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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 남원 추어탕 거리, 남원의 명소 광한루 인근에 형성된 음식 거리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익혀서 통채로 갈아서 채소와 함께 끓인 탕으로 전국적으로 먹는 음식이다. 주로 남부지방에서 현재 추어탕의 모습으로 알려진 음식을 만들어서 먹었던 것으로 보이며, 중부지방에서는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어서 매운탕처럼 먹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어떤 연유로 해서 추어탕하면 남원추어탕이 유명해진 것이지는 알 수 없지만, 전국적으로 추어탕을 파는 음식점은 주로 남원추어탕을 간판에 걸고 있다. 남원에서는 춘향전의 무대인 광한루 입구에 위치한 천거동 지역에 추어탕 거리가 형성되어 있으며, 많은 음식점들이 이 곳에 모여 있다. 음식 거리를 형성한 곳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식당들이 원조라는 간판을 달고 있어 사실 어디가 맛있는지 구분하기는 힘들어 보이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음식거리의 식당들은 음식..

맛집 2010.11.25

[서울 고려대박물관] 혼천시계 (국보230호)와 조선시대 천문도

고려대 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인 국보 230호로 지정된 혼천시계이다. 어떤 연유로 이 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의 천문학 수준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조선시대에는 혼천의라고 불리는 천체 위치측정기로 일월오행성의 위치를 측정했는데 문헌상 세종조에 만들어진 것이 처음이다. 그 이후로 물레바퀴를 동령하으로 하는 시계와 연결하여 혼천시계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그 모습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고려대 소장 혼천시계는 17세기에 천문학자였던 송이영이 만든 천문시계로 서양의 톱니바퀴 시계와 조선의 혼천시계를 결합하여 만든 독창적인 시계로 학자들에게 천문학 교육을 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 한다. 현재 만원권 지폐에도 나와 있을 정도로 그 중요성이 높고, 조선사회를 이해하는..

남원 만복사지 당간지주 (보물32호)와 석인상

남원 만복사지 절터 입구에 있는 당간지주와 석인상이다. 사찰문화재 중 보물로 가장 많이 지정된 것이 아마도 당간지주이며, 대부분의 사찰에서 당간지주는 그 절의 역사와 같이 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만복사지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체 높이가 5m 정도로 상당히 큰 규모이다. 조각수법에 세밀함이나 조형미 등은 통일신라시대나 삼국시대에 만들어 진 것에 비해서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만복사지 입구에 있는 석인상은 높이 5.5m의 상당히 규모가 큰 석상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만복사지만의 특별한 내력이 있는 석상으로 보인다. 그 용도에 대해서는 정확히 설명이 되지 않고 있어 그냥 석인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 설명에 의하면 석굴암에 나타난 금강역사와 그 모습이 비슷하다는 견해..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 (보물 30호)

남원 시가지 서쪽편에 위치하 남원 만복사는 고려 문종때 처음 지어진 사찰로 김시습의 소설 금호신화에 실린 만보사저포기의 무대로 유명하다. 만복사는 정유재란때 불타버리고 그 절터에선 오층석탑과 석좌, 석불입상을 비롯하여 몇 점의 석조 유물만 남아 있다. 그 중 만복사 절터 동쪽편에 서 있는 오층석탑은 고려초에 세운 것으로 그 원형이 많이 손상되어 있으며, 조형미도 크게 뛰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보물 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형적이 고려시대 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는 단순한 형태의 석탑으로 그 내력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쌓아는데, 전체적으로 각 탑신과 기단 등 구성요소들간의 비례가 뛰어나다고 할 수 없어 보인다. 원래 이 ..

[서울 고궁박물관] 대한제국 선포 이후의 변화

1894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청나라가 조선에서 물러나면서 일본의 지원하에서 갑오개혁이 있었으나, 삼국간섭(1895년),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으로 조선에서는 열강들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졌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변신은 열강의 간섭에 시달리던 당시의 상황에서 생긴 자주독립의 열망이 그 근본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한제국으로의 변신은 궁왕이 황제를 칭하는 것의 그 핵심이며 이는 갑신정변 이후 여러차례 건의가 있었으며, 아관파천 이후 열강들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면서 대한제국의 선포가 가능했다. 고궁박물관에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법령의 개정부터 복식의 변화 등 여러가지 중요한 변화를 보여주는 유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학부직원록. 1900년에 작성된 학부의 직원목록이다. ..

