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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고산서원, 구한말 성리학자 기정진을 모신 서원

전남 장선군 진원면 면소재 가까운곳에 위치한 고산서원 구한말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기정진을 모신 서원이다. 기정진은 순창출신으로 구한말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로 서경덕.이황.이이를 계승한 정통 성리학의 대가로 일컬어진다. 구한말 세도정치체제에서 잠깐 벼슬에 나간적이 있으나 일생의 대부분을 호남지방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보냈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중국 송나라와 조선의 정통 유학을 연구했으며 '납량사의', '정자설', '이통설'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장성 고산서원은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서원으로 모셔진 인물 또한 기정진과 그의 제자들이다. 서원의 건립은 조선후기 영.정조대에 들어서면서 서원의 무분별하게 설립되면서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나서 사회문제가 되었기때문에 그 이후 서원..

장성 이진환 가옥과 백계리마을

장성군 장성읍 백계리에 남아 있는 전통주택인 이진환 가옥 사랑채이다. 이 가옥은 초가지붕을 얹은 주택으로 19세기 말부터 이집에서 사랑채로 사용해 왔던 건물이다. 원래 사당에 딸린 재실용 강당 건물으로 사용하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겨 사랑채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앞면 5칸의 꽤 큰 규모의 건물로 '-'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오른쪽편에 안채였던 것으로 보이는 주택이 있는데, 현대식 기와를 얹기는 했지만 원래의 안채의 모습과 구조가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이 가옥이 소재한 장성 백계리 마을은 내장산과 입암산에서 발원하여 장선군을 지나서 영산강과 합류하는 황룡강변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장성댐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규모는 크지 않은편이 이 가옥을 제외하고는 오래된 고택이 ..

고택_정원 2013.03.03

여수항,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남해안을 대표하는 큰 항구

여수항은 전라좌수영 관아 객사였던 진남관을 중심으로 한 구항을 중심으로 바깥쪽에는 많은 어선들이 정박하는 국동항, 여천화학공단의 물류를 위한 크고 작은 항구들과 작은 포구들을 말한다. 여수 진남관 앞 구항은 전라좌수영 수군 함정들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배들 정박했던 전통적인 항구라고 할 수 있다. 여수 구항은 앞쪽에 돌산도가 큰 파도를 막아주며, 뒷쪽으로는 해발 220m 종고산과 325m 장군산이 배후를 감싸고 있어 항구로서 천혜의 입지를 갖추고 있다. 또한 여수항을 지나야만 돌산도를 우회하지 않고 빠르고 안전하게 배가 오갈 수 있다. 지금은 전통적인 세계유수의 항구와 마찬가지로 여수항도 선박이 정박하고, 화물을 싣고 내리는 기능은 외곽의 국동항과 공단지역 항구에 그 기능을 넘겨주고 도심항구로 연안여객선..

한국의 풍경 2013.03.03

장성향교, 옛 장성도호부 공립교육기관

장성군 장성읍 성산리에 소재한 장성향교는 조선시대 장성도호부 공립교육기관이다. 장성향교는 장성읍 소재지에서 약간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장성읍 소재지가 일제강점기에 호남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기차역과 가까운 현재의 위치로 옮겼기때문이다. 원래 장성도호부 관아는 향교에서 800여m 떨어진 성산초등하교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장성읍 지역에는 장성현이 있었고 남쪽에 진원현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지역이 피폐해져서 2개의 현을 합쳤다고 한다. 이때 장성향교와 진원향교가 합쳐져서 오늘날의 장성향교가 되었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내류지역의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장성군 북쪽에 입암산선을 쌓고 읍치를 성산으로 옮기면서 향교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의 향교 건물 또한 이때 세워진 것..

[중앙박물관 특별전, 유리 3천년의 이야기] 유리공예

오늘날 유리는 액체를 담는 그릇이나 용기, 강한 내구성을 갖춘 건축자재, 화려하게 가공한 장신구, 컴푸터 모니터를 비롯한 첨단 기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이다. 기원전 3천년경에 유리가 처음 만들어졌을때는 보석과 같은 느낌을 주는 광택이 있는 재료의 특성상 구슬과 같은 형태로 장신구 등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기원전 15세기경에는 심지를 이용하여 유리로 액체를 담을 수 있는 용기를 제작하는 코어성형기법이 발명되어 작은 병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유리의 가공은 고도의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공예로서 한단계 발전할 수 있었다. 이후 유리를 녹여 기존의 청동기를 만드는 방법과 유사하게 그릇을 만드는 주조기법, 다양한 색감을 나타낼..

