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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2797

[창녕박물관] 신석기유물, 비화가야 대표 유물

창녕박물관은 창녕읍 교동에 위치한 교동고분군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지역박물관이다. 하지만, 이 곳이 고대국가 비화가야의 중심지이고, 많은 고분을 남겨 놓고 있는 까닭에 출토된 유물이 수준이 높고, 수량도 많은 편으로 보인다.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표박물관인 김해박물관에 많이 전시되어 있지만, 수량이 많은 까닭에 이 곳 창녕박물관를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많아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수탈해서 보고서도 남겨놓지 않고 숨겨놓은 유물이 몇수레가 되었다고 하며, 계속된 도굴로 없어진 유물도 많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역사를 통털어서 많은 유물이 남아 있는 곳이 가야지역의 특징이다. 창녕은 서남쪽을 흐르는 낙동강의 영향으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고유문화가 발달한 곳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흔..

지역박물관 2010.03.08

가야산 해인사 장경판전,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전각

해인사 장경판전은 사찰경내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전각으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해인사를 살펴보면 중심불전을 제외하고는 별로 내세울만한 전각이나 석탑 등의 문화재는 별로 없는 편이고, 요사채와 부속암자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 해인사를 법보사찰이라 불리며 우리나라 3대 사찰에 포함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이 팔만대장경을 비롯하여 많은 불경판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경판전은 해인사에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경내 많은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곳 장경판전은 오늘날까지 전란이나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고 팔만대장경을 지켜왔다. 이 장경판전은 15칸 건물 두동을 나란히 배치하고 있는데, 장식이나 모양새 등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대장경을 온전히 보전하고자하는 기능적인 면만 ..

가야산 해인사, 불전들(대비로전, 웅진전, 명부전, 독성각, 국사단, 학사대 전나무)

해인사는 신라시대부터 존재해 온 아주 오래된 사찰이지만,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 판전을 제외하고는 유서깊은 사찰전각이 별로 없는 편이다. 현재 중심불전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대비로전, 웅진전, 명부전이 있다. 토속신앙과 관련된 전각으로 사찰입구에 국사단이 있는데 이는 보통 사찰의 산신각에 해당하는 전각이고 뒷쪽에는 또다른 민간신앙의 대상인 독성각이 있다. 대부분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 불전이다. 해인사 국사단. 국사단은 국사대신을 모신 단으로서 국사대신은 도량이 위치한 산국을 관장하는 산신과 토지가람신을 가리킨다. 가람을 수호하는 신을 모셨기 때문에 도량입구에 배치되어 있다. 해인사 웅진전. 오래된 전각으로 보이지는 않고, 해인사에 상주하는 스님들이 많고, 수행을 중시한다는 의미로 웅진..

[가야산 해인사] 당간지주, 석등

해인사 대적광전 앞에서는 절터나 오래된 사찰에서 석탑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남아서 절터였음을 알려주는 문화재인 당간지주가 철당간과 함께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최근에 만든 당간지주와 당간을 볼 수 있다. 1쌍의 당간지주와 붉은 칠을 한 당간이 대적광전 앞 경내 마당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마도 행사에 필요한 걸개그림을 걸어두는 용도란 것은 알았지만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처음 보았다. 해인사 대적광전 아래에 위치한 당간지주와 당간. 웬만한 사찰을 찾아가면 볼 수 있었던 중심불전 앞 당간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당간지주는 보통 사찰입구와 중심불전 앞에 위치하고 있는데, 해인사 일주문 옆에도 오래된 당간지주가 있다. 사찰을 찾는 사람에게 행사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목적인 것으..

합천 해인사 삼층석탑 (비로탑,정중탑)

해인사 경내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삼층석탑이다. 정중탑 또는 비로탑으로도 불리는 석탑으로 원래는 2층기단에 3층탑신을 하고 있었지만, 1926년에 기단을 한층 더 올렸다고 한다. 해인사의 사찰 규모나 오랜 내력에 비해서 석탑의 크기나 예술적 미, 내력 또한 많이 떨어지는 석탑이다. 중심불전인 대적광전 아래 마당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해인사 삼층석탑. 2층의 기단부 아래에 1층의 기단을 조성해 올려놓고 있는 석탑으로 웅장해 보이기는 하지만, 통일신라 이래의 삼층석탑의 비례가 변형되어 균형미가 떨어져 보인다. 석탑 기단부. 가운데 있는 부분이 세로 추가된 기단으로 보인다. 삼층으로 된 탑신은 원형이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 석탑 앞 연화무늬가 있는 제단(?) 경내 한가운데에 석탑, 석등이 있고 좌.우에는..