지역박물관 2010.11.24

남원 선원사, 도선국사가 남원의 번영을 바라며 지은 사찰

남원 도심에 동쪽편에 위치한 선원사는 통일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지역민들은 이 사찰을 남원의 번영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는 사찰이다. 지금은 도심에 위치한 조그만 사찰이지만, 남원 서쪽편의 만복사와 함께 그 규모가 상당히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원래의 사찰을 정유재란때 완전히 불타버리고, 오직 철불만 남았다고 한다. 현재의 사찰은 조선후기 영조때 남원부사가 지역의 신도계와 협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하였다고 한다. 사찰은 철불을 모신 약사전과 중심불전인 대웅전, 민간신앙과 관련되 칠성각으로 이루어졌으며, 아주 작은 규모로 복원이 되어 있다. 만복사지와 함께 고려시대 사찰형태인 도심 가까운 곳에 위치한 평지사찰이다. 남원도심 동쪽편 입구에 위치한 선원사는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전국 사찰 2010.11.24

김제 관아 내아, 동헌과 함께 남아 있는 고을 수령 살림집

김제 관아는 조선시대 관아를 구성하는 동헌, 내아, 정자가 남아 있고 부근에 관아에서 관리하던 중등교육기관인 향교가 있는 조선시대 지방의 행정 중심지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으로 역사적, 사회적 가치가 높아서 사적 482호로 지정된 곳이다. 김제는 정4품이 군수가 고을 수령으로 있던 지역으로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넓은 평야지대로 풍부한 물산을 자랑하는 곳이다. 김제 내아는 고을 수령의 살림집으로 김제군 동헌 뒷편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ㄷ'자형 안채 건물만 남아 있는데, 현존하는 관아 건물 중 동헌과 내아가 같이 남아 있는 흔치 않은 경우이다. 현재의 규모로 봤을 때는 고을 수령의 살림집이 작다는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안채 외에도 여러동의 살림집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

조선 관아 2010.11.23

[서울 고궁박물관] 대한제국의 선포

19세기말 조선은 갑오농민 전쟁과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서구 열강과 청.일의 간섭속에서 조선은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는 대대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구한말 조선의 정치적.경제적 역량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선언적 의미가 강한 조치였지만, 나름대로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대외적으로 독립국을 알리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다는 것은 유교적인 전통 예법에 따라서 왕의 호칭이 황제로 격상되며, 왕후는 황후로, 왕세자는 황세자로 명칭이 변하고, 왕자들은 번왕으로 임명되는 조치들이 뒤따랐다. 또한 조선을 건국할 때의 예에 따라서 고종의 4대조까지 황제로 추존하는 절차도 있었다. 황제를 칭함에 따라 조선에서는 폐지되었던 제천의식을 거행하는 환..

지역박물관 2010.11.23

정읍 태인현 피향정, 신라 유학자 최치원이 세웠다는(?) 호남 제일의 정자 (보물 289호)

전북 정읍 옛 태인현 중심지에 위치한 피향정은 통일신라 헌강왕태 태인 현감으로 있었던 유학자 최치원이 세웠다고 알려진 정자이만, 그 건축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고 있다. 실제로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현재의 모습은 광해군 때 크게 중수한 것으로 남아 있다. 정읍 피향정은 원래 큰 연못 중앙에 있던 섬 위에 세워진 정자라고 하는데 현재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원래의 모습은 상당히 웅장하고 화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남원 광한루나 진주 촉석루처럼 크고 웅장한 것은 아니지만, 현단위 지방 관아의 정자치고는 상당히 화려하다고 할 수 있다. 피향정은 막돌 기단 위에 28개의 석조 기둥 위에 올려 놓은 정자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이 정자는 사방이 뚫려있는 형태로 주로 공식적..

조선 관아 2010.11.22

남원 중앙하이츠콘도 지리산, 남원 도심에서 가까운 숙소

남원을 여행할 때 유용한 숙소 중 하나인 중앙하이츠 콘도이다. 남원시 도심 북쪽 교룡산성으로 가는 길에 있는 사적으로 지정된 만인의총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고속도로와 가까워 전남 담양지역이나 지리산을 여행할 때도 유용한 숙소로 시설이 훌륭한 편은 아니나 남원지역에는 콘도가 많아서 그런지 급박하게 일정을 잡을 때 특별한 성수기가 아니라면 대행사를 통해 쉽게 방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남원 도심에는 광한루가 유명하지만, 만복사지, 남원향교 등 가볼만한 유적지 많고 전남 동부지역과 지리산 부근을 여행하기에도 지리적으로 편리한 점이 많은 숙소이다. 남원시 도심 가까이에 있는 임진왜란 희생자를 기리는 '만인의총' 입구에서 남원 중앙하이츠콘도가 보인다. 부지가 넓거나 정원이 수려한 것은 아니고 단순한 ..

