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반응형

중앙박물관 289

[중앙박물관 고려실] 고려시대, 중국 송나라와의 교류

고려시대 중국에서는 오대십국을 통일한 송나라가 있었고, 북방에서는 거란,여진,몽골이 연이어서 크게 번성하였다. 고려와 송과의 관계는 북방 민족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발한 상호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로는 신안 보물선 등에서도 나타났듯이 송에서 만든 도자기류가 많은 것으로 보이며, 인쇄관련 서적류, 청동 거울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송(宋)은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통교하였다. 고려는 송으로부터 각종 서적과 예악.의학기술 등을 들여와 고려의 인쇄문화와 의료 및 각종 학문.사상과 의례를 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도자기.비단.약재.악기.차.향료.상아.물소뿔 등 지배층을 위한 사치품들을 주로 수입하고, 금.은.구리, 인삼.잣, 동물가죽, 마포, 화문석, 나..

중앙박물관 2012.02.10

[중앙박물관 고려실] 고려시대 금속화폐와 일상속 상류층 문화

고려시대에는 절제와 소박함을 강조하던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일상생활에서도 화려함과 세련된 문화를 향유한 사회였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화려한 색감과 형태의 고려청자를 비롯하여 물그릇으로 사용한 정병, 화려한 재질로 만들어진 생활용품 등이 남아 당시 지배층의 화려했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중국 송나라를 중심으로 활발한 무역거래가 있었던 시기로 신안 앞바다 등에서 발굴된 유물들에서도 알수 있듯이 도자기를 중심으로 송나라, 일본 등과 활발했던 무역활동을 엿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태안 앞바다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당시 강진가마에서 만들어진 청자들이 고려의 수도이 개경으로 운송하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무역..

중앙박물관 2012.02.10

[중앙박물관 고려실] 삼국사기, 고려의 관료 문벌과 향리

고려는 지방호족이었던 태조 왕건이 건국한 불교중심의 사회였지만, 국가를 움직이는 체제는 유학에 근거한 관료 중심의 사회였다. 강감찬, 윤관 등 고려를 대표하는 장군들도 사실은 문신일 정도로 문신 우위의 사회였다. 문신 우위의 사회를 대표하는 유물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를 들 수 있을 것이고, 각 문벌들의 흔적은 족보 등을 통해서 현재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관료와 문벌 고려시대 관료의 중심은 문신들이었다. 문신들은 정치와 일반행정은 물론이고 전쟁 시의 최고 지휘관도 도맡았다.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강민첨이나, 표청의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윤언이 등은 모두 문신들이었다. 문신으로 출세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5품 이상 고위 관료의 자식은 음..

중앙박물관 2012.02.09

[중앙박물관] 일본실, 일본의 회화

일본의 회화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싹텄다고 하며 초기 아스카, 나라 시대의 회화는 신앙의 대상으로 그려진 그림이 대부분으로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린 호류사 금당벽화가 고대 일본의 회화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중심이 된 불화가 일본회화에서 중용한 위치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회화는 간략화된 선과 화려한 색채가 인상적인 다양한 일본을 자연을 그린 풍경화와 각종 풍속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일본의 그림들은 한국이나 중국의 산수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으며, 이런 일본의 회화는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을 비롯하여 서구 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겐지모노카타리'는 11세기 초의 여성작가 무라사키 시키부의 장편소설로, 뛰어난 재능과 감성, 그..

중앙박물관 2012.01.31

[중앙박물관] 일본실, 도자기와 공예품

한국, 중국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역사를 같이하는 일본은 불교를 비롯하여 비슷한 점도 많지만 바다로 떨어져 있는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다른 부분도 상당히 많은 국가이다. 일제의 한반도와 중국 침략이라는 역사적 사건때문인지는 몰라도 문화재측면에서는 교류의 수준이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은 이웃나라이기는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박물관인 중앙박물관에서 조차도 일본을 대표하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 3층 아시아관 일본실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불교 관련 유물과 도자기 등 공예품, 그리고 회화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대부분은 임진왜란 이후인 에도시대 유물들과 현대 미술품들이다. 일본과 한국은 불교라는 부분과 동아시아 역사를 공..

