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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박물관 373

대구근대역사관, 구한말 이후 대구의 변화를 보여주는 전시관

대구는 조선시대 경상도 관찰사가 근무하는 경상감영이 있었던 도시로 낙동강 수운과 주요 교통로가 지나가는 교통과 행정의 중심도시였다. 원래 경상감영은 경주, 안동 등 여러지역을 순회하였으나 조선중기 선조대에 대구에 감영이 설치되었다. 구한말에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고 대구역이 1905년에 개통되면서 대구에서 전국 주요도시로의 이동이 쉬워지면서 대구로 인구와 물산이 집중되면서 대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대구에는 1900년대초 서양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중심지였으며,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함께 일본인들의 요구에 의해 당시 친일파 관찰사였던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허물고 도로를 개설하면서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한 행정.군사의 중심지였던 대구는 일본 상인들을 중심으로 경상도 내륙지역의 상업.제조업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지역박물관 2013.06.03

[대구박물관] 여자복식과 꾸미개, 바느질 도구

우리나라 복식에 대한 문헌기록은 북쪽지방인 숙신.옥저 등에서 가죽옷을 입었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벽화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입었던 복식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고구려 벽화에 등작하는 복식에서 동호 복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부분도 보이기도 하는데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로 상당히 국제적인 면모를 보인다고 한다. 우리나라 복식은 기본적으로 앞이 열려 있는 형태로, 기본적을 바지.저고리.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모를 중요시하는 전통이 있다. 이는 거의 2천년동안 변함이 없는 특징이기도 하다. 고구려 벽화등에서 보여지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저고리 형태는 조선초까지 변화가 없었으나 16~17세기를 거치면서 깃, 소매, 길이 등이 급격히 작아지..

지역박물관 2013.05.22

[대구박물관] 조선시대 남자 복식, 조복과 의관정제

조선시대 남자들이 입었던 옷은 일반평민에서 국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그중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양반계층이 입었던 의복이 그 종류가 많고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며, TV사극 등을 통해 일상적으로 많이 접해보는 조선시대 복식문화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입었던 옷으로는 평상시 집에 머물거나 여행을 할 때 입는 평상복, 관직에 진출하여 일상적인 업무를 볼 때 입는 관복인 공복일 비롯한 관복과 국가적인 행사에 입는 예복이라 할 수 있는 조복 등이 있다. 대구박물관에서는 많은 복식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 중 남자의 의복으로는 조복과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의관정제를 대표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복식에서 모자라 할 수 있는 의관은 그 종류가 다양하며 공..

지역박물관 2013.05.16

[대구박물관] 섬유의 역사와 염색

대구는 경북 내륙의 교통.행정의 중심지이자 섬유산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지금은 우리나라 경제에서 섬유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지만,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던 70년대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종사했으며 수출 주력상품으로 국가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산업이다. 대구박물관에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섬유산업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고대 이래로 우리나라 섬유와 복식 등을 보여주는 전시실을 마련해 놓고 있다. 전시유물들은 실을 짓고 직물을 제조하는 가락바퀴 등 고대의 도구들과 주로 조선시대 사용했던 다양한 복식과 직물, 장신구 등들 전시하고 있다. 인류가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옷을 만들어입기 시작했는데 언제부터 실과 직물을 만들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신석기시대 고대문명 발생..

지역박물관 2013.05.15

[대구박물관] 대구.경북의 유교문화, 사림과 서원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한 이후 중앙관료로 진출하지 않고 지역에서 영향를 갖고 있던 향리세력들은 점차로 중소지주로서 경제력을 축적하면서 학문적인 역량도 갖추게 되었다. 특히, 성종대에 길재의 학문을 이어받은 김종직을 필두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의 영남출신 사림들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기존의 중앙 훈구세력을 충돌하여 여러차례 사화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명종대에 이르러 사림은 조선사회의 주도세력으로 자리잡게 된다. 16세기 명종대에 중앙정계를 장악한 사림들은 다양한 학파를 형성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논쟁을 생겨났다. 이런 농쟁의 결과로 서경덕.이황.조식.이이와 같은 탁월한 학자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조선시대를 이끌 성리학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게 된다. 영남지역은 김종직을 비롯하여 사림들의 출신지로 다른 ..

