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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186

김제 피금각, 관아 정원의 조그만 정자

사적 482호로 지정된 김제 관아에 들어서면 수령이 근무하던 동헌, 살림집인 내아와 함께 작은 정자가 동헌 왼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피금각'이라는 현판이 달린 이 정자는 앞면 3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작은 정자이다. 일반적인 정자처럼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앞면과 옆면으로 가운데 1칸에만 방을 두고 있고, 사방으로 마루가 있는 특이한 구조의 정자이다. 아마도 고을 수령을 방문한 손님을 맞이하는 접대용 공간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헌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이 약간 특이한 점이기는 하지만, 크고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소박한 정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앞면3칸, 옆면 3칸의 정사각형의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는 김제관아에 있는 정자인 피금각. 피금각은 그 건축내력에 대한 설명이 없는 ..

조선 관아 2010.11.19

김제군 관아, 동헌 근민헌

김제지역은 삼국시대 이래로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우리나라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다. 김제 벽골제를 비롯하여 논농사와 관련된 유적지가 있고, 구한말 동학혁명의 주요 무대였던 곳이기도 하다. 특이한 점은 넓은 평야와 풍부한 물산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는 중요한 정치세력이 배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제관아는 넓은 김제평야 중심에서 가장 높다는 해발 40m의 성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며, 약 100m 거리 이내에 향교, 관아 건물이 몰려 있으며, 관아의 동헌과 내아가 온전히 남아 있어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하여 사적 482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제동헌은 김제군수가 업무를 보던 건물로 '근민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앞면 7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조선 관아 2010.11.19

양천향교 유예당

양천향교 앞에 있는 작은 정자인 유예당은 향교 앞에 있는 조그만 정자이다. 앞면 3칸 규모의 작은 정자로 원래부터 향교 앞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의 향교 앞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이다. 현재는 양천향교에서 실시하는 전통문화와 관련된 행사들을 진행하는 작은 노천극장과 함께 있는 건물이지만, 향교를 복원할 때 이 정자를 세운 것으로 볼 때 원래부터 있었던 정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현재의 정자는 앞면이 공연을 위한 작은 놀이마당을 향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정자의 형태로 볼 때 원래의 형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양천향교가 바라보고 있는 들판을 주변의 주택들이 막고 있는 형태이지만, 옛날에는 양천향교는 김포공항 주변의 넓은 들판을 내려다 보고 있는 형태이고, 이 정자 또한 들판을 내..

조선 관아 2010.11.10

천안 직산현 관아, 지방 수령이 근무하던 동헌

직산현은 조선시대 6대간선도로 중 하나로 호남과 충청지역과 연결된 도로상에 있는 주요 고을 중 하나였고, 경기지역을 벗어난 호서지역의 첫번째 고을로서 의미가 있었던 곳이다. 지금도 직산현 부근으로 1번 국도와 경부고속도, 경부선 철도 등 주요 교통수번의 얼굴이 되는 노선이 지나가고 있는 곳이다. 옛 직산현 관아가 있는 곳은 지금은 주요 교통로에서 약간 벗어난 까닭에 한적한 시골마을 읍소재지가 되는 곳이다. 이 곳에는 옛관아건물을 헐고 세워진 직산초등학교가 관아 건물터에 들어서 있다. 그나마 개발이 덜된 지역이기때문에 옛 관아건물 중 내동헌.외동헌.내삼문,아문의 4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옛 기록에는 객사, 군기, 동헌, 내아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며, 그 내용을 보면 주요 교통로에 있었기때문 찾아..

조선 관아 2010.10.28

천안 직산현 관아 아문, 호서지방을 들어가는 첫 관문

직산현은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위치한 지역으로 지금의 천안시 성거읍.성환읍.직산면.입장면을 포함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6대간선로 중의 하나이자, 지금도 1번국도가 지나가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지금은 면소재지로 옛 관아가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직산초등학교 서쪽편에 아문과 동헌 건물이 일부 남아 있다. 직산현 관아의 출입문인 아문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데, '호서계수아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이는 호서지방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라는 뜻이다. 직산현은 조선시대 행정단위로서는 그리 큰 편이 아니지만, 제대로 갖춘 아문을 두고 있는 것은 경기지역을 나서는 첫번째 관아라는 의미와 함께 주요 간선도로 상에 위치하여 국왕이 행차도 자주 있었고, 고위관리의 방문도 많았었기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직산..

