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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53

신라 탈해왕릉 (사적 174호), 월성 석씨 시조인 탈해왕을 모신 왕릉과 사당인 숭신전

경주시 동천동에 위치한 사적 174호로 지정된 신라 4대 탈해왕을 모신 탈해왕릉이다. 탈해왕은 월성 석씨의 시조로 설화에 의하면 석탈해는 일본 북쪽지방에서 바다를 통해 신라로 들어왔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 2대 남해왕의 사위가 되면서 유리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신라에서 왕을 지낸 성씨로는 박씨, 김씨, 석씨가 있으며, 신라에서는 8명의 석씨가 왕으로 재위하였는데 그 기간은 합쳐서 171년 정도였다고 한다. 월성석씨는 그 유래가 오래되기는 하였지만 후손이 번창하지 않아 현재 4,500명 정도가 있다고 한다. 탈해왕릉은 경주오릉과 마찬가지로 초기의 왕릉으로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위에 아무런 시설이 없이 봉분만 남아 있다. 봉분 앞에는 일제강점기에 경주 시내에 지어졌던 숭신전을 ..

신라 헌덕왕릉(사적 29호), 경주 북천(알천)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왕릉

헌덕왕은 신라 41대왕(재위 809~826년)으로 난을 일으켜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헌덕왕은 원성왕의 손자로 39대 소성왕의 동생이기도 하다. 통일신라의 안정기가 지나고 지배계층간의 권력투쟁이 심화되었던 시기의 왕이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안정화하고, 제방을 수리하는 등 농사를 장려하였다. 헌덕왕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웅주도독 김헌창의 반란을 진압하고, 대동강 지역에 장성을 쌓고 국방을 강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헌덕왕 자신 또한 조카인 반란을 통해 조카를 죽이고 즉위하였던 것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반기 귀족세력간의 갈등을 이끌었던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다. 헌덕왕릉이 자리잡고 있는 경주시 동천동 지역은 경주 도심 북쪽을 흐르는 북천(알천) 북쪽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북천..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던 신문왕릉(사적 181호)과 통일신라말 혼란기를 보낸 효공왕릉(사적 183호)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김정명)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이 귀족들을 제압하고 통일이후 사회안정의 기반을 마련한 왕이다. 또한 최고교육기관인 국학을 창설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문화를 증진하는 정책을 펼쳐 설총, 강수 같은 대학자를 배출하였다. 대체로 고려의 광종이나 조선의 태종에 비유되는 왕으로 귀족세력을 탄압하고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여 전제왕권을 확립하였다고 한다. 문무왕릉이 있는 동해에서 만파식적을 가져왔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여러차례 일어난 반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대에는 9주와 주.군.현을 정비하는 등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관리에게 지급되던 녹읍폐지하여 관리들의 경제력 확대를 억제시켰다. 신문왕릉은 경주의 동남쪽에 있는 낭산의 남쪽 끝에 위..

신라 헌강왕릉(사적187호)와 정강왕릉(사적186호), 경주 남산 동쪽 통일신라 쇠퇴기 왕릉

경주 남산 동쪽편 통일전과 서출지 근처 북쪽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헌강왕릉(사적187호)와 정강왕릉(사적 186호)이다.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여 웅장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던 괘릉 이후의 신라 왕릉과는 달리 소박한 느낌을 주는 통일신라 쇠퇴기 왕릉이다. 괘릉 이후에 정착되어가는 문인석, 무인석 등의 석물과 둘레석의 십이지신상, 난간석 등 왕릉을 구성하던 장식은 보이지 않고, 서구의 신전 제단같은 상석도 단순한 장방형 화강석 석단으로 바뀌어 있다. 봉분에는 단순하게 잘다듬은 화강석으로 둘레석을 둘렀을 뿐이다. 외형에 있어서는 신라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릉과 비슷하며, 복고적인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진흥왕릉 부근의 문성왕릉이나 헌안왕릉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헌강왕은 신라..

경주 신라 흥덕왕릉(사적30호), 통일신라 전성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왕릉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사적 30호로 지정된 신라 42대 흥덕왕릉이다. 이 왕릉은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인 원성왕의 괘릉과 함께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반영한 무덤으로 석물의 배치에 있어서 약간 다른면이 있지만 구성요소는 괘릉과 거의 유사하다. 왕릉은 둘레석을 두르고 있으며, 둘레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바깥에 난석이 둘러져 있다. 왕릉 중앙에는 전대나 후대의 왕릉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그리스.로마신전의 제단에서 볼 수 있는 큰 제단이 놓여져 있다. 석물은 왕릉입구임을 알려주는 화표석 1쌍, 문.무인상 1쌍, 2쌍의 사자상 중 하나가 없어진 3개의 사자상이 남아 있다. 특히, 무인석은 괘릉과 마찬가지로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왕릉 앞쪽에는 비석에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거북..

