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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 52

경주 구정동 방형분 (사적 27호),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특이한 신라 귀족층 무덤

경주 구정동 방형분은 사적 27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귀족층의 무덤이다. 불국사역 부근 경주에서 불국사로 들어가는 길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 고분은 봉분의 형태가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어서 방형분으로 불린다. 신라의 무덤 중에서는 유일한 사각형 무덤으로 그 형태는 고려전기에 무덤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경주를 대표하는 유적지인 불국사를 들어가느 길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고분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지했을 수 있지만, 지나치는 길에 있어서 방문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곳이다. 무덤내부는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봉분의 남쪽에 출입구가 있는 형태로 직사각형으로 축조된 굴식돌방무덤을 하고 있다.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관장식구.은제띠고리.은제행엽 등이 있다고 하며 경주박물관에 ..

경주 괘릉 (사적 26호), 신라 왕릉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춘 원성왕의 능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괘릉은 신라 38대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능이다. 원성왕은 혜공왕 16년에 상대등 김양상 (선덕왕)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한 후 그 공을 인정받아 선덕왕 즉위 후 상대등이 되었고 선덕왕이 죽자 원성왕으로 즉위하였다. 786년에 당나라에 조공을 하고 유교정치를 지향하여 독서삼품과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고 김제 벽골제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선덕왕과 원성왕대에 귀족들이 요직을 장악하고 그 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통해서 왕위를 계승하는 통일신라 후대의 정치 혼란상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한다. 사적 26호로 지정된 괘릉은 12지신상으로 둘레돌을 돌린 원형봉토분으로 봉토 주위에는 수십개의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했으며, 중앙에는 안상이 조각된 서역풍의 상석이 놓여 있다. 봉분에..

경주 무열왕릉 아래에 있는 김인문과 김양의 무덤,

경주 형산강 동쪽편 선도산 능선을 따라 조성된 태종무열왕, 진흥왕, 진지왕, 헌안왕, 문성왕을 비롯한 여러 고분들 중에서 가장 낮은 곳에 휘치한 2기의 고분으로 무열왕의 아들인 김인문과 통일신라 후기 대각간을 지낸 김양의 무덤이 있다. 이 고분들은 통일신라 귀족의 무덤중에서 그 주인이 알려져 있는 흔치 경우이다. 이 고분들은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형태로 봉분의 크기는 왕릉보다 약간 작은 규모를 하고 있다.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동생이기도 한 인물로 통일전쟁 과정에서 많은 공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세웠던 비석의 귀부만 무덤앞에 남아 있고, 비석의 일부는 경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김양은 이 곳에 능이 남아 있는 문성왕과 헌안왕을 도왔던 인물..

경주 서악동 진흥왕릉 (사적 177호)과 진지.문성.헌안왕릉

경주 형산상 서쪽에 있는 선도산 남쪽으로 뻗어내린 주능선 서악동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4기의 왕릉이다. 약간 아래쪽에 위치한 태종무열왕릉과 서악동 구분군에 비해서 봉분의 크기가 작고 잘 꾸미지 않은 왕릉으로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등 신라를 크게 중흥시키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진흥왕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이자 태종무열왕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의 왕릉, 신라 쇠퇴기에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제압한 문성왕과 그 뒤를 이은 헌안왕의 왕릉이 나란히 있다. 이 곳에는 4기의 왕릉 외외에도 약 10여기 정도 정비되지 않은 신라귀족(?)의 무덤으로 보이는 고분들이 능선을 따라서 들어서 있다. 진흥왕 신라 역사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왕으로 전국각지에 그가 다녀간 순수비를 남아 있는 왕이지만, 그가 남긴 업적..

경주 서악동고분군 (사적 142호), 무열왕릉 뒷편에 있는 신라 귀족의 무덤

사적 142호로 지정된 서악동고분군은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능선에 위치한 대형 고분으로 태종무열왕릉 뒷편에 나란히 놓여 있다. 이 고분들의 입지는 경주로 향해서 뻗은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앞쪽으로는 경주를 관통하는 큰 강인 형산강이 흐르고 있으며 남쪽 계곡 건너에는 벽도산이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당나라와 교류가 많았던 삼국시대 말기의 풍수사상이 반영된 입지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긴장관계에 있던 백제.고구려 등 외부세력의 침입이 예상되는 교통로에 능을 조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도산 능선을 따라 조성된 4기의 고분에 대해서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공식적으로는 태종무열왕과 관련이 깊은 왕족이거나 왕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뒷편 언덕..