가야산 해인사, 중심불전인 대적광전

법보사찰인 가야산 해인사 중심불전인 대적광전이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이 중심불전인 일반 사찰과는 달리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고 있기 때문에 대적광전이라 부른다. 건물은 수차례의 화재로 인한 소실과 중수를 거듭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구한말 순조때 새로 지은은 것을 1971년대 대폭 수리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을 토대로 과거 건물을 모습을 추론해 보면 구례 화엄사 각황전과 비슷한 통일 신라시대 금당의 모습을 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 규모 또한 후대의 대웅전 건물에 비해 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의 건물도 그 크기가 상당히 큰 편이고, 조선시대 이후 우리나라 건물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치미를 사용하고 있다. 해인사 중심불전인 대적광전은 앞면 5칸, 옆면 4칸의 상당히 ..

[가야산 해인사] 스님들 수행공간인 요사채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비롯하여 많은 불경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사찰로 대장경과 장경판전을 제외하고는 문화재는 많지 않은 편으로 각 불전이나 요사채들의 내력또한 깊지 않은 편이다. 해인사에는 원래 이 불경들을 지키기 위해 많은 스님들이 기거했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해인사가 깊은 산중에 있었던 까닭에 이 곳을 방문하는 신도들 또한 이 곳에서 묵고 가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해인사에는 많은 요사채들이 있으며, 대부분 건물 규모도 크고, 건물을 지은지 오래되 보이지는 않았다. 해인사 첫번째 출입문인 봉황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이는 요사채인 우화당. 두번째 출입문인 해탈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있는 건물인 사운당. 1984년도에 를 중수된 건물로 그 내력을 잘 알려지지 않는다. 종무소와 요사채를 겸해서..

[가야산 해인사] 누각 강당인 구광루와 보경당

구광루는 가야산 해인사 경내에서 강당 역할을 하는 누각을 근래들어서 아주 크게 지은 건물로 현 해인사 중수 결과 중 보경당과 함께 혹평을 많이 받는 부분이다. 누각은 사찰을 찾는 사람들이 설법을 듣거나 잠시 앉아서 쉬는 곳으로 누각에서 사찰의 풍경을 조용히 차분히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의 해인사 구광루는 전혀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보물을 보관하는 보관장으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건물의 규모도 사찰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서 너무 크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충남 예산 수덕사의 황화정루와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는 건물이다. 해인사 누각.강당인 구광루. 구광루 앞으로는 대웅전 앞 경내처럼 별도의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보통 사찰의 대웅전이 있는 경내 마당으로 들어가는 출입통로는 강당누각 아래..

[가야산 해인사] 봉황문, 해탈문

가야산 해인사는 우리나라 3대사찰답게 2단계의 출입문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출입문을 지키는 의미로 천왕문격인 봉황문을 지나문 국사단을 지어놓고 있다. 해인사 첫번째 출입문은 봉황문으로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는 천왕문격이며, 그 안에는 조각으로 만든 사천왕상이 아닌 탱화로 사천왕상을 그려놓고 있다. 봉황문을 지나면 계단을 올라 두번재 출입문이 해탈문을 지나서 첫번째 경내 마당에 들어서게 된다. 일주문을 지나 첫번째 출입문인 봉황문. 봉황문 편액 봉황문에는 사천왕상을 그린 탱화가 그려져 있다. 해탈문에서 내려다 본 봉황문 봉황문을 지나서 계단을 걸어 두번째 출입문이 해탈문에 들어선다. 해탈문 편액들 해탈문에서 내려다 본 모습 해인사 경내에서 본 해탈문

합천 해인사 길상탑 (보물 1242호), 오대산사탑지

보물 1242호로 지정된 해인사 입구에 있는 크지 않은 3층석탑으로 길상탑이라 한다. 이 길상탑은 통일신라후기, 치열했던 왕위쟁탈전 속에 장보고가 죽었던 그 시기에 해인사를 지키기 위해 죽은 승려와 주민들을 위해서 세운 석탑이라하며 일반적인 석탑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는 석탑이다. 길상탑을 1960년대에 해체했을때 탑에 대한 기록을 새겨 놓은 최치원이 쓴 탑지를 비롯하여 오대산사탑지, 백성산사탑지가 함께 출토되었다고 한다. 해인사 일주문 아래에 있는 길상탑. 정식 명칭은 '해인사묘길상사탑'이라 한다. 이 탑에서 출토된 '오대산사탑지'. 이 탑지는 인근에 있는 오대산사탑지만 이 길상탑에서 함께 출토되었다고 한다. 해인사 절 입구의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지점에 서 있는 탑으로,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