강화 홍릉(사적 224호), 무인정권기 대몽항전을 이끈 고려 23대 고종의 능

강화도의 주산인 고려산 남동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 23대 고종의 능인 사적 224호로 지정된 강화 홍릉이다. 고려 고종은 최충헌 집권기에 왕위에 올라 대몽항전을 거치면서 몽고에 항복하기까지 약 46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고종은 최충헌 일가가 집권하던 시기였기때문에 실권없었던 최씨정권을 몰아내고 몽고와 강화를 했던 그해에 죽어서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강화에 묻혀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종의 재위기에는 무신정권기란 어려움도 있었지만 몽골이 동아시아는 물론 중동과 서구까지 그 영향을 미쳤던 세계사적으로도 격변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고려도 거란.몽골 등의 침입을 받아 전국토가 초토화되고 인명과 문화유산의 손실도 상당히 컸던 시기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국내외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팔만대..

강화 석릉(사적 369호), 최충헌 정권에 의해 폐위된 고려 21대 희종의 능

석릉은 고려 21대 희종의 능으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이 능은 조선시대 이후 방치되어 있다가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봉분하였다고 한다. 희종은 신종의 아들로 무신정권 최충헌 집권기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1204년에 즉위하였고, 1208년 당시 내시 왕준명 등과 함께 정권을 휘두르던 최충헌을 죽이려다 실패하여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개성으로 돌아와 살기는 했는데, 복위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다시 교동도로 유배되어 죽었다고 한다. 석릉은 무신정권에 의해 폐위된 국왕의 능이라서 그런지 넓은 벌판이 내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조성되지 못하고 강화도에서도 깊은 산중에 속하는 양도면 진강산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석릉을 찾아가는 길은 양도면 카톨릭대학 인..

경주 진평왕릉 (사적 180호), 수.당 교체기 신라를 안정적으로 이끈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은 신라 26대왕 (재위 579~632)으로 진흥왕의 손자이자 선덕여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신라 중흥기를 이끌었던 진흥왕 이후 신라가 삼국간 경쟁에서 승리하고 통일을 이루는 과정이었던 선덕여왕대까지의 과도기를 이끌었던 국왕으로 재위 기간이 52년에 이른다. 고구려의 장수왕, 조선의 영조에 비견할 만큼 오랜 기간 왕위에 머무르면서 국가의 안정을 꽤했던 왕이다. 진평왕 재위기간동안에는 수나라와 고구려간의 전쟁으로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는 등 국제적으로 격변기였다고 할 수 있는 시기였다. 진평왕은 국내젹으로 여러 관청을 설치하는 등 내정을 안정시키고, 명활산성과 남산산성을 쌓는 등 경주 방위에 많은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수나라.당나라와의 외교에 힘써 삼국통일이 기틀을 마련하고 불..

경주 선덕여왕릉 (사적 182호), 경주 낭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최초 여왕의 능

선덕여왕은 신라 27대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다. TV드라마를 통해서 잘 알려진대로 이름은 덕만이고 진평왕의 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내정에서는 선정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키고 구휼사업에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자장법사를 중국에 보내 불법을 들여여고 많은 유학생들을 파견하여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이는데도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경주의 대표적인 유적인 첨성대를 건립하였고, 분황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들을 창건하고 황룡사 목탑을 세우는 등 불교를 크게 진흥시켰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백제와 신라의 적극적인 공세를 김유신과 김춘추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당나라와는 외교적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선덕여왕의 능은 경주 남쪽 낭산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

경주 효소왕릉 (사적 184호),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끈 효소왕의 능

신라 32대왕(재위 692~702)인 효소왕은 신문왕의 큰 아들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손자이기도 하다. 삼국통일 후 신라의 관제를 정비하고 당.일본 등과 수교하였다. 이학 교육기관인 의학을 설립하여 의학박사를 두고 중국 의학서를 교수하게 하고, 서시전과 남시전을 두어 경주의 시장을 활성화 시켰다. 동생인 성덕왕과 함께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효소왕릉은 경주 남쪽 불국사로 가는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생인 성덕왕릉과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은 밑둘레 57m, 지름 15.5m, 높이 4.3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으로 자연석으로 둘레석을 쌓았으나 지금은 몇개만 드러나 있다. 당나라의 능묘제도가 도입되기 직전에 조성된 자연석으로 둘레석을 쌓은 고분에서 비슷하게 ..