고성 송학동고분군 (사적 119호), 가야연맹체 소가야의 고분

고성읍 중심가에 있는 작은 구릉인 무기산 일대에 있는 송학동 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은 고성일대에 존재했던 소가야의 고분군으로 현재는 약 7기의 고분이 남아 있으며, 북쪽으로는 기원리 무덤들이 있고, 동쪽으로는 송학동 조개더미가 남아 있어 이 곳이 소야가국이 있었던 자리임을 말해주고 있다. 소가야는 중국 문헌 위서 동이전에 변한 12국 중 하나였던 고자미동국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삼한시대 무역중개항 역할을 했던 사천 늑도 등과 함께 한반도 연안을 따라서 형성되어 있던 한.중.일 해상교역로에서 중요 거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상무역에 있어서 가야연맹체의 주도국가였던 금관가야와 경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가야는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6세기 중엽 이전에 신라에 합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성..

고성 내산리고분군(사적 120호), 남해안 당항포에 자리 잡은 해상세력 소가야 유적지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에 있는 사적 120호로 지정된 내산리고분군이다. 내산리 고분군이 있는 이 지역은 진주, 사천, 고성반도의 남해안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소가야가 있었던 지역이다. 소가야는 고대 동아시아 주요 해상교통로였던 남해안 일대 요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교역으로 발전하였으며, 가야가 멸망하기 직전인 6세기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해지역의 금관가야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체의 일원이었으나 금관가야와는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다투는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후기에는 해상무역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한시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유적지로는 무역항이었던 사천 늑도 유적지가 있으며 고성읍에 소재한 송학동 고분군과 동해면에 소재한 내산리고분군이 소가야를 대표..

양산 신기리 고분군 (사적94호), 신라 지방귀족의 무덤

사적 94호로 지정된 양산 신기리 고분군은 북정리 고분군과 얕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는 신라의 고분군이다. 북정리 고분군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고, 출토 유물에 있어서 큰 차이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북정동 고분군과 구분하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신기리 고분군으로 지정된 고분은 약 10여기가 못되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쪽에 있는 고분이 다른 고분에 비해서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다고하며 무덤형식이 변모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 고분군에서는 통모양의 토기와 독모양의 토기로 만든 합구식옹관이 발굴된 것이 특이하다고 한다. 무덤의 형태는 구덩이식돌방무덤과 앞트기식돌방무덤이 같이 발굴되고 있으며, 구덩이식 돌방무덤에서는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

양산 북정리 고분군(사적 93호), 5~6세기 신라의 고분

양산 북정리 고분군은 양산 도심에서 동북쪽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길 옆 성황산에서 뻗어내린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5~6세기 신라의 고분이다. 능선 위쪽에는 대형 고분이, 아래쪽에는 소형고분이 20여기 분포되어 있다. 이 고분군은 이른 시기인 1920년대에 일본인에 의해 부부총에 처음 발굴조사되었다. 1990년대에 동아대 박물관에 의해 재조사되었다고 한다. 부부총에서 출토된 금동관 등 다수의 유물들은 현재 일본 도쿄박물관에 전시되있으며, 동아대에 발굴한 금조총에서도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김해지역과 가까운 이 고분은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던 시기의 지역 유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정리 고분군이 있는 지역은 양산시가 도시화되어 가면서 주택가로 변하고 있는 지역으로 보이며, 실제로는 현재 ..

김해 양동리 고분군(사적 454호), 5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된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에 이르는 고분군

김해시 주촌면에 위치한 양동리 고분군은 가야 고분군 중에서도 가장 많은 5천여점의 유물의 발굴된 유적지이다. 기원전 2세기 삼한시대부터 원삼국, 삼국시대에 이르는 기원후 5세기까지의 무덤 500여기가 산재해 있는 곳으로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양동리 가곡부락 뒷산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었고, 그 면적은 3만여평 정도이다. 현재 양동리 고분군은 유적 발굴이후 봉분들을 복원해 놓고 있지 않아서 유적지가 아니라 동네 뒷산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한식청동거울과 폭이 넓은 투겁창 등 중국 및 일본계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으며, 이 고분의 주인들은 지역의 유력집단으로 중국, 일본과의 해상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집단으로 여겨진다. 또한 대형 목곽묘와 외래계유물, 수정..

