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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정상 봉수대 아래 케이블카 타는 곳 풍경

서울 도심에 자리잡고 있는 해발 262m의 낮은 산인 남산은 한강과 함께 천만 서울시민에게 휴식공간과 숲이 주는 많은 이로움을 주는 곳이다. 남산을 오르는 방법은 서쪽편 남산도서관에서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는 것고, 동쪽편에서 산책길을 걸어서 오르는 길 등 많은 경로가 있지만, 그 중 가장 편한 것은 아무래도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길이다. 남산케이블카는 남산순환도로에서 출발하여 남산정상 봉수대아래까지 연결된다. 최근에는 도심에서 출발하여 남산3호터널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케이블카 승강장 입구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남산을 오르는 케이블카는 정상 봉수대 아래에서 내린다.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을 오른다는 것이 약간 밋밋한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만, 도심의 풍경을 하늘에서 가까이 본다는 것 또한..

한국의 풍경 2012.04.26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병자호란 최대의 패배가 있었던 곳

남한산성 북문에 해당하는 전승문이다. 이 성문은 원래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부터 있었던 성문은 아니고 인조때 신축한 성문이라 한다. 이 곳의 이름은 '전승문'이라고 부르는데 이 곳이 병자호란 당시 가장 큰 패전이 있었던 장소라서 그 사실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혔다고 한다. 남한산성에서 북문은 서울 강동지역 한강유역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북문 아래쪽은 통일신라시대 한강유역을 관리하는 주요 방어시설인 이성산성과 고려초 크게 세력을 떨쳤던 광주지역 호족의 근거지인 하남 춘궁동과 연결된다. 정문격인 서문과는 달리 일반적인 성곽의 성문과 비슷한 규모로 지었으며, 이 쪽 방면으로는 계곡을 통해서 접근하기는 쉽지만, 계곡과 주변 지역이 경사가 있는 편으로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형을 하고 있다. ..

[김해박물관] 고대 무덤양식인 돌덧널무덤, 돌널무덤, 고인돌을 볼 수 있는 야외전시장

금관가야 탄생설화가 있는 김해 구지봉 언덕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김해박물관은 낙동강하구지역을 중심으로 가야문화권의 유물을 체계적적으로 정리하여 전시하고 있는 국립박물관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도 대부분 삼국시대 가야연맹체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김해 양동리, 대성리 고분의 출토된 금관가야 유물을 중심으로 삼한시대 유적지인 창원다호리, 사처늑도와 대가야 유적지인 합천 옥전동, 고령 지산동 고분군, 아라가야 유적지인 함안 도항리, 말산리 고분군의 유물들과 경남지역의 삼한시대 변한과 가야연맹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지 않은 경주, 부여박물관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고고학 전문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박물관 건물은 철의 왕국 가야를 상징하는 철..

남한산성 장경사, 산성을 쌓고 지키던 승병들어 거처하던 사찰

병자호란에 대비하면서 조선은 한강이남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였던 남한산성을 크게 개축하면서, 전국의 많은 승병들을 동원하였다. 이 때 벽암각성선사가 조선8도의 도총섭이 되어 승려를 지위하여 남한산성을 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후에도 남한산성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 받았다. 남한산성내에는 이때 동원된 승려들을 위해 9개의 사찰이 지어졌다고 하며, 산성내 중심지에 위치한 개원사가 그 중심이 되는 사찰이었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에 세워진 9개의 사찰 중 현재는 본영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는 개원사를 비롯하여 망월사, 장경사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데, 이 사찰들은 대부분 남한산성 방어에 취약점을 가지고 있는 남쪽편 검단산 방향과 외성인 봉암성과 한봉성이 있는 망월봉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그..

전국 사찰 2012.04.25

남한산성, 동장대에서 북문인 전승문까지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 청량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으로 사방의 지형이 험한편으로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 북쪽 하남 춘궁동은 고려시대 절터인 춘궁동사지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중요한 산성이었던 이성산성이 있으며, 고려초 세력을 떨쳤던 광주지역 호족의 근거지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이 지역을 관할하던 광주목 관아는 남한산성에 위치하고 있는데, 광주향교는 아래쪽 춘궁동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원래 관아가 있는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성산성 주변은 대표적인 통일신라시대 지방 유적지로 한성백제의 수도인 몽촌토성, 풍납토성과 가까이 있으며,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에 의지하여 외부세력의 공격에 대응하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북문 아래의 계곡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

