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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225

충주 장미산성(忠州薔薇山城), 남한강이 굽어보이는 삼국시대 고구려 산성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간 분쟁이 많았던 지역인 충주 인근 남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장미산성입니다. 고구려와 신라가 세력권의 표시로 만들어 놓은 중원고구려비와 중앙탑이 있는 곳에서 자동차로 남한강변을 따라서 하류로 10여분 내려오면 있는 남한강 서쪽편 장미산에 장미산성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장미산성 중앙인 장미산 정상에 올라서면 남한강 상류쪽 충주 일대가 한눈에 들어와서 이 장미산성이 당시 국방상의 중요한 요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장미산성 성벽의 일부는 온전하게 남아있고 많은 부분은 허물어져 있지만 산성 자체는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충주 남한강변 중원고구려비와 중앙탑이 있는 지역에서 남한강 하류쪽로 도로를 따라서 자동차로 10여분 내려오면 남한강 서쪽편에 있는 나지막한 장미산이 있는 삼국시대 산..

연천 당포성, 임진강 나루를 지키는 고구려성

연천 당포성은 연천과 파주 사이를 가르면서 흐르는 임진강변에 있는 고구려 성 중의 하나이다. 4~5세기 무렵 고구려가 남하함에 따라 백제와의 전선이 형성되었으며, 그후 신라 진흥왕이 한강을 장악하면서 자연스럽게 신라와의 국경선이 되었던 지역이다. 임진강을 따라서 북단에는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 고구려의 요새들이 발굴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백제의 육계토성, 오두산성, 신라의 칠중성 등이 자리잡고 있다. 수백년동안 고구려와 백제 또는 신라와의 접전이 일어났던 국경지대 역할을 했으며, 지금도 남북의 휴전선이 이 임진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당포성을 보면 산성축조에 있어서 고구려인의 뛰어난 점을 느낄 수 있는데, 고구려 산성을 보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소수의 인원으로 방어할 수 있는 산..

부여 성흥산성 (가림성,사적4호), 백제수도 사비성을 지키던 주요 산성

부여 성흥산성은 해와 달이 뜨는 풍경이 아름다운 아름다운 장소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이 곳 성흥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부여)과 웅진(공주)을 지키는 군사전략상 아주 중요한 곳으로 부여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부여 수도인 사비성을 가로 지르는 백마강(금강) 하류쪽과 주변 논산지역의 넓은 평야를 굽어보고 있어 수도를 방어하는데 요충지이다. 성흥산성이 있는 임천면은 조선시대에는 임천군으로 현재 부여군에 속해 있던 부여현, 흥산현, 석성현보다 높은 지위의 군현으로 아마도 금강 수운을 관리하는 업무의 중요성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부여 성흥산성은 산정상을 돌과 흙으로 성벽을 빙둘러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산성의 규모는 아주 큰 편은 아니지만 적정한 수..

용인 처인성, 몽고침입때 명장 김윤후가 몽골 장군 살리타이를 사살, 몽고 침입을 물리친 곳

용인시와 남쪽 안성시, 평택시와 경계가 되는 지점에 위치한 남사저수지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처인성입니다. 전체 둘레 425m의 작은 평지성으로 성벽은 토성으로 쌓았으면 별로 높지도 않고 견고해 보이지도 않은 성입니다. 이 곳이 몽골의 고려 침입시 가장 유명한 전투인 처인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고려시대 명장 김윤후가 몽골 자군 살리타이를 사살함으로써 당시 세계 최고의 군대인 몽골 기마대를 물리친 곳입니다. 처인성의 전략적 위치는 용인 이남에서 서울방향과 연결해 주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중요해 보이기는 하지만 성벽의 규모로 보아 큰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만 역사적으로 고려가 몽골군을 격퇴한 장소로서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처인성은 용인 남사에서 서울 방향으로 들어오는 길목의 교통 ..

나주 자미산성, 고대국가 마한의 중심

나주 영산강 남쪽에서 영암 월출산까지의 넓은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 지역은 고대국가 마한의 중심지이고, 그 중심에 해발 100m도 되지 않는 낮은 야산에 자리잡고 있는 자미산성이 있다. 이 자미산성은 백제 테뫼식 산성으로 백제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산성의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자미산성은 영산강 이남 하류지역을 관장하는 곳으로 마한시대부터 후백제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과의 투쟁, 삼별초 항쟁 등 다양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이 주변 지역은 반남 박씨의 본향이기도 하다. 물론 자미산성은 지금 이름만 산성이고, 성벽이나, 성문지 같은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상태로 산성이었다는 의미만 간직하고 있다. 자미산성 입구 자미산성 오르는 길. 자미산성은 해발 100m가 되지 않는 낮은 ..