지역박물관 2013.05.11

[대구박물관] 조선 양반사회, 유교 경전과 학습교재

조선은 불교가 국가와 사회에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고려시대와는 달리 관료.유학자 등 신진사대부세력이 무장세력과 함께 세운 국가이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세력은 전제개혁 등을 통해 권문세족과 불교사원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려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신흥 사대부 세력이 받아 들인 성리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다. 조선은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로서 유학을 공부하여 과거를 통해 진출한 사대부를 중심으로 관료체제가 정비됨으로써 점차 양반은 계급적 의미를 갖게 된다. 조선초에는 지배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양반계급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없으나, 점차 과거나 다른 경로를 통해 관료를 역임한 집안의 후손들이 양반으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원래 조선시대에는 양반이라는 계급은 법제도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양인은 모두 과..

지역박물관 2013.05.08

[대구박물관] 불교공예품, 불교의식과 신앙생활에 사용된 공예품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유형의 문화재로는 삼국시대 이전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을 비롯한 다양한 껴묻거리, 불교가 전래된 이후 석탑을 비롯한 불교문화재, 고려시대 이후 유학과 관료사회를 대표하는 다양한 고문서, 책자, 그림과 서화, 고려시대 이후 상류층 사람들이 사용했던 도자기를 비롯한 생활용품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불교 관련 유물들은 사찰건축물을 비롯하여 부처와 승려의 사리를 모시는 탑과 탑비, 통일신라시대 이후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불상과 탱화, 불교의식에 사용되었는 의식구 등이 있다. 불교의식구는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도구들로 소리를 내는 종과 같은 범음구, 공양을 드리는데 사용되는 촛대, 향로 등의 공양구, 부처의 세계를 표현하는 사찰전각에 사용되는 번, 당, 사리갖춤 등의 장엄구, 고려말 이후 전래..

지역박물관 2013.05.03

[대구박물관] 사리갖춤, 부처님 사리를 보관하는 사리기와 공양물

사리갖춤은 통일신라시대까지 사찰에서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스투파(탑)에 모셔졌던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사리기와 공양물을 일컫는다. 사리는 부처의 유골인 진신사리와 부처의 정신을 상징하는 법신사리를 통칭해서 일컫는데 실제로는 법신사리가 많을 것으로 보인다. 사리갖춤은 시라를 담는 그릇, 그릇속에 넣는 불상, 작은탑, 경전과 구슬, 장신구 등의 공양물을 뜻한다. 사리를 담는 그릇인 사리기는 유리 또는 수정으로 만든 그릇과 이 그릇을 금,은,철,동,돌 등 다양한 재질의 용기에 차례로 넣어 사리에 안치한다. 부처의 사리는 불상이 신앙이 중심이 되었던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기때문에 사리를 담는 그릇과 공양물은 당대 최고의 기술과 정성이 들어간 공예품이라 할 수 있다. 최근까지 석..

지역박물관 2013.04.30

[대구박물관] 삼국시대 불교 조각,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국보182호)와 금동보살입상(국보 183호, 184호)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 고구려 소수림왕 때 전진에서 승려와서 불상과 불경을 전하면서 부터이고, 백제는 고구려와 별개로 4세기에 동진에서 온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서이다. 신라는 삼국 중 늦은 시기인 5세기 눌지왕때 고구려에 의해서 전파되었다. 신라는 토착신앙이 강해서 실제로 불교가 공인된 것은 6세기 법흥왕때 이차돈의 순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신라가 국가적으로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부터 경북지역에서는 불교가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경주에 비해서 이른 시기에 사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에 비해 불교가 먼저 전파된 경북지역에는 이른시기부터 불상을 만드는 조상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영주, 봉화, 안동, 군위 등 여러지역에서 삼국시대 금동불과 마애석불 등이 남아 있다. 특히, 우리나..

지역박물관 2013.04.27

부암동 서울미술관, 흥선대원군 별장 석파정과 이중섭, 박수근 화가의 명화를 볼 수 있는 미술관

서울 부암동 흥선대원군 별장이었던 석파정 언덕아래 있는 사설미술관인 '서울미술관'이다. 한 기업가가 석파정 일대를 구입한 후 세운 미술관으로 자신이 소장한 이중섭, 박수근 등의 걸작들을 중심으로 상설전시, 특별전시가 열린다. 대원군별장이었던 석파정은 최근에 공사를 하느라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공사하는 모습을 볼 때는 약간 우려스러웠던 점도 없지는 않았는데, 공사가 끝난 지금 석파정도 깨긋하게 수리가 되었고, 미술관도 언덕 아래에 석파정의 경관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적절하게 잘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설미술관으로 운영의 편의를 위해 바로 옆에는 면세점이 있는데 미술관의 경관을 해치지 않고 관광객이 미술관을 찾을 수 있도록 적절히 배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석파정은 원래 구한말 세도가였던 영의정을..

