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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259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 (보물 185호), 정림사지오층석탑을 닮은 고려초기 석탑

부여 무량사는 조선 세조때 생육신인 매월당 김시습이 만년을 보낸 사찰로 사찰경내에 보물로 지정된 김시습 초상화와 사찰 바깥쪽에 그의 부도탑이 모셔져 있는 사찰이다. 부여 서쪽편 만수산 아래에 있는 이 사찰은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 사찰 건물 전체가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중창한 것이라 한다. 사찰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2층 건물인 무량사 극락전이 있는 금산사 극락전보다는 작지만, 꽤 큰 건물로 통일신라시대 금당(장륙전)의 모습이 남아 있는 건물이다. 무량사 극락전 앞에는 웅장한 모습의 오층석탑이 남아 있는데,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과 그 모양새가 비슷하다. 기단은 단층인 것처럼 보이며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세워두고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층마다 ..

보령 성주사지 서3층석탑 (보물47호)

보령 성주사지 금당터 뒷편에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석탑가운데 서쪽에 있는 3층석탑이다. 탑에는 장식물을 달았던 흔적으로 보이는 구멍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탑을 장식하는 장식물들을 달아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사찰 가람배치는 신앙의 대상이었던 탑을 중심으로 하고 그 뒷편에 금당과 강당을 두는 것이 보통인데, 성주사지는 금당뒷편에 3기의 석탑, 앞편에 1기의 석탑이 배치된 특이한 형태이다. 경주 감은사지나 불국사의 경우 2개의 탑을 두고 있고, 익산 미륵사지는 목탑과 석탑이 나란히 3기가 서 있는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데, 이 곳 성주사지는 금당앞에 1기의 오층석탑과 뒷편에 3기의 3층석탑이 있다. 동쪽편 석탑이 다른 곳에서 옮겨 왔다고 하니 아마도 2개의 3층석탑이 금당뒷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아..

보령 성주사지 동 3층석탑

보령 성주사지 금당터 뒷쪽에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3층 석탑 중 동쪽편에 서 있는 3층석탑이다. 다른 2기의 3층석탑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반면에 이 석탑은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생긴 형태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 내력이 조각수법이 약간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찰 경내에 신앙의 대상인 불탑이 3기씩 배치되는 것은 전례가 없는 경우로 보이는데, 이 석탑은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이 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말기의 3층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2단으로 된 기단부 위에 몸돌과 지붕돌로 이루어진 탑신을 3층으로 쌓아 올려 놓고 있다. 신앙의 대상으로 만들어졌던 전기의 석탑에 비해서 이 석탑은 장식적인 의미가 강한 석탑으로 통일신라 말기에 대량으로 제작되었던 ..

보령 성주사지 중앙 3층석탑 (보물20호)

성주사는 서해안 대천해수욕장이 있는 보령시에서 내륙 방향으로 고개를 넘어서 조금만 들어오면 있는 옛 절터이다.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선종 도량의 하나로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 대형사찰이었다. 성주사 옛 절터에는 오층석탑 1기와 3기의 있는데 3기의 3층석탑 중 가운데에 있는 석탑이다. 3기의 석탑은 같은 양식을 하고 있지만 그 중 몸돌 조각 수법에 제일 화려하고 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은 2층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3층석탑이다. 전제적으로 비율의 잘 이루어져 있으며,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탑신 몸돌의 남북면에는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자물쇠와 문고리가 조각되어 있다. 잘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구성품의 비율, 조각 수법 등에 있어서 창의적이..

보령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국보8호)

대천해수욕장이 있는 보령시에서 내류 방향으로 조금 들어가면 통일신라시대의 큰 사찰이었던 성주사지 옛 절터를 볼 수 있다. 보령 성주사지에는 이 사찰을 창건한 낭혜화상의 탑비를 비롯하여 5층석탑과 3기의 3층석탑이 있는 큰 절터이다. 절터는 금당과 강당, 석탑으로 구성된 통일신라시대 사찰배치를 하고 있으며, 당시 산속에 많이 세워졌던 다른 사찰과는 달리 전통적인 평지사찰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성주사지에 있는 문화재 중에서 국보로 지정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성주사를 크게 중창한 낭혜화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낭혜화상은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당나라에서 선종을 배우고 와서 이 곳에서 성주산문을 창설한 인물이다. 이 탑비가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인 진성여왕때라고 하며,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