성주 성산동 고분군(사적 86호), 가야연맹체 성산가야 유적

성산가야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가야연맹체 국가 중 하나로 한반도 동남부 변한 12국 중에 하나에서 발전하였다고 한다. 벽진가야라고도 하며, 성주읍과 인근의 벽진면 일대를 영토로한 고대국가였다. 낙동강 서안의 현 성주읍 주변 지역으로 농업생산성 양호하며, 낙동강 수로를 이용할 수 있어서 고대국가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쪽편에 있었던 가야연맹체의 중심국가 중 하나였던 고령의 대가야와는 출토된 유물에서 다른 특징을 나타나며 오히려 신라의의 유물과 유사점이 많아서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성주읍 중심부를 휘감으면서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 남쪽편인 성주읍 성산동 산자락에 소재한 성주 성산동 고분군은 고대 국가로 가야연맹체 중 하나인 성산가야가 남겨 놓은 유적이다. 성산동 고..

공주 수촌리고분군 (사적 460호), 초기 백제시대 웅진지방 유력자의 무덤

공주에서 금강을 지나서 차령고개를 넘어 천안으로 연결되는 23번국도변에 위치한 의당면 수촌리 백제고분군이다. 백제시대 고분이지만 왕릉은 아니고 초기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하고 있을때 웅진지역 토호세력의 무덤으로 보인다. 이 고분은 수촌초등학교 뒷편에 2지역 고분군이 있고, 조금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1지역 고분군이 있다. 수촌리 고분군 발굴 조사를 통해서 목곽묘, 앞트기식돌방무덤, 굴식 돌방무덤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며, 부장품으로 백제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금동관모를 비롯하여, 금동신발, 환두대고, 중국제 자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곳 수촌리 백제고분군은 웅진시기의 무덤이 아니라 초기 한성을 도읍으로 한 시기의 지방세력의 위상이나 중앙과의 관계를 보여준다고 한다. 수촌리 수촌..

[중앙박물관 황남대총] 북분 금관 (국보191호), 금제 허리띠 (국보192호), 남분 금제허리띠 (보물 629호)

황남대총에서는 천마총,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과 더불어 신라를 대표하는 금관과 금제허리띠가 출토되었다. 2점 모두 그 제작수법이 상당히 뛰어나고 보존 상태가 훌륭하기 때문에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가 '금의 나라'라는 칭호를 받게 해주는 중요한 유물로 한국을 대표하는 금속공예품이라 할 수 있다. 금제허리띠 또한 그 구성품이 상당히 많고 정교하고 하려하게 만들어졌으며 출토될 당시 상태가 아주 좋고, 당시의 착용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유물이라고 한다. 신라의 금관은 그 제작형식에 있어서 북방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다수 학자들의 의견이고, 전세계적으로 출토된 금관은 모두 10여점이라고 하는데 그 중 한국에서 출토된 것이 8점이라고 한다. 신라 왕릉에 부장품으로 묻힌 금관은 실제 사용한 것이..

중앙박물관 2010.10.08

경주 대릉원, 월성 북쪽편에 자리잡고 고대 신라의 고분군

경주 궁성인 월성 북쪽편에는 너무나도 유명한 첨성대를 비롯하여 많은 초기 신라의 고분들이 산재해 있다. 내물왕릉을 비롯하여 일부는 월성 바로 북쪽편 궁궐터, 계림 등과 함께 있으며 유명한 천마총, 황남대총, 미추왕릉 등은 대릉원이라는 이름으로 약간 북쪽인 황남동 일대에 몰려 있다. 가장 작은 고분에 속하는 천마총, 금관총을 시범적으로 발굴한 결과 왕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훨씬 더 큰 고분에는 얼마나 많은 보물들이 같이 묻혔을까 상상을 하게하는 위대한 유적지이다. 고분들의 보면 초기 고분일수록 규모가 크고 후대로 올 수록 정형화되어 조선의 왕릉과 비슷한 규모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대릉원 입구, 미추왕릉 천마총, 미추왕릉, 황남대총이 있는 대릉원 입구와 들어가는 ..

경주 천마총과 주변의 고분들

경주 대릉원에 있는 많은 고분을 정비하면서 시범적으로 발굴한 고분입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적은 고분을 발굴했음에도 불구하고 천마도, 금관 등 많은 국보급 문화재들이 출토된 곳입니다. 지금 내부를 공개하고 있는 대릉원 내 유일한 고분으로 들어가면 신라 왕릉 내부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천마총은 대릉원에서 제일 구석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천마총 들어가는 길에 여러 고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대릉원 내에 있는 많은 고분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천마총 입구입니다. 경주 대릉원 천마총을 관람하러 온 어린 학생들이 열심히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대릉원 천마총 봉분의 모습입니다. 크기는 많이 크다고 할 수 없는 규모입니다. 천마총 안내표지판 천마총을 들어가는 길에 있는 대릉원의 여러 고분들입니다. 제155호 고..