경주 성덕왕릉 (사적 28호), 에밀레종으로 잘 알려진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끈 성덕대왕의 능

성덕왕과 효소왕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손자이자 신문왕의 아들로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으로 경주에서 불국사로 가는 국도와 철도가에 토함산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말단이 평지와 만나는 곳에 나란히 능을 마련해 놓고 있다. 문무왕대에는 왜(倭)의 침입에 대해서 상당힌 긴장했던 것으로 보이며, 문무왕의 능을 동해 대왕암에 수중능으로 마련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아들인 신문왕과 손자인 효소왕, 성덕왕은 일본이 침입할 수 있는 예상 통로라고 할 수 있는 울산과 경주를 연결하는 큰 길가에 나란히 마련하고 있다. 성덕왕은 당나라와 외교문서를 전담하는 통문박사를 설치하고, 당나라에 약43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당나라왕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이끌었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였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 노..

경주 서악동 진흥왕릉 (사적 177호)과 진지.문성.헌안왕릉

경주 형산상 서쪽에 있는 선도산 남쪽으로 뻗어내린 주능선 서악동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4기의 왕릉이다. 약간 아래쪽에 위치한 태종무열왕릉과 서악동 구분군에 비해서 봉분의 크기가 작고 잘 꾸미지 않은 왕릉으로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등 신라를 크게 중흥시키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진흥왕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이자 태종무열왕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의 왕릉, 신라 쇠퇴기에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제압한 문성왕과 그 뒤를 이은 헌안왕의 왕릉이 나란히 있다. 이 곳에는 4기의 왕릉 외외에도 약 10여기 정도 정비되지 않은 신라귀족(?)의 무덤으로 보이는 고분들이 능선을 따라서 들어서 있다. 진흥왕 신라 역사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왕으로 전국각지에 그가 다녀간 순수비를 남아 있는 왕이지만, 그가 남긴 업적..

경주 서악동고분군 (사적 142호), 무열왕릉 뒷편에 있는 신라 귀족의 무덤

사적 142호로 지정된 서악동고분군은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능선에 위치한 대형 고분으로 태종무열왕릉 뒷편에 나란히 놓여 있다. 이 고분들의 입지는 경주로 향해서 뻗은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앞쪽으로는 경주를 관통하는 큰 강인 형산강이 흐르고 있으며 남쪽 계곡 건너에는 벽도산이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당나라와 교류가 많았던 삼국시대 말기의 풍수사상이 반영된 입지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긴장관계에 있던 백제.고구려 등 외부세력의 침입이 예상되는 교통로에 능을 조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도산 능선을 따라 조성된 4기의 고분에 대해서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공식적으로는 태종무열왕과 관련이 깊은 왕족이거나 왕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뒷편 언덕..

경주 태종무열왕릉 (사적 20호),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무열왕 김춘추 무덤

경주시 서쪽편에서 경주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서악동 동쪽 언덕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5기의 고분 중 제일 앞쪽에 위치하고 있는 사적 20호로 지정되어 있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능이다. 무열왕릉의 위치는 약간의 언덕위에 있어서 경주시가를 굽어보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다. 또한 대구 등 경북지역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국도 입구에 태종 무열왕릉이 있는데 아마 이는 중국의 사례를 참고한 듯 하다. (적의 침입이 있을때 왕실이 물러서지 않고 선조의 능을 지킨다는 의미로 가상의 적이 가장 먼저 오는 곳에 대부분의 왕릉이 있고, 서울의 경우도 1번국도로 신의주로 가는 통일로에 서오능, 서삼능 등 가장 많은 왕릉이 있다.) 무열왕릉 봉분은 밑지름 36.3m, 높이 8.7m로 원형봉토분 형태를 하고 있으며 발굴..

서울 천장산 산책, 경종의 의릉과 옛 중앙정보부 강당이 있는 곳

천장산은 서울 동북쪽에 위치한 해발 141m의 조그마한 산이다. 이 곳에는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묘를 조성하기도 했으며,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과 그의 비인 선의왕후의 무덤이 있는 의릉이 있고, 남쪽으로는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양과 가까운 곳이었지만, 왕릉이 있는 구역으로 관리해와서 그런지 천장산에는 민가들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 이 능역으로 각종 공공기관이 들어서서인지 주변에 경희대, 외대, 동덕여대 등 많은 대학들과 과학기술원, 산업연구원 등 공공연구기관들이 들어서 있다. 천장산은 많은 지역을 포함하고 있지만 많이 알려진 곳은 의릉을 중심으로 한 옛 중앙정보부가 있었던 의릉 영역일 것이다. 의릉에 옛 중앙정보부가 자리하고 있어서 오랜 기간동안 일반인..