부여 부소산성

부소산성은 부여의 금강산변 낮은 야산인 부소산성에 쌓은 성을 말한다. 부소산성은 백제의 산성 형식을 보여주며 자연적인 능선을 쌓아서 산성의 형태를 만든 것으로 돌을 쌓은 흔적을 찾기는 약간 힘들다. 그렇지만 산성이 백마강을 끼고 요새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공략하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 부소산성 내 유물/유적: 1. 계백, 성충, 홍수 3명의 충신을 모신 사당: 삼충사 2. 3천궁녀가 떨어진 낙화암, 백마강 그리고 고란사 부소산 정상부근의 반월루 입니다. 부여시내와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입니다. 부소산성내에 있는 누각인 영일루 입니다. 부소산성내에 있는 숙영지인 군창지입니다. 부소산성의 성벽이었던 것 같은데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경주의 반월성이나 행주산성도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백제성인 토..

[서울 북한산성] 대동문에서 대성문까지

북한산성 중에서 성벽이 능선을 따라 가장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는 구간입니다. 정릉, 수유리 등 서울의 동쪽에서 북한산을 등반하게 되면 통과하게 되는 성문들입니다.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산성의 성벽을 느낄 수 있고 서울의 동쪽 부분의 경치를 멀리까지 감상할 수 있는 곳입니다. 북한산성 안쪽에서 본 대동문입니다. 북한산성 바깥쪽에서 본 대동문입니다. 대동문 바깥 쪽에서 본 성벽 북한산성 성벽 대동문 현판과 문루. 북한산성 성곽길. 이런 형태로 능선을 따라서 성벽이 있다. 이 성곽은 워낙 높은 능선에 있어서 쌓느라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군데군데 위치한 치. 가파른 언덕길. 능선을 따라서 이어진 북한산성 성벽, 문수봉까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성벽위서 내려다본 서울시가지 멀리 남산타워가 보인다. 대동문..

[서울 북한산성] 대남문, 청수동 암문

북한산성은 서울의 북쪽에 자리한 북한산을 둘러싸고 있는 성이다. 그래서 북한산성의 성벽들은 대부분 해발 500m이상의 능선을 따라서 쌓았고 그 중 구기동을 통해서 올라가면 문수봉 옆 고개길에 있는 대남문을 만날 수 있다. 북한산성 성문중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대남문입니다. 문수봉 바로 아래에 있는 고개에 있습니다. 성문을 통해 등산객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대남문 성문 대남문 문루와 현판 문수봉 방향으로 성벽이 계속 연결되어 있습니다. 대동문에서 대남문으로 연결된 성벽, 이 쪽 성벽이 제일 완벽하게 북한산성 성벽을 체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북한산성 성벽 대남문 성벽 위의 풍경입니다.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북한산을 감상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먼곳에서 바라본 대남문입니다 문수봉과 비봉 사..

[서울 성곽] 남산타워 오르는 길

조선시대 한양 도성을 이루는 성벽 중에서 남쪽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산 능선을 따라서 쌓은 성벽이다. 남대문에서 남산타워 오르는 길 입구까지의 도성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남산을 오르는 계단 옆으로 성벽이 남아 있다. 수도를 방어하는 중요한 성벽이지만, 남쪽 방향으로는 적의 침입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성벽이 높지고 견고하지도 않은 편이다. 아마도 도성의 상징적인 의미를 강조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산을 오르는 산책길 자체가 원래 성벽을 왕래하던 통로를 확장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남산을 오르는 산책길 입구. 길을 쌓은 축대의 모양새로 보아 원래 한양도성의 성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직터널 부근에서 끊어진 한양 도성 성벽이 다시 시작되는 지점. 남산 중턱쯤에서 남산을 오르는 계단길과 ..

[서울성곽] 남산 동쪽 장충동 일원

한양도성을 이루고 있는 성곽중 남동쪽 소문에 해당되는 광희문을 지나서 남산으로 연결된 성곽이다. 광희문에서 다시 시작된 성곽은 옥수동 방향 도로가 있는 부근에서 끊어 졌다가 장충체육관 뒷편에서 시작되어서 남산 동쪽 능선으로 연결되고 있다. 한양도성의 동쪽에 자리잡은 낙산 능선에 남아 있는 성곽과 함께 도심에서는 성곽이 꽤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성곽 안쪽에는 일반인들이 거주하는 주택이나 마을은 거의 없고 장충체육관, 신라호텔, 자유센터, 국립극장, 동국대학교 등 관변단체나 시설 등에 그 기원이 있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성곽 바깥쪽에는 일반 서민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전형적인 서울 성곽주변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 중 그 상태가 양호하게 남아 있는 장충동 일대의 서..