한국의 풍경 2010.11.22

전봉준 선생 고택,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녹두장군 살던 집 (사적293호)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 선생이 살았던 고택이다. 선생의 고택은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동진강 만석보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선생은 이 곳에서 농사일과 동네 서당 훈장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선생은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원래는 이지역에서 양반들이 가장 많이 사는 무성서원이 있는 태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모친상 때 부조금을 거둬주지 않았다고 곤장을 맞고 죽었다고 한다. 몰락한 양반으로 서당 훈장을 한 것으로 볼 때 당시 지역 농민들의 대표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현재의 고택은 원래 살던집을 그대로 복원한 것으로 보이며, 동쪽으로부터 부엌,큰방,윗방,끝방이 달린 '-'자형 초가집으로 일반적인 초가집의 구조와는 다른 ..

고택_정원 2010.11.22

정읍 태인현 관아 동헌, 동학농민군이 마지막 결전을 벌이고 해산한 곳

태인현은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과 태인면을 중심으로 주변은 면들을 포함했던 조선시대 고을 명칭이다. 지금은 작은 시골의 면소재지이지만, 통일신라시대 유학자 최치원이 이곳 태산군수를 지내는 등 유서깊은 고을이다. 태인현 관할 지역 중 칠보면에는 전북지역 유학의 중심지였던 신라의 유학자 최치원 선생을 모신 무성서원이 있고, 최치원 선생이 거닐던 연못에 세워진 호남제일의 누각이라는 보물 289호로 지정된 피향정이 있다. 태인지역은 넓은 호남평아와 동쪽의 산악지역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헌 뒷편 성황산은 동학혁명에서 동학군이 마지막으로 진을 치고 집결한 곳으로 동학혁명의 마지막 격전지이기도 하다. 태인동헌은 동학혁명당시 농민군이 점령했던 곳으로 전봉준의 농민군 주력이 태인동헌 뒷산인 성황산전투에서 패..

조선 관아 2010.11.21

[서울 고궁박물관] 왕실인장, 국왕이 개인적으로 소장했던 사인.

고궁박물관에서는 조선왕실의 문예와 예술적 취향을 설명하는 방편으로 왕실에서 소장했단 인장 중 글이나 시 등을 쓸 때 사용하는 개인적 용도의 인장을 전시하고 있다. 주로 구한말 헌종이 보관했던 많은 인장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이는 구한말 불타버린 헌종의 인장들을 고종이 복각한 것이다고 한다. 인장은 돌.금속.흙.나무 등을 이용하여 재질이 갖는 색채와 조형미를 살려 글귀를 새겨 놓는 예술적인 단계로 발전하였으며, 조선후기 정조의 문예부흥 정책과 맞물려 크게 발전하였다고 한다. 인장의 내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고 박물관에서 설명해 놓은 내용들을 옮겨 보았다. 1. 위환기하, 기쁨이 얼마나 되겠는가? 2. 군계준수, 여러 아우들 모두 빼어나다. 3. 여시불성, 만약에 시를 짓지 못하면 4. 산수유청음, 자연에는..

지역박물관 2010.11.21

김제 벽골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사적 111호)

김제 벽골제는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인 저수지로 학창시설 꼭 외어야만 했던 유적지 중 하나이다. 김제 지역을 포함한 전북지역은 우리나라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역으로 역사 이래로 벼농사의 중심지였다. 벽골제라는 이름 또한 '벼가 나는 골'이라는 우리말에 그 근원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김제군의 지명과 유래를 같이하고 있다고 한다. 호남평야는 넓은 평야지대의 풍요로움을 뒷면에는 동학농민혁명으로 대변되는 농민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 있는 곳으로 삼국시대부터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어 논에 물을 대어야 하는 어려움과 풍요속에 숨어 있는 수탈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장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전군가도로 대변되는 일제의 식량 수탈 또한 이 지역에서 집중적..

[서울 고려대 박물관] 조선시대 생활용구

고려대 박물관에는 산수전도, 동궐도, 혼천시계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과학기술과 관련된 유물들이 대표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중요 유물들이 있는 전시관을 지나서 가면 조선시대 유물들 중에서 역사적인 중요성은 약간 떨어지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사용했던 생활용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유물들에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의식주 생활과 관련된 문물과 그 문물에 도안된 상징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다. 청자상감국화모란문과형병 (고려 12세기, 국보 114호). 이 유물은 원래 중앙박물관에 있던 것인데, 혼천시계가 임시로 중앙박물관에 전시됨에 따라서 고려대 박물관에서 혼천시계대신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참외모양의 화병으로, 높이 25...