보령 성주사지오층석탑 (보물19호)

대천해수욕장이 있는 충남 보령시에 위치한 삼국시대 백제의 절터인 성주사지에 남아 있는 오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2층의 기단부와 5층의 탑신, 그리고 상륜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오층석탑이다. 이 석탑이 만들어진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말기로 통일신라의 석탑을 만드는 기술의 전성기가 지나고 전국적으로 대량으로 석탑이 만들어지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성주사지오층석탑은 전체적으로 도식화되고 정형화된 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보기는 힘든 석탑이다. 당시에 만들어진 석탑에는 사천왕상이나 팔부중상 등을 몸돌에 새겨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 석탑에는 장식을 새겨 놓고 있지는 않다.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석탑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보령 성주사지 절터의 중심이 ..

남원 만복사지 석불입상 (보물 43호)

만복사 절터에 있는 남아 있는 이 불상은 만복사를 처음 지을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위 위에 부처가 서 있는 입상 형태의 불사으로 뒷편에는 광배를 두고 있다.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부드러운 옷자락을 묘사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부자연스러운 면이 보인다. 이 불상은 입체감있게 조각한 것이 아니라 마애불상과 조각상의 중간적인 형태를 하고 있으며, 전면부만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뒷면에도 그림 형태로 간략하게 불상을 새겨 놓고 있다. 만복사는 고려시대에 창건한 평지사찰로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타 버린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는 석탑, 당간지주, 석좌 등 석재로 만든 유물들이 일부 남아 있다. 조선전기 김시습이 쓴 소설 금오신화 ..

남원 만복사지 석좌, 거대한 청동불상을 올려 놓았던 자리 (보물31호)

만복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남원성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던 아주 큰 사찰로 남원성 동쪽편의 선원사와 더불어 남원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큰 사찰이었다. 만인의총의 유적에서 알 수 있듯이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에서 왜군과 큰 전투가 있었고 수많은 수많은 관민이 죽었다. 이때 만복사도 함께 불타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보물 31호로 지정된 만복사지 석좌는 사찰 서쪽편에 있던 불전의 불상을 올려놓았던 석좌로 육각형으로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이 석좌는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상.중.하대를 조각으로 구분하고 있다. 하대에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장식하고 있는데 고려시대 유행한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상대 중앙에는 불상을 끼웠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있다. 만복사지 석좌..

남원 만복사지 당간지주 (보물32호)와 석인상

남원 만복사지 절터 입구에 있는 당간지주와 석인상이다. 사찰문화재 중 보물로 가장 많이 지정된 것이 아마도 당간지주이며, 대부분의 사찰에서 당간지주는 그 절의 역사와 같이 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만복사지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체 높이가 5m 정도로 상당히 큰 규모이다. 조각수법에 세밀함이나 조형미 등은 통일신라시대나 삼국시대에 만들어 진 것에 비해서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만복사지 입구에 있는 석인상은 높이 5.5m의 상당히 규모가 큰 석상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만복사지만의 특별한 내력이 있는 석상으로 보인다. 그 용도에 대해서는 정확히 설명이 되지 않고 있어 그냥 석인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 설명에 의하면 석굴암에 나타난 금강역사와 그 모습이 비슷하다는 견해..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 (보물 30호)

남원 시가지 서쪽편에 위치하 남원 만복사는 고려 문종때 처음 지어진 사찰로 김시습의 소설 금호신화에 실린 만보사저포기의 무대로 유명하다. 만복사는 정유재란때 불타버리고 그 절터에선 오층석탑과 석좌, 석불입상을 비롯하여 몇 점의 석조 유물만 남아 있다. 그 중 만복사 절터 동쪽편에 서 있는 오층석탑은 고려초에 세운 것으로 그 원형이 많이 손상되어 있으며, 조형미도 크게 뛰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보물 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형적이 고려시대 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는 단순한 형태의 석탑으로 그 내력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쌓아는데, 전체적으로 각 탑신과 기단 등 구성요소들간의 비례가 뛰어나다고 할 수 없어 보인다. 원래 이 ..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국보 201호)

