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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월정사, 수광전을 비롯한 불전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소재한 월정사는 삼국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오대산을 대표하는 큰 사찰이다. 월정사에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팔각구층석탑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세조를 비롯한 왕실의 비호를 받고 실록을 보관했던 오대산사고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등 원찰의 성격을 갖는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월정사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불교계에서 비중이 큰 사찰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당시 사찰 대부분이 소실되어 건축물로서 내력이 있는 불전이나 요사채건물은 없고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에 중건되어 불전이나 요사채에서 오래된 사찰로서의 느낌은 주지 못하고 있다. 월정사 주불전인 적광전 뒷편으로는 4동 불전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안쪽에 있는 것이 이름난 큰 산에 자리잡은 사찰에서 많이 ..

[경기도박물관] 구석기, 신석기시대 유물

경기도는 한강과 임진강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와 서해안 갯벌이 있어 인류가 거주하기에 좋은 환경으로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지석묘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구석기 연구에 획기전인 발견이 되었던 연천 전곡리 유적지, 암사동 선사유적지 등 많은 선사시대 유적지가 남아 있다. 경기도 일대의 선사유적지들 중 구석기 유적지로는 연천 전곡리, 파주 가월리, 연천 강내리, 용인 평창리 등이 있으며 대표적인 유물로는 구석기시대 연구에 획기적인 발견이 되었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를 비롯한 주먹도끼, 자리개, 몸돌, 찍개 등 다양한 유물들이 집터에서 발견되고 있다. 토기를 제작하고 농경생활이 시작되기 시작한 신석기시대 유적는 큰강인 한강유역의 암사동과 여주 흔암리, 임진강 유역의 파주 주월리와 연천 삼거리, 경기 남부 지역..

지역박물관 2012.01.03

파주 다율리고인돌, 안산 선부동고인돌

경기도 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파주 다율리 고인돌과 안산 선부동고인돌이다. 2기의 고인돌은 경기도 지역 택지개발 과정에서 이 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지석묘라고도 불리는 고인돌은 한반도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양식으로 전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중 한반도에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다. 다율리고인돌은 탁자식 고인돌로 덥개돌과 받침돌이 온전히 남아 있다. 파주 다율리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이라 조선시대에는 교하현이 있었던 지역으로 청동기인들이 살기에 적합한 넓은 농토와 강이 있는 지역이다. 선부동고인돌은 현재는 받침돌이 없이 덮개돌만 남아 있는데 원래부터 바둑판식 고인돌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안산 선부동은 현 안산시 도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동기시대 한반도 서해안 ..

[중앙박물관 특별전] 중국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 강세황과 1784년 사행

강세황(1712~1791)은 조선후기 영.정조대에 활약한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당시 한국 화단에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으며, 서양화법을 수용하는데도 기여한 인물이다. 재능이 뛰어나 시문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당대의 화가인 김홍도가 그의 제자라고 한다. 벼슬에 뜻이 없어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으며 60대에 과거에 합격하였다고 한다. 72세에 북경사행, 76세에 금강산 유람을 떠날 정도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진취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인화가라 할 수 있다. 강세황은 72세인 1784년에 늙은 몸을 이끌고 먼 북경 사행길을 떠났다. 젊어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작품활동에 전념했던 강세황이 60대에 관직에 들어가 그가 꿈꾸었던 중국을 70대에..

중앙박물관 2012.01.01

하얀 눈으로 덮힌 월정사 전나무숲길

오대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고찰 월정사에는 팔각구층석탑과 함께 이 사찰을 대표하는 장면으로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오대천 옆 숲길을 따라 이어진 전나무숲길을 들 수 있다.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숲은 소나무숲길이 있는 우리나라의 다른 숲길과는 달리 전나무가 심어져 있다. 평균 수령 80년이 넘는 약 1700여 그루의 전나무가 1km에 이르는 숲길을 이루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말 나옹선사가 월정사에서 공양을 드리고 있는데 소나무에 쌓여있던 눈이 그릇으로 떨어져 공양을 망쳐서 산신령이 소나무대신 전나무를 심게 하였다고 한다. 이 길을 걸으면 오대산에서 발원한 오대천 개울과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 전나무 숲이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과 일체가 된다는 느낌을 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숲길 중 하나이다. 오대산 월정사..