조선 관아 2010.10.27

서울 세검정터, 조선중기 인조반정을 모의했던 곳

세검정은 서울 성곽 북서문에 해당되는 창의문 바깥에 위치한 작은 정자이다. 서울 도심과 가장 가까운 아름다운 계곡인 백사실계곡에서 흘러내려온 홍제천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중기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옹립한 반군세력들이 거사를 모의한 장소로 잘 알려져 있으며, 거사 후 이 곳에서 칼을 물로 씻었다는 것에서 세검정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정자가 언제부터 처음으로 세워졌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가장 최근의 기록으로는 영조때인 1748년에 새로 고치면서 세검정이라는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그 뒤 1941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옛 기록을 참조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세금정 부근 홍제천은 옛날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가 있었다고 하며, 실록의 편찬이 끝난 뒤 사초들을 모아서 이 곳에서 씻는 세초작업이..

조선 관아 2010.10.23

안동 도산서원, 서원 관리인 살림집인 고직사

안동 도산서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살림집인 고직사는 강당인 전교당 옆쪽의 상고직사와 유생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 뒷편의 하고직사가 있다. 건물 규모는 유생들의 기숙인 농우정사나 동.서재봐다 약간 큰 것 같고, 도산서원 내에 다른 건물들에 비해서 약간 규모가 있어 보인다. 아마도 도산서원이 위치한 장소가 일반 민가와 상당히 떨어져 있기때문에 관리인들이 주변 민가에 살면서 출퇴근할 수 없어서 서원내에 항상 상주했었기때문인 것 같다. 또한, 고직사가 상.하에 따로 있는 것은 도산서원의 출발자체가 퇴계선생 생전에는 도산서당, 농운정사, 하고직사만이 있었는데, 선생 사후에 위쪽에 전교당과 사당인 상덕사가 건립되면서 제사 기능이 더해지고 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의 숫자가 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도산서원 상고직..

조선 관아 2010.10.21

안동 추월한수정, 퇴계종택에 있는 정자

추월한수정은 안동 도산서원 인근에 있는 퇴계선생의 종갓집 오른편에 있는 정자이다. 보통 사대부저택과 같이 있는 건물은 별채 형식의 사랑채로 불리는데 이 곳 퇴계종택에서는 용도를 정자로 정한 것 같다. 건물은 앞면 5칸의 제법 큰 규모로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 주택의 형식과는 약간 다르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지었는데, 서원의 강당이나 관청건물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는 건물로 일반 주택의 살림집과는 그 모양새가 완전히 다르다. 지금도 퇴계선생의 종손이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라서 그런지 건물 앞쪽에 비닐로 바람막이를 설치해 놓고 있다. 앞면 5칸의 큰 규모로 지어진 정자인 '추월한수정'. 온돌방이 왼쪽편에 1칸, 오른쪽편에 2칸이 있고,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추..

조선 관아 2010.10.20

안동 도산서원, 퇴계 이황을 모신 사당인 상덕사 (보물 211호)

상덕사는 도산서원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사당으로 퇴계 이황선생과 제자 조목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원래 퇴계 이황선생의 모신 서원은 안동 월곡면에 있었던 호계서원이었으나, 지역 유림들의 발의로 도산서당 뒤편에 도산서원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호계서원에서는 도산의 학풍을 이어받은 유성룡 선생과 김성일 선생이 퇴계 제자로 같이 위패를 모셨으나, 당시 지역민들 사이에 유성룡 선생과 김성일 선생 사이에 그 위상의 높고 낮음을 다투다가 같이 빠지면서 제자로서는 조목 선생만이 남은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상덕사는 앞면 3칸 규모의 크지 않고 소박한 형태의 건물로, 조선 선조때 지은 건물을 도산서원을 성역화하면서 크게 수리하였다고 한다. 당시 문화재로 지정된 토담도 돌담장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

조선 관아 2010.10.20

안동 도산서원, 강학공간의 중심인 전교당 (보물 210호)과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서재

도산서원 전교당은 강당기능을 하는 건물로 보물 210호 지정된 문화재이다. 도산서원 전교당은 퇴계 이황선생을 모신 상덕사를 제외하고는 제일 높은 곳에 있고, 건물 앞쪽에는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없어서 멀리까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구조이다. 전교당은 앞면 4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1칸인 온돌방 한존재와 3칸인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의 형태나 구조는 간단하며 아주 소박하고 검소하게 지어진 건물로 여겨진다. 대청의 전면은 문을 두지 않고 개방되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쌍여닫이문이 있어 겨울에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강당 건물은 퇴계 이황선생께서 직접 세운 건물은 아닌 듯하고 선생 사후에 세워진 건물로 보인다. 강당현판에 적힌 '도산서원'이라는 현판은 선..

