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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공산성] 공산루와 주변 성벽, 금강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곳

공산성은 금강을 천연 해자로 삼아서 서축과 토축으로 쌓은 산성이다. 공산성에서도 서쪽 금강변 구릉위에 위치하고 있는 공산루는 기록에는 없는 누각으로 봐서 최근에 금강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서 만든 누각으로 보인다. 지금은 공산성에 수풀이 우거져서, 산성 방위를 지휘하는 공산성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쌍수정이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여 마치 금강변 구릉에 위치한 공산루가 그 역할을 하는 것 처름 보인다. 공산성 서쪽편 석축은 원래 백제시대에 쌓은 흙으로 쌓은 토축 외부에 돌을 쌓아서 축조했다고 한다. 공산루에 올라서면 금강과 북쪽편이 훤히 보이는데 벌판은 그리 넓어 보이지는 않아서 수도로서 기능을 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공주 공산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북문인 공북루 앞에서 올라다 본 공산루...

[공주 공산성] 금서루 (錦西樓), 정문 역할을 하는 서쪽편 출입문

공주 금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공산성은 백제의 두번째 도읍진인 웅진성이 있던 자리이다. 동에서 서로 흐르는 금강이 북쪽 방향으로 천연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공산성은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포곡형 산성으로 원래는 백제의 성곽형식인 토성이었으나, 조선후기에 석축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공산성 서쪽 출입문인 금서루는 오래전에 공산성 안에 도로를 만들면서 없으졌으나, 최근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공주에 있는 금강을 건너는 다리 중 가장 오래된 금강교 바로 옆에 있어 공산성 정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금도 공산성 내부로 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자동차 출입문이 있다. 공산성 서쪽출입문인 금서루는 최근에 복원된 성루이지만, 공산성을 대표하는 장소가 되어 있다. 공산성 입구 주차장에서 올려다 보이는 공산성 금서루. ..

[공주 석장리박물관] 후기 구석기 시대 집터와 발굴도구 및 기록

공주 석장리 유적발굴은 60년대 미국인 대학권생이 이 곳을 처음으로 발견하여, 연세대 손보기 교수와 함께 발굴한 구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아서 가장 모범적이고 체계적으로 발굴을 실시한 대표적인 발굴 유적이다. 석장리박물관에는 발굴된 후기구석기 시대 1호집터를 재현해 놓고 있으며, 당시 발굴에 사용한 다양한 도구와 기록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가족과 함께 이곳 석장리 선사유적지와 박물관을 방문하면 고고학과 우리나라 구석기 문화에 대해서 좋은 학습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공주 석장리 박물관 내부에 재현해 놓고 있는 후기구석기 시대의 집터. 공주 석장리 발굴에 사용된 각종 기록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석장리 선사 유적지 발굴에 사용된 장비와 도구들 손보기 교수. 선사고고학과 인쇄문화 연구에..

지역박물관 2009.11.28

[공주 석장리박물관] 우리나라 구석기 유물 (단양 금굴 유적, 제천 점말동굴 유적, 대전지역 출토유물)

공주 석장리박물관에는 석장에서 출토된 유물 외에도 연세대 손보기 교수를 중심을 선사연구실에서 단양 금굴 유적, 제천 점말동굴 유적, 대전지역 등에서 출토된 구석기 시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단양 금굴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물이고, 제천 점말 동굴은 남한지역에서 최초로 발견된 구석기 유적지라고 한다. 단양 금굴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들. 전기 구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짐승화석과 주먹도끼, 찍개 등이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유적 앞으로 남한강이 흐르고 있다. 금굴유적은 1983~85년에 연세대학교 선사연구실에 의해 발굴되었다. 금굴은 석회암지대에 발달한 동굴로서, 동굴에 쌓여 있는 퇴적층에서는 구석기시대의 동물화석과 석기를 비롯하여 신석기시대의 무늬토기와 청동기시대의 민토기가 나왔다...

지역박물관 2009.11.28

[공주 석장리 박물관] 석장리 선사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

금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공주 석장리 선사유적지는 30만년전 전기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이전인 중석기 시대까지 다양한 석기들이 발굴되었다. 전기 구석기 유물부터 집터와 함께 발굴된 후기 구석기까지의 유물들은 깊은 땅속에 묻혀 있어서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중석기 시대 이후는 얕은 지역에 묻혀 있어, 경작 과정 등을 통해서 유물들이 흙과 섞여서 발굴된 유물은 많지 않다고 한다. 수십만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 지역에는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 많은 유물을 통해 밝혀졌다고 한다. 그래서 석장리 유적지는 국내 고고학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곳이라 한다. 30만전년으로 추정되는 전기 구석기 유물 여러가지 유형의 석기들 석장리 전기 구석기문화는 2지구 외날찍개 문화층과 주먹괭이-자르개 문화층, 1지구 ..