중앙박물관 2013.03.02

장성 필암서원(사적242호), 호남 제일의 사액서원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소재한 필암서원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하서 김인후(1510~1560)을 모시기 위해서 1590년(선조23)에 세워진 서원이다.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과 함께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영산강 중류지역 양반사회의 중심이 되었던 서원이다. 서원은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을 제사를 모시는 기능과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기능을 갖고 있는데 필암서원은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더 중시되었던 서원이다. 처음에는 장성읍 기산리에 서원이 세워졌으나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인조대에 다른곳에 옮겼으나 수해를 입어 1672년(현종13)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1659년(효종10)에 '필암'이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서울 인사동길, 대표적인 서울의 전통문화 거리

서울 인사동길은 종로 탑골공원에서 시작하여 북촌입구에 해당하는 안국동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길로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문화 거리이다. 이 길은 조선시대부터 개천을 따라서 있었던 길이라고 하며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에 골동품 상가가 형성되면서 한국적인 전통이 많이 남아 있는 거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다. 인사동은 조선시대 서울의 공식 상업지구인 육의전이 있던 종로 북쪽편과 창덕궁 남쪽에 형성되어 있던 관아 서쪽편에 인접하고 있는 주택가 였던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청계천 남쪽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반면에, 인사동 일대는 조선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핵심 주거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된 골통품 상가는 60년대에 전성기를 이루다가 70년대 이후에는 골통품 상가들은 ..

고택_정원 2013.02.28

장성 황룡전적지(사적406호), 동학농민전쟁 초기 관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주요 격전지

구한말인 1894년 대규모 농민봉기이자 미완의 혁명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격전지 중 하나로 사적406호로 지정된 장성 황룡전적지이다. 이곳은 장성군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2km, 필암서원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장성군 중심지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황룡전적지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전투가 있었던 장소처럼 황룡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조형물 외에는 특별히 볼 수 있는 유적은 없지만 동학혁명이라는 구한말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수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1994년에 세워진 기념탑은 동학혁명을 상징하는 높이 30m의 죽창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앞에는 당시 혁명군이 사용하였던 총알을 막기 위해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장태를 굴리는 모습을 형상을 ..

근현대유적 2013.02.27

[중앙박물관 특별전, 유리 3천년의 이야기] 유리로 만든 인장과 다양한 장신구

유리는 청동기시대 지금부터 4천년 전인 기원전 2000년 경 북부 메소포타미아지방과 이집트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이 유리는 일상생활용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으며, 기원전 1500년 경에 유리용기가 만들어진 이후 용기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100년 경 시리아에서 대롱불기 기법이 발명된 이래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생활용품으로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은 유리가 그릇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유리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부터 보석처럼 다양한 빛깔의 표현이 가능하고 제조공정을 통해서 다양한 형태로 만들 수 있었기때문에 그릇 이외에도 보석의 대용품으로서 반지, 목걸이, 펜던트 등 다양한 장신구를 만드는데 사용되어 왔다. 또한 보석의 중요한 용도 중 하..

중앙박물관 2013.02.27

장성 요월정 원림, 황룡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정자와 배롱나무 숲

장성군 황룡면 황룡리에 위치한 요월정는 이 지역에 위치한 많은 정자들 중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세워졌으며 유서 깊은 곳이다. 장성군 북쪽 백양사가 있는 백암산에서 발원하여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인 황룡강이 내려다 보이는 작은 동산에 자리잡고 있다. 이 정자는 조선중기 명종대 공조좌랑을 역임한 김경우가 세운 정자로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인 김인후, 기대승 등과 함께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던 유서깊은 장소이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전통적인 정자의 형태를 하고 있다. 2개의 방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에서 묵으면서 학문을 논하거나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요즘의 별장과 같은 기능을 하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장성군은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인 필암서원이 위치하고..

고택_정원 2013.02.26

[중앙박물관 특별전, 유리 3천년의 이야기] 장식유리의 만개와 이슬람 유리의 전개

기원전 1세기 시리아에서 대롱불기 기법이 발명됨으로써 유리제품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로마가 지중해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함에 따라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유리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다양한 지역에서 유리공방들이 생겨나고 새로운 기술들이 발전하게 되었다. 로마제국 이후에는 비잔틴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제국과 이란지역을 중심으로 한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리제작 전통을 계승하여 다양한 유리공예품을 만들었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유리제작 기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 페르시아에서 만든 유리제품들은 실크로드를 비롯한 다양한 교역로를 통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 고분에서 당시 페르시아로부터 유입된 유리제품들이 출토되..

