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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2706

서울 혜화동 골목길 걷기

한양도성 성안에서 동북쪽 출입문인 혜화문 안쪽으로는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중심으로 조선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혜화동 로터리 동쪽편 성곽 안쪽 언덕으로는 혜화동성당을 비롯하여 카톨릭 관련 시설들이 많이 들어서 있고, 혜화동 로터리북쪽에서 성북동으로 연결되는 큰 길에는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는데, 크고 작은 한옥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시대에도 양반들이 살았던 큰 마을이었고, 성균관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동네였던 것으로 보인다. 혜화동로터리 남쪽편으로는 서울의 대표적인 젊은이들의 공간이 대학로가 들어서 있는다. 대학로가 원래 서울대학교가 있던 자리이며, 아마도 조선시대에는 궁궐에 속해있던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성북동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풍경 2012.12.02

청주동헌, 조선시대 청주목사가 근무했던 관아 건물

청주목은 삼국시대 서원경이 설치되었던 청주지역에 설치된 지방행정기구로 고려가 국가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기 시작한 광종대에 전국에 12개 목(牧) 중 갑오개혁으로 전국의 행정체제가 개편되기까지 유지되어 왔다. 청주에는 병자호란 이후 해미읍에 있던 충청병영이 옮겨와 상당산성을 중심으로 내륙의 군사적 거점이 되어왔다. 청주 구도심으로 대부분의 행정기관이 모여있는 상당구 남문로에는 객사가 있었던 중앙공원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관아 건물들 중 일부가 남아 있다. 중앙공원 뒷편에는 원래 충주목 관아 동헌이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은 청원군청이 소재하고 있고, 그 사이에는 KT지사가 들어서 있는데, 대체로 충주목과 충청병영에 속했던 많은 관아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원군청 본관 뒷편에 남아 있는 청주동..

조선 관아 2012.12.02

안동 하회마을 영모각, 서애 류성룡 종가 유물 (보물460호)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은 보물 414호로 지정된 고택으로 서애 류성룡이 살았던 집으로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곳이다. 하회마을 종택으로 그의 형 류운룡이 살았던 양진당(보물306호)과 이웃하고 있다. 원래 류성룡은 낙향하여 이곳에서 작은 초가를 짓고 살면서, 번잡한 마을에서 벗어나 낙동강 건너편 부용대 아래에 작은 정자인 옥연정사를 짓고 그곳에서 징비록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현재의 충효당은 그의 증손자인 류의하가 17세기에 크게 중건하여 지은 것으로 조선후기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충효당 뒷편에는 불천위 조상에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 있고, 사당 앞쪽에는 류성룡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영모각이 있다. 류성룡 종가에는 많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극복과정을 손수 ..

지역박물관 2012.11.29

청주 망선루, 청주목 관아에 있던 공식 행사를 위해 세운 누각

충청북도 도청소재지가 있는 청주시는 삼국시대에 상당현과 서원소경이 설치되었으며, 가야가 멸망한 이후 김유신 장군으로 대표되는 가야후손들이 세력을 잡았던 곳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서원경이 설치되었고, 고려시대 이후로는 지방관제 중에서는 높은 직급이라고 할 수 있는 정3품 목사가 수령인 청주목이 설치되었다. 청주는 동쪽으로는 상당산으로 비롯하고 크고 작은 산들이 있고, 서쪽과 남북쪽으로는 금강 지류인 무심천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청주 구도심으로 상업의 중심지인 상당구 남문로 일대에는 조선시대 읍성 안 관아가 있던 지역으로 조선후기에 충청병영이 청주로 옮겨오면서 청주목 관아와 충청병영 관아가 모여있던 지역이다. 그 중 관아의 중심건물인 객사가 있었던 장소인 중앙공원에는 관아 건물 중 충청병영 ..

조선 관아 2012.11.29

구리 동구릉(사적 193호), 24대 헌종의 경릉과 20대 경종 비 단의왕후의 혜릉

구리 동구릉(사적193호)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 무덤을 중심으로 후대 왕들이 무덤이 계속 조성된 대표적인 왕릉이다. 동구릉에는 태조의 능인 건원릉을 중심으로 총 9곳의 왕릉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태조가 죽은후 풍수지리설에 따라 하륜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5대 문종을 비롯하여 선조, 영조 등 여러 왕과 왕비들이 계속해서 이곳에 능을 조성하였다. 시기에 따라서 동오릉, 동칠릉 등으로 불리다가 철종대에 헌종의 능이 조성됨으로서 9곳의 왕릉이 있는 동구릉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 왕릉의 터를 잡는 것은 넓은 지역을 능역으로 조성하고, 풍수리지리상 길지가 적합한지는 이론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고, 후대에 경쟁 정파의 공격을 받기 쉬운 까닭에 상당히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었다. 동..