[가야산 해인사] 비석거리.부도전, 원경왕사비

해인사 입구에는 해인사의 내력을 말해주 듯 많은 공덕비들이 있고, 그 뒷편으로는 성철스님을 비롯한 많은 고승들의 부도들이 모여 있는 부도전이 있다. 그 중 가장 크고 내력이 있어 보이는 탑비로는 고려시대 국사를 지낸 고승 원경왕사를 기리는 원경왕사비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입적한 성철스님의 부도를 찾는 사람에 제일 많아 보였다. 해인사 부도전. 비석거리 해인사 입구 비석거리에는 해인사 사적비를 비롯한 20여기의 공덕비들이 안치되어있다. 해인사 원경왕사비. 고려시대 고승 원경왕사를 기리고자 인종3년에 세운 비다. 가야면 야천리 반야사 터에 있었던 것을 1961년 해인사 경내로 옮겨왔다. 거북받침돌, 비몬, 지붕돌을 갖추었고, 각 부분이 얇은 것이 특징이다. 비문에 의하면..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 들어가는 길

해인사는 법보사찰로 팔만대장경을 비롯하여 많은 불경들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로 가야산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다. 아마도 전란에 피해가 적을 것으로 보이는 곳이 이 곳 해인사라고 많은 생각되어 이 곳이 법보사찰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해인사는 다른 사찰에 비해서 입구에서 많이 떨어져 있고, 들어가는 길은 수목이 우거진 숲길로 산사라는 의미가 깊게 다가오는 사찰이기도 하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에는 산길도 있고 맑은 계곡물도 흐르는 자연이 살아 숨시는 길로 숲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해인사 들어가는 입구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가야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고 이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 해인사 오르는 길이 시작된다. 해인사는 남쪽지방이지만 깊은 산중이라서 2월말인데도 눈이 녹지 않고 있다. ..

창녕 탑금당치성문기비, 비뒷면에 스님이 새겨진 비석

창녕읍내 북쪽편 언덕에 위치한 탑금당치성기비는 통일신라시대 부근의 여러 사찰에서 일어난 범종, 탑, 금당 등의 불사에 대한 여러 기록들을 남겨 놓고 있는 특이한 문화재이다. 그 모양새도 후대의 탑비처럼 거북돌받침을 한 웅장한 모습이 아니라 일반적인 바닥돌과 비몸,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의 뒷면에는 스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특색있는 비석이다. 탑금당치성문기비, 논밭이었던 곳 한 가운데에 천년이상의 세월동안 서 있었던 비석이다. 머리돌이 어색하게 큰데, 원래부터 있었던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한다. 비석의 뒷면에는 스님으 모습이 새겨져 있다. 옆에서 본 모습 논밭 가운데 서 있는 이 비석은 창녕군 청사 동쪽편에 있다. 인양사를 비롯하여 이와 관련이 있는 여러 절의 범종, 탑, 금당 등의 조성연대와 쓰..

창녕 술정리서삼층석탑 (보물 520호)

보물 520호로 지정된 창녕 술정리서삼층석탑은 이름으로 봐서는 술정리동삼층석탑과 한쌍의 탑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석탑이다. 동삼층석탑과는 같은 술정리 내에서도 많이 떨어져 있고, 석탑의 제작수법이 동삼층석탑에 비해서 많이 떨어지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지만 석탑 제작기술이 많이 쇠퇴한 후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층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쌓아 올린 술정리서삼층석탑. 기단과 탑신의 몸돌.머리돌의 비율에서 술정리동삼층석탑보다는 많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술정리 서삼층석탑 기단부. 한쪽면에 문짝을 새겨놓고 있는데 후대에 새긴 것이라 한다. 탑신은 동삼층석탑에 비해 날렵함이 없어 보이고, 탑의 상륜부에 장식이 남아 있다. 여러 방향에서 본 술정리서삼층석탑..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국보 34호), 통일신라 전성기의 석탑

창녕 술정리는 창녕읍에서 가장 중심인 재래시장이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에 비화가야가 있었던 시기부터 지역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으로 생각된다. 국보 34호로 지정된 술정리 동삼층석탑은 아마도 현재의 위치에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없어졌지만 황룡사처럼 도심지에 있었던 사찰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이 석탑은 불국사 삼층석탑의 양식의 그대로 반영되어 있으며, 당시 이런 형태의 석탑이 보편화되던 시기, 석탑 제작 기술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만들어진 석탑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 예술적, 문화사적 가치가 높아서 국보로 선정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창녕읍 중심부 술정리에 위치한 창녕술정리동삼층석탑 이 삼층석탑은 이층의 기단부 위에 삼층의 탑신을 얹어놓고 있는 있는데 그 비율이나..