중앙박물관 2013.02.22

[중앙박물관 특별전, 유리 3천년의 이야기] 불기 기법의 다양한 응용과 커트 기법(Cut Glass)

기원전 1세기경 시리아인들이 처음으로 대롱불기기법을 발명한 이후 귀금속이나 보석으로 만든 공예품처럼 몸을 장식하는 장신구나 부유한 계층에서만 사용했던 아주 특별한 용기로서 역할을 했던 유리는 대량생산을 통해 지중해 해상무역로나 실크로드를 통한 무역로를 통해 주요 교역품으로서 세계 각처로 퍼져나갔다. 대롱불기기법은 속이 빈 금속대롱 끝에 녹인 유리를 붙여 공기를 불어 풍선처럼 부풀린 후 모양을 만드는 기법으로 불과 몇분안에 그릇을 만들 수 있어서 이전의 금속공예기법을 적용한 주조기법이나 작은 용기를 만들었던 코어성형기법에 비해서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대롱불기기법은 그 자체로서도 다양한 크기와 모양을 만들 수 있어서 장인들이 지금까지도 선호하는 기법이며, 틀을 이용한 대롱불기기법은 규격화된 유리제품..

중앙박물관 2013.02.21

서울 한강철교, 1900년 한강에 처음으로 놓여진 다리

한강철교는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 건설된 다리로 노량진역과 용산역 사이를 연결한 철교이다. A, B, C, D선의 4개의 교량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강철교는 한강에 건설된 최초의 근대식 다리로 한강이남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기차가 통과하는 다리이다. 1900년에 건설된 A선과 1912년에 건설된 B선은 단선이고, 1944년 건설된 C선과 1994년에 건설된 D선은 복선으로 A,B,C선은 근대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한강철교는 전철이나 기차를 이용할 때 지나다니는 일상적인 다리이지만 주택가 등과 떨어져 있어서 가까이서 차분히 보기는 쉽지 않은 곳이다. 여의도 63빌딩에서 자전기길을 따라서 한강대교로 걸어가면 가까이 살펴볼 수 있다. 한강철도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은 미국인 제임스 모스가 1897년에 ..

한국의 풍경 2013.02.21

서울 경운동 민병옥 가옥과 민영휘 일가 저택이 있었던 경인미술관

서울 경운동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는 '민가다헌'이라고 적힌 한옥이 남아 있다. 지금은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경운동 민병옥 가옥'이란 이름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930년대 지어진 개량한옥으로 H형 평면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건축가인 박길룡이 설계한 건물로 안방을 비롯한 주요한 방들을 전면에 배치하여 채광과 전망을 좋게하였다. 전통한옥과는 달리 대청마루는 작게 하고, 별도의 방에 응접실을 설치한 개량한옥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주요 방들 앞 툇마루에는 유리창을 설치하여 보온과 채광을 고려하였으며, 현관과 출입문을 뒷편에 배치해 놓고 있다. 이 가옥을 설계한 박길용은 일제강점기에 화신백화점 등 많은 건축물들을 설계했던 건축가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개량한옥으로서 의미를 ..

고택_정원 2013.02.20

[중앙박물관 특별전, 유리 3천년의 이야기] 틀에 불어 만든 유리(Mold-blown glass)

기원전 1세기 시리아인에 의해서 대롱불기라는 획기적인 기술이 발명됨으로써 유리는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대롱불기는 고온에서 녹은 유리가 액체상태에서 서서히 굳는 성질을 이용하여 속이 빈 금속제관을 통해 풍선처럼 유리를 불어서 다양한 형태의 용기를 만드는 방법으로 기존의 코어성형기법이나 주조기법에 비해서 상당히 빠른 속도로 쉽게 유리를 만들수 있다. 유리를 만드는 방법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만드는 공정들은 자동화되었지만 기본적인 원리는 대롱불기의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대롱불기는 만드는 장인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기때문에 공예품이나 예술작품으로서 유리를 만드는 공방에서는 아직도 2천년전 시리아사람들이 개발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인 대롱불기 기법이 작가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중앙박물관 2013.02.19

서울 한강대교, 제1한강교로 불리웠던 한강에 처음 세워진 인도교

한강대교는 강북의 용산구 한강로와 강남의 노량진을 잇는 인도교로 한강 다리 중에는 첫번째로 놓인 인도교로 제1한강교라 불리웠다. 한강에 다리가 처음 놓인 것은 1900년 경인철도가 부설되면서 세워진 한강철교였지만, 이 다리에는 인도교를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강대교가 처음 세워진 것은 1917년으로 노들섬과 노량진간 대교(440m), 노들섬과 한강로간 소교(188m)가 나누어 세워졌다고 한다. 이후 1925년 대홍수로 소교가 손실되었다가 1935년에 복구되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철수하면서 대교를 폭파하였다가 1954년에 다시 복구하였다고 하며, 1981년에 8차선으로 확장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다리는 노늘섬과 한강로 사이는 트러스트 형식을 하고 있으며, 노들섬과 노량진 사이 대..

