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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조선의 법궁] 건청궁 장안당, 고종이 머물던 공간

경복궁 북쪽편 향원정이 있는 곳에 위치한 건청궁은 경복궁 중건 후 새로 지어진 궁궐 건물이다. 국왕이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일반 사대부 저택처럼 지은 건물로 국왕이 머무는 장안당과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 서재인 관문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곤녕궁 앞에는 연못인 향원지를 파고 서쪽편에는 서재인 협길당을 지어서 하나의 별궁 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는 곳이다. 건청궁은 이런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구한말 정치적 혼란기의 중심이 되는 장소였고, 이 곳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된 슬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다. 건청궁이라는 이름은 북경 자금성에 있는 황제의 처소인 건청궁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이며, 당시 고종의 생각에는 중국은 상당히 발전된 나라라고 생각했던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 고종..

궁궐_종묘 2010.09.10

고양 서삼릉 희릉, 외롭게 떨어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

원당종마목장 바로 옆에 있는 희릉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이다. 사극 '여인천하'에 나오는 중종과 명종때의 수많은 사건과 정쟁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능이다. 원래 서초구 내곡동에 있던 능을 당시 정쟁의 결과로 이 곳 서삼릉으로 옮겼다고 하며 중종의 능도 이 곳에 있었으나, 명종때 문정왕후가 강남의 선정릉으로 능을 옮겼다고 한다. 사극에서 슬픈모습으로 많이 등장하던 장경왕후는 죽어서도 홀로 자리를 하고 있으며, 다만 그 옆쪽에 자신의 아들인 인종은 능인 효릉과 함께 있다는 것이 위안일 것이다. 중종 계비인 장경왕후의 희릉. 중종의 능과 함께 있을때는 정릉이라고 불렸으나, 선정릉으로 이장후에는 희릉으로 불린다. 근처의 자신의 아들인 인종의 능이 있다. 입구의 홍살문. 그 옆에 판위..

고양 서삼릉 예릉, 조선이 마지막으로 조성한 국왕(철종)의 능

고양 서삼릉의 예릉은 조선이 법규에 의해 조성한 마지막 능으로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철종과 철인왕후의 능이다. 고종과 순종의 경우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되었기때문에 실질적으로 예법에 맞게 국가에서 시행한 마지막 왕릉이 되었다. 예릉은 고종때 흥선대원군이 주도로 왕권 강화를 보여 주기 위해 석물과 부속 건축물을 웅장하게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속건물로는 정자각과 비각이 남아 있고, 제례를 준비하던 부속건물인 수라방은 없어지고 수복방은 지금은 초석만 남아 있다. 조선 왕릉 상당수가 농협을 비롯한 농수산부에 산하 기관에서 접수해서 그런지 주변에 아름다운 길과 목장풍경으로 유명한 원당종마목장과 농협대학을 비롯한 유사 기관들이 모여있다. 조선 25대 철종과 철인왕후의 능인 예릉 전경. 홍살문, 정자각, 비각, 능..

고양 서삼릉, 의령원과 효창원

원당 종마목장과 농협대학이 위치한 서삼릉에 있는 의령원과 효창원이다. 효창원을 정조의 아들이 문효세자의 묘소로 원래는 서울 효창공원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의령원은 사도세자의 첫째 아들인 의소세손의 묘소로 정조대왕의 형님이 되는 분으로 그런 연유로 해서 이 곳으로 효창원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앞쪽에 의령원이 있고, 뒷쪽에 효창원이 있는데 격에는 잘 맞지 않은 것 같아 보이지만, 효창원을 후에 이 곳으로 옮겨서 그런것으로 보인다. 효창원과 의령원 앞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전각이 있는데, 능이 아니라서 그런지 정자각 형태를 하고 있지는 않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의소세손의 묘소인 의령원. 어린나이에 죽어서 그런지 영조가 직접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의령원 앞에 있는 석물. 영조가 ..

화성 융건릉, 융릉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합장릉

화성 융릉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원래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 곳 화산으로 옮기면서 영우원으로 했다가, 장조로 추존하면서 융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곳 화성 융릉,건릉이 있게 했으며, 수원 화성을 건축하게 된 동기중이 하나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이다. 정조의 정성이 깊었던지 서쪽편 정조대왕의 건릉보다도 사도세자의 융릉이 더 웅장해 보인다. 사도세자의 능인 수원(화성) 화산의 융릉. 원래 조성시에는 세자의 능으로 조성했지만, 왕릉 보다도 잘 만든 것으로 보인다. 여러 방향에서 본 사도세자의 융릉 제사를 올리는 공간이 융릉 정자각 측면에서 본 정자각 정자각 뒷쪽. 정자각 월대를 오르는 계단 정자각 월대 위 제사를 올리는 공간 융릉 정자각 추녀마루..