지역박물관 2009.11.28

[가족주말농장] 2009년 11월 (마지막), 김장 준비를 끝내다

11월을 마지막으로 올해 주말농장을 끝냈다. 마지막을 겨울 준비를 위한 김장채소 수확으로 배추와 무를 뽑았는데, 전문가가 아니라 배추나 무의 크기가 들쑥날쑥했다. 어떤것은 아주 크고, 어떤 것들은 주먹만하게 자랐다. 배추를 보면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채소가 역시 크게 잘자라고, 밖에서 키운 배추는 잘 자라지 못했다. 하지만 역시 밖에서 키운 것이 단단하고 싱싱해서 맛은 월등히 뛰어났다. 올해 주말농장을 해보니 재미있었던 부분도 있고, 생각만큼 잘 안되는 부분도 있었는다. 그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열매는 많이 달리지 않았지만 싱싱한 열매를 먹을 수 있었던 토마토가 제일 재미있었고, 오이는 역시 관리하기 힘들어 크게 재미를 보지 못했다. 비닐하우스는 온도가 높아서인지 배추가 크게 잘 자라서, 시중에..

기타 2009.11.27

북경 한인들이 많이 사는 왕징 거리 풍경

왕징은 북경 공항에서 북경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조성된 신도시로 북경에 거주하는 한인들 대부분이 모여사는 곳이다. 중국적인 모습을 거의 느낄 수 없고, 한국에서 서울 부근 수도권 신도시 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는 도시로 수만명이 한인들이 이 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거리의 모습도 고층아파트와 넓은 대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곳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거의 이 곳을 벗어나지 않고 생활하는 듯 하다. 중국의 버스 표지판. 설명은 친절하게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한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왕징의 남호시장 부근이다. 중국 도로에는 자전거 도로가 별도로 있는 경우가 많다. 중국 왕징의 아파트 단지내 상가는 부동산가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중국 왕징에 있는 백화점. 우리에게 익숙한 파리바게트를 비롯한 메이커가 있는 매장..

중국(China) 2009.11.22

중국 진황도(친황다오) 기차역 풍경

중국 진황도는 북경에서 기차로 2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도시이다. 중국대륙의 하북평원이 끝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이 도시는 만리장성이 시작하는 지역인 산해관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작은 어촌이지만 19세기말 탄광이 개발되면서 도시의 중심이 산해관에서 이 곳 친황다오로 옮겨졌다고 한다. 중국이 최근에는 많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친황도 기차역 풍경은 중국의 서민적인 풍경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친황다오 기차역, 단층 건물로 현대적인 건축물이 들어서 있지는 않고 있고, 역광장은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다. 친황다오역 광장의 매점 비슷한 건물 친황다오 역 상가. 우리나라 기차역 부근의 풍경과 비슷하다. 친황다오역 앞에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크게 보기 친왕..

중국(China) 2009.11.22

중국 진황도 북대하(北戴河), 북경에서 가까운 해수욕장

중국 진황도는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해관과 노룡두가 있는 곳으로 북경올림픽때 축구경기가 있었던 곳이다. 이 곳 진황도 북대하는 북경에서 가까운 곳 중에서 백사장이 있는 해안으로 모택동의 별장을 비롯하여 중국 고위층의 별장들이 있는 곳으로 북경에서 기차로 2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다. 아마도 중국이 개방되기 이전부터 이곳은 중국 서민들이 사는 곳과 다른 모습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지금은 북대하 해안지역은 서구의 어떤 리조트보다고 깨끗하고 정비가 잘된 곳으로 중국에서는 별천지 같다는 느낌을 주는 곳이다. 북경시민들에게는 바다를 즐길 수 있느 가장 가까운 곳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진황도 서쪽 해안강 자리잡고 있는 북대하 해수욕장. 고운 황토색 모래사장은 우리나라 서해안의 해수욕장을 연..

중국(China) 2009.11.22

[강화 해안 진지] 남장포대

강화도와 육지 사이를 흐르는 물길인 염하(강화해협)의 입구를 지키는 덕진진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남장포대입니다. 낮은 위치에 포좌를 설치하여 염하를 지나는 선박을 공격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남장포대에는 대포 10문이 설치되어서 강화 해안의 진지 중에서 가장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던 곳이라 합니다. 신미양요 때 미국 함대와 격렬한 포격전을 벌인끝에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70년대에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염하(강화해협)을 지키는 진/보 중에서 가장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던 남장포대입니다. 대포 10문이 지키고 있었으며 신미양요 때 미국함대와 격렬한 포격전을 벌린 곳이기도 합니다. 남장포대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대포를 전시해 놓고 있습니다. 남장포대의 포좌입니다. 대포 10문으로 서울을 들어오는 함대를 ..