봉화군 북지리는 봉화읍에서 십여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백산에서 발원한 큰 개천이 봉화읍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봉화 닭실마을을 나와서 봉화읍에서 부석사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서쪽편 개울가에 국보인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을 볼 수 있다.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곳은 교통의 요지로서 신라시대에 500여명의 승려들이 있었던 큰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북지리 여래좌상은 자연암벽을 파서 만든 석불로서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국보 201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침 이 곳을 방문했을 때 법회가 있어서 세부적으로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전체적으로 크고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이 석불을 중심으로 사찰이 들어선 것 같은데, 내력이 깊어 보이지는 않아 보였다. 북..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 화재로 받침돌인 귀부만 남아 있는 나옹선사 부도 탑비 (보물387호)

양주 회암사 동쪽편에 있는 3기의 부도 중 제일 윗쪽에 위치한 나옹선사 부도에는 부도탑이 없어서 형식에 잘 맞지 않아 보였는데 그 탑비는 현재 회암사 서쪽편 언덕에 홀로 서 있었다. 나옹선사는 고려말 회암사를 크게 중창시킨 고승으로 그의 호칭은 나옹선사, 보제존자, 선각왕사로도 불리며 그의 사리탑은 이 곳 회암사 외에도 그가 입적한 여주 신륵사와 원주 영전사지에도 남아 있었고, 그의 영정이 신륵사 조사당에 모셔져 있다. 특히, 신륵사에 있는 사리탑은 조선전기를 대표할 수 있는 석종형 사리탑을 하고 있으며, 영전사지 사리탑은 부처을 사리를 모신 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무학대사와 함께 국가적으로 존경을 받았던 고승이었던 같다. 양주 회암사에 있던 그의 부도탑비인 진각선사 왕사비는 최..

양주 회암사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

양주 회암사 동쪽 언덕에 있는 3기의 부도 중 제일 위쪽에 위치한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이다. 다른 부도와는 달리 앞쪽에 탑비는 남아 있지 않다. 나옹선사는 고려말 승려로 무학대사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으며, 양주 회암사를 아주 크게 중창한 인물이다. 나옹선사의 명성에 비해서 그 부도탑은 단촐하면서도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앞쪽에 있는 지공선사 부도탑과 함께 전통적인 고승의 부도탑 모양을 하고 있으나, 고려전기의 화려한 부도탑에 비해서는 조형미가 많이 떨어지는 것 같다. 아마도 고려말에서 조선초에는 전국적으로 부도탑을 만들 수 있는 조각가들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양주 회암사를 크게 중창한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 나옹선서 부도는 8각을 기본형으로 하고 있는 전통적이 부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받침..

양주 화암사 지공선사 부도와 석등, 탑비

양주 회암사 언덕에 있는 여러기의 부도 중 하나인 지공선사 부도이다. 이 부도는 회암사를 창건한 인도인 승려 지공선사의 사리를 모신 것으로 부도탑, 제단, 석등, 탑비가 제대로 구성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보이는 8각을 기본으로 한 전형적인 형태를 하고 있는데, 고려전기의 부도탑에는 화려한 조각이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비해 이 부도는 어떤 장식도 하지 않고 있으며 돌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다. 부도 앞 석등은 4각을 기본으로 한 형태로 이 또한 장식이 없고, 석재를 조립해서 만든 듯한 느낌을 준다. 탑비는 앞쪽의 무학대사비와 마찬가지로 4각의 받침돌 위에 몸돌과 머리돌을 얹어 놓은 것으로 조선후기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원래의 탑비가 놓여졌던 거북모양 이수가 탑비 옆에 놓여져..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 홍융탑을 구성하고 있는 무학대사묘비로서 홍융탑 앞에 위치하고 있다. 비문에는 그가 원나라에 들어가 나옹선사의 제자가 된일, 한양천도에 역할을 한 일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원래는 태종 10년에 변계량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나, 순조되 파괴되었다고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비석은 고려시대에 만든 많은 탑비에 비해서 제작수법이 많이 떨어지고 단순한 4각받침돌 위에 비석을 세워놓고 있다. 그 옆에는 원래 탑비가 세워졌던 이수가 놓여 있다. 양주 회암사 동쪽편 언덕 무학대사 홍융탑 앞에 세워진 탑비인 무학대사비. 무학대사 탑비는 4각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어 놓은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후기에 훼손된 탑비를 새로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 홍융탑 앞 쌍사자석등 (보물389호)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 부도를 구성하고 있는 홍융탑 앞 쌍사자석등이다. 이 쌍사자석등은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이 하나로 붙어 있으며, 그 위에 화사석을 두고 있다. 이 석등은 기존의 8각 석등형태에서 사각형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큰 특징이며, 무학대사의 명성이 연관되어서 보물로 지정된 것으로 보인다. 조각된 쌍사자는 가슴과 배가 붙이 있어서 입체감이 부족하고 그 조각 수법도 크게 세련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 화사석은 2개의 석재를 그냥 올려놓아 단순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 홍융탑 앞에서 불을 밝혀주는 역할을 하는 쌍사자석등. 연꽃무늬가 새겨진 바닥돌과 아랫받침돌이 하나로 되어 있으며 쌍사자상이 중간받침돌 역할을 하고 있다. 회암사 무학대사 홍융탑 앞 쌍사자석등 쌍사자상을 새겨놓은 중간받침돌..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 홍융탑 (보물388호)