경주 미추왕릉, 대릉원 들어가는 길

경주 대릉원에는 천마총과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다수의 신라 고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릉원에 존재하는 다수의 고분 중에서 가장 정비가 잘되어 있고 내력이 알려진 곳이 미추왕릉입니다. 미추왕릉 앞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제사를 올리기 위한 숭혜전과 왕릉 앞에서 상석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경주 대릉원 입구입니다. 대릉원 입구에서 고분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는 길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대릉원 소나무 숲길을 조금 들어오면 북쪽편에 조선시대 왕릉처럼 출입문이 있는 고분을 만날 수 있는 대릉원에서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고 지금도 제사를 지내는 미추왕릉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대릉원 미추왕릉 출입문입니다. 조선 왕릉처럼 삼문으로 되어 있고 문에는 많은 틈이 있습니다. 대릉원 미추왕릉에는 제사를 올릴..

부여 능산리 고분군, 백제 마지막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군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나지막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학자들에 의헤 6기의 고분이 확인되었으며, 1965년에 다시 2기의 고분이 발견되어 총 8기의 고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능산리 고분군들은 일찍 그 존재가 확인되어서 도굴이 먼저 이루어졌기때문에 발굴시 출토유물이 거의 없다고 한다. 능산리 고분군은 능산리형돌방무덤으로 불리는 백제후기에 조성된 대부분의 무덤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아마도 당시에 법률적으로 봉분을 조성하는데 규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최근에 조성한 의자왕 부자의 가묘까지 합쳐서 백제왕릉원이라고 불리고 있다. 부여 능산리고분군 전경. 능산리산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

영주 순흥읍내리벽화 고분, 고구려 영향 받은 신라 고분

풍기에서 소수서원을 가는 국도변에 자리잡고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고분이다. 이 고분은 순흥읍내리벽화고분이라고 부르며, 구릉 윗쪽에는 또다른 신라고분인 어숙묘가 있다. 이 고분에서는 벽화가 발견되었으며, 당시 고구려와 접경지역이었던 이 지역에서 고구려 영향을 받은 고분으로 여겨진다. 고분내부 벽화는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 같고, 지금은 모조품이 내부에 그려져 있다. 소수서원이 있는 순흥면 소재지 부근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순흥읍니리 벽화고분. 고분 내부 벽면에 새겨진 그림들. 고분 널방입구. 정면과 측면에서 본 고분. 비봉산 정상(높이 431m)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구릉의 경사면에 있는 무덤이다. 무덤의 외형은 둥글고 내부는 널방(현실)과 그 방에서 입구를 연결하는 널길(연도)로 이루어진 굴식돌방무..

부여 능안골 고분군, 백제 후기 귀족들의 무덤

백제 마지막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군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볼 수 있는 백제 후기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안골 고분군이다. 이 고분들의 모양새를 보면 최근의 무덤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기때문에 지나가다 보면 어느 집안의 선산이 아닌가 생각들 정도로 고분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는 무덤들이다. 모두 60여기의 고분이 있다고 하며, 많지는 않지만 유물들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 고분군 앞에 있는 안내표지판을 보면 겉모양은 비슷해 보이지만 내부는 다양한 형태의 석실들로 이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능안골 고분군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평이하게 생긴 무덤처럼 보인다. 약간 시대가 앞선 가야나 마한지역의 경우 귀족들이나 왕이나 큰 구분이 없이 거대하게 봉분을 조성하고, 부장품도 풍부한 경우가 ..

백제 무녕왕릉 있는 공주 송산리 고분군

공주 송산리고분군은 무녕왕릉으로 유명한 대표적인 백제 고분군으로 공주를 도읍으로 정했던 시기의 백제 왕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경주 왕릉에 비해서 크기도 크지 않고 내부는 중국 남조 귀족들의 무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가 남조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서 그런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공주의 도읍인 공산성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서방을 죽은자들의 땅이라는 사상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외형적으로는 화려한 면모가 거의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곳에는 무녕왕릉을 포함하여 7기의 왕릉이 금강변 구릉에 남쪽 방향을 보면서 줄지어 있다. 공주 공산성 서쪽 금강변 구릉에 위치하고 있는 송산리 고분군. 공주가 백제의 수도였던 시기 왕들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며, 위쪽에 1~4호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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