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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225

안성 죽주산성, 서문에서 동문까지

조선시대 종3품 부사가 고을 수령인 죽산도호부에 위치하고 있는 죽주산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산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시대 대몽항쟁기에 송문주 장군이 성을 크게 고치고 몽골군을 물리쳤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죽산은 청주와 충주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서 삼국시대부터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죽주산성은 삼국시대부터 북쪽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쌓은 산성으로 지형적으로도 북쪽편이 경사가 완만한 편이어서 외성,중성,내성으로 여러겹 성벽을 쌓아 두고 있다. 반면에 죽산도호부 관아가 있는 현재의 죽산면소재지는 죽주산성 남쪽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편 지형은 대체로 경사가 급한편으로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가 쉽게 되어 있다. 죽주산성..

안성 죽주산성, 북치성.포루에서 서문까지

안성시 죽산면 비봉산 아래에 위치한 죽주산성은 고려시대 대몽항쟁기에 송문주 장군이 몽골군의 공격을 격퇴한 것으로 잘 알려진 산성이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중부내륙지방의 중심지역인 충주, 청주와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산성으로 신라가 처음 쌓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산성은 내성, 중성, 본성의 3겹으로 성곽을 치밀하게 쌓고 있으며, 치성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몽골군의 공략을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전쟁 경험이 많았던 송문주 장군이 죽주산성을 새로 고칠때 많은 부분을 보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죽주산성은 작은 계곡을 끼고 있는 포곡식 산성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방이 경사가 심한편으로 방어가 용이한 테뫼식 산성의 지형적 특징도 ..

안성 죽주산성, 동문에서 북치성.포루까지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에 소재한 죽주산성은 고려시대에 죽주성이라 불렸던 곳으로 대몽항쟁기에 몽고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죽주산성이 있는 죽산면 일대는 지금은 안성시에 속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안성과는 별개의 지역으로 종3품의 부사가 고을수령으로 있었던 제법 큰 규모의 고을이다. 죽주산성과 죽산도호부가 있는 이 지역은 지금도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청주에서 진천을 거쳐서 서울로 향하는 길과 충주에서 장호원을 거쳐 서울로 향하는 큰 길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러한 지리적, 전략적인 중요성으로 인해서 이 곳에 산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산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신라나 백제가 한강이남 주요지역에 국방을 위해서 처음 쌓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죽주산성..

강화 북일곶돈대, 일몰이 아름다운 장화리마을에 위치한 돈대

조선 숙종 5년(1679)에 해안 방어를 위해 강화유수 윤이제의 주도로 승병과 어영군을 동원하여 40일만에 완공한 강화 53돈대 중 하나인 강화도 서남부 해안을 감시하던 북일곶 돈대이다.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에 소재한 이 돈대는 검암돈, 장곶돈, 미곶돈과 함께 장곶보 소속으로 강화도의 서남쪽으로 돌출한 지형인 북일곶에 위치하고 있다. 북일곶돈대는 강화 서남해안으로 돌출한 북일곶 언덕 위에 세워진 돈대로 석축의 높이는 높은 곳이 2.4m이고, 전체 둘레는 120m 규모로 직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다. 돈대 내부에는 대포를 장착할 수 있는 포좌가 정면에 2개, 남.북 방향으로 모서리에 1개씩 4개의 포좌가 설치되어 있다. 북일곶이 위치하고 있는 장화리마을은 강화에서도 해넘이 풍경이 제일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

강화 선수돈대, 석모도 앞바다를 지키던 돈대

조선은 병자호란의 굴욕적인 패배 이후 북방민족으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기 조선 숙종대에 강화도 전역을 요새화하여, 강화유수부가 소재한 지역에 강화산성을, 그 바깥쪽에 외성을, 해안에는 돈대를 구축하여 해안경비를 강화하였다. 강화 해안의 돈대는 숙종대인 1679년 병조판서 김석주가 건의하고, 강화유수 윤이제의 주도로 전국의 승병들을 동원하여 해안 주요 요지 49곳에 돈대를 설치하였다. 이후 보강을 통해 구한말까지 53돈대를 운영 했다고 한다. 돈대는 해안을 감시하기 좋은 위치에 50명 이내이 병력이 머물면서 적을 감시하고 방어하던 요새로 그 형태는 원형, 사각형 등으로 다양하다. 돈대는 병자호란이전에는 거의 없었던 방어시설 형태로 화포와 총을 사용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강화군 화도면 내리 후포항 뒷..