지역박물관 2013.04.26

[대구박물관] 신라와 가야의 꾸미개 (금동관, 관장식, 장신구 등)

대구박물관에서는 대구.경북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유물들을 주로 전시해 놓고 있는데 주요 출토지역으로 원삼국시대에 쌓은 토성으로 달구벌국의 중심지였던 대구 달성을 비롯하여 경산, 김천, 의성, 상주 등 신라의 지방세력을 비롯하여 고령, 성주지역의 가야연맹체 세력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신라 지방세력의 무덤에서 출토된 꾸미개들은 그 구성이나 형태에 있어서 경주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들과 비슷하며, 경주와는 달리 금관은 출토되지 않고 있다. 출토된 유물로는 신라금과과 비슷한 '出'자 모양의 장식을 한 금동관과 깃털모양의 금동관, 날아가는 새의 날개 모양을 하고 있는 관장식, 원삼국시대 중국과 서역의 영향을 받은 동물모양 허리띠와 신라와 비슷한 북방유목민의 영향을 받은 허리띠.드리개..

지역박물관 2013.04.26

[대구박물관] 고대인의 장송의례

사냥과 채집생활을 하던 인류가 농경생활과 함께 한곳에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계급이 생겨나면서 다양한 형태의 제사의식이 생겨나고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 중 죽음은 여러 제사의식 가운데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삶의 일부분으로서 이와 관련된 다양한 의식이 생겨나게 된다. 죽은이의 시신을 묻는 무덤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이는 죽은이가 사후세계에서 살아야 할 집과 같은 성격을 갖기 때문으로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모습 중 하나이다.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게 된 이후 삼국시대까지 무덤에는 죽은이를 위해 다양한 껴묻거리를 같이 묻었는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은 이들 껴묻거리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무덤에선 죽은이가 생전에 사용했던 의복, 그릇을 비롯한 다양한 ..

지역박물관 2013.04.25

[대구박물관] 삼국시대 무기

대구.경북지역은 고령의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연맹체 세력이 존재하다가 신라가 강력한 세력으로 주변지역을 통합함으로써 신라의 지방세력으로 점차 바뀌었다. 신라는 마립간시기에는 군사력이 강하다고 할 수 없었으나,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왜를 물리친 마립간시기 이후에는 동북아시아에서 강력한 전력을 자랑하던 고구려의 군사와 무기체제를 받아들임으로서 판금갑옷을 비롯하여, 철제투구, 환두대도 등을 갖추게 됨으로써 가야를 병합하고 진흥왕대에 한강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다. 삼국시대 신라와 가야에서 사용한 무기들은 다양한 종류들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매장풍습이 죽은자가 사후세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생전에 사용했던 많은 무기들과 생활용품 등을 무덤에 껴묻거리로 묻었기때문이다. 출토된 유물들은..

지역박물관 2013.04.23

[대구박물관] 신라와 가야의 토기

흙을 물에 섞어 빚은 후 불에 구워서 만드는 토기는 신석기 시대 이후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금속제 도구와 함께 인류가 사용해온 대표적인 생활도구이다. 토기는 농경생활을 기반으로 하면서 식량이나 물을 저장하는 용기로 사용되었으며 신석기시대 이래로 끊임없이 사용되어왔고,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기때문에 고고학에서는 토기의 형태로 연대를 추정하는 방업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삼국시대 신라의 토기는 4세기 후반 구멍을 뚫은 굽다리토기가 출현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물레를 이용하여 형태를 빚은도 고온으로 밀폐된 가마에서 구워서 얇고 단단한 그릇을 만들수 있게 된다. 신라의 토기는 경주에 있는 많은 고분들에서 껴묻거리로 만들어진 것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특히 4~6세기 지배계층의 무..

지역박물관 2013.04.22

[대구박물관] 고대국가 형성기의 대구.경북

고조선이 한나라에 의해 멸망된 이후 한반도 북쪽과 만주에는 부여가 고대국가로 존재하고 있었고 부여의 일파인 고구려가 신흥세력으로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있었다. 고구려 남쪽으로는 함경도 동해안 지역에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연맹체 성격의 동예와 옥저가 존재했다. 한반도 남쪽에는 고조선세력이 남하하여 토착세력과 합쳐진 삼한이 진국에 이어서 오랜 기간 존속하였으며, 백제.신라.가야연맹체가 신흥세력으로 부각되고 있었으며 이 시기를 원삼국시대라고도 부른다. 대구.경북지역은 진한.변한.마한으로 구성된 삼한 중에서 진한이 연맹체 형태로 존재하였으며, 고령지역의 대가야, 경주지역의 신라가 점차 고대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진한은 경주 사로국을 비롯하여 12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었는데, 소국의 규모는 그리 크..