조선 관아 2010.10.20

안동 도산서원, 책을 보관하던 광명실과 목판을 보관하던 장판각

도산서원 건물배치에서 제일 특이한 점은 강학공간 입구에 누마루를 두지 않고, 진도문이라는 별도의 출입문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도산서원이 입지한 위치의 가장 큰 장점인 낙동강과 강너머 마을의 아름다운 경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도산서원에는 정문에서 강당인 전교당까지 계단과 정원을 두고 있을 뿐 누마루를 설치하지 않고 있다. 다만 강학공간인 출입문 양쪽으로 누각식 건물이 광명실을 두고 있으며, 여기에 있는 작은 누마루에 서서 멀리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광명실을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진도문 양쪽에 두개의 건물을 두고 있다. 광명실은 습해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 건물로 지었으며,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누각의 기능도 같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도문을 들..

조선 관아 2010.10.19

안동 도산서원, 퇴계선생이 제자를 가르치던 도산서당

도산서원 정문을 들어서면 서원의 중심영역으로 교학공간인 강당 전교당까지는 계단식으로 길이 조성되어 있고 서쪽편에는 유생들이 기숙사인 농운정사와 서원 관리소인 하고직사가 있고 동쪽편에는 퇴계 이황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몸소 지은 도산서당이 있다. 아마도 강당과 기숙인 동.서재에는 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퇴계 선생은 도산서당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산서당은 앞면 3칸 규모의 작은 건물로 퇴계선생이 거처하던 '완락재'라 불리는 방과, '암서헌'이라고 불리는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마당 앞에는 연꽃을 심어 놓은 작은 연못이 있고, 도산서당 동쪽편으로 퇴계선생이 화초를 가꾸던 작은 동산이 있다. 도산서원 정문.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축대를 쌓아서 계단..

조선 관아 2010.10.18

안동 도산서원, 유생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와 서재인 역락서재

퇴계 이황 선생이 세운 안동 도산서원은 계단식으로 건물들을 배치하고 있는데, 그 중 제일 앞쪽에 있는 건물들인 농운정사와 역락서재이다. 농운정사는 도산서원의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로 서원 정문을 들어서면 서쪽편에 있는 건물이다. 서원 강당인 전교당 앞 마당에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지만, 아마도 이 곳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고직사 건물 앞에 추가로 세운 건물인 것으로 보인다. 역락서재는 서원 바깥에 있는 별채와 같은 건물로 선생의 제자들이 선생을 위해서 세운 건물이라고 한다. 서원 바깥쪽에 있는 것으로 봐서는 도산서원을 찾아온 손님들이 묵으면서, 퇴계 선생과 학문을 논하던 장소인 것으로 보인다. 서원 안에 있는 유생들의 공부가 방해 받지 않도록 외부에서 손님을 맞기 좋은 구조로 되어 있..

조선 관아 2010.10.17

안동 도산서원, 과거시험을 보았던 시사단과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

2010년 가을에 들어서면서 다시 한번 조선시대 양반문화와 유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안동 도산서원을 찾아가 보았다. 주말이기도 하고 예전에 비해서 전통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도가 높아져서 그런지 이 곳 도산서원을 찾는 사람에 예전에 비해서 많이 늘었다는 느낌이다. 도산서원은 병산서원과 함께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는 경치가 매우 수려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서원이다. 도산서원의 입지가 상당히 좋다는 것은 학문을 수양하는 장소로서 일반인들이 도산서원까지 들어가기는 쉽지는 않지만, 큰길에서 도산서원까지의 길은 낙동강변 언덕을 따라서 나 있는 숲길이다. 하지만 낙동강 건너편으로는 제법 넓은 들판이 있고, 마을들도 많이 보이는 편이다. 이는 수양을 위해 깊은 산중이나 계곡으로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일반 세상과..

조선 관아 2010.10.17

봉화 닭실마을 청암정

봉화 닭실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천변마을과 함께 이중환이 '택리지'에 3대 명당지로 꼽은 마을이다. 봉화읍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이 곳 닭실마을은 조선중기 문신 충재 권벌이 중종때 기묘사화로 파직을 당하여 외가의 세거지였던 이 곳에 입향하면서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닭실마을의 명성에 비해서 오래된 고택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양반들이 모여살던 대부분이 깨끗하고 넓은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반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봉화 닭실마을에서 제일 잘 알려진 곳으로 충재 권벌의 종가집 한편에 위치한 청암정이다. 청암정은 충재 권벌선생이 세운 정자로 거북모양같은 바위에 세워졌으며 주변에는 연못이 있다. 청암정에는 퇴계 이황선생을 비롯하여 당대의 학자들이 방문하여 학문을 교류했던 곳이다. 청암정은 봄..

