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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146

[중앙박물관 부여/삼한실] 삼한의 토기, 고대인과 새

삼한의 토기는 기존의 제작 기술에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어 만들어졌는데 가마에서 구워서 단단해진 경질무문토기와 단단하게 두드리는 두드림기법이 적용된 타날문 토기가 있는데 단단해서 실용성이 좋은 경질무문토기의 비중이 높았다고 한다. 현재 출토되는 토기는 실생활에서 쓰던 토기와 무덤에 부장품으로 만든 토기가 있는데 약간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삼한에는 이 시기의 종교적 성격을 같는 새모양을 하고 있는 토기가 많이 출토되는데 이는 조령신앙과 관련되어 있으며, 한반도를 많이 찾아오는 철새인 오리모양의 토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고대인과 새 고대사람들은 새가 봄철에 곡식의 씨앗을 가져다주거나 죽은 이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한다고 하는 조령신앙을 믿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새를 형상화한 ..

중앙박물관 2011.04.10

[중앙박물관 부여/삼한실] 삼한의 무기와 도구, 철기문화의 발전

한반도 남쪽 지역에 존재했던 삼한은 중국, 일본과 주요 해상교통로에 있었으며, 고조선 멸망 이후 남하한 세력들의 우수한 기술과 지식 등으로 인해서 상당한 문화 수준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의 철기문화가 도입된 삼한은 향상된 생산력으로 사회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전단계에 이르런 것으로 보인다. 삼한의 철기는 초기에는 주조로 만든 호미, 괭이 등 농기구가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철기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다양한 무기를 제작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삼한에서는 아주 발달된 한국형 동검이 출토되기는 하지만, 청동검은 지배계층의 권위를 나타내는 의기로서 역할을 했을 뿐인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철제무기가 발전하면서 무기로서 강력한 효과를 나타내어 사회 갈들을 해결하는 무력의 중요성이 ..

중앙박물관 2011.04.09

[중앙박물관 부여/삼한실] 동예,옥저, 삼한의 유물

고조선이 한나라에 멸망할 무렵 한반도 북쪽과 만주 지역에는 부여가 고대국가로서 존재하고 있었고, 동해안 지역에는 동예와 옥저가 있었다. 부여는 북만주 지린성 일대에 있었던 고대국가로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의 원류가 되는 국가로서 우리나라 고대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국가이다. 부여의 남쪽에 존재했던 동예와 옥저는 통일된 정치체제를 구축하지는 못하고 연맹체와 비슷한 성격을 가졌던 국가로 대부분의 기간동안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국가이다. 북쪽에는 부여가 있었다면 남쪽에는 진국에 이어서 삼한이 오랜 기간동안 존속하였다. 호남지역의 마한, 경남지역의 변한, 경북 지역의 진한으로 구성된 삼한은 고조선의 세력교체시 이동한 세력들이 근거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한과 변한은 중..

중앙박물관 2011.04.08

[중앙박물관 청동기/고조선실] 고조선과 한(漢),

요령식 동검과 한국형동검으로 대표되는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문화와는 달리 중국에서 고조선의 철기문화는 중국에서 이동해온 유력 세력들과 관계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여러 역사기록에서 기자의 한반도 이동, 연나라 출신 세력으로 추정되는 위만조선 등이 철기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고조선을 대표하는 철기문화는 평양상리, 평양 동대원리, 황주 흑교리 유적을 통해서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고조선 특유의 나무곽 무덤에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나무곽무덤은 고조선 문화를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로 한국형 동검, 동기, 철제 칼을 비롯한 무기류 등이 부장품으로 출토되고 있다. 평양 주변 고조선 영역에서 나타났던 나무곽 무덤과 부장 유물을 고조선 멸망 이후에도 낙랑군 지역에서도 계속에 나타나고 있으며 이..

중앙박물관 2011.04.06

[중앙박물관 청동기/고조선실] 한국식 동검과 철기의 등장, 고조선과 진(辰)

우리나라의 철기는 평안도 청천강 이북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전국시대 혼란기에 연나라로부터 인구의 유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지배층을 이루던 세력들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고조선의 지배층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위만이 쿠데타로 집권한 위만조선 시기에는 세력경쟁에서 탈락한 집단들이 한반도 서남부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읍성국가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으로 보이며, 이들 국가들은 대체로 진辰이라 불리고 있는데 통일된 국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철기는 평북 위원 용연동 유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양한 종류의 철제무기와 농공구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중국 연나라와는 긴장관계가 유지되는 한편 많은 교류가 있었던 것으..