[서울 성곽] 이간수문과 주위 성벽 흔적, 동대문운동장에 묻혀 있던 조선시대 수문

최근에 철거된 동대문운동장은 일제가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의 성곽을 허물어서 만든 운동장으로 최근에 철거가 완료되었다. 철거과정에서 남산과 장충동에서 흘러내린 물을 성 밖으로 빼내기 위해 만든 조선시대 수문이 이간수문이 발굴되었고, 주위 서울 성곽의 성벽도 조금씩 복원해 놓고 있다. 이 곳은 조선시대 병영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의 용산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성밖 청계천으로 빼내는 조선시대 수문이 이간수문. 오랜 세월 동대문 운동장 아래 묻혀 있었던 까닭에 원형이 거대로 남아 있다. 아치형으로 만든 거대한 수문. 우리나라 석조구조물 중에서는 상당히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수문 안쪽에서 본 모습. 거대한 돌이 돌출되어 있다. 서울 성곽에서 유일한 ..

[서울 성곽] 혜화문, 한양도성 동소문에 해당하는 성문

사직터널에서 산능선을 따라서 인왕산을 거쳐 북악산을 지나 창덕궁과 성균관대학 뒤쪽 능선을 지나서 의정부 방향 도로와 만나는 곳에 있는 혜화문이다.한양도성의 동소문에 해당하는 성문으로 의정부, 양주를 거쳐 함경도 방향으로 연결된 도로들이 한양도성으로 들어오는 혜화동 고갯길에 있던 성문으로 지금은 원래의 위치에서 동쪽편 언던에 위치하고 있다. 다른 성문과는 달리 원래부터 있던 성문이 아니라 90년대에 복원한 성문이다. 혜화문 안쪽으로는 혜화동 대학로가 있으면, 성곽은 다시 낙산 능선을 따라서 계속 이어진다. 한양도성의 동소문은 원래 의정부방향 도로 중앙에 있었는데, 도로 확장 등으로 현재의 위치인 동쪽편 언덕에 복원해 놓고 있다. 복원된 혜화문. 아치형 성문과 성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래 있었는 성루가 1..

[서울 성곽] 성북동 경계가 되는 창덕궁 뒷편 와룡공원 성벽

한양 도성을 이루고 있는 서울의 성곽 중에서 북악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벽이 사람들이 사는 공간과 만나기 시작하는 지점인 와룡공원 부근의 성벽이다. 오랜 기간 동안 국왕이 거처했던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녹지공간과 북한산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이 곳 성벽을 넘으면 성북동이 시작된다. 성의 북쪽이라는 성북동은 이 성벽너머의 마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성벽 바로 아래에는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에서 묘사한 성북동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는 달동네라고 불리는 동네가 있고, 그 너머로 요즈음의 부의 상징이라는 성북동 고급 주택가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궁궐이 지키던 성벽답게 거의 전역에 걸쳐서 아주 크고 튼튼한 돌을 쌓은 성벽이 있으며, 성벽위에는 또한 아주 튼튼한 흉벽이 있..

[서울 성곽] 창의문(자하문), 한양도성 북소문에 해당하는 성문

창의문은 자하문이라고도 불리는 한양 도성의 서북쪽 방향에 위치한 성문이다. 세검정에서 청와대와 경복궁 방향으로 난 고갯길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후기 인조반정때 반란군들이 세검정에서 출발하여 이 곳 창의문을 통해서 지나갔다고 하며, 60년대 북한에서 침투한 김신조 일당도 이 곳을 지나서 청와대를 기습할려했던 곳이다. 창의문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성문 중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에 속하며, 원래 이 길은 조선시대에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한때 풍수상 좋지 않다고 하여 폐쇄되기도 한 성문이다. 창의문 아래에는 1.21 청와대 습격 당신 순직한 경찰들의 동상이 서 있고, 그 아래로는 이 곳의 청계천 발원지임을 말해주는 표지석이 있다. 인왕산길에서 북악산길로 가는 도로에서 보이는 창의문. 현재 창..

[서울 성곽] 서대문에서 인왕산 아래 (사직동 부근)

서울의 성곽은 인왕산, 북악산, 남산, 낙산 등 서울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적인 장애물에 오랜 기간 동안 성곽을 쌓아 형성되어 있고 4대문과 4소문을 두고 있습니다. 서울의 서쪽 방면을 막고 있는 성곽은 서대문을 중심으로 인왕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는데 숭례문과 서대문 사이의 성벽은 도심으로 변해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서대문에서 시작해서 능선을 따라 쌓은 성벽은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서울 성곽 여행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는 사직단 근처 사직터널위 능선에 설치된 성벽을 올라가는 길입니다. 이 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인왕산 능선을 따라서 쌓은 서울 성곽을 탐사할 수 있습니다. 사직단과 독립문이 있는 무악재 사이의 능선을 따라 형성된 성벽 주위 마을 주민을 위한 도로에 잘려나간 성벽입니다. 독립..

