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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박물관 373

[경주박물관 안압지관] 안압지 출토 유물로 본 신라의 궁궐 건축

안압지는 신라의 궁궐이었던 월성 동쪽편에 있는 별궁에 있던 임해전지의 별칭이다. 이 곳에 궁궐을 짓고 연못을 조성한 것은 기록에 의하면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대에 별궁으로 지었다고 한다. 백제 무왕이 사비성에 조성한 궁남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도교적 형식이 많이 반영되어 궁궐건물인 동궁안에는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연못에서 세개의 섬을 만들었으며, 후원에는 꽃나무를 심고 오늘날 동물원처럼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한다. 조선시대 궁궐인 경복궁의 경회루나 향원정, 창덕궁 후원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곳으로 사신의 접대나 연회를 베풀던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규모는 조선시대 궁궐에 비해서 큰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안압지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대부분 실생활에 사용하던 ..

지역박물관 2012.06.29

[경주박물관 안압지관] 안압지 출토 목간 등에서 볼 수 있는 신라의 문자생활과 민속신앙

경주박물관 안압지관은 안압지에서 출토된 3만여점의 유물 가운데 대표적인 유물 7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안압지는 신라 왕궁이었던 월성 동쪽편에 있던 동궁의 정원을 구성하고 있던 연못으로 동궁의 임해전에 딸린 연못이라하여 임해전지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대에 연못을 파고 정원을 조성하였다고 하며, 이곳에는 동물원도 있었다고 한다. 1974년 이래로 오랜 기간동안 발굴조사를 벌였는데 신라을 대표하는 3만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부장품으로서 만들어진 것인데 비해,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안압지가 연못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었던 까닭에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안압지가 있던 동궁..

지역박물관 2012.06.27

[중국 섬서역사박물관 소장 당대 명품전] 당나라 장안 사람들이 정신세계, 불상들

당나라는 이민족과 치열한 투쟁이 계속된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를 계승한 국가로 이전 시기의 왕조로 가장 중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한나라와는 다른 성격을 보이는 왕조였다.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서역의 많은 문물들과 종교, 사상들이 전래되었고, 동시대 세계를 휩쓸었던 이슬람이 절정기를 이루던 시기이기도 하다. 남북조시대에 중국에 본격적으로 전해진 불교는 당나라때에 전성기를 이루며, 한나라 이후 노장사상이 민간신앙과 결합된 도교는 황실의 후원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또한 국가 정치체제의 중심인 유교 또한 학문과 정치의 중심으로 그 역할이 줄어들지 않았으며, 사회 체제로서 그 중심은 더욱 굳건해 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유교, 불교, 도교 이외에도 서역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마니교, 이슬람교 등도 장안을..

지역박물관 2012.06.26

[중국 섬서역사박물관 소장 당대 명품전] 당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인 당삼채와 십이지신상

당삼채는 중국 역사상 가장 국제적인 성격을 지녔던 왕조인 당대(618~906년)에 만들어졌던 도기로 3가지 색상의 유약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도기에 녹색, 갈색, 황색, 백색 또는 코발트이 남색을 입혀서 칠한 것으로 그릇을 비롯한 생활용품과 무덤의 부장품이나 장식용으로 만든 남녀 인물상, 신상, 전설상의 동물, 말 등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진시황 무덤에서 발견된 토용이나 우리나라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는 이형토기와 같은 용도로 죽은자가 사후세계로 가는 길에 동행하는 의미를 가진 부장품이 주된 용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 귀족들이 취향이나 생활모습, 복식 등을 잘 보여주는 유물로 당시 수도였던 장안이나 귀족들이 많이 살았던 낙양의 무덤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안녹산의 난 이후 당나라의 국제적 영향력이..

지역박물관 2012.06.25

[중국 섬서역사박물관 소장 당대 명품전] 당나라 시대 금.은으로 만든 화려한 금속세공품 그릇

중국 당왕조 사회의 국제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는 유물 중 하나로 금과 은을 비롯한 금속제 생활용기들을 들 수 있다. 이전시기에도 청동으로 만든 동기를 비롯하여 금속제 용기들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는 제례의식과 관련된 의기의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의 문화와 문물이 들어오면서 로마를 비롯하여 페르시아,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등에서 많이 만들어졌고 사용되었던 금속제 생활용품들이 당나라 장안의 상류층에 크게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나라 등을 거쳐 실크로드 동단에 위치한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며, 백제 말기의 부여나 신라에서 화려한 금은그릇 등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내물왕대 이후 황금시기로 불리는 신라의 고분에서는 금관..