화성 융건릉, 정조대왕 건릉 정자각 등 부속 건물들

정조대왕 건릉의 부속건물로는 제를 올리는 정자각, 왕릉 입구임을 알려주는 홍살물, 제물을 준비하던 수라간과 왕의 업적을 적어 놓은 비각이 있고,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제를 올리는 공간이 있다. 왕릉이 엄숙함을 잘 반영하여 화려하지 않고, 단정한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건릉 정자각. 제를 올리는 공간으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왕의 혼령이 다니는 신도와 국왕이 다니는 어도의 2개의 길이 있다. 정자각은 한자 丁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정자각이라 부른다. 건릉이 시작하는 부분이 홍살문 제물을 올려놓는 장소인 판위가 홍살문을 지나면 동쪽편에 있다. 제물을 준비는 장소인 수라방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신도와 어도로 구성된 참도가 있다. 정자각은 1단의 월대 위에 세워져 있는 건물로 제사를 모시는 공간이다. ..

화성 융건릉,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건릉

수원(화성) 화산 융건릉 중 서쪽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건릉이다. 정조가 사도세자 능인 융릉을 국왕의 격에 맞게 조성한 후 그의 유언에 따라서 화산 동쪽에서 두번째 언덕에 조성했다가 효의왕후 사후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고 한다. 사도세자에 대한 그의 효심을 잘 엿볼수 있는 부분이다. 현재는 왕릉 가까이는 갈 수 없게 되어있고, 아래에서만 올려다 볼 수 있다. 수원 화산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정조대왕이 묻힌 건릉 정조대왕 건릉 입구에 홍살물이 보이고, 중앙에 정자각, 뒷편에 봉분이 있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건릉의 모습 정자각에서 내려다 본 건릉 입구 정조대왕 건릉 봉분 확대해서 본 건릉.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을 두른 차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융릉의 상설과 흡사..

화성 융건릉 왕릉 들어가는 숲속길과 입구 재실

화성 화산에 위치한 융건릉은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과 정조대왕이 묻힌 건릉을 통칭하여 융건릉이라 부른다. 현재는 행정구역상 화성에 속하지만 통칭은 수원 화산이라고 부르며, 근처에 있는 용주사와 더불어 왕릉 영역을 이루고 있다. 화산은 수원 남쪽의 넓은 벌판에 자리잡고 있으며 왕릉을 숲을 아주 정성스럽게 이백년 정도로 가꾸어 왔기때문 숲이 상당히 우거지고 아름답다. 융건릉 입구에서 건릉과 융릉을 한바퀴 돌고 나면, 숲의 기운을 듬뿍받고 나올 수 있다. 융건릉 입구에서 조금 걸어서 들어가면 동쪽 융릉방향과 서쪽 건릉방향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을 만난다. 길 양쪽으로 송림이 우거져 있다. 갈림길에서 서쪽편 건릉으로 들어가는 길. 중간에 숲은 송림에서 다른 활엽수로 바뀐다. 숲길을 걸어서 조금더 들어가면 정조대왕의 ..

전주 경기전 조경묘(肇慶廟),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를 모신 곳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공 부부의 위패를 모신 장소로 전주 경기전 정전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씨왕조의 시조를 모신 장소답게 규모는 크지는 않지만 외삼문, 내삼문이 있고 내부에는 신로(神道)와 향로가 놓여 있는 등 왕실의 법도를 많이 따르고 있으며, 우측편에는 제법 큰 규모의 재실(齋室)이 있습니다. 전주이씨 시조를 모신 곳이라서 그런지 일반인들에게는 내부가 공개되지 않고 외부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전주이씨 시조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 입구에 서있는 홍살문입니다. 홍살문을 지나면 조경묘의 외삼문이 있습니다. 홍살문을 지나서면 조경묘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외삼문이 있습니다. 유교적인 법도에 따라서 삼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신(神)이 드나들 수 있도록 문에는 틈이 많이 있습니다. 조경묘는 ..