중앙박물관 2011.04.04

[중앙박물관 청동기/고조선실] 한반도 서남부지역 성읍국가의 성장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예산 동서리 유물)

청동기시대 한반도에 출현한 고대국가인 고조선은 그 성격이 현대적인 의미로 한반도와 요동지역을 통치한 국가는 아니고, 수도인 평양을 중심으로 일정지역만 그 세력권으로 두고 있었던 국가였다. 청동기시대에는 국가형태를 갖춘 고조선 이외에도 권력자를 중심으로 소규모의 국가가 여러곳에서 건설되었는데 대개 치소는 방어에 편리한 야산 부근에 건설하고 주변에 토성이나 목책을 쌓고, 성책밖에는 호를 파는 등의 방어 시설을 갖추었다. 이런 형태의 국가를 고대국가와 구불하여 부족국가, 성읍국가, 군장사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런 성읍국가들 중에서 중국과 일본간의 해상 교역로에 위치하고 있었던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서 이른 시기에 성읍국가들이 형성되어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부여 송국리 유적지에서 볼 수 있듯이 ..

중앙박물관 2011.04.03

[중앙박물관 청동기/고조선실] 고조선의 동검 문화의 성립 (요령식 동검, 한국형 동검)

고조선은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고대국가이다. 중국 요녕성을 비롯한 동북부 지역과 같은 시기에 비슷한 청동기 문화를 같이했던 고대국가 고조선의 원래 국호는 조선이지만, 조선왕조와 구분하기 위해서 편의상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문헌상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단군에 세운 단군 조선과 이후 은나라가 주나라에 의해서 멸명한 이후, 중국에서 넘어왔다는 기자조선과 연나라 세력의 일부인 위만조선까지 이어지다가 한무제에 의해서 멸망한 국가이다. 문헌상의 내용들은 신화적인 내용도 있지만 당시의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다양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로는 고조선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고로 출토되는 요령식 동검과 이 동검이 발전한 한국형 동검을 들 수 있다. 비파형 동검이..

중앙박물관 2011.04.02

[중앙박물관 청동기/고조선실] 청동기시대 도구, 간석기와 청동무기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5세기부터라고 알려져 왔으며, 중국 동북지역, 만주지역과 같은 문화권으로 중국 황화유역과는 다른 문화권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국가인 고조선과 관련이 많은 것으로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현재 출토되는 비파형 동검, 지배계층의 무덤인 고인돌 등에서 많은 연관성을 보이고 있는 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청동기는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고 권위의 상징물이나 제사를 지내는 의기로서 지배계층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한다. 실제로는 민무늬토기, 간석기, 목기 등이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청동기시대에는 벼농사가 확산되고 정착생활이 이루어짐에 따라 마을이 생겨나면서 외부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어시설 등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공동체의..

중앙박물관 2011.03.31

[중앙박물관 청동기/고조선실] 농경문 청동기, 민무늬 토기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농경문청동기가 있다. 대전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기원전 4세기 유물로 앞면에는 밭을 가는 모습을 뒷면에는 솟대를 표현한 것으로 당시에 생산과 풍요를 비를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에 한반도 사람들의 높은 농경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유물로 한국인의 정신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솟대와 조선시대까지 그 풍습이 남아 있는 옷을 벗고 밭을 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청동기시대에는 겉면에 무늬가 없는 민무늬 토기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지역과 시기에 따라서 다양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은 토기의 형태로는 붉은간토기, 송국리식 토기, 검은간 토기 등이 있다. 이 민무늬토기는 청동기 시대 이후에도 꾸준히 사용되었다고 한다. 농..

중앙박물관 2011.03.30

[중앙박물관 신석기실] 토기의 출현과 지역성, 대외교류

우리나라의 최초의 토기는 기원전 6,000년 경부터 사용한 덧무늬토기로 알려려 왔으며, 기원전 4,500년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빗살무늬 토기가 가장 많이 발굴되고 전국적으로 고루 분포되어 있어서 한반도의 신석기문화를 빗살무늬토기 문화라 일컫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에 제주 고산리에 기원전 8,000년 무렵의 토기가 발굴되면 그 연대는 현재 알려진 것 보다는 이른 시기에 토기가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신석기 시대에 사용한 토기 중 가장 먼저 사용한 형태인 덧무늬 토기는 주로 남해안과 동해안 등 해안가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겉면에 진흙띠를 붙여서 무늬를 만든 토기이다.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중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난 토기로 전국적으로 발굴지역이 전국적으로 고루 분포되어 있다. 가장 잘 알려진 빗살무늬..