김포 우저서원(牛渚書院), 전형적인 경기지역 서원

수도권 지역에는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서원이 김포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자 유학자인 중봉 조헌 선생을 모시고 있는 김포 시내에 자리잡고 있는 우저서원이다. 우저서원은 낮은 야산 아래에 한강과 김포평야지대를 바라보고 있는 고풍스러운 서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저서원은 수도권에 소재한 서원이라서 그런지 고종때 서원 철폐령에 의해 제외되었던 서원 중의 하나이고, 규모도 지방의 서원에 비해서는 크지 않다. 우저서원은 조헌선생을 모신 사당과 학생들이 공부하는 강당, 동.서재로만 이루어져 있다. 조헌은 김포출신으로 조선중기의 유학자이자 임진왜란 당시 크게 활약한 의병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명종대에 급제하여 전라도사, 통진현감, 보은현감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관직에 물러난 뒤로는 충청도..

[김해박물관] 가야의 대외교류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 한반도남부지역에 자리잡았던 진국과 삼한시대에도 한반도는 한.중.일 무역에 있어서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이유 중 하나가 고조선이 해상연안무역을 통제하면서 이익을 얻었기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생겨났던 많은 성읍국가들 중 상당수가 한.중.일 해상무역로에 위치한 충청도 서해안, 영산강 하구의 나주지역, 한반도 동남부의 사천, 창원, 울산지역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 지역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청동제 의기 등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그 중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가야는 일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잇점으로 고대 이래로 한반도와 일본, 중국을 연결하는 주요 거점 중 하나로 파도가 거센 대한해협을 건너기 위해 잠시..

지역박물관 2012.04.23

남한산성 봉암성과 한봉성, 동쪽편 벌봉과 한봉 주위 능선에 쌓은 외성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에 위치한 해발 498m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의 연주봉, 동쪽의 망월봉과 벌봉, 남쪽의 여러 봉우리를 연결한 둘레 약 8km의 상당히 큰 규모의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지형은 대체로 동쪽 계곡을 제외하고는 성벽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편이며, 내부는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분지를 이루고 있어서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천혜의 요새였던 이 곳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마지막 항전을 하였던 곳으로 실제로 인조가 항복하게 된 것은 산성이 점령되었기때문이라기 보다는 강화도가 함락되고, 산성내에 비축한 식량이 부족하였기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 기간 중 대체로 청나라군사의 공격을 적절히 막아낼 수 있었지만, 남쪽의 검단산과 연결된 능선, 동쪽의 벌봉,한봉과 연결된 능선에서 청..

[덕수궁] 편전인 즉조당과 준명당, 석어당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 뒷편에는 편전에 해당하는 석어당, 즉조당과 준명당이 자리잡고 있다. 덕수궁이 구한말 국왕이 거처하는 정식 궁전으로 바뀌면서 많은 건물들이 새로 지어졌지만, 이 곳에 있는 석어당과 즉조당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처했던 전각들을 보존한 곳이다.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오른 곳이고, 석어당은 선조가 거처하다 승하한 유서깊은 건물이다. 덕수궁은 경복궁과는 달리 정전을 둘러싸고 있었던 행각이 남아 있지 않고, 즉조당 옆으로 서양식 건물이 석조전이 세워졌기때문에 다른 궁궐과는 달리 개방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편전 건물 중 석어당은 현존하는 유일의 목조 2층집으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소박한 살림집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건물로 임진왜란 당시 임시로 궁궐로 사용했던 건물 중 대부분은 1..

궁궐_종묘 2012.04.23

[김해박물관] 가야의 상형토기, 가야토기의 아름다움

상형토기는 사람이는 특정한 사물의 형태를 본떠서 만든 토기로 삼국시대 신라와 가야의 고분 등에서 주로 출토되는 토기의 형태이다.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상형토기는 용기로 쓰였던 기존의 토기와는 내부의 형태는 비슷해 보이면서도 그 용도는 무덤의 부장품으로 묻혔던 토우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상형토기에는 사람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 것, 동물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것, 집이나 신발 등 기물의 형태를 본떠서 만든 것이 있다. 이들 상형토기는 인물,동물,기물의 형태를 간략화시켜서 표현하는 조형미적으로 그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 상당수 있으며, 표현한 사람이나 기물 등을 통해서 당시의 주거, 복식, 무기 등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경우도 많다. 상형토기는 주로 낙동강 유역 주변에서 출토되는데 ..