강화 정족산성(삼랑성), 남문인 종해루와 주변 성벽, 양헌수 승전비

정족산성은 정족산을 중심으로 3개의 봉우리를 능선을 따라서 연결한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으로 산성의 방향은 강화해협(염하)를 바라보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지금은 정족산성 동쪽편으로 넓은 간척지 평야가 펼쳐져 있지만, 원래는 넓은 갯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안을 따라서 구축한 돈대와 함께 강화도 남쪽 해안과 연안 해로인 강화해협을 감시하고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산성으로 생각된다. 이 곳은 오랜 옛날부터 천혜의 요새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는 정족산 사고가 산성내에 설치되어 있다. 정족산성의 주출입문은 남문으로 실제로는 산성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계곡의 시냇물이 흘러 내려가는 방향이다. 일반적인 산성과는 달리 평지와 비슷한 고도에 성문이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과도 상당..

강화 정족산성(삼랑성), 서문에서 동남쪽 치성(雉城)까지

강화 정족산성은 둘레 약 1km로 주산인 해발 220m 정족산을 중심으로 3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전등사와 정족산사고가 있는 계곡을 에워싸고 있는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이 산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성벽을 축조하고 있는 석축의 형태 등으로 유추해 볼 때 고구려 산성의 특징을 하고 있다. 정족산성에는 주출입문인 종해루가 있는 남문을 중심으로 동문, 서문, 북문을 두고 있다. 남문에는 문루를 두고 있고, 북문은 암문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정족산성 서문은 조선후기 강화 해안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조직인 진.보 중에서 강화도 남쪽 해안을 지키는 돈대를 관장하던 선두보가 위치하고 있다. 방어상 취약지역인 남문과 동문과는 달리 서문은 선두보와 연결되는 출입구이자,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연결로이..

강화 정족산성(삼랑성), 정족산(해발220m) 정상 부근 성벽

강화 정족산은 해발 220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높은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정상부에 올라서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실 지금은 많은 간척이 이루어져서 강화도에 넓은 농토가 많지만, 원래는 드넓은 갯벌위에 크고 작은 섬들이 흩어져 있는 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족산 정상에 올라서면 북쪽으로는 고려시대 왕릉들이 있는 진강산이 보이고 그 사이에 넓은 평야가 들어서 있다. 서쪽편으로는 강화도의 명산이라고 할 수 있는 마니산과 그 너머로 석모도와 서해바다가 보이고 동쪽편으로는 강화해협과 문수산성, 김포지역이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편으로 길상산과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다. 정족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해 왔던 산성으로 강화해협(염하), 한강하구, 서해안 연안 항로를 지키는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요지였던 것으..

강화 정족산성(삼랑성), 강화해협(염하)가 내려다 보이는 동문에서 북문까지

강화도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성은 그리 높지 않은 해발 220m의 정족산을 중심으로 3개의 봉 우리가 솥다리처럼 받치고 있어서 정족산성 또는 삼랑성이라고 불린다. 이 성을 쌓은 연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바깥쪽에 돌을 쌓아 석축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의 산성은 거친 활석을 비롯하여 잔돌로 촘촘하게 석축을 쌓았는데 서울의 아차산성이나 고구려가 쌓은 여러 산성들과 입지나 석축을 쌓는 수법이 비슷한 것으로 볼 때 고구려가 백제를 몰아내고 한강유역 패권을 잡은 이후에 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족산성은 서북쪽 해발 220m의 정족산이 가장 높은 산이고, 남쪽편과 동쪽편에 비슷한 높의 봉우리들이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등사와 정족산 사고가 있었던 산성내부는 강화해협(염하)가 있..

논산 노성산성, 백제 수도 사비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지키던 산성

노성산성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 송당리에 위치하고 있는 삼국시대 백제가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노성산은 해발 310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계백장군이 나.당연합군과 마지막 일전을 벌였던 황산벌이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북쪽 공주와 서쪽 부여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자리잡고 있어 조선시대까지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산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성 아래에는 이 지역을 관장하던 노성현 관아가 위치하고 있으며, 대전으로 연결되는 동족편 연산현과 함께 금강 하구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중요한 거점이었던으로 보인다. 산성은 노성산 정상부 둘레에 2~4m 정도의 석축을 쌓고 있은 테뫼식 산성으로 그 둘레는 900m 정도라고 한다. 부여의 부소산성을 비롯하여 백제는 주로 토축성을 쌓았는데 이 곳 노성산성은 일정한 크기의 돌로..