전국 사찰 2011.12.31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 태평성시도에 본 당시 중국의 도시생할

조선후기 중국 사행을 떠났던 화가들이 그렸던 당시 중국 도시의 풍경이다. 8폭으로 이루어진 이 그림은 실제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그렸다기보다는 중국 당시 보고 들었던 도시의 모습을 한 곳에 모아서 묘사하괴. 화면은 가내구역, 자연환경과 유흥구역, 군사훈련 구역르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시 도시의 상업활동에 비중을 두고 그려진 그림으로 보인다. 태평성시도, 조선후기 성(城)으로 경계 지워진 도시에서 생활하는 인물들의 활발한 모습이 그려 있으며 제3폭 어깨에 '太, 平 문자'가 써 있다. 중국 그림의 영향을 받아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도로에는 수레와 인파가 가득하고 번창한 상점과 화려한 건물이 등장한다. 화면의 구성은 상업구역, 가정 내의 생활과 가족관계를 보여주는 가내구역, 자연환경과 유흥의 ..

중앙박물관 2011.12.31

[맛집] 본수원갈비, 수원을 대표하는 음식문화

경기도 도청소재지인 수원은 조선 22대 정조가 수원화성을 세우고 행궁을 건립한 이래로 경기도 남부 지방의 중심이 되어 온 도시이다. 수원화성 팔달문 부근 팔달시장을 중심으로 상거래가 성행하였으며, 그 중 가축의 거래 또한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수원은 정조가 화성을 세운 이후 종2품인 화성유수가 수장이 화성부가 설치되면서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고 융.건릉을 중심으로 제사가 많았고, 상주 인구 또한 많았기때문에 음식문화가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를 대표하는 양반도시라고 할 수 있는 수원을 대표하는 음식으로는 수원 왕갈비를 들 수 있을 것이고, 수원 왕갈비는 수원 부근에 있었던 우시장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는 다른 지역과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수원 왕갈비가 크게 알려지고 수원에서 왕갈..

맛집 2011.12.29

오대산 월정사, 주불전인 적광전

오대산 월정사는 643년(선덕여왕12)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에는 작은 암자의 형태로 유지되다가 이후에 사찰로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월정사는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방문하고 이 곳에 오대산 사고를 두는 등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원찰 기능을 했던 사찰이기도 하다. 고려초기에 세워진 팔각구층석탑을 제외하고는 사찰전각들은 여러차례의 화재와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서 문화재로서 내력이 있는 불전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월정사는 주불전인 석가모니불을 모신 적광전을 비롯하여 많은 불전과 요사채를 두고 있는 강원도 지역을 대표하는 대형 사찰이다. 월정사의 주불전은 적광전으로 석가모니를 본존불로 모신 불전이다. 원래 이 곳에는 일곱부처를 모신 칠불전이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국보 48호),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석탑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 기슭에 위치한 월정사는 643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사리와 대장경일부를 가지고 돌아와 통도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알려진 오래된 고찰이다. 오대산 깊은 산중에 위치해 있지만 국보 48호인 팔각구층석탑과 그 앞에 있는 보물 139호인 석조보살좌상을 제외하고 전각들은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렸기때문에 오래된 건물은 남아 있지 았다. 불교와 관련있는 오대산이라는 이름과 함께 문수보살이 머무는 땅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 사찰은 조선초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영향으로 이곳에 오대산사고를 설치하고 상원사를 중창하는 등 왕실관 관련이 있는 원찰의 기능을 했던 사찰이라 할 수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고려초에 세워진 석탑으로 8각모양의 2단 기단 위에 9층의 탑신을 올린 석탑으로 경..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사행을 다녀온 화가들, 세한도(국보 180호)에 나타난 청나라 문인들과의 교류

조선시대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사행을 가는 것을 명나라때에는 천자에 조공을 간다는 의미로 '조천'이라고 불렀으며, 청나라때는 병자호란의 치욕도 있고 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조공이라는 뜻보다는 북경을 방문한다는 의미로 '연행'이라고 불렀다. 중국 사행을 오늘날 조공이라는 의미로 폄하하는 경향이 많지만 중국사회는 당시에는 넓은 세상과 문물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기때문에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관동팔경 유람과 함께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일 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 특히, 조선후기 영정조대에 들어서면서 청나라의 국력이 강성해지고 안정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다양한 형태로 중국을 방문했고,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저술한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당시 지식인들이 느낀점을 많은 기록으로 남겨놓고 있다. ..

