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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186

[서산 해미읍성] 옥사와 회화나무, 천주교 박해의 현장

해미읍성 정문인 진남문에서 동헌으로 들어가는 길 중간에 우뚝 서 있는 회화나무를 볼 수 있고, 그 뒤로 옥사가 있다. 이 곳 해미읍성은 구한말 천주교 박해의 현장으로 교인들을 고문했던 흔적이 회화나무에 남아 있고, 당시 옥사터에 옥사를 복원해 놓고 있다. 옥사는 내옥, 외옥 2개의 건물로 남.녀를 구분하여 수용하였다고 한다. 옥사 마당에는 곤장이 준비되어 있어 방문하는 사람에게 재미있는 체험을 할 수 있게 해준다. 해미읍성 진남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동헌 정문이 보이고, 길 왼쪽에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이 있는 회화나무가 서 있다. 해미읍성 회화나무 해미읍성 서쪽편 옥사 건물, 남.녀를 구분해서 수용하고 있다. 해미읍성 동쪽편 옥사 옥사내부. 해미읍성 옥사 마당에 곤장이 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 천주와 깊..

조선 관아 2010.09.21

인천도호부청사, 복원된 인천도호부청사 건물군

인천도호부는 인천지역을 관할하던 지방관청으로 지방수령 중에서 높은 편에 속하는 종3품 도호부사가 근무하던 곳이다. 원래의 위치는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문학초등학교로 변신해 있으며, 지금도 동헌일부와 객사가 남아 있다. 보통 지방관청은 객사를 중심으로, 지방수령이 근무던 동헌, 숙소인 내아를 비롯하여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던 이방청 또는 작청 등이 있으며, 주변에는 지방 공공교육기관인 향교가 배치되어 있다. 현재 복원된 인천도호부청사는 객사, 동헌 그리고 출입문이 아문이 향교 동쪽편에 복원되어 있어 역사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복원된 인천도호부청사. 출입문격인 아문이 앞쪽에 있고, 객사와 동헌이 나란히 있다. 이 곳에는 전통문화체험 등 다양한 행사와 여러 민속자료들을 체험할 기회를 주고 있다. 입구에 나란히..

조선 관아 2010.09.21

강릉 객사문, 대표적인 관청 건물

강릉 객사문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관청 건물 중에서 가장 유래가 깊고 만든 수법이 뛰어나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의 하나로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에다. 강릉객사가 있는 임영관은 고려 태조가 강릉에 세운 지방관청 건물로 지방관청 중에서는 유래가 상당히 오래된 곳으로 임영관을 이루고 있던 건물들은 대부분 헐리고 객사문만 남아 있다가 최근에 복원이 이루고 있다. 강릉객사문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객사 출입문으로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의 특징인 맞배지붕에 주심포양식으로 만들어졌다. 건축의 수법이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고, 그 수법도 뛰어나기 때문에 문화재로서 가치가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다. 강릉 임영관지 객사 출입문인 강릉객사문은 그 모습이 웅장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으면서도, 안정적이고 단아하며..

조선 관아 2010.09.21

[나주목 관아] 나주 동헌 출입문인 정수루

나주목 관청 건물의 중심이 되는 나주 객사 금성관 서쪽편에는 나주 목사가 근무하는 동헌이 있었던 자리가 있고, 그 뒷편으로 아직까지 나주목 내아가 남아 있다. 객사, 동헌, 읍성, 향교 등 지방관청을 구성하는 요소가 나주에는 많이 남아 있어 나주목 관아 전체가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그 중 나주 동헌 출입문인 정수루는 객사 출입문인 망화루 앞을 지나는 도로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나주 객사인 금성관 정문을 나서면 서쪽편에 동헌 출입문인 정수루가 있다. 정수루는 2층 누각으로 전체가 개방되어 있다. 정수루 편액 동헌 안쪽에서 본 정수루 정수루 옆 도로에 있는 비석 정수루를 들어서면 나주목 내아에 있는 오래된 고목을 볼 수 있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나주목사로 부임한 우복용이 지은 것으로, 나..

조선 관아 2010.09.21

[나주목 관아] 금성관 정문인 망화루와 객사 마당

나주목 관아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객사인 금성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금성관과 내부 마당은 일제강점기 이후 오랫동안 나주 군청청사가 있었던 장소였다가 최근에 옛 건물들은 헐리고, 나주 객사를 구성하던 구성 요소들이 하나.둘씩 복원되고 있다. 그 중 깨끗하게 복원되어 객사의 모습을 빛내주는 것이 정문인 망화루일 것이다. 망화루는 이층 누각이 있는 출입문으로 전형적인 관청 건물의 출입문 모습을 하고 있다. 나주 객사인 금성관 앞 마당은 최근에 건물철거를 완료해서 인지 지금은 텅빈 느낌을 주고 있다. 나주 객사 출입문인 망화루. 객사 서쪽편에는 관청 건물인 동헌 출입문인 정수루가 있다. 이 곳 망화루와 정수루가 있는 이 길은 곰탕으로 유명한 식당들이 많아서 '곰탕거리'라고 불린다. 망화루 편액 출입문인 ..

