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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2797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보물228호)과 석종비(보물229호)

신륵사는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선사가 마지막으로 입적하면 그의 제자들이 크게 중창한 사찰로 세종대왕 영릉이 여주로 옮겨지면서 원찰로 크게 번창한 사찰이다. 조선초기 무학대사가 주지로 있으면서 왕실과 관련이 깊었던 대표적인 원찰인 양주 회암사와 관련이 깊은 사찰이기도 하다. 현재의 신륵사는 조선중기 성종대에 크게 중창될 때의 모습이 여러차례 중건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말.조선초를 대표하는 승려인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의 영정이 모셔진 조사당 뒷편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는 신륵사를 크게 중창시킨 나옹선사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이 있다. 나옹선사의 승탑은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정형화된 목조 건물 형태를 하고 있는 승탑과는 달리 인도의 승탑인 스투파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

[대구박물관] 고대국가 형성기의 대구.경북

고조선이 한나라에 의해 멸망된 이후 한반도 북쪽과 만주에는 부여가 고대국가로 존재하고 있었고 부여의 일파인 고구려가 신흥세력으로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있었다. 고구려 남쪽으로는 함경도 동해안 지역에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연맹체 성격의 동예와 옥저가 존재했다. 한반도 남쪽에는 고조선세력이 남하하여 토착세력과 합쳐진 삼한이 진국에 이어서 오랜 기간 존속하였으며, 백제.신라.가야연맹체가 신흥세력으로 부각되고 있었으며 이 시기를 원삼국시대라고도 부른다. 대구.경북지역은 진한.변한.마한으로 구성된 삼한 중에서 진한이 연맹체 형태로 존재하였으며, 고령지역의 대가야, 경주지역의 신라가 점차 고대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진한은 경주 사로국을 비롯하여 12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었는데, 소국의 규모는 그리 크..

지역박물관 2013.04.20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 경상도 관찰사가 근무하던 정청 건물

선화당(宣化堂)은 관찰사가 근무하던 감영의 정청으로 이름이 없거나 고유 이름이 있는 일반 동헌 건물과는 달리 감영 정청은 '선화당'이라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선화당에서는 관찰사가 주관하는 주요 업무 및 중요한 송사, 재판 등이 행해졌다. 조선시대 감영에는 정청인 선화당을 중심으로 많은 부속건물들이 있었지만, 대도시 중심부에 위치해 있던 까닭에 남아 있는 건물은 거의 없는 편이다. 정청 건물인 선화당은 충청감영, 강원감영, 경상감영 선화당이 남아 있고, 객사는 전라감영 전주객사가 남아 있다. 조선초기 관찰사는 임기 2년(조선초는 1년)으로 지역을 순회하면서 근무했기때문에 감영이 별도로 설치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며, 경상감영은 경주, 안동, 상주 등이 감영역할을 하였다. 조선중기부터 관찰사가 한..

조선 관아 2013.04.19

화성 전곡항, 수많은 요트들이 정박해 있는 이국적인 풍경의 어항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에 있는 작은 어항인 전곡항이다. 전곡항이 위치한 곳은 화성 동쪽에 위치한 큰 섬인 대부도를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전곡항 부근은 삼국시대 신라가 당나라와 뱃길을 열기위해 쌓았던 당성과 가까이 있는 포구로 대부도와 육지사이의 수로가 시작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전곡항은 전곡리 해안 갯벌에 있던 작은 섬을 연결하여 수심을 확보하고 많은 배들을 정박할 수 있게 바깥바다쪽으로 위치를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전곡항은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장점을 활용하여 전국 체조로 레저어항 시범지역으로 선정되어 바깥바다쪽으로 방파제를 설치하고 수심을 확보하여 서해안 어항중에는 드물게 썰물과 상관 없이 24시간 배가 드나들 수 항구이다. 전곡항은 어선들을 위해 개발한 항구는 아니고 레저용 요..

한국의 풍경 2013.04.15

대구 경상감영 징청각, 관찰사가 머물던 거처인 내아

대구시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공원은 조선시대 경상감영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관아건물들이 해체되면서 대구시와 경북도를 관할하는 많은 관청건물들이 들어서 있던 곳이다. 원래 경상감영에는 응향당, 제승당, 응수당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옛 관아 건물로 관찰사 집무공간이었던 선화당과 살림집인 징칭각이 남아 있다. 선화당 뒷편에 위치한 징칭각은 관찰사가 머물던 살림집으로 1601년(선조34)에 대구에 감영이 설치될때 세워진 건물로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06년(순조6)에 중건한 것이라 한다. 일제감정기에 감영을 해체하고 감영에 경북도청이 설치될 때 많은 건물들은 없어졌지만 징칭각은 사무실로 개조하여 사용했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70년 이곳에 중앙공원을 조성하면 대청마루만 있..