중앙박물관 2011.12.28

[이탈리아여행] 품페이, 빵을 팔던 베이커리(Bakery)와 상점이 즐비한 상가골목과 저택(House of Leone)

AD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어느날 갑자기 역사속으로 사라진 폼페이는 인구 2~5만 규모로 베수비오 화산 주변의 넓은 농토와 주요 교통로, 항구가 있었던 로마시대 지방도시 중에서는 상업도시로 꽤 번창했던 도시이다.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 그대로 화산재에 파묻혔 있었던 폼페이 유적지에는 당시 생활상을 모여주는 많은 주택들과 생활 도구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현대 도시의 기준으로도 도로망, 수도, 공공건물들이 잘 배치되어 있는 도시로 로마시대 번창했던 도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폼페이의 중심인 포럼광장 뒷편으로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여러개의 주도로가 있고, 폼페이 시민들이 살았던 주택가들을 연결해 주는 크고 작은 도로들이 바둑판처럼 잘 짜여 있다. 도시의 중심인 포럼광장 뒷편으로는 휴양...

이탈리아(Italy) 2011.12.27

[중앙박물관 특별전] 중국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 사행과 화가들

조선시대 중국과의 무역과 인적교류는 명나라의 바다를 통한 무역을 금지한 해금정책에 따라 공식적인 외교절차로 사신들이 상호 방문하는 조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조공은 국가적인 중요한 행사에 사신단이 상호 방문하는 공식적인 절차였으며 사신행렬에 상인들이 참여하여 많은 무역이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중국과의 조공관계는 양국간에 상하관계를 의미한다고 하여 폄하가 되는 경향이 있으나, 당시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관례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은 총 500여회에 걸쳐 중국에 사신단을 파견하였으며, 조선에서 그 횟수를 늘려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북경을 방문하는 사신단에 참여함으로서 새로운 세상과 학문을 접할 수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사신단과 함께 중국을 방문하기를..

중앙박물관 2011.12.26

남한산성 사당과 비석군, 현절사와 청량당

병자호란은 인조 14년(1636) 겨울에 청나라와 조선간에 2번째로 벌어진 47일간의 전쟁이다. 당시 청나라는 만주족.몽골족.한인으로 이루어진 1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임경업 장군이 지키던 의주의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13일만에 서울을 공략했다. 인조는 원래 강화로 피난하기로 했으나 청군에 의해 길이 막혀 불가피하게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남한산성가 천혜의 요새라서 큰 전투가 없었지만 전쟁에 대한 대비가 부족해 혹한과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중 강화가 함락되고 주위 정세가 불리함에 따라 부득이 하게 삼전도에서 청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에는 여러 사당들이 있는데 그 중 병자호란 47일간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현절사와 청량당이 있다.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반대했던..

남한산성,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연무관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숙종대와 영.정조대에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방어상 취약했던 부분을 보강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산성 방어시설을 보완하는 것과 함께 행정적으로도 산성내 행궁을 설치하면서 광주목 관아도 산성내로 옮겨지면서 행정중심 도시로서의 기능도 함께 했다. 광주목사는 원래 외관직 정3품의 상당히 높은 관직이었으나 병자호란 이후에는 광주목이 광주부로 승격되고 고을 수령도 오늘날 장.차관급에 해당되는 광주유수로 승격되었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별도의 군사조직인 수어청이 정조대에 남한산성으로 옮겨지면서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남한산성내 동쪽편에 위치한 행궁은 광주부 수장으로서 행정의 중심지였다면 산성내 중앙도로 북쪽편에 위치한 연무관과 주위 건물들은 군사조..

남한산성, 지수당과 비상시 대비 물을 저장했던 연못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에 위치한 청량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남한산, 남쪽의 검단산 사이에 형성된 분지를 둘레 8km의 석축으로 쌓은 대표적인 조선시대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동쪽은 높고 경사진 지형이며, 동쪽은 완만하게 계곡이 형성되어 있는 천혜의 요새로서 지형적인 장점을 갖고 있는 곳으로 주위의 산으로 둘러싸여 산성내 물은 풍부한 편이었다. 산성내에는 비상시에 대비하여 3개의 큰 연못이 파고 물을 저장해 두고 있다. 원래의 연못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매몰되거나 훼손되어 현재는 2의 연못이 남아 있다. 연못에는 1672년에 부윤 이세화가 세운 정자인 지수당이 복원되어 있으며 1804년 유수 김재찬이 지은 관어정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 내에는 조선시대 차관급에 해당하는 군사조직인 수어사를 겸했..