조선 관아 2010.09.21

[고창읍성(高敞邑城)] 객사, 동헌 등 읍성내 관청들

고창읍성은 지역민이 거주하던 장소는 아니고 산성의 형태와 비슷한데 지방관청 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생각되는 곳이다. 남강변에 자리잡은 진주성이 고창읍성과 비슷한 형태이다. 읍성내 제일 높은 곳에는 중앙정부를 상징하는 객사가 있고 그 아래로 동헌, 작청 등이 있다. 읍성의 가운데에는 연못과 누각이 있어 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성문 입구에는 감옥이 있고 서쪽편으로는 지방토호들이 모여서 수령을 보좌하고 논의할 수 있는 향청이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은 복원된 건물처럼 보입니다만 지방관청의 배치와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창읍성 내부 전경. 조선시대 관청에서 제일 중요한 건물인 객사. 임금의 전패와 궐패를 안치하고 문안을 드리는 주사(主舍)와 온돌방을 두어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한..

조선 관아 2010.09.21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지(統制營址)

국보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조건축물인 세병관이 자리한 곳은 오늘날 통영(統營)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자리했던 장소입니다. 원래의 건물은 다 허물어지고 세병관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지금 순차적으로 건물들을 복원하고 있는데 정문역할을 하는 망일루, 수항루가 복원되어 있고, 통제영을 건설했던 통제사 이경준의 사적비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통영 중심부 뒷동산에 자리하고 있어 통영시내가 내려다 보이게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높은 건물들이 많아서 바다와 통영시내가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 통영이란 이름의 근원이 되는 삼도수군 통제영지 입구에 있는 누각인 망일루(望日樓)입니다. 최근에 복원한 건물로 문화재적 가치는 많지 않지만 세병관만 남은 통제영지를 복원하여 역사교육의 장으로 삼는다..

조선 관아 2010.09.21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정독도서관에 있는 조선시대 관청 건물

종친부는 조선시대 국왕의 친인척인 종친들을 관리하고, 관련 업무를 하던 관청으로 원래는 민속박물관과 건춘문이 있는 경복궁 동쪽편에 있던 것을 1980년대에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정독도서관 마당 동쪽편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현재 서울에는 육사 교정에 있는 삼군부 건물과 함께 조선시대 관청 건물 중 남아 있는 3동의 건물 중 하나로, 조선시대 관청의 모습을 실제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종친부 건물은 본채인 경근당과 별채인 옥첩당, 그리고 두 건물을 연결해 주는 복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근당은 앞면 7칸으로 목조건축물 가운데에서는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이다. 경근당에는 국왕의 어진 등을 보관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 사무공간은 별채인 옥첩당에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종친부는 경복..

조선 관아 2010.09.20

독립관(모화관), 중국사신을 맞던 곳에서 독립협회 사무실로 변했던 건물

서대문 독립공원에 있는 독립관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던 옛 독립협회 사무실로 쓰던 독립관을 고증에 따라 복원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원래 중국 사신 방문시 접대를 하던 공간인 영빈관으로 사용하던 모화관 건물을 청.일 전쟁 이후 독립협회에서 사용하던 건물이다. 앞면 6칸, 옆면 4칸의 규모가 큰 건물로 옛날 사진과 비교해 보면 원형에 가깝게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현 건물 자체로는 문화재로 큰 의미는 없으나, 조선시대 중국과의 사신교류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독립협회의 발자취도 같이 느껴볼 기회도 주고 있다. 독립문이나 영은문과 함께 원래 위치는 도심쪽 영천시장 부근이었다고 한다. 주변에 수행원들이 머무는 숙소인 한옥도 여러채 있었다고 한다. 중국 사신을 맞이..

조선 관아 2010.09.20

[전주 경기전(慶基殿)] 전주사고(全州史庫)

경기전 정전이 입구인 내삼문 동쪽편으로는 작은 문이 있고 이 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문화재로서 가치는 별로 없지만 역사적 의미가 아주 큰 전주사고 실록각을 볼 수 있습니다. 전주사고는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화를 면한 사고로서 건물은 당시에 불타 없어져 버렸지만 실록은 보존되어 지금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었고 조선의 역사를 온전하게 전할 수 있게 한 장소입니다. 아마 경기전에 사고를 운영함으로써 철저한 보관에 힘쓸 수 있도록 한 의도로 보입니다. 전주사고를 보지못했을때는 사고(史庫) 건물이 꽤 큰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의외로 건물크기가 작고 아담한 규모입니다. 조선전기의 4대사고 중의 하나인 전주사고 건물인 실록각입니다. 원래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고, 지금의 건물은 원래 전주사고가 있..