청주 충청병마절도사 영문, 조선후기에 세워진 병영 출입문

충청북도 도청소재지인 청주시는 삼국통일에 큰 기여를 한 김유신 장군의 출신지역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5소경 중 하나인 서원경이 설치된 곳이다. 고려초에는 호족세력이 강했던 지역 중 하나로 청주목이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조선후기에는 충청도 내륙지역의 국방상 중요성이 강조되어 서산 해미에 있던 충청병영이 이곳으로 옮겨졌다. 충북도청과 청원군청이 있는 청주 구도심 중앙공원은 조선시대 청주목 관아 객사가 있던 곳으로 객사건물은 남아 있지않고, 객사 누각 건물인 망선루, 충청병영 출입문을 비롯하여 척화비 등이 남아 있으며, 뒷편 청원군청내에는 동헌 건물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병영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종2품 무관인 병마절도사가 머무르는 곳으로 충청도, 경상좌.우도, 전라..

조선 관아 2012.11.27

서울 성북동, 골짜기 북쪽 언덕 성북동길 걷기

서울 성북동은 북악산 동쪽편 한양도성 성벽 바깥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한양도성을 수비하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도성 북쪽에 있어 성북동이라 불렸다고 한다. 성북동은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자연과 함께 살 수 있는 공기 좋은 동네라 할 수 있다. 도성바깥쪽 성밖마을에는 지금도 낡은 주택들과 좁은 골목길이 60년대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1960년대 시인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에서는 골짜기 채석장 하얀먼지로 황폐화된 도시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표현했던 성북동 북쪽편 언덕은 지금은 서울을 대표하는 고급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다. 원래부터 서민들이 살았던 성밖의 북향을 하고 있는 언덕과 성북천 주변은 60년대 풍의 가옥들이 많이 남아 있지..

한국의 풍경 2012.11.26

부여 무량사에 모셔진 매월당 김시습 부도

부여 만수산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무량사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했던 생육신 중의 한사람이자 당대의 천재로 널리 알려진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을 보내고 돌아가신 사찰이다. 이 사찰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흔적으로 그가 직접 그렸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사실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영정이 보관되어 있고, 사찰에서 약간 떨어진 언덕에는 그가 죽은후 남김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 모셔져 있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여 젊은 나이인 21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을 떠돌다 간 그의 삶이 아쉬워서 그런지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그래서인지 그가 만년을 보낸 무량사 또한 그의 명성과 함께 크게 번창한 사찰로 보인다. 무량사 입구 마을에서 서쪽편 언덕에는 여러기의 부도들이 모여 있는 부도군이 있는데, 그 중에서 ..

서울 인왕산 국사당과 선바위, 서울에 남아 있는 전통신앙 관련 사당

국사당(國師堂)은 국수당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 뒷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동신을 모시는 마을 제당이다. 국사는 한자로 國師로 표기하는 하지만 한자에 담긴 뜻과 같지 않고 단순히 한자로 기록하기 위해 음을 취한것일 뿐이다. 실제로는 국사당이라는 말보다는 국수당, 국시봉, 국수봉 등 다양한 형태의 발음으로 나타난다. 국사당은 우리나라 중서부 해안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천신이 하강한 장소라는 의미의 천신사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산신당이나 서낭당 등 신당보다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 위상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 남아 있는 전통신앙과 관련된 사당인 인왕산 국사당은 원래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선바위가 있던 인왕산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산에 국..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국보41호), 도심 상가지역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철당간

청주 남문로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청주목 관아 및 충청병영이 있었던 행정 중심지로 넓은 벌판을 이루고 있는 넓은 청주벌판이 동쪽끝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고려시대 용두사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철당간만이 남아 있다. 고려 광종 13년(962)에 청주지역 호족들이 세운 사찰로 보이는 용두사는 인근의 흥덕사나 사뇌사와 함께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했던 사찰로 보이며, 금속활자를 비롯하여 금속공예가 크게 발달했던 지역으로 보인다. 당간은 절입구나 법당 앞에 깃발이나 괘불을 거는 것으로, 돌로된 지주대를 마주보게 세우고 그 사이에 철이나 돌로 만든 당간을 세웠다.당간 몸체에는 당간을 세운 목적을 담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글에는 '준풍3년'이라는 광종의 독자적인 연호와 함께 청주호족과 학교 관련 내용이 있..