조선 관아 2013.04.15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230호), 목은 이색이 대장경을 인쇄하고 대장각을 세운 내력을 적은 비석

여주 신륵사 경내 동쪽편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남아 있는 비석인 보물 230호로 지정된 '신륵사 대장각기비'이다. 이 비석은 고려말 유학자이자 조선의 건국에 반대했던 대표적인 충신이었던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장경을 인쇄하고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우면서 그 내력을 적은 비석이다. 비석은 연꽃무늬를 새긴 대석위에 대리석에 글씨를 적은 비몸을 세우고 양쪽에 기둥을 댄 다음 그위에 지붕을 놓은 형태로 조선초기 비석의 형식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대장경을 보관하던 대장각은 2층으로 지어진 건물로 아마도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곳에 정자처럼 지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쪽에 세워진 다층석탑, 삼층석탑과 함께 신륵사를 대표하는 건물로 이정표 역할을 했던 건물이었던 것..

화성 제부도, 바닷길이 열리는 서해안 작은 섬

제부도는 화성면 서신면 대부도 남쪽편에 있는 작은 섬으로 서해안에서 바닷길이 열리는 섬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낮은 구릉과 주변 평지로 이루어진 섬으로 밀물때 1시간 정도 잠기기는 하지만 사실상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제도도 동쪽으로는 육지와 약 1.8 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고,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서쪽 해안은 큰 파도가 몰고 오는 모래가 쌓여 있는 약 1km 정도의 백사장이 형성되어 있어 해수욕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밀물때를 제외하고는 바닷길이 열리는 자연현상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서해안에서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대표적인 섬 중의 하나이다. 제부도 위치한 남양만 일대는 삼국시대 신라가 중국 당나라와 뱃길을 열었던 당항성이 있는 지역으로 한.중.일 연안항로..

한국의 풍경 2013.04.14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226호)과 삼층석탑, 남한강 수로와 나룻터 이정표가 되었던 탑

신륵사 경내 동쪽편 남한강가 넓은 바위에는 다층전탑과 작은 삼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벽돌로 쌓은 전탑은 신륵사를 찾는 사람뿐만 아니라 배를 타고 남한강을 오가는 많은 선박들에게 등대나 이정표같은 역할을 했던 탑이다. 다층전탑은 벽돌로 쌓아서 만든 전탑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시대에 중건하면서 옛모습고 벽돌로 쌓은 전탑은 우리나라에서는 많지 않은 형태이고 많은 나람들이 오가는 남한강 나루터에서 눈에 띄는 이정표가 되었기때문에 신륵사를 벽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탑 아래 바위 위에는 고려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는데,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화상을 화장한 장소라고 한다. 신륵사 다층전탑 탑은 화강석으로 쌓은 기단위에 벽돌로 몸돌을 쌓고 그 ..

화성 당성(사적 217호), 당항성이라 불렸던 신라의 대외 창구

당항성이라고도 불리는 당성은 수원 서쪽 대부도 부근 해안지역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소재하고 있는 산성이다. 당성은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포용하여 대략 삼각형에 가까운 형상으로 석루를 돌렸으며 소규모나마 포곡식 산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삼각형의 2변에 해당되는 서북.동북면은 능선을 이용하여 구축하였는데 석축이 형태는 잘 남아 있느나 표면은 흙과 잡초가 덮혀 마치 토루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서북 능선을 통과한 부분의 석축은 거의 잡초와 작은 수목이 우거진 토축처럼 바뀌어 있다. 성벽의 둘레는 약 1,200m로 산성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당성이 위치한 화성군 남양지역은 원래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유한 이후 당성군이라 불렀으며 조선 태종때 전국의 지방조직을 정비..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225호), 대리석으로 만든 조선시대 석탑

신륵사 주불전인 극락보전 앞 마당에 세워져 있는 다층석탑은 높이3m로 석탑으로서는 크지 않은 편이며 통일석탑이나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경천사지 석탑 등에 비하면 아담해 보이는 석탑이다. 고려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전통적인 삼층석탑 또는 오층석탑과는 달리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탑으로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도교풍의 장식이 많은 경천사지석탑의 특징을 이어받은 석탑으로 보이다. 신륵사가 세종대왕 영릉의 원찰 역할을 부여받아 크게 번창했던 성종대에 중창된 다른 불전들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서울 탑골공원에 남아 있는 세조대에 세워진 원각사지십층석탑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때 원각사 석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성종대에는 세조의 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불교를 크..