지역박물관 2012.06.24

[중국 섬서역사박물관 소장 당대 명품전] 당나라인의 예술과 풍류

당나라는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수나라를 이어 618년 이연이 건국하여 907년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중국대륙을 통치한 왕조이다. 한나라와 함께 중국 역사상 이민족인이 아닌 한족 왕조로서 가장 번성했던 왕조이기도 하다. 당나라는 남북조 혼란기를 통일한 왕조로서 중국 한족 고유의 문화도 발전했지만, 이민족과의 적극적인 교류로 국제적인 성격을 가진 대표적인 왕조라고 할 수 있다. 당대의 제도, 문물, 사회체제 등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동아시아 특유의 문화를 형성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는 유교문화가 사회의 주류을 이루었던 송나라를 비롯하여 후대의 중국 왕조와는 달리 국제적이며 개방적인 성격을 많이 갖고 있었던 왕조로 남북조대에 처음 전래된 불교..

지역박물관 2012.06.23

[중국 섬서역사박물관 소장 당대 명품전] 화려한 생활용기, 당삼채를 비롯한 당대 도자기

중국 산시성 시안시에 해당하는 장안은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왕조들이 도읍으로 삼았던 도시로 중국을 통일 진나라, 이를 계승한 한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강성하고 국제적인 성격이 강했던 당나라가 수도를 삼았던 도시이다. 장안은 동.서교역로인 실크로드의 출발점이 도시를 지리적.역사적인 면에서도 국제적인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도시이다. 장안이 초기 중국의 많은 왕조들이 수도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고대 이래로 흉노를 비록한 서역과 북방 유목민들의 위협이 거셌기때문에 이를 제압할 수 있는 국경과 가까운 곳에 도시를 건설해야 했고, 이들 유목민들과의 투쟁을 통해서 강력해진 장안 주변의 세력들이 혼란기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당나라 이후 서역의 유목민 세력이 약해지고 동..

지역박물관 2012.06.22

[중국 섬서역사박물관 소장 당대 명품전] 국제도시 장안과 실크로드

경주박물관에서는 2012년 봄 한.중수교 20주년을 기념하여 을 열었다. 이 특별전에 중국을 대표하는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 등 13왕조의 수도였던 서안(장안)시에 있는 섬서역사박물관 소장 문화재 중 당나라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을 전시하였다. 이 특별전을 통해 중국 역사상 가장 번성했으며, 국제적인 성격이 강했던 당나라때의 장안사람들들 생활모습과 국제도시 장안의 성격을 보여주고, 동시기 존재했던 통일신라문화와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특별전에서는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과 주변지역에서 출토된 생활용품, 건축부재, 불상 등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당나라를 대표하는 유물인 당삼채와 도자기를 제외하고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들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서역..

지역박물관 2012.06.19

[부여박물관] 박만식 기증실, 충남 논산지역 출토 백제 토기

부여박물관 기증전시실로는 충남대 건축학과 교수를 지낸 박만식씨가 기증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박만식기증실이 있다. 이 전시실에는 삼국시대 백제의 영역 중 부여와 가까운 지역인 논산시 연산면 일대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전시된 토기는 적갈색 연질토기도 있으나, 대부분 회청색 경질토기로서 단지, 목단지, 그릇받침, 굽다리접시, 손잡이잔, 세발토기, 뚜껑접시, 병, 작은단지, 토기뚜껑 등은 이 지역의 대표적 기종으로 꼽힌다. 경주박물관의 국은기념실에 비해서 전시유물이 다양하지 않고 연산지역에서 출토된 토기 위주의 단조로운 전시실이라 할 수 있다. 이 전시실에 전시된 토기들은 논산 모촌리와 표정리 고분군을 비롯하여 충남 논산군 연산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들이라고 한다. 논산 표정리고분군은..

지역박물관 2012.06.16

[부여박물관] 백제의 멸망과 의자왕, 후대 사람들이 본 백제와 부여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재위 641~660년)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재위 초기인 642년에는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40여성 빼앗는 등 신라에 큰 타격으로 주었다. 고구려와 연합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와 당나라의 해상 교통로를 장악하는 등 내.외적으로 백제의 국력을 회복하는데 힘썼다. 만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다가 660년 나.당 연합군의 침공으로 사비성이 포위되자 웅진성으로 피신했다가 항복아여 태자와 함께 당나라에 압송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나.당연합군은 신라군이 육로로 김유신이 이끄는 5만명의 군대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서 계백의 오천결사대를 격파했으며, 당나라의 소정방과 신라의 김인문이 이끄는 연합군이 금강수로를 이용하여 사비성을 함락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백제의..