연세대 교정에 있는 수경원(綬慶園) 터와 정자각

수경원 옛터에서 남은 건물인 정자각입니다. 예전에는 바닥의 초석과 앙상한 기둥만 남아있고 담장도 없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깨끗하게 복원을 해 놓고 있습니다. 내력은 잘 몰랐는데 이 곳이 정조의 할머니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조의 후궁 영빈이씨의 묘가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예전부터 연세대학교회 앞 언덕의 잔듸밭은 봉분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교회가 있는 자리는 봉분이 있던 자리라고합니다. 수경원의 남은 건물은 지금은 복원된 정자각과 비각뿐이라고 합니다. 수경원 옛터에서 남은 건물인 정자각입니다. 격식에 맞게(?) 잡상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바닥의 초석과 앙상한 기둥만 남아있는 폐허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복원을 해 놓고 있습니다. 내력은 잘 몰랐는데 이 곳이 정조의 할머니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

청계천 수표교, 하천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가 있던 다리

서울 장충단 공원 옆을 흐르는 개천에는 옛날 청계천에 있던 돌다리 중의 하나로 청계천 수위를 측정하던 수표가 설치되었던 다리인 수표교가 옮겨져 설치되어 있다. 60년대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청계천 돌다리 중 원형대로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다리인 것으로 생각된다. 청계천 다리는 조선초 태종부터 세종때까지 돌다리로 건설되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토목기술을 볼 수 있는 하나의 샘플같은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는 아치교를 많이 세웠는데 청계천 돌다리는 화강석으로 조립식에 가깝게 다리를 건설하고 있는데, 아마도 큰비가 왔을 경우 무너지는 경우가 많아서 쉽게 복구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수표교에 설치되어 있던 수표는 이 곳에 같이 있다가 현재는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

울진 월송정 입구 평해황씨시조단

관동팔경 중 하나인 울진 월송정 송림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평해황씨시조단이다. 이 곳을 찾은 것은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월송정을 찾아가는 길에 넓은 정원이 있고, 고풍스러운 건물이 몇동 있길래 차를 멈추고 한번 둘러본 곳이다. 월송정 입구 소나무 숲에 연못을 파고 재실로 보이는 건물이 있어서 부잣집 저택인 줄 알았는데, 평해황시 시조를 모시는 곳이라 한다. 평해황씨 시조는 후한의 학사로 풍랑을 만나 표루하다가 평해지역으로 흘러들어 신라에 귀하한 황학이라는 사람으로 현재 건물들과 비석들은 조선 숙종때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시조단으로 문중에서 신성시 여기는 장소로 그런지 일반인이 출입을 할 수 없고 담벼락 밖에서만 내부를 살펴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월송정 입구 울창한 송림속에 위치한 평해황씨시조단 부속..

강릉 오죽헌, 문성사와 어제각

강릉오죽헌은 조선중기 최치운이 창건한 이래 아들과 사위 등에게 물려주면서 오랜 기간동안 이 지역에서 명맥을 이어오던 것을 1970년대 오주헌 정화사업에 따라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그 모습이 오천원권 지폐에 담겨짐에 따라서 안동의 도산서원과 함께 실생활에서 그림으로 가장 많이 접해왔던 유적지이다. 율곡 선생과 신사임당이 태어난 오죽헌을 중심으로 고택,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 과 벼루를 보관하는 어제각, 기념관이 하나가 되어 강릉과 영동지역을 대표하는 역사유적지라 할 수 있다. 경포호수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곳 오죽헌은 현재도 성역화되어 있는 곳이지만 정조가 명을 내려서 어제각을 세운것을 보면 조선시대에도 이 곳 영동지역을 찾는 많은 선비,묵객들이 이 곳을 찾았던 것으로 보이며, 율곡 선생..

영은문 주초, 중국 사신을 맞던 모화관 앞에 세웟던 영은문 주춧돌

조선시대 중국사신이 한국을 방문할 때 의주를 거쳐서 오랜 여행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고양 벽제관에서 잠시 머물면서 의복을 단정히 하고, 한양의 서북쪽 경계였던 무악재를 넘으며, 첫번째로 보이는 출입문이라 할 수 있는 영은문을 지나서 숙소인 모화관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구한말 자주독립의지를 표명하기 위해서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고 하며 주춧돌만 남아 있다. 구한말이라 영은문을 찍은 사진은 여러장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 모습을 보면 한국식과 중국식을 혼합한 듯한 형태를 하고 있다. 독립문 앞에 있는 영은문 주초, 독립문과 영은문이 있던 원래 자리는 도심쪽인 영천시장 부근이라 하며, 도로공사로 인해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옛날 영은문 사진을 보면 영은문은 중국 패루와 비슷한 모양을..

해남 고산윤선도 유적

해남 고산 윤선도 선생 고택인 녹우당이 있는 해남읍 연동리 일대른 고산 윤선도 유적지라 하며, 윤선도 선생과 자화상으로 유명한 그의 증손자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인 공재 윤두서 선생이 살았던 녹우당과 사당, 재실격인 고산의 고조부이자 이 곳 해남따에 처음으로 자리잡은 어초은 윤효정을 모신 추원당과 사당, 그리고 인공적으로 정원을 조서성한 비자나무숲 등이 있다. 마을 입구에는 옛성의 연못터에 만든 연못이 있고 조금 걸어서 올라가면 고산 윤선도 선생의 고택이 녹우단과 그 옆에 수령이 꽤 있어보이는 은행나무가 있다. 이 곳에 터를 잡은 해남 윤씨는 조선후기 장자 상속 관습을 먼저 실천하여 큰 부를 이룬 집안으로 윤두서 자화상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으며, 이를 전시하는 유물전시관이 녹우단 동..