중앙박물관 2012.01.28

[중앙박물관특별전] 일본 비와호지역의 불교미술, 호수에 비친 극락왕생의 염원

2011년 겨울 중앙박물관에서 '일본 비와호지역의 불교미술, 호수에 비친 극락왕생의 염원'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이 개최되었다. 가까운 이웃나라이지만 실제 접하기는 쉽지 않은 일본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전시회라고 할 수 있다. 제목과 마찬가지로 일본 교토 부근 비화호 지역에 산재한 불교문화재들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불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불교미술품을 우리나라의 것과 비교하면서 한번 살펴볼 수 있는 전시회가 되었다. 비화호가 있는 시가현은 고대에는 오미라고 불렸으며 백제유민들이 정착했던 곳이기도 하며, 동대사기 있는 나라지역, 수도였던 교토와 함께 많은 불교 유적들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 오미, 비와호, 그리고 불교전래 시가현은 고대에 오미라 불렸는데, 오미와 ..

중앙박물관 2012.01.27

[중앙박물관 특별전] 중국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 강세황과 1784년 사행

강세황(1712~1791)은 조선후기 영.정조대에 활약한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당시 한국 화단에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으며, 서양화법을 수용하는데도 기여한 인물이다. 재능이 뛰어나 시문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당대의 화가인 김홍도가 그의 제자라고 한다. 벼슬에 뜻이 없어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으며 60대에 과거에 합격하였다고 한다. 72세에 북경사행, 76세에 금강산 유람을 떠날 정도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진취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인화가라 할 수 있다. 강세황은 72세인 1784년에 늙은 몸을 이끌고 먼 북경 사행길을 떠났다. 젊어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작품활동에 전념했던 강세황이 60대에 관직에 들어가 그가 꿈꾸었던 중국을 70대에..

중앙박물관 2012.01.01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 태평성시도에 본 당시 중국의 도시생할

조선후기 중국 사행을 떠났던 화가들이 그렸던 당시 중국 도시의 풍경이다. 8폭으로 이루어진 이 그림은 실제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그렸다기보다는 중국 당시 보고 들었던 도시의 모습을 한 곳에 모아서 묘사하괴. 화면은 가내구역, 자연환경과 유흥구역, 군사훈련 구역르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시 도시의 상업활동에 비중을 두고 그려진 그림으로 보인다. 태평성시도, 조선후기 성(城)으로 경계 지워진 도시에서 생활하는 인물들의 활발한 모습이 그려 있으며 제3폭 어깨에 '太, 平 문자'가 써 있다. 중국 그림의 영향을 받아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도로에는 수레와 인파가 가득하고 번창한 상점과 화려한 건물이 등장한다. 화면의 구성은 상업구역, 가정 내의 생활과 가족관계를 보여주는 가내구역, 자연환경과 유흥의 ..

중앙박물관 2011.12.31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사행을 다녀온 화가들, 세한도(국보 180호)에 나타난 청나라 문인들과의 교류

조선시대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사행을 가는 것을 명나라때에는 천자에 조공을 간다는 의미로 '조천'이라고 불렀으며, 청나라때는 병자호란의 치욕도 있고 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조공이라는 뜻보다는 북경을 방문한다는 의미로 '연행'이라고 불렀다. 중국 사행을 오늘날 조공이라는 의미로 폄하하는 경향이 많지만 중국사회는 당시에는 넓은 세상과 문물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기때문에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관동팔경 유람과 함께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일 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 특히, 조선후기 영정조대에 들어서면서 청나라의 국력이 강성해지고 안정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다양한 형태로 중국을 방문했고,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저술한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당시 지식인들이 느낀점을 많은 기록으로 남겨놓고 있다. ..

중앙박물관 2011.12.28

[중앙박물관 특별전] 중국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 사행과 화가들

조선시대 중국과의 무역과 인적교류는 명나라의 바다를 통한 무역을 금지한 해금정책에 따라 공식적인 외교절차로 사신들이 상호 방문하는 조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조공은 국가적인 중요한 행사에 사신단이 상호 방문하는 공식적인 절차였으며 사신행렬에 상인들이 참여하여 많은 무역이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중국과의 조공관계는 양국간에 상하관계를 의미한다고 하여 폄하가 되는 경향이 있으나, 당시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관례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은 총 500여회에 걸쳐 중국에 사신단을 파견하였으며, 조선에서 그 횟수를 늘려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북경을 방문하는 사신단에 참여함으로서 새로운 세상과 학문을 접할 수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사신단과 함께 중국을 방문하기를..