지역박물관 2012.06.15

[부여박물관] 백제의 무늬 전돌 (보물 343호), 산경치.용.봉황.연꽃.구름.괴수 등 여덟가지 무늬의 전돌

무늬벽돌(塼)은 오늘날 벽돌이나 타일과 비슷한 용도로 사용하는 건축자재로 흙을 사각형, 직사각형, 마름모꼴 등의 형태로 바닥이나 벽면을 장식하는데 주로 사용했다. 무늬벽돌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 이후부터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고분이나 절터에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바닥이나 벽면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무늬벽돌에는 다양한 소재의 무늬들이 그려져 있는데 불교적인 소재인 연꽃이나 보상화무늬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무늬벽돌의 무늬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 무늬를 통해 당시의 회화 경향이나 문화의 전파 관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부여 규암면 외리 절터에서 파편을 포함하여 모두 140여점 출토된 보물 343호로 지정된 백제의 무..

지역박물관 2012.06.14

[부여박물관] 백제 사비 시대의 불교 예술, 금동불상

중국 동진을 통해 백제체 불교가 처음 소개된 것은 침류왕때이지만, 실제로 불교가 크게 융성한 것은 백제 부흥을 꿈꾸던 성왕대로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제의 영향을 받아서 중국으로부터 기술자 등을 지원받아 도읍을 사비성으로 옮기면서 정림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찰을 세웠다. 이런 경향은 그의 아들인 위덕왕과 무왕, 의자왕때까지 이어졌으며, 이런 경향은 일본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특히 백제의 불교는 예술과 외교적인 측면에서 많은 족적을 남겨 놓고 있는데 신라의 금동불상인 반가사유상, 일본의 반가사유상, 신라의 황룡사 목탑, 석가탑, 일본 나라의 동대사를 비롯한 많은 불교 건축에 백제의 영향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일본의 사찰건축 전문회사 또한 이 당시부터 존재했던 백제의 장인..

지역박물관 2012.06.13

[부여박물관] 신라와의 전쟁과 익산경영, 왕궁리유적지 출토 유물

전북 익산시 왕궁리에는 국보 289호로 지정된 왕궁리 5층석탑을 중심으로 옛 절터가 남아 있다. 이 절터를 발굴 조사한 결과 사찰건물터와 함께 궁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와 주변에 성벽터가 발견되어 이 곳이 백제 무왕이 미륵사 건립과 함께 백제 왕궁을 조성했다는 것을 추정하게 해 주고 있다. 왕궁리 절터에는 무왕이 조성한 왕궁지와 후대의 사찰 유적이 같이 남아 있는데 후대의 궁궐과 마찬가지로 앞쪽에는 정전을 중심으로 한 의례적인 공간이, 뒷쪽으로는 생활공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절터에서는 중앙정부가 있는 곳이란 의미의 '수부'명 기와가 발견되어 이 곳이 왕궁으로 조성한 곳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한 관북리유적지 등에서 출토된 당시의 행정관제를 나타내는 글씨가 찍힌 기와들이 왕궁리유적지에서..

지역박물관 2012.06.11

[부여 박물관] 백제 중흥을 꿈꾼 서동요 주인공 백제 무왕

성왕이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긴 이래로 백제는 약 100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존재했었느데, 성왕, 위덕왕, 무왕, 의자왕 재위기간이 대부분으로 그 중 서동요 설화로 잘 알려진 무왕이 재위 기간 40여년으로 가장 길었다고 할 수 있다. 무왕대에는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며,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당나라와 교류하였다. 무왕대에는 신라 공격에 자주 군대를 동원하고 미륵사나 궁궐 남쪽 연못(궁남지)를 파는 토목공사를 많이 일으녀 국력이 많이 소모되어 백제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무왕과 관려된 유적으로는 삼국사기에 무왕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왕흥사가 있는데, 이 사찰은 최근에 출토된 왕흥사지 목탑지에서 출토된 청동사리함에 이 사찰이 위덕왕대에 577년에 세워졌다고 하며, 죽은 그의 아들을..