[강화 해안 진지] 덕진진(德津鎭)

강화와 육지를 가르는 염하(강화해협)이 사실상 시작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국방상의 요지인 덕진진입니다. 육지쪽인 김포의 덕포진과 함께 해협을 지나가는 선박을 제일 먼저 제압하는 시설입니다. 그래서 조선시대부터 이곳 덕진진 산하에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두어서 제일 막강한 화력을 배치하였습니다. 물론 남쪽편에는 초지진이 있지만 그 곳은 소규모의 진으로서 감시의 역할이 더 큰 것으로 보입니다. 강화 염하(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충지 덕진진의 문루인 공조루입니다. 이 곳을 통해서 강화도로 출입을 했을 것 같습니다. 신미양요때 파괴되어 홍예문만 남아있던 것을 70년대에 복원했다고 합니다. 덕진진 성벽에서 내려다 본 문루인 공조루입니다. 덕진진 외부 해안에서 강화도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입니다. 문루 밖에서 본 덕..

[강화 해안 진지] 덕진돈대(德津墩臺)

덕진돈대는 초지진과 함께 염하(강화해협)를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한 군사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돈대입니다. 그래서 바로 북쪽의 남장포대, 김포의 덕포진과 함께 서울을 출입하는 선박을 통제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돈대입니다. 신미양요때 미군과 격전을 벌인후 완전히 파괴된 것을 70년대에 복원했다고 합니다. 남장포대를 지나서 언덕위에 덕진돈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덕진돈대에서는 염하(강화해협)으로 들어오는 선박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덕진돈대의 출입구입니다. 다른 돈대와 마찬가지로 한사람 정도가 지날 정도의 작은 통로입니다. 덕진돈대는 직사각형 모양의 돈대로서 전면 양쪽 모서리 부분에 각각 2개의 포좌가 있습니다. 덕진돈대는 높은 위치에 있어서 그런지 별도의 보호를 위한..

[강화 해안 진지] 오두돈대(鼇頭墩臺), 해안 돈대의 전형적인 모습

강화대교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제일 큰 유적지 중의 하나인 광성보에 도착하기 직전에 자리잡고 있는 오두돈대입니다. 원형의 돈대가 있는 위치의 모양이 자라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오두돈대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강화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많은 돈대 중에 전형적인 돈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오두돈대 남쪽으로는 고려시대에 벽돌로 쌓았다는 강화전성이 있다고 합니다. 강화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는 많은 돈대 중에서 전형적인 돈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오두돈대입니다. 원형으로 석축을 쌓고 있습니다. 화도 돈대 앞에서 바라 본 오두돈대가 있는 곳입니다. 이름 그대로 자라의 머리통 모양을 하고 있는 곳에 돈대를 쌓아 놓고 있고 주위에는 시야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없습니다. 오두돈대의 외부 석축입니다. 원래 석축은..

[강화 해안 진지] 화도돈대(花島墩臺)

강화 화도돈대는 강화섬 해안가에 설치한 많은 돈대 중에 하나입니다. 이름처럼 화도돈대는 원래 섬이었던 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근처에 고려시대 대몽 항쟁시 설치된 강화외성의 흔적과 수문이 남아있는 지역입니다. 아마도 이곳이 강화성의 남쪽 끝이 아니었나 생각되는 곳에 자리잡은 돈대입니다. 화도돈대가 자리잡은 곳은 높은 언덕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해안가에 낮은 절벽이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화도 돈대의 성벽은 거의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고 시야를 좋게하기 위해 쌓은 축대의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화도돈대의 출입문입니다. 돈대의 성벽은 남아 있지 않고 별다른 설명을 찾지 못해서 지금 복원한 모습이 원래의 모습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작은 출입문이 있습니다. 화도돈대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직사각형 모..

[강화 해안 진지] 좌강돈대

강화 선원사지 부근 염하 해안가에 있는 용진진에서 관리하던 3개의 돈대 중에 현재 복원되어 있는 돈대인 좌강돈대입니다. 거의 대부분이 최근에 복원된 시설로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높지 않지만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군사시설로 생각됩니다. 물론 강화 해안가에 있는 수많은 돈대 중에 하나이기는 하지만... 용진진의 좌강돈대는 전형적인 원형 돈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주위는 평지로 인위적으로 언덕을 쌓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돈대에 올라서면 사방을 감시하기에는 좋습니다. 좌강돈대에 올라서서 내려다 본 염하와 주변의 모습입니다. 좌강돈대와 용진진의 문루가 성벽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성벽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고 일부만 낡은 성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좌강돈대의 출입구입니다. 한 사람 정도 지나..