중앙박물관 2011.03.29

[중앙박물관 신석기실] 신석기인의 어로, 수렵, 농경 생활과 정신세계

신석기시대는 빙하기가 끝나고 새로이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어 정착한 시기를 말한다.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했던 한반도에서는 다양한 지역에서 신석기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대표적인 신석기 유적으로는 서울 암사동,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 등이 있으며 넓은 평야가 없는 한반도 지형의 특성에 맞게 농경을 주로 했다기 보다는 강가나 바닷가에서 고기잡이이와 사냥, 채집등으로 생활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발굴되는 유적지 또한 강가나 바닷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에는 초기부터 농사가 시작되지는 않았고, 사냥과 어로 이외에는 산에서 도토리를 채집하여 저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농사는 주로 중기 신석기 이후의 유적에서 괭이, 따비, 낫 등의 농경용 석기가 출토되고 있다. 반면에 바닷가나 강가에 발..

중앙박물관 2011.03.24

[중앙박물관 구석기실] 한반도의 구석기 유물

한반도의 구석기는 60년대 미국인 대학원 학생이었던 앨버트모어가 공주 석장리 금강변을 답사하던 중 맨석기를 발굴함으로서 시작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후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구석기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고 많은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어 오늘날에는 그 연대가 약 70만년전이며 전국 각지에서 구석기인들이 살았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으로 250만전부터 1만년전까지를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구석기인들은 사냥과 채집생활을 했으며 식량을 찾아 옮겨다니면서 주로 동굴이나 강가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석기 시대 유물로는 찍개류와 주먹도끼 등 큰 석기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구석기 후기에는 작은 돌날을 제작하여 나무나 뿔에 결합하여 사용했으며, 구석기 시대 후기 한반도에서는..

중앙박물관 2011.03.23

[중앙박물관] 선비들의 사랑방과 목가구

성리학이 국가 통치이념이었던 조선 사회에서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던 사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비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은 유학의 이념과 도덕을 바탕으로 사회를 교화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여겼다. 이들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방안으로 유교경전, 역사 등을 끊임없이 공부해야 했으며, 이들이 주로 활동하는 공간으로는 현인을 모시는 서원, 서당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전국 명승지에 있는 크고 작은 정자 또한 그들의 활동공간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비는 자택에 있는 사랑방이 학문을 익히고 주변인사나 명사들과 교류하는 장소로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의 사랑방은 집안의 생활공간과 분리되어 있었으며, 집안의 어른인 가장이 주로 거처하는 장소였다. 조선시대는 유교사회로 근검과 절제를 ..

중앙박물관 2011.03.21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조선후기의 백자

조선후기의 백자는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결과로 백자의 질이 많이 떨어졌다가 17세기말부터 다시 원래의 수준으로 질이 나아져 하얀백자가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조선후기는 세계적으로 백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기로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의 기술을 받아들여서 상당한 수준의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의 도자기는 유럽으로 수출되는 한편 유럽의 도자기 생산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도자기 생산 기술이 발전했던 시기인 조선 후기에는 우리나라은 전대에 비해서 도자기 생산기술이 그리 발전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으며, 세계적인 도자기 교역에서도 소외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백자의 질은 전대에 비해서 발전하기는 했지만 세계적으로 인상적인 도자기술을 만들지 못했으며, 그 기..

중앙박물관 2011.02.18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조선 백자, 순백의 아름다움

백자는 분청사기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도자이다. 분청사기가 조선전기인 16세기까지 150년 정도 만들어진 것에 비해서 백자는 조선시대 전 기기간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조선 백자는 다양한 형태와 무늬들이 있는데 그 중 순수한 흰색의 자기를 순백자라고 한다. 유교사상이 사회전반을 지배한 조선시대에서 순백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백자는 검소와 절제를 중요시하는 사대부들의 취향과 맞아 떨어졌으며,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에 까지 순백의 도자기들이 크게 선호되었던 점이 백자가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도자기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전기에는 사대부 취향의 백자와 서민 취향의 분청사기가 전국적으로 같이 만들어졌으나, 15세기에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

중앙박물관 2011.02.17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분청사기의 발전과 쇠퇴