조선 관아 2010.09.20

충무공께서 앉아 고민하던 한산도 수루(戍樓)와 제승당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 수영이 있던 자리에 제승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제승당은 정유재란으로 한산도 진영이 불타 폐허가 된 것을 1700년대에 통제사인 조경(趙儆)에 의해 유허비가 세워지고 이 옛 터에 제승당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곳 제승당 유적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우리에게 알려진 충무공의 시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로 잘 알려진 한산도 수루일 것입니다. 이 곳에서 수루에 올라서면 임진왜란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큰 승리였던 한산대첩의 현장인 통영 앞바다가 멋있게 펼쳐져 있습니다. 남해바다의 아름다운 풍경과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좋은 곳입니다. 한산도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인 수루(戍樓)입니다. 원래부터 있던 수루는 아니고 최근에 복원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선 관아 2010.09.20

경복궁 수정전 (집현전 자리)

경복궁 수정전은 경회루 바로 앞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집현전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종이 집현전에 대해서 얼마나 우대하고 있었던지를 잘 알 수 있다. 왕의 집무실인 사정전 바로 옆에 경복궁에서도 경치가 제일 좋은 경회루 앞에 학자들을 위한 집현전을 세웠던 것이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학자들에게서 좋은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복궁 수정전 앞에 있는 아름다운 소나무과 건물과 잘 어울립니다. 물론 앞의 화장실 표시는 약간 비호감입니다. 친절한 안내는 좋지만 궁궐내에 너문 눈에 띄게 표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정면에서 본 경복궁 수정전입니다. 지금으로서는 크게 보이지 않지만 타 건물에 비해서 결코 작은 건물은 아닙니다. 경복궁 수정전 건물 뒤로 돌..

조선 관아 2010.09.20

강화 고려궁지, 외규장각(外奎章閣) 건물

강화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대몽항전의 중심지였고, 그 이후에도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행궁 등의 시설이 이 곳에 많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시설이었던 외규장각이 이 곳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구한말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불타버렸다고 합니다. 지금의 건물은 최근에 복원한 건물입니다. 강화 고려궁지 내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건물인 외규장각 건물입니다.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에 의 불타버린 것을 최근에 복원했다고 합니다. 외규장각 현판 입구에서 본 외규장각 건물입니다. 바로 옆에는 강화지역의 수장인 강화유수가 근무하던 동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마도 강화유수의 업무중 중요한 부분이 외규장각을 지키고 방문하는 사람을 관리하는 업무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래서인지 강화유수부 동헌, 이방청 ..

조선 관아 2010.09.20

영주 소수서원, 죽계천 취한대(醉寒臺)

영주 소수서원 입구의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다 보면 오른쪽편 냇가인 죽계천변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이다. 서원은 대부분 강변 경치가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정자나 누각을 두어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면서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영주 소수서원은 서원 외부, 죽계천가에 정자를 지어 놓고 있다. 퇴계 이황선생이 산기운과 죽계전 맑은 물에 취해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라는 뜻에서 취한대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소수서원 정문 부근에서 보이는 취한정. 예전에는 이 곳을 건너는 다리가 없어서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징검다리를 만들어 쉽게 건너가 볼 수 있도록 해 놓고 있다. 소수서원 옆을 흐르는 죽계천이 잠시 소(沼)를 이루는 곳에 취한대가 자리잡고 있다. 죽계천을 ..

조선 관아 2010.09.19

구한말 갑신정변의 현장, 우정총국

종로 보신각에서 안국동 방향으로 남북으로 난 도로를 우정국로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는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인 갑신정변의 현장인 우정총국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 불교 중심지인 조계사와 붙어 있는 한옥건물이라 조계사 부속 건물로 착각하기 쉬운 이 건물은 이 곳이 오랜 기간동안 관청건물로 사용된 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도 이 곳이 도화서, 전의감 등 기술과 관련된 관청들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도로에 있다. 갑신정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우편제도를 도입하고 그 업무를 담당하기 위한 우정총국을 설립하면서 그 기념식에서 김옥균을 위시한 개혁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곳이다. 건물은 구한말의 전형적인 관청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큰 특징은 없지만 역사,사회적인 의미가 큰 건물이자, 서..