지역박물관 2012.06.08

[부여박물관] 백제금동대향로 (국보287호), 백제를 대표하는 문화재

삼국시대 백제를 대표하는 화려한 유물인 국보 287호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이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대에 크게 유행한 박산향로의 일종으로 백제 마지막 왕들이 묻혀있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 절터에서 발견되었다. 이 향로는 용이 머리를 들어 입으로 향로를 물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받침, 사실감 있게 묘사된 연잎으로 장식하고있는 향로 몸통, 중국 전설에 나오는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박산을 묘사한 몸체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뚜껑의 정상부에는 한마리의 봉황이 장식되어 있다. 향로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향로에서 피워 올린 연기가 박산 주위에서 안개처럼 퍼져나가는 모습을 연출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산형태의 뚜껑에는 12명의 인물과 42마리의 동물, 바위, 나무 등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어 중국의 영..

지역박물관 2012.06.06

[부여박물관] 능산리 절터 출토유물에서 보여지는 백제의 대외교류

백제는 성왕대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중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양나라 무제를 위한 대통사를 창건하였으며 유학에 정통한 학자와 장인,화가 등을 초빙하기도 하였으며, 불교경전 들을 얻어 오기도 했다.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능산리사지에는 당시 중국과의 교류를 나타내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중국 남조와 백제와의 교류가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대 이후에도 이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능산리 절터에서는 수당의 영향을 받은 흑갈유 벼루나 자기편을 비롯하야 남조에서 많이 사용한 호자, 서역과 북위에서 많이 만들어진 소조상을 비롯하여 서역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유리제품들도 출토되고 있다. 또한 능산리절터에서는 백제에서 사용된 항아리, 사발, 등잔,..

지역박물관 2012.06.05

[부여박물관] 백제 창왕명석조사리감 (국보 288호), 능산리사지 출토 금속공예품과 소조상

국보 288호로 지정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은 백제 마지막 왕들의 고분이 있는 능산리 절터 목탑지에서 출토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리감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창왕은 백제 27대 위덕왕을 일컫는 명칭이며, 그의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석으로 능산리사지 목탑지 심초석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리감에는 창왕의 여동생인 공주가 만들어 사리와 함께 봉안했다는 글씨가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인 예서풍의 글자로 적형 있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중요한 금석문 자료로,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게 적혀 있어 이 절의 창건연대와 이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의 제작연대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또한 능산리절터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목탑이 있던 터에서는..

지역박물관 2012.06.05

[부여박물관] 능산리사지 목간에 남겨진 이야기

책(冊)이라는 한자의 어원이 되는 목간은 종이가 발견되기 이전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문서로 폭 1cm, 길이 20~30cm 정도로 끈어로 묶어서 사용했는데, 지금의 책과 비슷한 크기라고 할 수있다. 목간은 춘추전국시대 이후 다양한 저서들이 적혀있는 오늘날의 책과 같은 용도로도 많이 사용되었지만, 실제로는 교역을 위한 영수증, 물품표, 교역내용의 기록한 장부 등의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는 한.중.일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지역에서 교역의 목적으로 한자를 도입하고, 이를 목간에 기록해 놓은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목재로 만들어진 목간은 물품표 등이 경제적인 목적으로 종이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동안 사용되었는데, 목재의 특성으로 우리나라에서 잘 부패되지 않는 연못, ..

지역박물관 2012.06.03

[부여박물관] 능산리사지 가람이야기, 공방지 출토 유물들

부여군 능산리 고분과 부여 나성 사이에 위치한 능산리 절터는 백제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로 원찰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탑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이 사찰은 다른 사찰과는 달리 뒷편 강당과 주변 건물들이 사당으로 먼저 세워지고 그 뒤에 목탑과 금당이 지어지면서 사찰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능산리 사지 절터 뒷편에는 강당건물과 함께 공방지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있는데, 이 곳은 원래 성왕의 제사를 지내던 사당의 부속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절을 세운 위덕왕이 죽고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 기능이 축소되면서, 공방건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는 굴뚝을 설치하여 동광석을 제련하고 사찰에 필요한 각종 ..

지역박물관 2012.06.02

[부여박물관] 위덕왕과 능산리사지, 절터에서 출토된 유물

백제 마지막 왕들의 무덤이 있는 능산리고분과 백제 나성 사이에 위치한 능산리사지는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인 금동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감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된 절터이다. 백제는 사비성을 도읍으로 하던 시기에 많은 사찰들을 건립했지만 그 중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이다. 이 사찰은 백제가 사비로 도읍을 옮기던 시기에 지어졌다는 의견되 있지만, 대체로 백제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원 원찰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으로 보인다. 이 절은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전형적인 1탑 1금당의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여러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중국으로 부터 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청자를 비롯하여, 문서에 해당하는 많은 목간들, 건축자..

지역박물관 2012.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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