지역박물관 2013.04.20

[대구박물관] 청동기시대 유물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중국 동북지역, 만주지역과 같은 문화권으로 기원전 15세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중국 황화지역의 고대문명과는 다른 문화권으로 지배층 무덤인 고인돌, 비파형 동검 등 이 지역 청동기 문화만이 보여주는 독특한 특징들이 있다. 한반도에서 청동기문화는 지배층 무덤인 고인돌인 분포하는 대동강유역을 비롯한 한반도 서남해안에 많이 분포하고 있지만, 동해안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청동기시대 유적들이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수렵과 채취, 어로가 주 생계수단이었던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청동기시대에는 벼농사가 확산되면서 정착생활이 이루어지고 비교적 큰 규모의 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한 집단내에서는 사회적, 계급적으로 분화가 일어났다. 청동기시대는 발전된 도구..

지역박물관 2013.04.15

[대구박물관] 대구.경북지역의 선사시대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는 최근까지도 알려진 것의 거의 없다고 1960년대 미국인 대학원생이 공주 석장리에서 구석기 유물을 발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한반도의 대표적인 구석기 유물인 뗀석기인 주먹도끼가 발견되어 세계 고고학계의 통념을 바꾸었다고 할 수 있는 연천 전곡리유적지를 비롯하여 파주 금파리, 제천 수양개 등 한강을 비롯하여 전국의 큰 강을 중심으로 유적지들이 발견되었다. 낙동강 중.상류지역에 해당되는 경북지역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주먹도끼가 안동 마애리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대구 월성동, 상주 신상리 등 낙동강 주변에서 구석기 유적지들이 발견되고 있다. 대구.경북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구석기 유적기가 많이 발견되는 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대구.경북에 사람이 ..

지역박물관 2013.04.14

[필암서원 유물전시관] 하서 김인후와 고암 양자징

하서 김인후는 조선중기 문신이자 유학자로 전남 장성에서 출생하였다. 김인후는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과 학문을 닦았으며, 과거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홍문관 박사 겸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면서 인종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인종은 중종의 아들로 인품이 훌륭하고 학자들을 좋아했기때문에 연산군대 이후 중앙으로 진출한 사림출신 관료와 학자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병약하여 즉위 8개월만에 사망하였다. 김인후가 학문적 업적도 뛰어났지만 인종의 스승이었던 점이 당대 및 후대 왕들과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던 큰 동기가 되었다. 김인후는 인종의 사망과 을사사화 등으로 실망하여 고향인 전남 장성으로 낙향하여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당대 및 후대 학계에서 인종의 스승이었던 점..

지역박물관 2013.03.12

[필암서원 유물전시관] 필암서원 문서(보물587호), 서원 운영 기록을 남겨 놓은 문서

정성 필암서원에는 조선후기 인조2년(1624)부터 구한말인 1900년까지 서원에서 작성했거나 발간했던 문서나 서적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원래는 서원내 서적이나 목판을 보관하는 건물인 장판각 건물에서 보관했으나, 지금은 서원 앞에 유물전시관 형태의 꽤 건물에서 서원의 내력과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설명과 함께 전시해 놓고 있다. 그 중 서원의 운영과정에서 작성한 각종 문서들은 조선후기 서원의 운영과 조직구성 들을 볼 수 있고, 지방교육제도와 사회경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어 보물 587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총 14책 64매로, 역대 원장들을 기록한 '원장선생안', 서원에서 강의를 담당한 교관, 강의에 참석자 등 강의내력을 기록한 '보강안', 강회 참가자 명단인 '문계안', ..

지역박물관 2013.03.07

[청주박물관] 학문과 충절의 본향

한반도 중앙에 위치한 충북지역은 영남지방과 한강유역을 연결해 주는 육로와 남한강, 금강을 이용한 내륙수운이 발달한 지역으로 역사이래로 한강유역과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중요한 지역이었다. 한반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삼국간 치열한 전쟁이 있었던 삼국시대에는 많은 산성을 비롯한 국방유적들이 한강과 금강유역을 비룻한 주요 교통로에 남아 있으며, 주거유적 또한 많이 발굴되는 편이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였으며, 지방호족들이 주요 교통로에 세운 사찰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 중 일부는 오늘날까지 사찰로서 유지되고 있으나 많은 사찰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폐사되어 그 절터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에는 한강유역을 다투던 전쟁이 임진왜란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고, 불교 또한 크게 번성하지..

지역박물관 2013.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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