분청사기는 고려 상감청자를 계승한 도자기제작기법으로 '백토로 분장한 회청색의 사기'라는 뜻으로 20세기에 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초에 많이 사용되었던 분청사기는 일반적으로 보기에는 고려청자에 비해서 제작수법이 쇠퇴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가장 한국적인 도자기라고도 할 수 있는 도자기이다. 분청사기의 전성기는 15세기로 왕실에서부터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도자기이다. 고려 청자가 주로 귀족층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며 소량생산을 했던 것에 비해서 분청사기는 고려말 전국적으로 확산된 가마터 덕분에 대량생산되었다고 하며, 그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양질의 것과 일반적인 것과는 수준차이가 상당히 많이 났던 것으로 보인다. 전국 각지에서 약 150여년간 생산되었던 분청사기는 세계적으로 순백의..

중앙박물관 2011.02.16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조선초기 분청사기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도자기인 분청사기는 회청색 그릇에 흰 흙을 입혀 다양하게 장식하는 도자기로 그 기술의 근원은 고려시대 상감청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분청사기는 고려말 청자의 주요 생산지인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의 가마들이 왜구의 침략으로 피폐화되면서 도자기를 만들던 장인들이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분청사기는 만들어진 시기가 15~16세기에 걸쳐 약 150년의 기간 동안 만들어졌다. 투박하면서도 서민적인 면모를 보이는 분청사기는 다른 도자기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적인 미를 잘 담아내고 있어, 고려청자, 조선백자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자기라 할 수 있다. 분청사기는 주로 민간에서 운용하는 가마에서 많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광주지역에 관..

중앙박물관 2011.02.15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고려 상감청자의 발전

고려청자를 비롯해서 우리나라 도자기 제작기술 중 가장 독창적이면서 뛰어난 것은 아마도 고려 상감청자일 것이다. 상감청자는 바탕에 무늬를 새기고 다른 종류의 흙을 메워 넣는 방법으로 나전칠기나 금속공예의 입사기법에서 이전부터 볼 수 있었던 것인데, 이를 고려시대에 도자기에 적용한 것이다. 제작기법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감무늬를 만든 후 고온의 가마에 구우야만 했기때문에 재질의 차이 등으로 실제로는 상당히 어려운 기술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의 상감기법은 12세기에 그 기술의 절정을 보였다고 하며, 상당히 많은 수작들을 오늘날까지 남겨 놓고 있다.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많은 도자기들이 이 상감기법을 이용해서 만든 도자기로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비색과 함께 세계적으로 그 기술과 예술성을 인..

중앙박물관 2011.02.15

[중앙박물관 도자공에실] 고려후기의 청자

고려후기에는 몽골의 침입으로 오랜 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적으로 경제가 상당히 어려웠던 시기이다. 이는 청자제작에도 영향을 미쳐 전반적으로 전성기의 청자에 비해서 고려후기에는 그 제작수법의 단순해졌으며, 이전의 세련된 기술들이 많이 쇠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려 중기 청자기술의 발달이 남송과의 교역 등을 통해서 크게 발전할 수 있었는데 그 경제적 기반이 약해짐으로써 생기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고려후기 해안지역에는 일본의 왜구가 서남해안 지방을 침입하여 고려청자를 만들던 가마들이 있었던 전남 강진과 전북부안의 장인들이 내륙으로 피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도자기 생산의 새로운 거점이 생기고 조선시대 분청사기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용어리..

중앙박물관 2011.02.14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고려 전성기의 도자기

고려시대 도자기의 제작은 차문화의 확산과 관련이 깊으며, 초기 가마터에 출토된 유물 중에는 차을 마시는 찻잔인 완의 비율이 50%를 넘기도 한다. 고려의 자기문화가 가장 세련되게 꽃피었던 시기는 고려 중기인 12세기였던 것으로 보이며, 국보로 지정된 고려청자의 상당수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에는 완이 주로 만들었으나 중기에는 매병, 향로, 주전자, 베개 등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가 만들어 졌으며 그 형태나 빛깔에 있어서도 고려청자 고유의 특징을 형성하였다. 이 시기에는 청자를 생산하는 가마 또한 개경 중심에서 전북 부안, 전남 강진 등의 가마에서 우수한 품질의 도자기를 생산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중국 남송과 일본의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서 그 교역로 중간에 위치한 전북 부안이나..

중앙박물관 2011.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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