창녕 퇴천삼층석탑, 통일신라 석탑

창녕읍 만옥정공원에 있는 퇴천삼층석탑이다. 원래 민가에 무녀져 있던 것을 해체,보수하여 이 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창녕의 술정리석탑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 석탑으로 기단부를 비롯하여 많은 부분이 없어져서 보물급으로 지정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만든 수법이나 형태로 봐서는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을 보여주는 석탑이다. 2층의 기단부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것으로 당대의 다른 석탑과 마찬가지로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다. 퇴천삼층석탑의 기단부. 하단부는 낮게, 상단부는 높게 만들어져 있는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전형을 보는 듯하면 한쪽면은 없어져 새로운 돌로 수리해 놓고 있다. 3층으로 된 탑신.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해 놓고 있으며, 몸돌과 지붕돌들의 비율이 잘 배치되어 있다. 여러 방향에서 본 ..

창녕 송현동석불좌상, 통일신라시대 석불

창녕읍 화왕산을 오르는 입구에는 비화가야 고분군이 능선을 따라서 있고, 그 한쪽에는 작은 비각같은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곳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오래된 석불을 모시고 있는데, 석불에 비해서 건물이 잘 안어울린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전국 대부분의 석불들이 마찬가지이겠지만 역시 석불은 건물안 보다는 노천에서 맑은 바람과 햇빛을 받을 때 그 느낌이 더욱 살아나 보인다. 이 곳 창녕 송현동 석불 또한 전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는데, 꽉 막힌 입구, 촛불, 어두컴컴한 조명 등 불국사 석굴암에서 보았던 좋지 않았던 느낌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석불자체로는 석굴암보다는 많이 떨어지지만 나름 기교도 있고, 품위도 있어 보인다. 창녕 송현동 석불좌상. 크 바위 앞면을 조각해서 만든 마애불로서, 석굴암과 비슷..

해남 녹우당 비자나무숲, 어초은사당, 고산 사당

고산 윤선도 선생 고택인 녹우당 동쪽편으로는 고산선생의 사당과 이 곳에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어초은 서생이 사당이 있고, 그 뒷편으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나무 숲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곳의 비자나무는 어초은 선생이 이 곳에 터를 잡을 때 조성한 인공림으로 수령이 500년 이상되는 것이 많고 선조의 유훈에 따라 후손들이 나무를 잘 가꾸어서 대표적인 인공림이다. 어초은 선생 사당 뒷편으로 비자나무숲이 조성되어 있다.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 등지에서 자란다. 잎은 두껍고 작으며 끝이 뾰족하다. 꽃은 봄에 넓게 피고 열매는 가을에 길고 둥글게 맺는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해남 연동리의 비자나무 숲은 ..

해남읍 단군전, 팽나무 숲 우거진 공원

해남읍 서쪽편에는 도심 한가운데에 팽나무숲이 우거진 공원 같은 곳에 향교나 서원같은 시설이 있을 것 같은 자리에 단군을 모신 사당인 단군전이 자리잡고 있다. 사당자체는 건물이 크지 않고 전면 3칸의 소박한 건물이지만, 단군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고, 출입문인 삼문과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느 수령이 오래된 팽나무 고목들로 우거진 숲이 인상적인 곳이다. 단군전 정문. 태극문양을 한 삼문을 하고 있어 서원이나 향교같은 분위기이다. 이 단군전은 오래된 것이 아니라 1950년대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단군전 내부에 있는 사당은 앞면 3칸의 조그만 건물이다. 독립운동 기념탑과 단군상 각종 공덕비들을 이 곳에 모아놓고 있다. 해남읍 단군전 앞에는 수령이 오래된 팽나무 숲을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한국의 풍경 2010.02.28

강진 다산초당 천일각, 다산이 고향 생각날 때 강진만을 내려다 보던 정자

다산초당에서 연못을 지나면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책을 갖추고 손님을 맞던 사랑채 역할을 했던 동암이 있고, 동암을 지나서 조금더 걸어가면 강진만이 내려다 보인는 작은 정자인 천일각이 있다. 천일각에서는 강진만 바다와 바다건너 칠량과 천관산을 볼 수 있다. 이 곳에서 보는 강진만은 넓은 바다는 아니고, 다산의 고향이자 생가인 양수리 부근 한강변의 다산생가 뒷동산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아마도 다산은 이 곳 정자에서 고향생각을 많이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산초당의 사랑채격인 동암에서는 다산이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저술했던 곳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물론 건물은 다산초당과 같은 시기에 복원한 건물이다. 다산초당 동암을 지나 조금 걸어가면 강진만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

조선 관아 2010.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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