남한산성 사당과 비석군, 현절사와 청량당

병자호란은 인조 14년(1636) 겨울에 청나라와 조선간에 2번째로 벌어진 47일간의 전쟁이다. 당시 청나라는 만주족.몽골족.한인으로 이루어진 1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임경업 장군이 지키던 의주의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13일만에 서울을 공략했다. 인조는 원래 강화로 피난하기로 했으나 청군에 의해 길이 막혀 불가피하게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남한산성가 천혜의 요새라서 큰 전투가 없었지만 전쟁에 대한 대비가 부족해 혹한과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중 강화가 함락되고 주위 정세가 불리함에 따라 부득이 하게 삼전도에서 청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에는 여러 사당들이 있는데 그 중 병자호란 47일간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현절사와 청량당이 있다.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반대했던..

남한산성,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연무관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숙종대와 영.정조대에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방어상 취약했던 부분을 보강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산성 방어시설을 보완하는 것과 함께 행정적으로도 산성내 행궁을 설치하면서 광주목 관아도 산성내로 옮겨지면서 행정중심 도시로서의 기능도 함께 했다. 광주목사는 원래 외관직 정3품의 상당히 높은 관직이었으나 병자호란 이후에는 광주목이 광주부로 승격되고 고을 수령도 오늘날 장.차관급에 해당되는 광주유수로 승격되었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별도의 군사조직인 수어청이 정조대에 남한산성으로 옮겨지면서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남한산성내 동쪽편에 위치한 행궁은 광주부 수장으로서 행정의 중심지였다면 산성내 중앙도로 북쪽편에 위치한 연무관과 주위 건물들은 군사조..

남한산성, 지수당과 비상시 대비 물을 저장했던 연못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에 위치한 청량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남한산, 남쪽의 검단산 사이에 형성된 분지를 둘레 8km의 석축으로 쌓은 대표적인 조선시대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동쪽은 높고 경사진 지형이며, 동쪽은 완만하게 계곡이 형성되어 있는 천혜의 요새로서 지형적인 장점을 갖고 있는 곳으로 주위의 산으로 둘러싸여 산성내 물은 풍부한 편이었다. 산성내에는 비상시에 대비하여 3개의 큰 연못이 파고 물을 저장해 두고 있다. 원래의 연못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매몰되거나 훼손되어 현재는 2의 연못이 남아 있다. 연못에는 1672년에 부윤 이세화가 세운 정자인 지수당이 복원되어 있으며 1804년 유수 김재찬이 지은 관어정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 내에는 조선시대 차관급에 해당하는 군사조직인 수어사를 겸했..

[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특별전, 산성도시를 세우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숙종대와 영.정조대에 남쪽 성벽 부근을 비롯하여 방어상 취약했던 지점에 옹성을 쌓는 등 많은 보완이 있었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한강 동남쪽 지역을 관장하던 광주목 관아를 옮기고 행궁을 건설하는 등 행정적으로도 보완이 있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종묘와 사직을 갖춘 유일한 행궁으로 비상시 국왕이 거처할 수 있도록 대비를 하였다. 남한산성을 관장하던 광주목사는 원래부터 정3품의 높은 관직이었지만 병자호란 이후에는 광주부로 승격하여 종2품의 부윤 또는 정2품의 유수가 수장으로 있었으며,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조직인 수어청 수장인 수어사도 겸하게 되었다. 평사시 남한산성에는 약 천명 정도의 군사가 상주하였으며, 주민은 4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산성을 축..

남한산성, 동문인 좌익문(左翼門)

남한산성은 한강 유역이 내려다 보이는 서장대를 중심으로 주변 산능선을 따라서 석축을 쌓은 둘레 8km의 대표적인 조선시대 산성이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을 두고 있으며 좌익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동문은 광주지역과 연결되는 성문으로 한반도 중부내륙지방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동문은 산성내 행궁을 중심으로 좌측에 위치하고 있어서 좌익문이라고 부른다. 동문은 남문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가장 통행이 많았던 성문으로 광주에서 계곡을 따라 평탄한 길이 나 있기때문에 아마도 산성내 필요한 물자는 동문을 통해서 공급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동문은 지형적인 이유로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했기때문에 실제 우마차나 사람들의 통해은 남쪽편에 있는 제11암문을 이용했을 것..