지역박물관 2010.11.20

정읍 황토현 전적지, 동학 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친 곳 (사적 295호)

전북 정읍의 황토현 전적지는 사적 295호로 지정된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 곳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친 곳이다. 이 곳 황토현 지역은 넓은 호남평야에서 높지는 않은 작은 야산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 곳에서 전북 감영이 있던 전주까지는 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야지대이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주에서 출발한 관군이 이 곳에 황토현 부근에서 넓은 평야지대를 지켜보고 있던 동학농민군에게 크게 패한 장소이다. 황토현 전적지에는 동학농민 운동을 말해주는 특별한 유적은 없고, 주변에 사당을 비롯하여 기념관, 학생수련원 등의 교육.전시시설들이 모여 있다. 넓은 대지위에 여러 기념관과 동학혁명을 기념하는 각종 조형시설들만이 있어 약간 설렁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구..

근현대유적 2010.11.20

정읍 만석보 옛터, 동학혁명 횃불이 타올랐던 역사의 현장

만석보는 전북 정읍과 김제의 경계선이 되는 곳인 정읍천과 동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 두었던 보가 있었던 곳이다. 구한말 탐관오리의 대명사인 고부군수 조병갑이 고을 백성들을 동원하여 보를 쌓고, 과중한 수세를 거둠으로써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구한말 동학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던 역사적인 현장이다. 실제로 만석보를 쌓았던 지점을 보면 그 강폭이 그리 넓지 않고, 강을 막는데 동학혁명이 일어날 정도 과중한 공사가 아니었음에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욕에 의해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방에서는 당시에 만석보 상류에 농민들이 만들어 사용하던 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병갑이 농민들을 동원해 보를 쌓고 물세을 걷었다고 하니 그의 탐욕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만석보만 보아도 그의 ..

근현대유적 2010.11.20

[서울 고궁박물관] 조선 왕실의 문예, 국왕 짓고 쓴 글

조선시대 국왕이 직집 지은 글을 어제, 글씨를 서필이라고 한다. 어제와 어필은 국왕의 권위를 나타내며, 국왕의 일생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선왕의 일대기를 기록한 실록과 더불어 어제.어필을 수집하고 간행하는 것이 크게 중요시 되었다. 특히 숙종~영조 시대에는 역대 왕들의 어제와 어필을 편집하고 인쇄하여 책이나 첩으로 많드는 것이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에 국왕은 공적.사적으로 많은 글들을 친히 짓고 썼으며, 서원에 편액을 내리거나, 궁궐 건물의 편액을 직접 쓰기도 했다. 국왕이 쓴 글들은 모아서 책이나 첩으로 만들거나 돌이나 나무에 새기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그 내용이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오는 경우가 많다. 고궁박물관에는 많은 양의 어필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상당수는 영조가 적은 ..

지역박물관 2010.11.20

서울 연남동 중국 화교들이 많이 모여사는 거리

1990년대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한국과 중국 본토와의 인적교류가 형성되면서 전국적으로 여러곳에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모여 살거나 물품을 거래하는 상가가 형성되었다. 대표적인 곳으로 개항장 인천항을 중심으로 구한말 이래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고 지금은 자장면 발생지로 유명한 공화춘을 중심으로 새로운 관광지로 변신한 인천 북성동 차이나타운과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모이는 안산과 구로공단을 들 수 있다. 또한 지금은 많이 쇠락했지만 서울 명동의 중국대사관과 화교소학교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 중국인 거리가 있고, 서울 연남동에도 한성화교중학교를 중심으로 중국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거리가 있다. 그 중 연남동은 연희동에 소재한 한성화교중학교를 중심으로 한.중 수교 이전에도 중국 화교들의 생활 근거지였으며..

한국의 풍경 2010.11.19

김제 피금각, 관아 정원의 조그만 정자

사적 482호로 지정된 김제 관아에 들어서면 수령이 근무하던 동헌, 살림집인 내아와 함께 작은 정자가 동헌 왼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피금각'이라는 현판이 달린 이 정자는 앞면 3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작은 정자이다. 일반적인 정자처럼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앞면과 옆면으로 가운데 1칸에만 방을 두고 있고, 사방으로 마루가 있는 특이한 구조의 정자이다. 아마도 고을 수령을 방문한 손님을 맞이하는 접대용 공간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헌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이 약간 특이한 점이기는 하지만, 크고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소박한 정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앞면3칸, 옆면 3칸의 정사각형의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는 김제관아에 있는 정자인 피금각. 피금각은 그 건축내력에 대한 설명이 없는 ..

조선 관아 201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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