지역박물관 2012.04.22

남한산성, 장경사신지옹성에서 망월봉 정상 동장대까지

남한산성은 수어장대가 설치된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해발 497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여러개의 봉우리와 능선을 성벽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내부는 물이 풍부하고 병사와 주민이 머무를 수 있는 분지를 형성하고 있어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쪽의 해발 542m의 검단산과 동쪽의 해발 515m의 벌봉 주변이 남한 산성 본성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곳을 통한 공격에 취약한 점이 있으며, 실제로 병자호란 당시 벌봉과 검단산 능선을 청군이 점령하여 강력한 화포로 본성을 공격하여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동쪽편에는 외성인 봉암성과 한봉성을 쌓고 남쪽편 검단산에는 신남성 돈대를 쌓았다. 또한 외성과 돈대를 엄호하기 위해 주변 여러곳에 옹성도 설치하였다. 남한산성..

[김해박물관] 가야의 철제무기와 판금갑옷

낙동강 하구에서 철을 중심으로 해상무역을 통해 크게 번성하였던 가야는 연맹체라는 정치적 특징으로 인해 강한 중앙집권적 국가로는 발전하지 못했지만, 해상교역을 통해 백제, 중국, 일본과 교류하면서 무기 등 기술적인 면에서는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맹체 세력이었던 가야에는 많은 고분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데, 이들 고분군에서는 삼국시대의 무기들을 보여주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가야의 고분에서 출토된 무기류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고대 로마나 중세 유럽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판금갑옷들과 말에게 씌웠던 말갑옷일 것이다. 판금갑옷은 여러개의 철판을 못이나 가죽끈으로 결합한 것으로 그 형태는 로마 보병의 갑옷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실제 판금갑옷은 외형상 화려하고 튼튼..

지역박물관 2012.04.21

남한산성, 제1암문에서 장경사 신지옹성까지

남한산성 동쪽편 성벽은 장경사에서 정상부에 해당하는 벌봉부근까지는 아래쪽은 언덕의 경사가 있는 편으로 적의 침입을 제압하기는 수월하지만, 정상부에서는 동쪽의 벌봉 주변과 능선으로 연결되어 방어가 취약했던 부분으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동쪽편 봉우리를 장악하여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던 곳이다. 이런 까닭에 중턱부분에 장경사 신지옹성이 설치되었고, 본성 바깥쪽에 외성으로 봉암성과 한봉성이 설치되었있다. 이들 옹성과 외성들은 병자호란이 끝난후 당시 전투상황을 반성하면서 남한산성의 기능을 보완하는 측면에서 숙종대에 화포와 총포 사용을 전제로 신축된 것들이라고 한다. 남한산성을 축성하고 지키기 위해 동원한 승병들을 위해 지은 사찰인 장경사에서 언덕길을 따라서 올라가다보면 정상부에 조금 못미친 지점에 작은 출입문인 ..

[김해박물관] 가야인의 생활도구, 장신구, 제철

가야에서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많은 장신구들이 출토되고 있는데,그 양에 있어서는 신라에 비해서 많지 않은편이다. 가야지역에는 고령 지역과 부산 복천동에서 금관과 금동관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가야 독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신랑의 영향을 받은 5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가야에서는 원래 금은 등 금속장신구보다는 유리구슬로 만든 장신구를 선호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문헌에 가야인을 설명하면서 이런 특징을 기술하고 있다고 한다. 금속제 장신구 또한 비교적 늦은 시기에 신라와 교류를 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가야는 철을 기반으로 한.중.일 해상무역을 통해 발전한 세력으로 금속제 장신구등은 많이 출토되지 않는데 비해서 철기로 만든 다양한 무기들이 가야 고분들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

지역박물관 2012.04.19

남한산성, 동문에서 장경사 입구 제1암문까지 성벽길

남한산성은 한강유역이 내려다 보이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둘레 8km의 석축을 쌓은 대표적인 조선시대 산성이다. 산성의 지형은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서울 방향으로는 경사가 급한편이며, 동쪽과 남쪽으로는 크고 작은 봉우리와 연결되면서 지형이 약간 완만한 편으로 동문인 좌익문은 중부내륙지방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 중의 하나로 광주,이천을 거져서 충주와 청주 지방으로 연결된다. 남한산성 동문에서 동북방향으로는 여러개의 봉우리가 연결되어 있는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남한산성을 건설하고 지키기 위해서 동원한 승병들을 위해 세운 사찰인 망월사와 장경사가 자리잡고 있다. 동문에서 2개의 사찰까지는 도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성곽은 동쪽방향으로 돌출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동문인 좌익문에서 장경사가 있는 제1암문까지는 동..