남한산성, 제3남옹성에서 동문(좌익문)까지

남한산성은 한강 유역이 내려다 보이는 서장대가 있는 청량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남한산, 남쪽의 검단산 사이에 형성된 작은 분지를 둘레 8km의 석축으로 쌓은 대표적인 조선시대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서쪽으로는 서울 송파나루를 비롯하여 성남을 거쳐 서울로 연결되고 있으며, 남쪽은 검단산, 동쪽으로는 경기도 광주를 거쳐 이천, 여주, 진천 등 한반도 중부내륙지역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성곽은 병자호란 당시 드러난 방어상 취약지점인 남쪽편 성벽 앞으로 설치된 3개의 옹성을 지나면 동문인 좌익문까지는 약간 경사진 지형을 따라서 성벽을 쌓고 있다. 남장대 부근의 평탄한 지형이 끝나는 지점에 설치된 방어시설인 치(雉)를 지나면 특별한 방어시설은 설치되어 있지 않고, 지형에 따라서 성벽과 여장만 설..

[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특별전, 병자호란 47일간 기록

남한산성은 수도를 방어하고 한강이남 주요 교통로를 지키기 위해 쌓은 천혜의 요새이지만, 병자호란 47일간 항전의 현장이자 치욕의 장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626년 청나라는 백마산성을 비롯하여 주요 공격로에 배치된 산성을 이용하고자 했던 조선의 방어전략을 무력화시키면서 이를 우회하여 무려 10여일만에 수도인 한양을 직접 공략하였다. 워낙 청나라의 전략과 군사적 능력이 출중하였던 까닭에 원래 강화도로 피신할 계획이었던 인조는 불가피하게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하였으나, 식량의 부족과 청나라의 효과적인 공략으로 47일만에 항복하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17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크게 변화시킨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전쟁기간은 47일에 불과하기때문에 이 전쟁에서 개별 사건이나 인물은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고, 당시 ..

남한산성, 남장대에서 제3 남옹성까지

한강 이남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청량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남한산, 남쪽의 검단산 사이에 형성된 작은 분지를 둘레 8km의 석축으로 쌓은 조선시대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한강과 서울이 내려다 보이는 북쪽과 동쪽은 경사가 심한편으로 적이 공격하기가 쉽지 않고, 동쪽은 경사가 원만한 편이지만, 계곡을 형성하고 있어서 쉽게 공략하기는 힘든 지형을 하고 있다. 반면에 남쪽은 약간 떨어진 곳에 검단산이 있고, 두 지역을 연결하는 능선에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 검단산에서는 쉽게 공략할 수 있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검단산까지 성곽으로 연결하게 되면 방어해야하는 범위가 너무 넓어지는 단점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는 남쪽 검단산 지역에을 점거하여 강력한 화포로 남쪽편 성벽을 공략하여 남한산성에서 농성하..

[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특별전, 남한산성의 축성과 무기류

남한산성은 광주부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으로 삼국시대 한성백제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신라가 삼국통일 후 당나라에 대응하기 위해 대대적을 쌓은 주장성에서 오늘날과 같은 산성의 모습으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산성은 고려시대 대몽항전기에도 효과적으로 몽고군에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천혜의 요새였다. 임진왜란 이후 북방에 등장한 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인조 2년부터 4년에 걸쳐 주변 지형에 따라 오늘날의 형태와 비슷하게 축조되었으며, 행궁과 관아시설, 4개의 대문과 장대 등을 갖추어 유사시를 대비하고 했다. 행궁은 서쪽의 청량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향으로 건축되었고, 중요 관청의 위치와 방향 및 도로 역시 행궁의 방향을 중심으로 결정되었다. 또한 산성안에는 산성을 축조할 때 동원된 승려들..

남한산성, 제1남옹성에서 남장대까지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에 위치한 청량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남한산, 남쪽의 검단산 사이에 형성된 분지를 둘레 8km의 석축으로 쌓은 조선시대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한성백제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후기 인조대에 청나라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장대.돈대.암문 등 다양한 방어시설과 행궁 등 관아 건물들을 두고 있다. 남한산성은 전체적으로는 높고 경사진 지형에 석축을 쌓았기때문에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으며, 역사 이래로 성이 함락된 적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남한산성에서도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분은 남쪽편 검단산 정상과 연결되는 능선지역으로 경사가 완만하고 검단산과 약간 떨어져 있어서 전체적으로 산성을 쌓아서 방어하기에는 그 범위가 넓어지는 약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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