이천 설봉공원, 도자기 축제가 열리는 이천 도심 공원

이천 설봉공원은 이천시 도심 서쪽편 설봉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도심공원이다. 원래부터 이천의 도심공원이었지만 수년전 이천.광주.여주 일대에서 도자기엑스포가 개최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천시의 진산이라 할 수 있는 삼국시대 산성이 남아 있는 해발 394m의 설봉산 자락 아래 위치하고 있다. 설봉산 계곡을 막아 조성한 저수지인 설봉호를 중심으로 다양한 공원시설과 산책로 등이 조성되어 있다. 설봉공원에는 야외공연장, 미술관, 조각공원, 도자기센터 등의 문화시설과 현충탑, 충효공원을 비롯한 공원시설, 최근에 복원한 이천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인 고려초 거란과 담판을 이끈 서희를 비롯하여 조선중기 문신인 김안국 등을 모신 설봉서원, 전통사찰인 영월암 등이 들어서 있다. 설봉공원은 관광객들이 ..

한국의 풍경 2013.04.10

서울 석파정, 인왕산 자락에 자리잡은 흥선대원군 별장

서울 종로구 부암동 인왕산 동쪽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구한말 흥선대원군 별장이었던 석파정이다. 이 별장은 구한말 세도정치기 권력층이었던 안동김씨 일원으로 철종때 영의정까지 올랐던 김흥근이 세웠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은 집권한 뒤 반강제적으로 헌납받아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했다고 하며, 고종도 이 곳에 가끔 머물렀기때문에 행궁의 역할도 했던 건물이다. 조선시대 수도 한양에서 가장 가까운 경치좋은 숲과 계곡이 많았던 부암동에 자리잡은 이 별장은 주변에 인왕산, 북악산 등 바위산이 많아 대원군은 '삼계동 정자'라 불리웠던 것을 '석파(石坡)'라 이름집고 자신의 호도 '석파'로 바꾸었다. 석파정은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흥선대원군의 후손들이 소유하다가 한국전쟁 후 고아원.병원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최근에는 사설미술관인..

고택_정원 2013.04.10

여주 신륵사 조사당(보물 180호),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지공,나옹,무학대사 영정을 모신 곳

여주 신륵사는 남한강변에 위치한 고찰로 삼국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내용은 아닌것으로 보고 있으며, 고려말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입적하면서 크게 번창한 사찰이다. 고려시대 남한강변 수운과 교통로상에는 큰 절이 많았는데 당시 신륵사는 상대적으로 그 위상이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부근에 있던 고달사가 여주지역에서는 큰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는 조선시대에 억불정책으로 폐사되었던 주변의 다른 사찰들과 함께 크게 위축되었다가 예종대에 세종대왕 영릉이 여주로 천장되면서 원찰로서 주변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에는 나옹선사 부도를 비롯하여 고려시대 석탑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사찰건물 대부분은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나옹선사를 비롯..

태안 안흥항, 태안반도 남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큰 어항

안흥항은 태안반도 남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항구이다. 안흥항은 역사 이래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항로 중 하나였던 한반도 남서해안에서 그 역사가 오래된 항구 중 하나이다. 서해바다 먼곳에 돌출되어 있는 지형적 조건과 항구 바깥쪽에 신진도라는 섬이 먼바다에서 오는 큰 파도를 막아주고 있어 항구로서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주고 있다. 안흥항은 고려.조선시대 세금운송 수단이었던 연안항로를 따라서 운행하던 조운선이 지나가는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중국 산동반도에서 요동지역 해안을 거치지 않고 한반도와 직접 연결되는 항로가 개척된 이후 중국과 교류하는 대외창구가 되었다. 삼국시대 백제의 수도가 웅진과 사비에 있었던 시기에는 중국 남북조와 백제가 교류하는 창구였으며, 조선시대 명나라가 몽골과 청나라의 압박으로 ..

한국의 풍경 2013.04.08

이천 설봉서원, 고려시대 거란과 담판으로 큰 외교적 업적을 남긴 서희를 모신 서원

설봉서원은 이천시 관고동 설봉산성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서원이다. 설봉서원은 고려초기 거란과의 외교에서 큰 공을 세운 문신이었던 서희를 비롯하여 이관의, 김안국, 최숙정을 모신 서원이다. 우리나라 서원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인 명종대에 이천부사 정현이 지역유림의 건의에 따라 세운 서원으로 이천출신 인물 중 빼어난 업적을 보인 인물들을 모신 서원으로 최치원 등을 모신 경주 서악서원과 비슷한 성격의 초창기 서원이라 할 수 있다. 문중 중심 또는 조선시대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 아니었기때문에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된 서원이다. 서원 건물은 사당, 강당, 동.서재로 구성된 전형적인 서원의 건물배치를 하고 있다. 이천시 도심에서 가까운 설봉공원내에 있어 공원을 찾거나 설봉..