[김해박물관] 가야의 창고와 토기, 토기조각에서 나타난 가야인의 문자생활

가야인이 살았던 집모양은 현재까지 발굴된 집터와 집모양의 토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가야인 주거형태로는 신석기시대 이래로 전통적인 주거형태인 땅을 파서 기둥과 벽을 세워서 만든 움집형태의 가옥과, 고상가옥이라고 불리는 높은 기둥을 세워 만든 다락집이 대표적이다. 이런 가옥들은 가야인들이 만든 토기에서 그 형태가 확인될 수 있는데 창원 다호리에서 발굴된 고상가옥형태를 보여주는 집모양토기가 대표적이다. 고상가옥은 대체로 주택이라기 보다는 곡식 등을 저장했던 창고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야인들이 사용했던 토기들에는 당시 한.중.일 연안무역항로에서 물품의 거래 등을 위해서 문자를 사용했던 흔적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한자 이외에도 가야인들만이 인식할 수 ..

지역박물관 2012.04.18

김해 예안리 고분군(사적 261호), 밭으로 변해버린 금관가야 고분군

김해 예안리 고분군은 낙동강 서쪽편 대동리 들판에 소재한 고대국가인 금관가야의 고분군이다. 다른 고분들과는 달리 봉분이 남아 있지 않고, 지금은 대부분 밭으로 변해버린 곳이다.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고분은 금관가야 지배층이 아닌 일반인들이 묻혔던 곳으로 덧널무넘, 구덩식돌넛무덤, 독무덤, 앞트기식 돌방무덤 등 총 181기의 고분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 고분군은 가야시대에 존재했던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변천한 가야의 매장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며 약 2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부산대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고 하며 일부는 김해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예안라 고분군은 도로변에 있는 밭에서 발견된 것으로 얼마전까지는 다..

김해 구지봉, 금관가야 탄생 설화인 구지가(龜旨歌)의 무대

김해 시내에서 약간 북쪽에 자리한 구지봉은 가야 건국 설화의 무대이자, 수 많은 학생들이 국어 시간에 배워야만 하는 '구지가'의 무대이기도 하다. 구지봉은 김해박물관 바로 올라갈 수 있는 뒷동산이자 수로왕비릉을 통해서도 올라 갈 수 있다. 구지봉의 생김새는 구지봉 뒷산과 연결하여 거북이의 머리 부분과 비슷하고 목부분에 수로왕비릉이 자리잡고 있고, 지금은 도로가 있어 꼭 목이 잘린 것 처럼 보인다. 구지봉 정상에 올라서면 조선시대 명필 한석봉이 '구지봉석'이라고 끌씨를 적어놓은 고인돌과 중간 누가 세워 놓은 지는 알 수 없는 바윗돌이 서있다. 수로왕비릉에서 구지봉으로 오르는 길. 수로왕비릉 서쪽편 문인 구지문을 통해 구지봉으로 올라올 수 있는데, 오르는 길에는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구지봉 옆으로 난 ..

김해 수로왕비릉 (사적74호), 구지봉 아래 목부분에 자리잡은 수로왕비 '허황옥' 릉

김해 북단에 자리잡은 김해 허씨의 시조이자 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의 능이다. 위치를 잘보면 가야 건국설 의 "구지가"와 관련된 구지봉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멀리서 보면 구지봉이 거북의 머리라고 보면 수로왕비릉이 자리한 위치가 목부분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의 수로왕릉과는 수백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면서 구지봉을 지키고 있다.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왕비는 성은 허, 이름은 황옥으로 알려져 있으며, 인도에서 배를 타고 왔다고 전해진다. 허황옥이 낳은 왕자 중 2명에게 왕비의 성을 주어 김해 허씨가 이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왕릉 앞에는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돌로 쌓은 파사석탑이 있어 전설이 신빙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무덤의 형식은 수로왕릉과 비슷한 형식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

김해 수로왕릉(사적73호), 납릉으로도 불리는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무덤

김해시 도심 중심부에 위치한 가락국이라고도 불리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무덤인 사적 73호로 지정된 수로왕릉이다. 금관가야의 왕궁이 있었다고 하는 주거유적지인 봉황동유적지 북쭉편, 지배층의 무덤인 대성동고분군과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수로왕릉의 축조연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고려문종대에 부분적으로 수리가 있었다고 선조대인 1580년(선조13)에 대대적으로 개축하였으며 인조대와 고종대와 숭전전을 비롯하여 사당과 제실건물들이 증축되었다고 한다. 수로왕릉은 봉분의 높이가 약 5m로 신라의 고분이나 왕릉, 가야의 고분들에 비해서 봉분은 크지 않으며, 그 형식은 오히려 조선시대 왕릉에 가까워 보이는 무덤이다. 지봉유설 기록에 의하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 형식을 하고 있으며, 일본인들이 이 무덤을 도굴하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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