고택_정원 2010.09.10

태조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 오면서 쉬었던 전주 오목대(梧木臺)와 이목대(梨木臺)

전주 한옥마을 길을 따라서 동쪽편으로 계속가면 조그만 동산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곳이 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유적지인 오목대(梧木臺)와 이목대(梨木臺)입니다. 오목대는 태조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잠시 머물면서 조선 건국의 의지를 드러낸 곳이고, 이목대는 태조의 5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작은 동산인 이 곳을 오르면 서쪽편으로 전주 한옥마을의 정겨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고 전주 구도심 전체가 눈 앞에 펼쳐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전주 한옥마을 동쪽편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오목대와 이목대입니다.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는 언덕에 올라서면 전주 한옥마을을 포함하여 전주 구도심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 곳에서 국악을 배우는 학생들의 낭랑한 창(唱)소리를..

영조가 당쟁을 없애려 세운 성균관 탕평비

성균관 대학을 들어가는 입구에는 영조가 세운 탕평비가 있다. 아마 당시 당쟁의 중심이 성균관 이었던 모양이었는지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웠다.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은 말을 잘안들어서인지 영조시대에도 탕평책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당쟁이 해소되지는 못한것 같고, 결국 그것이 조선을 멸망에 이르게 한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영조가 세운 탕평비입니다. 《예기》 가운데 한 구절인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마음이요, 아첨하고 신의가 없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가 적혀 있습니다. 성균관 대학 입구에 있는 성균관 탕평비 뒷면에 적힌 글씨입니다. 성균관 탕평비 기단과 지붕입니다. 성균관 탕평비가 있는 누각은 성균관 대학 입구에 있습니다. 역사는 참 가까..

행주산성 정상 행주대첩비, 덕양정, 충의정, 기념탑.

한강 하류에 자리잡고 있는 행주산성은 건너편의 개화산과 더불어 평지에 솟아 있어 멀리서도 쉽게 보이는 유적지입니다. 행주산성 정상에는 이정표 역할을 해 주고 있는 기념탑과 조선시대에 세운 대리석으로 만든 대첩비가 있고, 특별한 유적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대첩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70년대 성역화 사업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것들입니다. 행주산성 정상에 오르는 길이 끝나는 부분입니다. 발 아래로 한강이 흐르고 정상부에 위치한 기념탑과 대첩비각이 보입니다. 행주산성 정상부로 오르는 길입니다. 성역화 사업으로 조성된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아늑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 길입니다. 행주산성 정상으로 오르는 길 옆으로 있는 숲속길입니다. 이 숲속길로도 정상으로 오를 수 있습니다. 행주산성에서 가장 좋은 경치를 감상할 ..

행주산성 입구의 권율장군 동상과 대첩문, 오르는 길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중에 있었던 3대 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의 현장으로 우리에게 아주 가까히 있는 유적지입니다. 산성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남한산성처럼 돌로 쌓은 성곽은 볼 수 없지만, 북쪽편에는 토성의 흔적이 일부나마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서울을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곳입니다. 행주산성은 일산으로 가는 자유로변에 자리잡고 있는 유적지로 눈에 보이는 때는 많지만 잘 들어가지는 않게 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경치도 좋고 임진왜란 당시를 한번 되새겨보기에 좋은 장소입니다. 행주산성의 이름을 널리 알린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장군의 동상이 산성입구에 우뚝 서 있습니다. 70년대 유적지 성역화 사업에 따라 조성된 전형적인 모습..

명황제가 충무공에 내려준 수군도독인과 팔사품 (충렬사)

통영 충렬사가 의미를 갖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난중일기와 함께 충무공 유품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유품인 팔사품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팔사품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이 충무공의 전공을 명황제 신종에 보고하자, 감동한 신종이 충무공에 내린 8종류의 특별한 물품으로 삼국지 등에 많이 등장하는 도독인을 비롯하여, 호두령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입니다. 당시에도 충무공의 전공은 상당히 뛰어났고 임진왜란 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황제 신종이 충무공에게 내린 팔사품 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동으로 만든 도독인입니다. 삼국지 등에서 말로만 듣던 도독인을 실물로 보니까 생각보다 크고 ..

지역박물관 201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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