조선 관아 2010.10.14

선정릉 제사 준비를 하던 재실

선정과 정릉 중간에 위치한 재실은 두 왕릉의 재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원래는 선릉과 정릉에 각각 재실이 있었으나, 구한말에 통합되어 하나의 재실만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재실은 왕릉 입구 낮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나 이 곳을 침수피해가 많은 곳이라서 언덕 위에 재실을 조성해 놓고 있다. 재실은 중앙에 제사에 참석한 왕이 휴식할 수 있는 사랑채같은 건물이 있고, 여러개의 방과 창고로 이루어진 행랑채가 담장을 이루고 있다. 숲손 언덕에 위치한 재실. 여러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행랑채와 사랑채처럼 생긴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재실은 제사준비를 하는 곳으로 실제 제사를 이 곳에서 지내지 않는다. 재실 중앙에 있는 건물. 앞면4칸의 건물로 왕이 왕릉에 제사를 지낼때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재실은 일반 민..

조선 관아 2010.10.06

양주목 관아, 한양 동북방면에 있었던 큰 고을

서울과 함경도를 연결해 주는 3번국도는 옛날부터 물자와 사람의 이동이 많았던 경제적,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교통로였다. 이 길을 통해서 함경도 동해안에서 생산되는 해산물(건어물)과 북방 만주지역에서 들어오는 교역품들이 서울로 들어오는 길이었고, 군사적으로 북만주 지역에서 한강유역으로 가장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길이었다. 그래서 삼국시대에는 이 지역은 한강유역을 쟁취하기 위해서 차지해야 할 중요한 지역이었다. 북한산 동북쪽 지역에는 그래서 고려시대부터 양주목이 설치되어 이 일대 전체를 다스리는 관리를 두었다. 양주목은 외관직인 정3품 목사가 다스리던 지역으로 현재 행정구역으로 양주시, 의정부시, 동두천시, 남양주시, 구리시와 서울의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도봉구 등을 포함하는 현재의 광역시와 비슷한 ..

조선 관아 2010.09.27

양주목 관아, 목사가 근무하던 동헌

조선의 수도 한양의 동북쪽 관문에 있었던 양주목은 양주시, 의정부시, 동도천시, 남양주시, 구리시와 서울의 강북구, 도봉구, 중량구, 노원구 지역을 포함하는 아주 큰 고을로 외관직인 정3품의 양주목사가 다스리던 지역이다. 지금은 경기북부의 도농복합시인 양주시의 작은 시골마을에 옛 양주목 관아지가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양주군의 행정기관이 경원선 철도역이 있는 의정부로 옮겨가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옛 관아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리고 그 옛터만이 남아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그 옛터에 양주향교가 제일 먼저 복원되고, 관아 건물로는 동헌만이 복원되어 있다. 양주시 유양동 불국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옛 양주관아터에 복원된 양주목 동헌을 보면, 비록 복원된 건물이지만 옛날 양주목이 얼마나 큰 고을이었는지를 잘..

조선 관아 2010.09.26

아산 공세곶고지, 공덕비만 남아 있는 조선시대 충청지역 조운 중심지

아산 공세리성당은 조선시대 충청지역 조운의 중심지였던 공세곶 창고를 개조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아산시 인주면에 자리한 공세곶은 지금은 평야지대에 있는 작은 언덕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해안가에 돌출된 지형이 곶이었던 곳으로 주변지역이 간척되어 농지로 변했기때문에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공세곶에는 충청지역에서 세금으로 걷어들인 곡식을 모아두었다가 배를 이용한 수운으로 서울로 운반하던 기관인 공진창이 있던 곳으로 세금을 운송하는 조운뿐만 아니라 물자가 서울로 이동하는 중요 교통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금강의 강경포구, 영산강의 영산포구 등 당시 해운의 중심지가 되었던 많은 포구처럼 이 곳 공세곶도 지금은 한적한 시골소읍처럼 보이지만 이곳에 창고가 운영되던 시절에는 조운을 담당하던 해운판관을 비롯..

조선 관아 2010.09.24

아산 온양군 동헌

온양온천으로 유명한 아산 온양 시가지에서 동남쪽 산너머에 있는 옛 온양군 동헌이다. 이 곳이 온양지역 행정의 중심지였으나, 장항선 철도부설로 인해 그 기능을 온양온천 부근 지역으로 넘겨주고 한적한 시골마을 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는 곳에 있다. 대부분의 조선시대 관아건물들처럼 온양군 동헌과 그 출입문인 온주아문 바로 앞에는 온양초등학교가 있다. 20세기초 전국에 초등학교가 세워지고, 근대적인 행정기관이 들어서면서 전국 대부분 관아의 동헌과 내아 등 은 시청,읍사무소,면사무소 등로 변했고, 객사는 초등학교 교사로 바뀌었는데 이 곳 또한 비슷한 경로를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아와 작청같은 건물들은 없어지 동헌건물만 변형되어 주재소,파출소,동사무소 등으로 사용하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온주아문을 들어서..

조선 관아 201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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