서울 태릉 조선왕릉전시관

서울 동쪽편에 위치한 조선중기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모신 태릉 입구에 있는 조선왕릉전시관이다. 이 전시관은 최근에 세워진 곳으로 조선왕실에서 국왕이 승하하는 순간부터, 국장행사의 진행, 왕릉의 조성과 관리까지 조선왕릉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 전시된 내용은 주로 왕릉에 대한 설명과 그 설명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유물(복제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조선시대 국장은 왕이 승하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며, 주요 절차를 보면 도감의 설치 -> 빈전에 안치 -> 왕의 즉위 -> 시호를 올림 -> 명당선정 -> 왕릉조성 -> 왕릉으로 모심 -> 삼년상 후 종묘에 모시는 순서로 진행된다. 기간은은 왕릉으로 모시기까지 5개월의 기간이 소요되며, 종..

지역박물관 2010.10.28

서울 태릉,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능

서울 동북쪽에 위치한 태릉은 올림픽을 준비하는 선수촌과 육군사관학교로 유명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역대 조선 왕과 비의 능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으로 근처에는 동구릉과 강릉이 있다. 이 지역에 많은 능이 있는 관계로 넓은 능역이 일제강점기까지 남아 있었고, 그런 이유로 해서 근처에는 육군사관학교, 태릉사격장, 태릉선수촌, 군부대 등 많은 공공시설이 소재하고 있다. 태릉의 주인인 문정왕후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걸 중 한명으로 조선 11대 중종의 계비이다. TV가 도입된 이래 가장 많은 사극의 주인공 중 한명인 문정왕후는 중종이 계비임에도 고양 서삼릉에 있었던 중종의 능을 서울 강남의 정릉으로 옮기고 자기도 그 곳에서 묻힐 작정으로 원찰인 봉은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

서울 석관동 의릉, 조선 20대 경종과 선의왕후 왕릉

서울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은 조선 20대 경종과 그의 비인 선의왕후의 능이다. 왕릉으로서는 한양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의릉은 장희빈의 아들로서 숙종 다음 왕인 경종의 능으로 선의왕후의 능과 앞.뒤로 나란히 있는 특히한 구조인 상하이릉봉이다. 이는 풍수지리설에 따라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의령의 능역이 되는 천장산은 남쪽편이 옛 홍릉지역과 함께 서울 동북지역에서 가장 넗은 녹지를 제공하고 있는 곳으로 주변에 많은 국책연구소와 대학들이 자리잡고 있다. 의릉이 있는 곳을 사용한 정부기관은 옛 중앙정보부로 의릉영역내에 있는 중앙정보부 강당은 70년대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지금은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정원이 내곡동 헌인릉 부근으로 이전함에 따라서 옛건물들과 부지를 문..

세종대왕 옛 영릉 석물과 신도비

영릉은 세종대왕의 능으로 원래는 서울 내곡동 태종의 능인 헌릉 서쪽편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을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고 하여, 현재의 위치인 여주로 이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주로 이장하면서 기존의 석물들은 무거워서 옮기기 힘들다고 하여 땅속에 묻었다고 하는데, 70년대에 그 석물과 옛 영릉 석실들이 발굴되어 현재는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옛 영릉은 '국조오례의'에 따라 조성된 마지막 능으로 현재의 영릉과는 다른 모습이었다고 한다.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 마당에 전시된 석물들은 영릉에 있었던 모든 석물들이 발굴된 것은 아니지만 상당부분 남아 있다고 한다. 발굴된 석물은 무인석 2기, 문인석2기, 석양.석마 2기씩, 장명등, 망주석, 혼유석, 고석과 신도비가 있다. 청량리 옛 홍릉 능역에 속..

서울 숭인원 (사적361호), 명성황후 능인 홍릉이 있었던 자리.

서울 청량리 북쪽편에 위치한 숭인원은 원래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의 능이 홍릉이 있었던 자리이다. 1919년 고종이 죽으면서 남양주 금곡동에 고종의 홍릉이 조성되면서 이장하였다. 바로 옆에는 고종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의 묘소인 영희원이 있는데 이는 고종의 능을 생전이 이 곳에 조성할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홍릉이 이전되고난 빈자리에 영친왕의 맏아들인 이진의 묘소가 1922년에 조성되면서 숭인원으로 불리게 된 것 같다. 지금도 이지역이 홍릉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주변에선 도심속의 작은 숲을 이루는 공간과 국가기관들이 많이 산재해 있다. 숭인원은 고종의 아들이자 일제강점기에 마지막 왕이라 할 수 있는 영친왕의 맏아들인 이진의 묘소이다. 아마도 조선시대를 마감하는 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보인다. 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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