[강화 해안 진지] 갑곶돈대

강화도 해안은 조선시대 국방상 아주 중요한 장소로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한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여 나름 철저한 방비를 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안을 따라서 많은 돈대와 보, 진을 설치해 놓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육지와 강화 사이의 염하를 경계로 하는 해안에 많은 군사시설들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중 갑곶돈대는 서울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군사 시설로 여겨져 왔습니다. 지금의 갑곶돈대는 70년대에 고증을 통해서 복원해 놓은 시설로 강화역사관 내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구(舊) 강화대교 입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강화를 들어오는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갑곶 돈대입니다. 갑곶나루터는 서울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출입구로서 강화해안에 있는 많은 요새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

[강화 해안 진지] 돈대, 용진진

강화의 출입구인 강화대교에서 남쪽으로 해안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도로변에 볼 수 있는 작은 성문이 보입니다. 이 성문이 강화의 해안 진지 중에 하나인 용진진입니다. 3개의 돈대를 관리했다고 하나 평지에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유실되었고 최근에 복원한 문루와 좌강돈대만 볼 수 있습니다. 용진진의 성문과 문루입니다. 아마도 옛날 이 곳에 나루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원래는 성벽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최근에 복원한 모습입니다. 뒷편에는 복원된 좌강돈대가 있습니다. 용진진이 관리하던 좌강돈대입니다. 원형의 돈대로서 사방의 시야가 아주 좋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용진진 문루와 주위 성벽입니다. 용진진 좌강돈대 내부입니다. 측면에서 본 용진진 문루와 좌강돈대입니다. 좌강돈대에서 내려다 본 염하입니다...

오산 보적사, 독산성에 있는 작은 사찰

보적사 권율장군의 세마대로 유명한 오산 독산성 성벽 안에 있는 암자같은 조그만 사찰이다. 현재의 보적사는 정조가 용주사를 창건할때 말사로서 독산성과 함께 재건된 것으로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산성안에 창건된 사찰로 이 독산성이 처음 축조된 삼국시대부터 그 역살를 하고 있다는 고찰이다. 이 사찰은 약사여래을 모시는 약사전을 주불전으로 하고 있다. 산 정상에 있는 작은 성문을 출입문으로 하고 있으며, 사찰경내에 들어서면 넓은 화성, 수원의 평야지대가 훤하게 보이는 곳이다. 오산 독산성 세마대지 바로 아래에 위치한 보적사. 1개의 주불전과 요사채로 구성된 작은 사찰로 화성 용주사의 말사이다. 사찰 뒷편 산정상에 있는 정자가 권율장군으로 유명한 세마대이다. 독산성 성문이 보적사의 출입문 역할을 한다. ..

전국 사찰 2009.11.21

화성 용주사 호성전, 사도세자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전각

호성전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전각으로 용주사 창건의 동기가 되는 건물이다. 지금 이 곳에는 사도세자, 혜경궁홍씨, 정조대왕, 효의왕후 김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일 여섯번의 재를 오렸다고 한다. 용주사 경내의 박석이 깔린 길, 삼문, 홍살문 등 궁궐식 예법이 들어간 건물들이 용주사에 있는 이유가 호성전에서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며, 당시 정조대왕이 이 곳 용주사로 여러번 행차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한국전쟁때 불타버린 것을 새로 중건하였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전각인 호성전. 그 앞에는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부모은증경탑이 있다. 호성전은 앞면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소박하고 검소해 보인다. 부모은중경탑. 취지는 좋으나 예술적인 면이 부..

[화성 용주사] 범종(동종),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3대 동종 중 하나

용주사 범종은 이 사찰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상원사 동종, 성덕대왕신종과 더불우 우리나라 3대 범종이라 할 수 있는 문화재로 크기는 큰 편은 아니지만 종의 모양새나 새겨진 문양의 예술성이 뛰어나고 보존상태는 아주 양호하다. 이 동종의 고리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힘차게 종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종의 몸체에는 비천상과 삼존상을 두고 있는데 성덕대왕 신종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래서 신라 동종 양식으로 만들어진 범종이라고 한다. 용주사 동종. 통일신라 문성왕 때 조성된 것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는 후대에 새겨진 것으로 실제로는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종이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용주사 범종의 고리인 용뉴와 음통인 용통. 꿈틀거리는 용이 종을 들어올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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