중앙박물관 2011.12.26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실] 천자로 불린 고려왕, 고려 인종 장릉 출토 유물

고려가 살았던 시기는 몽골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북방 민족의 요.금과 중국 민족의 송, 그리고 서역의 많은 나라들이 존재했으며, 서로 견제 및 협력관계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고려왕은 형식상 조공관계를 유지했지만, 국제관계의 역학 구도에 따라서 왕이라 칭하기도 하고 천자라 칭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 유적 또는 유물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고려 역사를 대표하는 유물 또는 기록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조선초에 역사에 대한 세탁이 한번 있었던 관계로 그런 현상이 생긴것으로 보인다. 국립 중앙박물관에는 고려 왕에 대한 대표적인 유물로 인종의 무덤인 장릉에서 출토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천자로 불린 고려 왕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몽골이 일어난 13세기까지 동북아시아는 고려와 정통 중국 왕조인 ..

중앙박물관 2011.12.06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실] 호족의 시대와 후삼국 통일

통일신라 말기는 계속된 왕위쟁탈전으로 인해 극도로 혼란스러운 사회였으며, 중앙정부 통제력의 약화로 지방에는 다양한 호족세력이 등장한 시절이었다. 고려가 건국하기까지 약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이 시기에 속하지면, 워낙 혼란스러웠던 시절이었던 까닭에 많은 유물이 남아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기록에는 많은 사실들이 적혀 있으나, 유물로는 딱히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고려태조의 후삼국 통일 고려는 한때 후백제에 비해 다소 열세였으나, 태조 왕건이 불교계와 6두품 출신 지식인을 우대하고, 혼인정책 등으로 크고 작은 호족들을 적극 포섭하면서 점차 형세를 역전시켜갔다. 특히 "백성으로부터 조세를 거둘 때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백성들이 바쳐야 할 세금을 크게..

중앙박물관 2011.12.06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문서에 보이는 신라 마을의 모습, 일본 정창원 문서

한반도에서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청동기시대가 아닐까 생각된다. 문헌상으로도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존재했고, 기자나 위만의 존재가 있었고, 중국에서 한반도 연안을 거쳐 일본으로 연결되는 해상무역이 활발히 이루졌기때문 낙랑지역을 비롯하여 창원 다호리, 김해 예안리 유적 등에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기때문에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한자를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한자를 사용한 기록은 고대국가에서 부터 목간이나 토기를 비롯한 생활용품에 새겨진 명문,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기록한 비석의 형태로 많이 남아 있다. 반면에 한나라에서 발명된 종이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한반도에 도입되었으나 종이에 적혀진 문서의 형태로는 남아 있는 유물을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중앙박물관 2011.11.26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이두와 향찰의 발명,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우리나라에 한자가 수용된 이후 우리말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두, 향가, 향찰, 속자, 구결 등 다양한 형태로 방법들이 만들어졌는데, 보통 이를 통털어서 이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두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서 우리말을 적던 표기법으로 삼국시대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고려때에는 이서라는 형태로 하급관리들이 공문서나 관용문에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보통 이두는 넓은 의미로 한자를 차용해서 음을 표기한 것을 통칭하며, 현재의 일본어 또한 이두와 비슷한 개념의 문자라 할 수 있다. 이두는 신라초기부터 사용되어 진 것으로 보이며 서동요, 제망매가 등 다양한 문학작품이 이두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 신문왕때 설총이 기존의 이두사용법을 정리하여 크게 발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두의 사용은 삼국유..