안동 하회마을 부용대, 낙동강 12경 중 하나로 하회마을 경치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

하회마을 부용대는 마을 북쪽편 낙동강 건너에 있는 해발 64m의 절벽으로 마을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낙동강이 하회마을을 휘감아 돌면서 깍은 절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부용'이라는 이름은 연꽃을 뜻하며 마을형상이 물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보인다하여 붙여졌다. 부용대는 하회마을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한참을 돌아서 풍천면소재지에서 다리를 건너 화천서원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다. 부용대는 하회마을 낙동강변 만송정 솔숲에서 바라보는 절경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부용대에서 마을과 낙동강 경치를 내려다 보는 것이 더 큰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마을에서는 부용대를 감상하기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부용대 아래에서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곳 겸암정사와 옥연정사가, 마을 ..

한국의 풍경 2012.11.19

[창덕궁] 낙선재 일원 (보물 1764호), 마지막으로 왕족이 거처하던 곳

창덕궁 낙선재는 일제강점기 이후 1989년까지 마지막 이씨왕조 후손들이 살았던 공간을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국왕의 침전이다. 구한말인 헌종 13년(1847)에 지어진 낙선재는 기존의 궁궐전각 형태가 아닌 사대부 저택처럼 지어진 국왕의 침전이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 처음부터 궁궐에서 태어나 세자를 거쳐서 왕위에 오른 경우도 있지만, 일부 국왕들은 사저에 태어나 일반인처럼 살다가 왕위를 이을 세자가 없어서 대신 왕위에 오른 경우가 많다. 이런 왕들은 민간인으로 살던 시절을 그리워하여 궁궐내에 사대부 저택 형태로 전각을 짓고 거처하는 경우가 있었다. 낙선재와 마찬가지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 경복궁 후원의 건청궁이 이런 연유로 궁궐내에 사대부 저택 형태로 지은 전각들이다. 낙선재는 먼저 국왕의 ..

궁궐_종묘 2012.11.18

서울 하늘공원, 가을 억새가 절정을 이루는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복원한 월드컵경기장 부근 도심공원

2002년 월드컵을 기념하여 80년대 서울시 쓰레기를 처리하던 난지도 일대에 조성한 월드컵 공원은 쓰레기더미가 쌓여 있는 2개의 봉우리에 조성한 하늘공원과 노을 공원, 월드컵경기장 전면의 도심공원이 평화의 공원, 매립장 주변 공터에 조성한 난지천공원, 한강둔치에 조성한 난지한강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월드컵공원은 쓰레기매립장을 재활용하면서 생태복원과 안정화를 위해서 만들어진 공원으로 평화의 공원을 제외하고는 다른 도심공원에 비해서 편의시설이 거의 없는 편이라 불편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자연그대로의 모습을 즐기면서 쉴 수 있는 생태공원이다. 월드컵 공원에 조성한 5개의 공원 중 하늘공원은 노을공원과 함께 원래 쓰레기를 높이 쌓아두었던 쓰레기더미를 흙으로 덮어서 자연생태계로 복원한 공원이다. 5만8천여평에..

한국의 풍경 2012.11.18

안동 하회마을 옥연정사, 서애 류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한 부용대 기슭에 자리잡은 정자

하회마을 서쪽편 낙동강의 빼어난 12절경 중 하나인 부용대 아래에는 서애 류성룡이 서당으로 지은 옥연정사와 겸암 류운룡을 모신 화천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화천서원은 정조대에 지은 서원으로 원래 이곳은 옥연정사가 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옥연정사는 류성룡이 35세 때 마을에 작은 정자인 원지정사를 지은 이후에 그곳이 마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편안하게 독서를 하면서 즐길 여유를 찾지 못하여 마을 건너편 부용대 아래 외진 곳에 터를 마련하여 짓기 시작한 곳이다. 당시는 류성룡의 경제력이 부족하여 쉽지 짓지 못하다가 승려 탄흥의 도움을 받아서 10여년에 걸쳐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이후 큰 홍수로 하회마을이 수해를 입어 이 곳에 기거하면서 임진왜란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징비록을 완성한..

고택_정원 2012.11.16

서울 삼청각, 70년대 요정 건물이었던 북악산 자락 성북동 전통 공연장

성북동 삼청각은 70년대에 대원각, 청운각과 함께 대표적인 대형 요정이었다. 그 중 삼청각은 경복궁이나 청와대와 가깝지만 성북동 주택들이 북악산 숲과 만나는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70년대 여야 고위 정치인의 회동과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 막후 협상장소 등으로 이용되었던 장소이다. 80년대 이후 쇠퇴하여 한때는 건설업체에서 인수하여 고급빌라를 짓고자 했으나 삼청각의 빼어난 입지적 조건과 역사적 의미 등을 고려하여 서울시에서 전통문화공연장으로 바꾸어 운영하고 있다. 요정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요릿집이 전해져 생겨난 고급 요리집으로 처음에는 궁궐이나 관아 등에서 일하던 관기들이 풀려나와 요릿집 등에서 일하면서 생겨난 음식점으로 기생을 불러다 놀던 유흥업소로 기생집이라고도 불렀던 곳이다 성북동에서 경복..