여주 효종 영릉(사적195호), 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조선 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인 영릉이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모신 영릉에서 북동쪽으로 700여m 정도 떨어진 남한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왕릉이다. 효종의 능은 원리 구리 동구릉 건원릉 서쪽편에 있던 것을 현종대인 1673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당시 석물에 틈이 있어 봉분안으로 비가 샐 염려가 있다는 여론이 있어서 능을 옮기기는 했는데, 실제로 별 문제가 없어 이에 연루된 인사들이 면직을 당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산릉의 조성과 천장 등에 관련하여 세력간 대립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왕릉은 왕과 왕비의 능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는 동원상하릉으로 효종 영릉이 최초의 사례이며 이후 경종과 선의왕후의 의릉이 이런 형태를 하고 있다. 단지 왕릉을 두르는 담..

서울 장교동 한규설가옥, 구한말 상류층이 살았던 도심 한옥

서울 정릉 국민대학교 교정으로 옮겨진 장교동 한규설 가옥이다. 이 가옥은 서울 도심 청계천 하류에서 다섯번째 다리였던 장통교부근에 있던 가옥이다. 장교동은 조선시대 서울의 5부 52방 중 장통있었던 곳이라고 하며 부근에 긴 창고건물이 있어 청계천 다리를 창창교라 불렀으며 장교동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청계천 광통교와 장통교 일대는 지금도 서울에서 제일 번화한 도심으로 구한말 역관과 의관 등 기술직 중인들의 집중적인 거주지였다. 오늘날 이들의 직업은 의사, 외교관에 해당하는 전문직으로 서구문물의 도입과 함께 이들이 실세로 떠오르던 인물들이었다. 한규설(1848~1930)은 무관출신으로 구한말 대한제국 한성판윤(서울시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일제와 의사늑약 체결을 극구 반대하다 파직되었으며, 일제에 ..

고택_정원 2013.04.06

이천 설봉산성 (사적423호), 한강 유역을 다투던 삼국시대 산성

설봉산성은 이천시 도심 서쪽에 위치한 해발 394m 설봉산 정상 동북쪽 능선, 칼바위 주변에 남아 있는 옛 산성터이다. 능선 주변에 석축을 쌓은 테뫼식 산성이라고도 하며, 계곡을 감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라고 한다. 삼국시대에 처음 쌓은 산성으로 성벽은 대부분 흙으로 쌓고 일부 돌로 쌓은 석축도 있는데, 원래의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고 칼바위 부근에 복원한 성벽을 볼 수 있다. 산성 내부에는 주춧돌이 질서 있게 배치되어 있는 건물터와 봉수대가 있다. 이 성을 쌓은 축성연대는 백제시대 유물이 발굴되어 백제가 처음 쌓았다는 의견이 있으며, 백제.신라.고구려가 한강유역을 다투던 시기에 고구려군이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설봉산은 경기도 내륙 남한강 이남 지역에서 비교적 농토가 넓고 질좋은 쌀 생산지로..

여주 효종 영릉 재실 (보물 1532호)과 세종 영릉 재실

재실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재실과 비슷한 건물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조선이 들어서 왕릉을 세우고 유지하기 위한 규범인 산릉제도에 재실이 포함되면서 능역뿐만 아니라 일반 사대부에서도 조상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재실을 짓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재실 건물은 외형상 일반 가옥과 비슷하면서도 많은 사람이 참석하기 위한 공간으로 넓은 대청마루, 마루와 연결되어 같은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온돌방,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 등으로 이루어진다. 선현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나 문묘에 딸린 강학공간 또한 재실의 기능을 확대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왕릉을 조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산릉제도에 따라 재실은 홍살문 바깥쪽 ..

인천도호부청사,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 관아건물

인천시 문학동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 옛 인천도호부청사이다. 객사 일부와 동헌 건물이 남아 있는데 원래 건물을 일제강점기 이후 다른 용도로 사용하면서 건물에 많은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들은 인천도호부가 처음 생긴 조선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 기와 명문에 숙종대인 1677년(숙종3)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후기에 크게 중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시에서 최근에 옛 인천도호부 관아건물들을 문학경기장 건너편 인천향교가 있는 언덕에 복원하였는데,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변형이 많이 되어서 그런지 옛 건물들을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남겨두고 새로운 건물들을 신축.복원해 두고 있다. 인천도호부는 이 지역에 있던 지방행정기구로 종3품 부사가 고을 수령이었다...

조선 관아 201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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