중앙박물관 2011.11.22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삼국시대 사상,종교와 문자

고대국가에서 국가나 집단간의 교역을 위한 경제적인 동기와 지배계층의 권위를 나타내거나 통치를 위해서 문자의 사용이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자의 기원 또한 길흉화복을 점치는 행위에서 그 내용을 기록하는 갑골문자 등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종교적인 행위가 당시에는 지배계층의 통치를 위한 정치적인 활동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대국가에서 통일신라까지 시기의 문자 기록 중 상당수는 종교적인 행위와 관련이 있는 것이 많다. 대표적으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은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며, 가장 오래된 문서 또한 붓으로 쓴 사경이다. 삼국시대에는 종교적인 내용이 담긴 목간이 많이 출토되고 있으며, 중국의 능묘제도가 받아들여진 이후에는 개인의 업적을 칭송한 묘지비..

중앙박물관 2011.11.20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삼국시대 글자가 새겨진 토기와 기와

삼국시대 사람들이 문자를 사용했던 흔적들은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돌에 글을 새긴 비석일 것이다. 비석에서는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후대에 만들어진 역사서 등을 통해서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반면에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한 문자는 화물이나 물건의 꼬리표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던 목간이나 그릇, 건축에 사용한 벽돌이나 기와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기와나 토기는 전국적으로 많이 발견되는편인데, 주로 제작연도나 제작자, 제작경위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이런 유물들 중 지명이나 마을이름 등이 적혀 있는 것에서 당시 이런 물건들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집..

중앙박물관 2011.11.18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삼국시대 목간과 글자가 새겨진 생활용품

목간은 글을 적은 나뭇조각으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문서라고도 할 수 있으며 책(冊)이라는 한자의 어원이 된다. 대개 나무를 폭 1cm, 길이 20~30cm, 두께 3mm 정도로 끈으로 묶어서 사용했는데, 지금의 책과 비슷한 크기라고 할 수 있다.논어를 비롯한 춘추전국시대의 다양한 저서들이 적혀 있는 목간들이 중국에서도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목재가 잘 부패하지 않는 사막이나, 뻘에 묻혀 있던 상태로 많이 발견된다. 목간은 우리나라에서 여러지역에서 발견되는데 특히, 경주 안압지를 비롯하여 삼국시대에 적혀진 목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목간은 고조선때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한.중.일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지역에서는 교역을 위한 경제적인 목적으로 한자..

중앙박물관 2011.11.17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삼국시대의 비석

비석은 어떤 인물이나 사건 등을 기념하기 위해 돌.목재.철재 등에 글자와 조각 등을 새겨 넣은 기념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돌에 글자와 조각상을 새겨놓은 것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이를 통해 오늘날 사람들이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비석과 같은 형태의 기념물로는 고대 메소포타미의 함무라비법전,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석할 수 있게 단초를 제공해 준 로제타스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석들이 남아 있다. 동양에서 비석은 주로 돌에 글자를 새긴 석비의 형태로 중국 주나라부터 시작되어 한대와 당대를 거치면서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을 갖춘 전형적인 석비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비석 중..

중앙박물관 2011.11.16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삼국의 문방구

한자가 한반도에 전래된 이래로 문자생활을 사용했던 문방구로는 기본적으로 종이,붓,먹,벼루가 구한말 이후 새로운 필기도구들이 등장하기까지는 사용되었다. 삼국시대 이전의 문방구가 이후와 다른점은 글자를 적는 필기도구로서 목간, 죽간 등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목간은 종이가 발명대기 이전인 진한(秦漢)시대와 그 이후에도 종이와 함께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간은 끈으로 엮은 얇은 나무판에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으로 책(冊)이라는 글자의 어원이 되며, 종이가 발명된 이후에도 상당히 오랜기간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도 문자가 도입된 이래로 목간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창원 다호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붓과 지우개 역할을 했던 칼에서 알 수 있듯이 교역을 위한 실무적인 목적에서 먼저 사용되었던 것으로..

중앙박물관 2011.11.12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문자의 수용

한반도에서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청동기시대로 중국과 비슷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고조선은 전국시대부터 중국 연나라와 교역이 활발했으며, 명도전이나 오수전 등의 화폐들이 중국과의 교역통로에 위치한 지역에서 많이 출토된다. 또한 전국시대나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많은 연나라지역 사람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기자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고조선은 중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문자를 사용했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문자 사용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고조선시대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까지 발굴되고 있는 문자와 관련된 유물들은 주로 한.중.일 해상교역로에 분포해 있는 삼한지역..

중앙박물관 2011.11.12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