이 후사가 없거나 반란 등의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왕위에 추대된 왕이 민간인 신분으로 살았던 집을 말하며 태조의 함흥본궁, 인조의 저경궁, 영조의 ..

궁궐_종묘 2011.09.06

인제 강원도 중앙단, 강원감영에서 별여제를 지내던 제단

여제는 제명을 누리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고 제사를 지내 줄 가족마저 없는 외로운 귀신이 산자에게 역과 같은 탈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여 전염병 등이 돌때 국가나 마을에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여제는 에 왕이 지내야할 제사 중 후손이 없이 죽은 옛날 제왕을 위한 제사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국가적인 성격의 제사가 중국 명나라대에 도교와 민간신앙이 받아들여져서 이런 귀신을 통제하고 그들의 원한을 풀어줄 것을 기원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여제는 조선초기에 우리나라에 전해졌다고 하며, 대종.세종대에 제사의 형식이 정비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성황신을 비롯하여 도교신을 모시는 의미가 강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백성을 위로하는 구휼적인 측면이 강했다고 한다.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합강리에 소재한 ..

궁궐_종묘 2011.09.01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