한국의 풍경 2012.11.16

안동 화천서원, 하회마을 부용대 아래 겸암 류운룡을 모신 서원

안동 하회마을 건너편 낙동강 12경 중 하나인 부용대 아래에 위치한 화천서원은 서애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을 모신 서원이다. 비교적 늦은 시기은 조선후기 정조대에 세워진 서원으로 당시 서원은 교육기능보다는 제사 기능을 중시하여 강학공간을 크게 짓지 않는데 비해 화천서원은 조선 중기의 교육기능 중심 서원과 비슷한 규모로 지어졌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강당과 주사만 남아 있던 것으로 1996년에 복원하였다. 서원건물은 대부분 최근에 지은지은 것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낙동강 명승인 부용대와 인근에 있는 옥연정사와 더불어 하외마을 양반들이 후학양성을 위한 세웠던 입지조건과 배경에 의미를 갖는 서원이다. 겸암 류운룡은 서애 류성룡의 형으로 당대에는 퇴계 이황의 문인이자 ..

안동 하회마을, 입향조 류종혜가 심은 수령 600년 삼신당 느티나무

안동 하회마을은 원래 허씨와 안씨가 살았던 집성촌이었는데, 조선초 인근 풍산지역에서 고려시대 호족이라고 할 수 있는 향리였던 풍산류씨가 들어와 살면서 풍산류씨의 집성촌이 형성된 곳이다.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마을을 휘감아 돌면서 동쪽에는 화산으로 막혀 있고, 남.서.북쪽으로는 낙동강이 흘러 고립된 지형을 이르면서도 어느정도의 농토를 확보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런 지리적인 이점으로 임진왜란이나 한국전쟁같은 전란을 피할 수 있었고,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여 영남의 대표하는 길지로 여겨진다. 하회마을에는 종택인 양진당을 비롯하여 충효당, 북촌댁, 남촌댁 등 많은 한옥들과 초가들이 있는 전통마을로 고택들과 함께 하회탈춤으로 잘 알려진 마을제사인 동제가 잘 남아 있다. 하회마을에는 조선시대 마을에서 볼 수 있는 민속..

한국의 풍경 2012.11.15

서울 길상사, 성북동 북악산 자락에 자리잡은 옛 요정 대원각을 시주하여 세워진 공원같은 사찰

서울 성북동 북악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길상사는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70년대 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주인이었던 김영한이 송광사에 시주하여 사찰로 바뀐 곳이다. 1만여평의 이르는 넓은 부지위에 옛날 요정으로 사용하였던 건물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최근에 일부 전각들을 신축하여 사찰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원이 잘 가꾸어진 사찰경내에는 울창한 수목들로 가득차 있고, 북악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작은 개울이 정원의 풍광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길상사를 시주한 김영한은 월북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알려진 기생으로 70년대 고급요정이었던 대원각을 운영했으며 만년에 법정의 무소유 철학에 감화를 받아서 수차례에 걸쳐 시주의사를 밝혔으나 법정이 거절하였다가 1997년에야 사찰로 바뀌었다고 한다. 법정이 만년을 보낸곳이기도..

전국 사찰 2012.11.14

안동 하회마을, 빈연정사와 낙동강변 소나무숲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회마을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양반들의 세거지이다. 낙동강이 마을을 휘감아 돌아가고 동쪽으로는 산줄기가 낙동강과 만나는 화산이, 서쪽편으로는 낙동강의 절경인 부용대자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이중환의 택리지에 봉화 닭실마을, 안동 천전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영남 4대 길지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이 마을은 풍산류씨가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서애 류성룡을 비롯하여 많은 고위관리와 학자를 배출한 곳으로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마을에는 종택인 양진당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양반가옥들이 남아 있다. 하회마을에는 조선시대 부유한 양반들이 살았던 모습을 보여주는 오래된 고택과 함께 선비들의 삶을 보여주는 서원과 정자 등이 여럿 남아 있다.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

고택_정원 2012.11.13

남해 금산 보리암, 관음보살 남해바다를 내려 보고 있는 우리나라 3대 기도처

남해섬에서 가장 유명한 명승지이자 우리나라 3대 기도처 중의 하나인 남해 금산의 보리암이다. 남해의 명산인 금산 정상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보리암에 들어서면 남해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지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해풍을 맞을 수 있다. 아름다운 바다와 남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관음보살상이 인상적인 곳으로 아주 잘 어울리는 광경으로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어려운 일이 만나면 남해보살을 만나러 갔던 곳을 연상시키는 장소이다. 보리암은 683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작은 암자로 원래는 보광사였다고 한다. 후에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열었다는 전설이 있는 사찰로 17세기에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찰로 삼고 이름을 보리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절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사찰이라기 보..

전국 사찰 201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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