한국의 풍경 2013.02.19

[중앙박물관 특별전, 유리 3천년의 이야기] 대롱불기 유리(Free-blown glass)

유리가공기술은 기원전 15세기경에 유리로 액체를 담을 수 있는 코어 성형기법이 개발된 이래로 거푸집을 이용한 금속가공기술을 적용한 주조기법, 다양하고 화려한 색감이 뛰어난 모자이크기법 등이 개발되었다. 인류가 유리를 사용한 이래로 다양한 가공기술이 개발되고 유리의 용도 또한 처음에는 보석이나 귀금속처럼 장식을 위한 장신구 역할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점차 다양한 형태의 유리 그릇이 만들어지면서 실생활에 사용되는 생활용품으로 그 기능이 확대되었다. 하지만 유리의 생산기술 또한 고도의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했고 생산량에 한계가 있었다고 여전히 일반인들은 사용하거나 가질 수 없는 고급스러운 물품에 속했다. 유리 가공 기술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는 기원전 1세기 경에 시리아에서 속이 빈 금속관을 이용하여 유리..

중앙박물관 2013.02.18

서울 노량진 사육신 역사공원, 단종복위를 꾀하다 처형당한 사육신 묘소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는 한강변 언덕에 위치한 사육신 공원은 조선초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대응하여 단종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잃은 사육신의 무덤에 조성된 공원이다. 원래 이곳에는 단종복위 사건에 가담하여 참혹하게 처형된 성승,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 다섯분의 시신을 어느 스님이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숙종대에 사육신이 복위되면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가묘가 새로이 모셔지고 산기슭에 이들을 모시는 민절서원이 세워졌다. 현재 민절서원은 남아 있지 않고 1970년대 사육신묘 부근을 성역화 하면서 의절사라는 사당을 세우고 주변을 공원화하여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조선초기 단종복위를 꾀하다 참혹하게 처형을 당한 사육신들은 박팽년을 제외하고는 그 후손도 ..

[중앙박물관 특별전, 유리 3천년의 이야기] 모자이크 기법으로 만든 유리

기원전 2000년경부터 인류가 유리를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한 이래로 유리는 보석처럼 광택이 나는 물질로 부적의 기능을 갖는 펜던트나 몸에 지닐 수 있는 장신구로서 사용되었다. 유리를 제작하는 기술로 기원전 15세기 경부터 코어성형기법이 사용되면서 유리는 액체를 담는 용기로서 역할이 부여되었다. 더욱 큰 그릇을 만들고, 얇고 투명한 느낌을 주는 주조기법이 사용되었다. 주조기법은 거푸집에 녹은 유리를 흘려 넣어 굳히는 기존의 금속가공기법을 적용한 것으로 크고 다양하면서 세련된 장식을 한 유리제품을 만들 수 있게 하였다. 주조기법이 유리를 이용한 그릇 등을 만들기 위해서 발전된 기술이라고 하면, 기존 유리의 기능이었던 보석과 같은 몸에 지니거나 장식을 하는 장신구로서 기능을 강조한 새로운 기술로는 모자이크기법..

중앙박물관 2013.02.17

서울 용양봉저정, 정조가 한강을 건넌후 잠시 쉬었던 노량진나루터 정자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는 인도교로서 첫번째로 건설된 한강대교는 한강 이남의 노량진과 강북의 용산을 연결해 주는 다리로 1917년에 준공되었으며, 1980년대까지는 제1한강교라고 불리웠다. 노량진에서 용산까진 강폭이 좁고 가운데 노들섬이 있어서 한강을 건너기에 가장 용이하였던 지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시흥.수원을 거쳐서 충청도.전라도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노량진 나루터는 경강의 4대도선장 중 하나로 교통량이 많았다고 한다. 한강대교 남단 입구 언덕에는 용양봉저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한강을 내려보고 있다. 이 정자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 참배길에 한강을 건넌 후 잠시 휴식하던 곳이다. 앞면 6칸의 마루와 온돌방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숙식을 하던 행궁이라기 보다는 정조가 화성행차를 ..

조선 관아 2013.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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