[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특별전, 산성도시를 세우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숙종대와 영.정조대에 남쪽 성벽 부근을 비롯하여 방어상 취약했던 지점에 옹성을 쌓는 등 많은 보완이 있었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한강 동남쪽 지역을 관장하던 광주목 관아를 옮기고 행궁을 건설하는 등 행정적으로도 보완이 있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종묘와 사직을 갖춘 유일한 행궁으로 비상시 국왕이 거처할 수 있도록 대비를 하였다. 남한산성을 관장하던 광주목사는 원래부터 정3품의 높은 관직이었지만 병자호란 이후에는 광주부로 승격하여 종2품의 부윤 또는 정2품의 유수가 수장으로 있었으며,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조직인 수어청 수장인 수어사도 겸하게 되었다. 평사시 남한산성에는 약 천명 정도의 군사가 상주하였으며, 주민은 4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산성을 축..

남한산성, 동문인 좌익문(左翼門)

남한산성은 한강 유역이 내려다 보이는 서장대를 중심으로 주변 산능선을 따라서 석축을 쌓은 둘레 8km의 대표적인 조선시대 산성이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을 두고 있으며 좌익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동문은 광주지역과 연결되는 성문으로 한반도 중부내륙지방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동문은 산성내 행궁을 중심으로 좌측에 위치하고 있어서 좌익문이라고 부른다. 동문은 남문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가장 통행이 많았던 성문으로 광주에서 계곡을 따라 평탄한 길이 나 있기때문에 아마도 산성내 필요한 물자는 동문을 통해서 공급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동문은 지형적인 이유로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했기때문에 실제 우마차나 사람들의 통해은 남쪽편에 있는 제11암문을 이용했을 것..

[이탈리아여행] 폼페이, 포럼광장 뒷편 상가지역과 대저택(House of Pansa)

폼페이는 AD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과 함께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도시이다. 이 도시는 인구 2~5만 규모의 항구가 있는 상업도시이자 수도 로마의 휴양지 역할을 했던 도시이다. 현재 남아 있는 폼페이 시가지 유적들은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매우 가치가 높고 소중한 유적지이다. 이 곳에 남아 있던 모자이크 벽화, 조각상 등 아주 중요한 유물들은 주로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에 소장.전시하고 있고, 현재 유적지는 당시 도시의 모습과 구성, 주택 들을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남아 있다. 폼페이 도시의 중심지인 포럼광장 북쪽 쥬피터신전을 지나서 대로를 따라서 걸어가면,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주택들과 상가 등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폼페이 유적지를 걸어가다 보면 로마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모..

이탈리아(Italy) 2011.12.19

남한산성, 제3남옹성에서 동문(좌익문)까지

남한산성은 한강 유역이 내려다 보이는 서장대가 있는 청량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남한산, 남쪽의 검단산 사이에 형성된 작은 분지를 둘레 8km의 석축으로 쌓은 대표적인 조선시대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서쪽으로는 서울 송파나루를 비롯하여 성남을 거쳐 서울로 연결되고 있으며, 남쪽은 검단산, 동쪽으로는 경기도 광주를 거쳐 이천, 여주, 진천 등 한반도 중부내륙지역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성곽은 병자호란 당시 드러난 방어상 취약지점인 남쪽편 성벽 앞으로 설치된 3개의 옹성을 지나면 동문인 좌익문까지는 약간 경사진 지형을 따라서 성벽을 쌓고 있다. 남장대 부근의 평탄한 지형이 끝나는 지점에 설치된 방어시설인 치(雉)를 지나면 특별한 방어시설은 설치되어 있지 않고, 지형에 따라서 성벽과 여장만 설..

[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특별전, 병자호란 47일간 기록

남한산성은 수도를 방어하고 한강이남 주요 교통로를 지키기 위해 쌓은 천혜의 요새이지만, 병자호란 47일간 항전의 현장이자 치욕의 장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626년 청나라는 백마산성을 비롯하여 주요 공격로에 배치된 산성을 이용하고자 했던 조선의 방어전략을 무력화시키면서 이를 우회하여 무려 10여일만에 수도인 한양을 직접 공략하였다. 워낙 청나라의 전략과 군사적 능력이 출중하였던 까닭에 원래 강화도로 피신할 계획이었던 인조는 불가피하게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하였으나, 식량의 부족과 청나라의 효과적인 공략으로 47일만에 항복하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17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크게 변화시킨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전쟁기간은 47일에 불과하기때문에 이 전쟁에서 개별 사건이나 인물은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고, 당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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