양주 회암사는 고려말에 창건되어 조선후기에 폐사된 사찰로 조선 건국에 관련된 무학대사가 주지로 있었으며,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나 머물렀던 사찰로 조선 왕실과 관련이 많은 큰 사찰이다. 옛날의 영광을 간직한 옛 회암사는 그 건물터만 남아 있고 절터 뒷편에는 회암사와 관련된 고승들의 부도가 여럿 있으며, 그 부도를 중심으로 현재의 회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회암사 옛터에서 뒷쪽으로 올라간 언덕에 있는 고승들의 부도 중 대표적인 것으로 보물로 지정된 무학대사 홍융탑은 8각의 바닥돌 위에 용과 구름이 새겨진 몸둘과 목조건축물 형태의 지붕돌로 구성된 부도로서 조선전기 부도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학대사 홍융탑은 현재의 회암사 동쪽편 언덕에 있으며, 여러기의 부도 중 제일 앞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부도..

아산 평촌리 석조여래입상

아산 외암민속마을 맞은편 평촌리 산중턱 옛절터에 있는 고려시대 불상이다. 최근에 개설된 것으로 보이는 21번국도 옆에 있지만, 이 절터를 찾아갈려면 논길로 해서 찾아들어가야 한다. 이 절터에는 이 불상과 함께 작은 절이 있지만 그 내력을 잘 알기 어려운 작은 사찰이다. 이 불상은 화강암을 다듬어 만던 석조여래입상이지만 실제로는 바위에 새겨놓은 마애불상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는 투박한 느낌이지만 옷주름이나 얼굴의 표현 등에 있어서는 조각솜씨가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이 남아 있는 형식화된 고려초기 불상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의 조각품들처럼 사실적이면서도 전체적인 비례에 있어서 균형미를 갖추지 못하고 있지만, 고려시..

원주 법천사 지광국사현모탑, 고궁박물관 마당으로 옯겨진 부도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던 고승의 사리탑인 부도 중에서 그 제작 수법이 뛰어난 걸작으로 알려진 원주 법천사 지광국사현모탑이다. 이 부도는 고려시대 고승인 지광국사를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부도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빼돌려졌다가 총독부에 의해서 서울로 다시 반환된 것으로 제자리인 법천사지에 옮겨지지 못하고 경복궁 경내에 전시되어 있다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일제가 빼돌린 많은 부도탑들이 경복궁에 전시되어 있다가 대부분은 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되고 있지만 이 부도탑만이 아직도 경복궁에 남아 있다. 법천사 지광국사현모탑은 고스의 사리를 모셔두는 부도이지만 그 모양새는 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당시에 다른 부도처럼 많은 장식을 조각해 놓고 있다. 기본 형태는 석탑의 모양이지만 세부적인 조각수법은 당시 ..

보협인석탑 (국보 209호),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보협인탑

보협인탑은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특이한 형태의 탑이다. 일반적인 석탑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전체적으로는 삼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에 불상과 석가모니와 관련된 내용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탑의 전면이 조각으로 가득찬 것은 중국 보협인탑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보협인탑은 원래 천안에 있던 고려시대 절터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동국대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하며, 5개의 돌만 남아 있는 것으로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보협인석탑은 중궁 오월국 마지막왕이 소탑 8만4천기와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했다고 해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동국대박물관에 있는 보현인석탑이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석탑처럼 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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