조선 관아 2010.09.10

울진 월송정, 관동팔경 1경

울진 월송정은 관동팔경 중 제일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제1경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곳이다. 동해안 온천위락지인 백암온천에서 가까운 월송정은 그 유래가 삼국시대 화랑들이 유람했다는데서 출발하고 있으며,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아서 풍류를 즐긴 곳이다. 사람의 본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으로 보이며, 동해바다의 끝없는 수평선과 백사장, 그리고 백사장을 집어 삼킬듯한 파도는 가슴에 쌓였던 스트레스를 없애주고 파도를 헤쳐서 앞으로 가야하겠다는 굳은 심지를 심어주는 것 같다. 월송정 누각에 오르면, 소나무숲 사이로 백사장이 있고, 넓은 동해가 가슴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주고 있다. 현재의 월송정 누각은 80년대초에 세워진 것으로 앞면 5칸의 규모가 큰 누각에 속한다. 월송정 누각 자체가 큰 역사적,..

조선 관아 2010.08.04

영양 서석지와 주일재, 한국을 대표하는 정원

영양군은 안동에서 동쪽으로 더 들어간 태백산맥 아래에 있는 크지 않은 고장이다. 분명 지금은 안동에서 자동차로 청송군 진보면을 거쳐서 들어가야하는 오지처럼 보이지만, 실제 조선시대에는 경북 동해안 지역과 경북 안동지역을 연결해 주는 교통의 요지로 여러 사찰 유적과 고택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영양 서석지는 이지방에 남아 있는 많은 고택 중 하나로 담양 소쇄원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정원으로 잘 알려져 있다. 광해군때 진사를 지낸 정영방이라는 사람이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서석지라는 연못과 서재인 주일재, 정자인 경정, 그리고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주일재 앞쪽에는 매.난.국.죽을 심어 놓은 사우단이 있다. 연못에는 연꽃이 있고, 크고 작은 돌들이 연못위로 솟아오른 모양을 하고 있다. 한국..

조선 관아 2010.08.01

안동 낙동강변 영호루, 공민왕 현판이 남아 있는 누각

안동 영호루는 안동시 남쪽 낙동강변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누각으로 우리나라 4대 누각의 하나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의 누각 건물은 앞면5칸, 옆면4칸의 중간 규모의 누각으로 잦은 수해로 인해서 수차례에 걸쳐서 중수된 건물로 1970년에 마지막으로 중수된 건물이라고 한다. 그 위치 또한 원래의 위치는 안동 성문 남쪽 낙동강변, 즉 낙동강 이북 도심쪽에 서 있던 누각이라고 한다. 그래서 위치난 건축물로서는 큰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는 누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안동 영호루가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고려말 개혁군주인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안동에 머물고 있을때 이 곳 영호루에서 뱃놀이를 하거나 활쏘기를 했다고 하며, 친필로 적은 영호루라는 현판을 달게 함으로써 그 역사적인 의미를 갖게 되..

조선 관아 2010.07.31

화성행궁,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에 설치한 대표적인 조선시대 별궁

화성행궁은 정조대왕이 건설한 신도시인 수원 화성의 서쪽편에 위치한 팔달산 정상 서장대 아래에서 동쪽인 창룡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행궁이다. 행궁은 왕이 한양 도성의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무는 별궁으로 국가가 위급할 때나 각지에 흩어지 왕릉을 행차할 때 잠시 머무는 공간으로 수원 화성의 행궁은 화성에 위치한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을 방문할 때 잠시 머무를 목적으로 수원 화성과 함께 건설되었다. 수도인 한양 부근에는 여러 곳의 행궁이 있었지만, 그 규모면에서 화성행궁은 궁궐에 준하는 규모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화성행궁은 연회를 베풀던 누각인 낙남헌을 제외하고는 없어졌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여 옛모습을 다시 보여 주고 있다. 수원화성은 지방관직 중에 높은 직급인 종2품의 화성유수가 다스리던 지역으로 화..

조선 관아 2010.05.24

망원정터, 강북강변 도로 옆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

강북강변도로를 타고 양화대교을 지나서 일산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도로 옆 숲속에 숨어 있는 것 같은 작은 정자를 볼 수 있다. 마포구 망원동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는 망원정이다.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처음 만들었을때에는 '희우정'이라고 불리었다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다시 지으면서 '망원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지역은 봄.가을 국왕이 농사짓는 모습을 보기 위해 행차했을 때 잠시 쉬면서 한강의 경치를 감상하던 곳이라 하며, 일제강점기인 1925년 홍수로 없어진 것을 1980년대에 망원동이 홍수로 잠긴 것을 복구할 때, 새로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정자는 세워진 지 벌써 20년이 지나서 그 때 심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망원동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어서 접근성은 좋지 못한편이지만 한강에..

조선 관아 201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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