평택 농성, 임씨의 시조 임팔급이 정착했다고 알려진 곳

평택 농성은 통일신라시대 중국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다 우리나라로 넘어온 충절공 임팔급이 평택 팽성에 터를 잡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임팔급은 우리나라 모든 임씨의 시조로 여겨지는 사람으로 그런 연유로 해서 이 곳 농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성은 전체 둘레가 약 300m 정도되는 작은 평지성으로 흙으로 쌓은 판축토성이다. 삼국시대 백제에서 추로 토성을 많이 쌓았으며,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는 외벽의 석축으로 보강한 경우가 많은데 이 곳 평택 팽성의 농성은 토성 그대로의 모습이 남아 있다. 높이는 약 4m 정도로 읍성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규모는 되어 보였다. 평택 팽성지역은 아산만과 가까운 평야지대로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임진왜란때 쌓았다는 설이 있지만, 농성의 위..

[남한산성] 서문(우익문)에서 북문(전승문)까지, 석양이 아름다운 곳

남한산성 서문에서 북문까지는 산성의 서북쪽으로 솟아있는 능선을 따라서 성곽을 쌓은 곳으로 한강이 흐르는 서울시내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남한산성 축성의 목적인 한강 수운을 제압하고 관리하는 기능을 가장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곳으로 적들이 남한산성을 제압하지 않고는 이 곳을 지나서 남한강 상류 방향으로 진격하기 힘들고, 한강 이남 지역으로의 진출이 어렵기 때문에 삼국시대 초기부터 이 곳에 산성이 존재한 이유가 되는 곳이다. 이 곳은 또한 서울에서 일몰 풍경이나 야경을 촬영하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며, 실제로 이 곳을 찾았을 때도 많은 사진작가(?)들이 일몰장면과 야경을 촬영하기 위해서 오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서문에서 약간 위쪽에 있는 능선에서 서울 한강이남과 한강이 흐르는 모습이 가장 가까이서 ..

수원 화성, 조선의 성곽 축성 기술이 집약된 유네스코 문화유산

수원화성은 조선후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그 무덤을 현재의 융건릉으로 옮긴후 인근에 건설한 신도신인 화성을 건설하면서 세운 성곽이다. 기존에 화강암으로만 쌓던 축성양식에서 벗어나 석축으로 쌓은 석성과 구운벽돌로 쌓은 전성의 형태를 지형과 용도에 맞게 적절하게 섞어서 축성하였다. 축성 공사에는 다산 정약용이 서양의 것을 응용한 거중기가 사용하였으며,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는 성곽으로 그 축성과정이 의궤 등 다양한 자료에 상세히 남아 있고, 조선의 성곽 축성 기술이 집약된 것으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상당히 높다고 인정되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수원 화성는 서남쪽의 팔달산과 동장대가 있는 낮은 구릉을 연결한 평지성에 가까운 읍성이다. 성곽의 축성기술은 ..

강화해안진지, 김포 덕포진 포대

김포 대곶면 염하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는 덕포진이다. 덕포진은 조선시대 해안가 진영으로 포대와 파수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강화해안가 염하 초입에 자리잡고 있는 초지진, 덕진진, 남장포대와 함께 서울로 들어가는 뱃길을 지키는 군사전략상 아주 중요한 요새로 특히 포대를 구성하여 강화 덕진진의 남장포대와 함께 협공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곳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포구인 김포 대명리 포구 인근에 위치한 덕포진은 언제나 소풍을 온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조용한 역사 유적지로 역사체험과 소풍을 겸할 수 있는 좋은 명소라 할 수 있다. 김포 덕포진은 염하를 지나가는 선박을 향해 포를 발사할 수 있는 중포가 설치된 포대를 중심으로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염하 건너편에 설치된 남장포대와 함께 가장 많은 ..

공주 공산성, 백제 두번째 수도 웅진

공주 공산성은 백제의 두번째 수도로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한 후 부여로 다시 옮길때까지 64년 동안 그 역할을 했던 곳이다. 금강변 남쪽의 약 110m 정도의 구릉에 석축과 토축으로 쌓은 천혜의 요새와 같은 성이다. 북쪽으로는 한강이 막혀있고, 동.서.남쪽으로는 높지 않은 구릉이 둘러싸고 있는 곳이다. 백제의 성곽은 주로 흙을 다져서 쌓은 토축성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이 곳 공산성은 조선시대에 다시 석축성으로 고쳐 쌓은 까닭에 사비성이나 몽촌토성 등 백제 성곽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의 공산성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산성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으로 생각된다. 공산성 중심인 금강변에는 지금은 민가도 없고, 아무도 살지 않는 곳으로 약간 삭막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이 곳은 금강나루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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